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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요한계시록 #Revelation 12:17
여자는 용의 핍박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여 마흔 두달 동안, 1260일 동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하나님 그리스도께로부터 양육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자녀들을 낳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고 예수의 증거를 가지게 하여 하나님의 성도들로 양육한다. 하와는 비록 아담보다 앞서고자 하는 교만함으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아담도 죄에 빠지게 하는 큰 죄를 저질렀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징벌로 내리신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수백년 동안 잠잠히 묵묵히 감내하였다.
#20210526
#신명기 #Deuteronomy 18:20-22
오늘날에는 표면적이고 가시적인 증험과 성취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자들이 어떤 목사가 전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과연 그 말씀이 성경에 부합하는가 상고하고 다른 내용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물어보고 질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니 당연히 맞겠거니 해버리면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게 되거나 그릇된 이단사설에 미혹되어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 버리게 된다.
#20200526
1.#창조 #진화 #홍수
창세 이후에 인류는 생물학적으로 두 번의 급격한 기능저하가 발생하는데, 하나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이고, 다른 하나는 대홍수로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고대 인류가 멸망한 이후이다. 첫번째에서는 사람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두번째에서는 수명과 2차 성징기가 급격하게 짧아졌다. 이 두 번의 급격한 생물학적 기능 저하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의 섭리로만 가능하다. 노아의 홍수 이후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지구 환경의 격변으로 인한 자연적 결과라고 보는 것은 진화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 인류의 모습이 노아의 홍수 이전 고대 인류나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와 동일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현재 인류로 추정할 수 있는 시기는 노아의 홍수 직후 까지이다.
2.#출애굽기 #Exodus 29:38-46
#번제
교회 다니는 사장이 직원들의 급여를 떼어먹거나 하청업체 대금을 부당하게 지연하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뻔뻔하게 교회에서 열심인 모습을 보이며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단지 교회다닌다는 이유로 자기는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며 아무런 근거없이 정신승리를 하기도 한다. 스스럼없이 육체의 정욕을 따라 간음을 저지르면서도 서로 너무나 사랑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일곱번의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제사를 아무런 가치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 짓밟는 짓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러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한다거나 소득의 십일조를 지나치게 아까워하여 억지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최상급이 아니라 상한 예물을 드리는 것과 같다. 반대로 교회를 섬긴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보낸다거나 지나치게 많은 재물을 바침으로 인해서 가족을 돌보지도 부양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도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술사 시몬처럼 신령한 것을 돈주고 사려는 것과도 같다. 목사가 자기 탐욕을 위해 복음을 왜곡하고 지나친 헌금과 봉사를 강요해서 교인들이 제대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고르반과도 같다. 교회가 사회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것과 성경에서 명시하지도 않은 정치체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 해석하여 신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신령한 것을 땅의 것으로 떨어뜨리는 죄이다.
3.#출애굽기 #Exodus 30:1-10
#성막 #성소 #지성소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고 지성소는 영을 의미하며 지성소를 제외한 성소는 혼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분향할 제단을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밖에 즉 지성소와 가장 근접한 성소에 배치한다는 것은 이 제단에서 피우는 향이 지성소에까지 스며들어 퍼지게 하기 위함이다. 이 분향 제단은 이렇게 지성소와 가장 근접한 곳에 위치함으로써 지성소와 방불한 성소라고도 할 수 있다. 향연의 특성상 연기는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는 없으나 지성소를 비롯한 성소 구석구석에까지 퍼지게 된다. 따라서 분향 제단의 향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혼 즉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과 행적은 그분의 인성의 정신활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또한 영원 전부터 인성과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의 신성의 행위로 간주되어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참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임하실 때 그 거룩하신 영광이 지성소 뿐만 아니라 성소에까지 가득하게 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두 위격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이라는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완벽하고 충만하게 거하셔서 그리스도의 정신인 혼과 육에까지 신성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것이다. 분향 제단의 향연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의 고유한 정신활동이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지정하신 향이 아닌 다른 향을 피우거나 살과 피에 해당하는 소제와 전제를 드려서는 안되었다. 다만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1년에 한 번 제단을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아무리 거룩한 제단이라 하더라도 흠이 있는 인간의 손을 타야 했기 때문이다. 분향 제단의 속죄는 아마도 대제사장이 1년 중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대속죄일에 행하였을 것이다.
#20190526
#설교묵상 #역대상 21장
다윗의 인구 조사(삼하 24:1-25)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이다. 다윗의 시대에 사탄은 다윗이 자기의 30 용사 중 한 명인 충직한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또한 사탄은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하게 하고 다말의 오라비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게다가 사탄은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그런 사탄은 다윗의 말년에까지도 끝까지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 다윗의 교만함을 부추기고 충동질한다.
다윗은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백성을 계수하는 것은 어쩌면 정당한 권한일 수도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아하수에로는 자기 제국의 형통함을 두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이방나라의 왕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문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윗만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국력을 자랑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신앙적으로가 아니면 매우 판단하기 어려운 내적인 문제였고 하나님께서 그것이 죄라고 명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죄인줄 모르고 지나칠만한 사소해 보이는 문제였다. 사탄은 이런 점을 공략하였고 다윗은 이에 넘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것이 사탄의 충동으로 인한 범죄인 것을 이렇게 기록된 말씀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다윗으로서는 어쩌면 자기 심령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즉, 자기 나라의 백성을 계수함으로써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셔서 지금까지 이렇게 부강하게 이끌어 오셨다고 선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그 누구보다도 더 평생동안 하나님의 이끄심만을 바라왔던 자였기 때문에, 그의 하고자 하는 일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범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았다고 해서 마치 하와가 뱀과 대화하듯이 사탄과 대화했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이는 사탄이 어떤 비밀스러운 모종의 방식으로 다윗의 심령에 침투하여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범죄하도록 한 것이다.
교회는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유익을 위한 사역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사역이라 할지라도, 이를 행하는 담임목사의 의중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유익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담임목사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인들은 교회 사역의 진정한 내면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일이면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겠거니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담임목사가 교회 사역에 대한 자기 심령을 민감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의 충동에 넘어가게 될 수 있다. 통상적인 교회 사역이 아니라 특별하고 대내외적으로 규모가 있으며 영향력이 있는 사역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압이 비록 다윗의 명령에 대해서 바른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저의가 충심에서 나온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이었으면서도 끊임없이 다윗과 갈등을 일으켜 왔고 반기를 일삼았다. 오죽했으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 요압을 편히 죽게 놔두지 말라 할 정도였다. 결국 요압은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다가 성전에서 뿔을 잡은 채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런 요압이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도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어서라기 보다는 단지 다윗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그는 다윗의 재촉에 못이겨서 백성을 계수하지만 일부 지파의 수는 계수하지 않는다. 요압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였다면 다윗의 명령의 부당함을 자기 지위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만 두거나 막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계수함으로써 하나님께 다윗과 함께 범죄하였다. 또한 백성을 계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죄를 물으신 것이기 때문에 요압은 이를 수행하더라도 자기에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일부러 두 개 지파를 누락함으로써 자기 불만을 표출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기 주군에게도 불충한 자가 되었다. 즉, 요압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갑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나 다윗에게나 모두 범죄한 자가 되고 말았다.
다윗의 심령은 이미 사탄에게 완전히 충동되고 미혹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나단 선지자가 반대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자기를 그렇게 힘들게 한 요압만이 반대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더욱 자기가 옳은 줄로 확신하고 이 일을 밀어부쳤을 것이다.
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어떤 연유로 죄를 깨닫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하늘 앞에 교만했다가 일곱 이레를 짐승처럼 살다가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과 같이, 다윗도 일정 기간 사탄의 충동과 미혹의 기간이 끝나자 다윗이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성을 계수한 것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죄를 깨닫는 것은 그 받게 될 징계 때문에라도 참으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 아래서 잠시 심령의 만족을 누리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기보다는, 비록 잠시 괴롭더라도 죄를 깨닫고 그 채찍을 맞은 후 영생의 복락을 누리는 것이 낫다. 다윗이 비록 범죄하였더라도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을 반증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하는 담임목사라면 더욱 이런 다윗을 본받아 비록 잠시 미혹을 당하는 때가 있더라도 조속히 그 미혹에서 벗어나 죄를 민감하게 깨닫는 심령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그런 조심성이 없는 담임목사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와 같다.
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내어 놓으리니 그 중에서 하나를 네가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12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이든지라고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지를 결정하소서 하니
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죄의 댓가는 매우 혹독하다.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받는 사람일수록, 더욱 작은 죄에 더욱 크게 징계의 채찍을 맞게 된다. 댓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리라는 생각은 망상일 뿐이다. 오늘날 소위 복음의 은혜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죄와 회개를 너무나 무가치하게 여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회에서 심각한 범죄가 벌어져도 단지 '하나님께 회개하였다'라는 공언만으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고르반 회개'가 만연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짓된 회개는 뱓지도 않으시고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도리어 가증한 것으로 여기실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에 단번에 백성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신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수 십 년 된 굵직굵직한 신자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이렇게나 저렇게나 분열되는 모습만 보이며 점점 오래된 고목과 같이 말라가는 교회의 모습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당사자인 다윗을 직접적으로 치시지 않고 도리어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백성 7만 명을 죽이신 것은 우리로 뭔가 의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통해 실질적으로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치신 것으로 보는 유력한 해석이 있다. 일례로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을 때, 다윗의 편에 들지 않고 반역자인 압살롬의 편에 선 백성들이 많았다. 압살롬은 그렇게 훔친 백성들의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감히 반역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을 반역한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을 따라 반역한 백성들의 죄악을 나중에 이렇게 갚으신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교회의 사역자, 담임목사 된 자로서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역을 하는 자는 압살롬과 같이 반역하는 자이다. 그런 담임목사는 교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훔치듯 교인들의 마음을 훔쳐서 자기를 바라보게 하여 함께 그리스도를 반역하게 만든다. 그런 반역하는 담임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은 언젠가는 저 7만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그리스도의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역을 히고 있는지 제대로 점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세 가지 재앙은 기간만 다를 뿐, 아마도 피해 규모는 동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앙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를 하나님의 징계로 보기보다는 우연히 일어난 재난 정도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다윗은 기간이 가장 짧은 재앙을 선택함으로써 이것이 하나님의 채찍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받는 징계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하나님께서 뉘우치셨다는 것이 마치 사람과 같이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비록 죄의 댓가로 징계하심으로 백성 7만 명을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매우 가슴 아파 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하자면 부모가 잘못한 자식을 회초리로 매질 할 때에 느끼는 슬픈 심정이라 할 수 있다.
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다윗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민감한 심령으로 처절하게 회개하였다. 또한 홀로 재앙의 천사를 목격하고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오늘날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도리어 뻔뻔한 다수의 담임목사들과는 감히 비교불가한 모습이다. 남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죄악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마치 다윗이 남들은 보지 못하는 재앙의 천사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런 민감한 심령으로 수시로 엎드려 회개하는 담임목사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이다.
18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19 이에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다윗이 올라가니라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오르난의 타작마당 앞에서 재앙의 천사를 멈추게 하신 것은, 아마도 오르난을 살리시기로 선택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오르난은 그런 끔찍한 징계를 당하면 안되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서 재앙을 멈추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르난이라는 의인으로 말미암아 더이상의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20 그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오르난이 네 명의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
21 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매 오르난이 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 마당에서 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다윗에게 절하매
오르난은 다윗만이 볼 수 있었던 천사를 자기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만큼 그는 적어도 죄에 대해서만은 다윗만큼 민감한 심령을 가진 신실한 의인이었음에 분명하댜. 하나님 앞에 민감한 심령으로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천사를 보는 것과 같다.
22 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넘기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내게 넘기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제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전염병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하니
23 오르난이 다윗에게 말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하는지라
24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빼앗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니라
25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다윗은 오르난의 땅을 거저 얻으려 하지 않고 원래 땅값보댜 더욱 큰 금액을 주고 샀다. 이는 교회 사역에 필요한 비용은 지나치게 깎는 일 없이 정당한 댓가를 치러야 함을 의미한다. 적어도 교회의 담임목사는 주님의 일이라는 미명하에 이것저것 공짜로 받거나 지나친 할인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되며, 도리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때에는 값을 더 쳐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부교역자 사례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교역자들의 동역이 없이는 목회도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사례비를 넉넉하게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사명페이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그 가진 것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그 가진 것을 팔아 영의 약을 사라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뿐이다.
반면에 오르난은 재앙을 멈추는 회개의 제사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소유를 전부 내어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아까워하지 않고 드리고자 하였다.
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28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2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30 다윗이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더라
다윗은 번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내림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진노를 멈추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여호와의 천사의 칼이 너무나 두려워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목사들이,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응답의 불을 내리시기도 전에 스스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안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고 나서도 너무나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런 자들은 여전히 사탄의 충동과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