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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탄생2(창세기) 창세기 6절, 하느님께서는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서 뜻하는 “물”은 옹달샘이나 개천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융 심리학에서는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고, 위험하지만 동시에 모든 생명의 시원인 바다를 “무의식”의 상징과 가장 가깝다고 봅니다. 따라서 물 한가운데 궁창이 생겨 갈라지는 이미지는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의 상태로 깨어가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는 ‘궁창’을 육체적, 정신적 발달과 재탄생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옳고 그름도, 나와 남도 잘 분리하지 못하는 미숙한 무의식적 상황을 극복하고 의식의 힘으로 분별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내면과 외부의 다양한 존재와 상황에 이름을 붙여 이해하고 상호 관계를 이해해야 비로소 성장과 성숙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는 게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이런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다시 아이처럼 혼돈의 상태로 퇴행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미처 그 결과를 생각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감각과 도덕관념을 너무 예민하게 갖고 살면 현실이 너무 고달프고 아플 수도 있고, 자기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외부의 압도적 상황과 마주치면 차라리 눈을 감고 막살고도 싶습니다. 불운한 일을 자꾸 겪다 보면, 판단력도 무디어지죠. 피할 수 있는 경제적인 실수도 하고,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에도 어이없이 남들과 다투고, 해로운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쪽으로 돌아가 다시 나와 남을 곤경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고난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무의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침몰하는 형상입니다. 그렇게 가라앉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다가도, 생명줄을 잡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꼭 귀인이 나타나거나 돈벼락을 맞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내부에서 생각도 못한 비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과 인연이 불현듯 머리를 때릴 때, 다시 제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가 바로 아름답고도 귀한 때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죽으면, 내가 감옥에 가면, 내가 사라지면, 죄 없는 자식,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이지…’, ‘나를 믿고 따르던 지인들을 배신하는 것이지…’와 같은 책임감입니다. 알게 모르게 맺은 인연에 대한 부채의식이 소환되는 순간, 우리는 더는 무책임하게 자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던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태산같이 크기 때문입니다. 빚을 어떻게 갚지, 고민하고 애쓰다보면 역설적으로 고통의 무게는 가볍게 느껴집니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업어서 등하교를 시키는 부모님들, 병든 부모 형제를 업고 닦이고 먹이는 이들에게 엄청난 마음과 몸의 힘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의무감은 나를 힘들게 만들지만, 그만큼 강하게 단련시킵니다. 밀알이 썩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않고, 한 알의 겨자씨가 큰 나무로 변하게 된다는 구절은 허투루 넘기지 말고 항상 간직해야 할 구절입니다. 9절에서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과 뭍과 바다를 만든 후 “푸른 싹과 풀과 나무를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은, 우리가 이웃과 이 지구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어두운 혼돈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우리가 구원받는 계기는 상처받고 버려진 아이와 노인, 크고 작은 권력에게 유린당한 약자들, 넓게 보아서는 멸종위기에 있는 지구상의 생물들 같은 것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움직이는 행동과 실천입니다. 큰 고통을 겪은 후, 뜻하지 않게 자신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어서 사실은 큰 축복이었다고 회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장사가 안 돼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식당의 주방장이 문득 어떤 재료를 다르게 넣어 보니 매상이 올라갔다든가,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아 파산당할 회사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로 기사회생하는 것 같은 뜻밖의 멋진 일이 벌어지는 날들은,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오랜 일상의 축적된 결과입니다. 어떤 시점에 이르러 그동안의 노고가 보상될 때까지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꼭 힘든 고비에서 허우적거려 완전히 다른 자신의 삶을 꿈꿀 때가 아니더라도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할 때, 푸른 싹과 풀과 나무의 이미지는 도움이 됩니다. 무언가를 써야 할 때, 없던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할 때, 모처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새로운 학교와 직장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한편으로는 설레고 한편으로는 불안하지만, 큰 나무를 상상하면서 작고 여린 나무순을 돌보는 마음이라면 어려운 순간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에 나타나는 물과 땅과 식물과 짐승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놀랍고도 신비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어렵고, 고단하고, 불편하고, 때론 정말 아프고 힘든 인생에서 끝까지 우리 손을 놓지 않고 나아가게 해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주는 존재가 뜻밖에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자신을 용서하게 해 주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 하나밖에 모르는 우리들은 지구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짐승들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참아 주고 보듬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코로나 사태는 이웃과 지구에게 지은 우리의 빚과 책임도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글 |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