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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회창 지지자 여러분, 맑은샘입니다.
김경준 사건을 보니 참 착찹하군요....현재, 좌파들과 신당이 이를 연일 공격하고 있습니다만 , 이는 궁극적으로 불법을 저지른 김경준과 이명박씨 책임이 큽니다. 현재,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아무리 부정할려고 해도 이 사건 초기부터 " 김경준 없는 이명박, 이명박없는 김경준"이 성립될까요?
필자는 불법 김경준을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명박씨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저도 대한민국 최일류의 금융전문가 친구로부터 "무엇이 투기이고 투자인지?" "무엇이 주가조작의 여러 유형인지"에 관해 확실하게 알아보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사 이명박씨의 말이 맞다고 해도 '김경준이 불법을 저지르기 전에 나는 같이 했다. 그 후는 나는 모른다" "김경준만 사기꾼이다."는 말은 정말 무책임하고 저급한 말입니다. 또, 초기 이명박씨가 김경준을 소개할 당시의 언론 기사를 보니 이명박씨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정말 추잡합니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분명히 이명박씨 본인에게 있다는 점"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들 좌파가 우파를 칠 때, 건드리는 부분이 바로 우파의 썩은 점들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썩은 우파는 썩은 좌파를 칠 수 없음을 저는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우파, 건전하고 강한 우파, 미래 희망의 우파운동을 해야 하고 그 결론이 지금은 "이회창 대통령 당선을 위한 합법 운동" 이라고 감히 저는 생각 합니다. 이에 우리는 정말 국민들을 위한 책임성, 구체성, 현실성 있는 공약에 치중해야 하겠습니다.
자, 각설하고 약속드린 졸필 올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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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사회,공산주의 H: (80, 90년대 이후의 좌익운동)
구국결사대의 맑은샘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이제 "80-90년대의 좌익활동은 어떠한가?" " 현재의 좌파들, 2007 고려대 맑시즘 세계 대회"를 살펴보고 끝을 맺을까 한다. 주욱 살펴본 결과 역시 80년대는 좌익내부에서도 노선투쟁이 활발했으며 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동구권과 구쏘련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좌익 운동이 잠시 주춤했다가 현재 좌익의 특성은 좌익운동도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흐름에 반사해 좌익 글로벌 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면에서 보면 이 점이 처음 마르크스가 말한 인터내셔날한 면을 오히려 부각시켜 주어서 지금 좌익들은 소위 그들의 말대로 제3인터내셔날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80년대에는 NL(주사파)가 득세하다가 90년대에는 PD파가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과정에서 PD파(민중 민주주의 : 역시 근원사상은 마르크시즘임.)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는데, PD파에서도, 현재 자유주의자(우파) 행세를 하는 위장의 계열도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고 본다.
다음은 좌익 운동권에 몸담고 있다가 최근 전향했다고 하는 “자유주의 연대, 최홍재씨” 의 글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우습게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라는 말이 최초로 만들어져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말은 전향 여부와 상관없이 좌익에서 떨어져 나온 떨거지의 말인지, 우익 목소리를 내는 좌익들의 新위장의 말인지를 앞으로 우익진영에서도 가늠하는 준거가 될 것이다.
"최 홍재" 그의 전향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그가 몸담고 있었던 좌익의 상황을 우익을 생각하지 않았던 듯, 스스로 고백한 글이라 자유애국진영 우리들에게 그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는데, 적당하다고 여겨져 이 연재물에 실어 발표한다.
*다음은 최홍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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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88년 - 91년 5월 투쟁) 최홍재 씀.
역사 개요 및 사건 일지
6.29 선언에 의해 등장한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부르주아 통치전략은 서서히 변화해나간다. 88년 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을 민자당으로의 3당 합당으로 돌파하면서 시작되는 보수대연합의 추진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 수준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이는 서서히 <민주 대 반민주>라는 한국사회의 고전적 대립을 무너뜨린다.
87년 이후 열린 정치적 공간을 통해 전노협, 전교조 탄생 등 계급대중운동의 자주적 단결과 정치적 진출이 가속화된다. 89-90년 현대중공업 총파업 투쟁과 90년 전노협의 전국적 연대파업. 89년 교사 대거 해직과 고교생 운동의 대두. 90년 전농 결성과 수입개방 반대투쟁. 민중운동의 전선체는 전민련으로 탄생하나 또 하나의 조직에 불과한 상태가 되며 90년 민중진영의 공동투쟁을 위한 국민연합이 생겨난다. 90년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국민연합도 91년 5월 투쟁 속에서는 하나의 참가세력으로 되며, 강경대 열사 타살 정국은 범국민대책회의가 주도한다. 5월 투쟁 이후에는 상설연합을 건설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전민련 내부의 합법정당 건설 논의가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 발족으로 외화된다. 그러나 3당 합당 이후 야권통합을 위한 이부영 등 14인이 탈퇴하며, 민중당은 민중운동 명망가들을 내세우고 여러 좌익세력들이 결집하여 창당된다.
학생운동에서는 NL/PD 대립구도의 시대가 개막된다. 전대협을 통한 NL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그 반대파를 PD가 대표한다. 전대협은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주체사상과 항일무장투쟁의 널리 역사가 보급되고 학생운동 내에서의 반종파투쟁을 전개하는 등 김일성주의 운동으로서의 자기 성격을 전면화한다. 민주노조 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 속에서 노학동맹론 대두한다. 87년 민중후보 운동 참가 대오를 발판으로 PD 정파주의가 만개한다. 정파간 전술논쟁의 만개, 정파주의 당건투 노선의 만개. 정파 운동이 당건설투쟁의 논리적-역사적 대립물이 된다.
PD의 시원은 85년 C-N-P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C-N-P 논쟁 당시 보수야당과의 제휴를 거부하고 경제투쟁으로부터 시작해 노동자를 주체로 세우는 정치투쟁을 해야한다는 PDR이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이 미약한 상황에서 사실상 당면한 정치투쟁의 과제를 회피하는 주장이었다. 하기에 80년대 중반 노동운동에 있어 PD란 경제주의자, 노동자주의자의 딱지였으며, 노동운동의 선배들인 그들은 구로연투 등에서 ND의 젊은 후배들이 정치투쟁을 주장할 때 대립했다.
노동운동 PD는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이후 대선에서 민중후보 운동에 결합하면서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개입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제파 PD를 비롯한 여러 노운 정파들이 민민학련이 사라진 학생운동에 대한 침투를 시작한다. MT-MC 논쟁의 패배와 주체사상파의 MC군 접수로 학생운동에서 사라진 무림의 후예인 인민노련도 뒤늦게 민중당을 매개로 한 학생운동 재침투를 시작한다. PD 학운 정파 형성의 가장 큰 학생운동적기반은 87년 대선에서 후보단일화의 입장에 섰다가 막판에 민중후보 운동에 결합하게 되는 NL Left였으며, NDF, CPC, 민민학련 출신들도 결합되었다. 노동운동 PD와 달리 이론운동 PD도 강령과 합법 출판물을 가장 큰 무기로 학생운동에 침투하는데 학생운동가들의 인텔리적 속성과 결합하여 급속히 확산된다.
88년
2월 24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학살원흉 노태우 부정집권 규탄대회」 6개 시,도에서 개최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 기호 2번 김중기군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 및 총장에게 ‘국토순례 대행진 및 남북 청년학생 체육대회 개최’ 제안
4월 1일. 옥포 대우조선 노조 총파업 돌입.
4월 12일. 「서울지역 대학생 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서건추)」 발족식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여소야대 국회 구성
5월 10일.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 연합 건설 준비위원회」 발족, 서총련
5월 13일. 서울지역 총학생회 연합 발대식, 한양대
5월 15일. 「양심수 전원 석방 수배 해체 촉구 대회」 중 명동성당 구내 카톨릭 교육관 옥상에서 미제 축출, 조국통일, 공동올림픽 쟁취 등을 외치며 서울대생 조성만군 할복-투신 자살
5월 17일. 서민투련 결성식, 서울대
5월 31일. 서총련 산하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 연합」
(조통 특위) 발족, 한양대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를 전대협이 개최, 연세대
6월 10일. 6.10 남북학생회담 원천 봉쇄 속에 서울역, 홍제동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 조통 특위 대표단 등 900여명 연행
6월 24일. 서울대생 ‘농촌활동 지원금 지급’, ‘학교버스 제공’ 요구 거부하는 학교측에 항의, 총장실 점거 농성
7월 27일. 「평화협정 체결과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청년학도 결의대회」 개최, 고려대
8월 15일. 남북학생회담 출정식, 전대협, 연세대
9월 17일. 공동 올림픽 쟁취대회, 서총련, 고려대
10월 15일. 광주학살 5공비리 주범,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벌을 위한 투쟁본부 발대식, 서총련, 종로성당
11월 4-12일. 전-이 구속을 위한 전국적 투쟁
11월. 인민노련 「학생동지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전-이 구속투쟁 비판, 파쇼악법철폐투쟁 주장
11월 13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전국노동법 개정 투쟁본부 주최로 노동자, 학생 5만여명 참가. 여의도까지 평화대행진
11월 25일. 광주학살 부정비리 주범 전두환 구속, 노태우 처단을 위한 제2차 결의대회, 반민주악법철폐 학생투쟁연합(학투련), 동국대
11월 26일. 노태우, 전두환-이순자의 용서를 호소
89년
1월 1일. 김일성 신년사 발표, 남북정치협상회의 제안, 4당 총재와 김수환, 문익환, 백기완씨 초청
1월 8일. 현대 중전기, 해고 노동자 등 집단폭행
1월 15일. 울산 노동운동 탄압 분쇄 및 테러만행규탄 전국노동자대회, 3만여명 참가
3월 16일. 지하철 노조 파업, 경찰력 투입 강제해산, 30여명 구속
3월 25일. 문익환 목사 평양방문
3월 30일. 현대중공업에 경찰 8천여명 투입, 파업농성 강제 진압
4월 30일. 여의도 노동자대회, 원천봉쇄로 12개 지역 800개 사업장에서 규탄 집회, 연세대 주변에서 노동자, 학생 가두시위
5월 2일. 동의대 사태 발생. 전경 사망.
5월 6일. 전대협 성명 발표, 화염병 등 폭력자제 선언
5월 10일. 조선대생 이철규씨 변사체 발견
5월 25일. 전대협 소속 학생 470명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구국단식농성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조 결성대회 개최
6월 6일. 문규현 신부 등 3명 방북
6월 10일. 전대협, 평양축전 참가 학생실무회담 봉쇄 규탄대회
6월 27일. 서경원 의원 방북관련 구속
6월 28일. 전대협,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범국민 진군대회 개최
6월 30일. 외대 용인캠퍼스 대학생 임수경, 전대협 대표로 평양 도착
7월 1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 평양에서 개최, 170여개국 3만여명 참석
8월 15일. 임수경양 판문점을 통해 귀환
10월 6일. 중앙대 안산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씨 장례식, 전대협장으로 엄수
10월 15일. 연세대에서 프락치 추궁받던 설인종군 사망.
11월 12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철폐 및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경찰 원천봉쇄, 서울대에서 5천여명 집회, 가두시위
90년
1월 22일. 전노협 창립대회, 민자당 창당(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
4월 12일. KBS 노조 제작거부
4월 13일.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민연추) 정식 결성대회
4월 21일. 「국민연합」 발족식, 연세대
4월 24일. 전국농민회 총연맹(전농) 창립
4월 25일. 현대중공업 노조 총파업 돌입
4월 29일. 전노협 총파업 결의
5월 1-4일. 155개 노조 12만여명 파업참가
5월 9일. 민주자유당 창당대회.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국민연합」 주최 국민대회 거행. 서울지역 4만, 전국 10만 참가
5월 17일. 「반민중적 파쇼야합 민자당 타도와 전투적 민중연대를 위한 전국학생투쟁체연합 준비위」(전학투련) 발족, 서울대에서 전국 45개 대학 결집. 의장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주옥
5월 29일. 민연추에서 선야권 통합을 주장하며 이부영씨 등 14인 사퇴
6월 20일.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학생추진위원회 준비위」 결성,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위원장은 서울대 김헌
6월 21일. 민중당 창당 발기인 대회
8월 15일. 범민족대회 성사투쟁, 연세대
8월 22일. 혁노맹(혁명적 노동자계급 투쟁동맹) 사건 발표, 27명 연행 조사
9월 4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한 북한 대표단 서울 도착
9월 23-24일. 50여개 시군에서 국민연합, 「민자당 일당국회 해산과 민중생존권 쟁취대회」 1만 5천여명 참가
10월 4일. 보안사의 윤석양 이병, 보안사 민간인 사찰 내용 폭로 양심선언
10월 13일. 확대비상시국회의, 보라매 공원에서 「보안사 불법 사찰 규탄과 군정청산 국민대회」 개최. 4만여명 경찰과 공방
10월 31일. 사노맹 관련자 40여명 구속
11월 10일. 민중당 창당대회, 무역회관
91년
1월. 인천 현대자동차 노조 총파업 및 공권력 투입, 동인천과 부평 등지에서 노학연대 가두시위
2월. 수서비리 규탄 가두시위, 서총련
4월 26일.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식 및 한반도 평화군축 결의대회, 서울대. 명지대생 강경대군 학원자주화 집회 후 교문시위 중 전경 구타로 사망
5월 4일. 백골단 해체의 날
5월 9일. 민자당 창당 1주년을 맞이해 전국적으로 30만명 가두시위 참가
5월 중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 의문사, 안양병원에서 시신사수 투쟁 전개
5월 말. 대한극장 앞 시위에서 성균관대생 김귀정씨, 전경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사망
5월 말. 외국어대에서 정원식 문교부 장관에 대한 계란과 밀가루 세례. 각 언론들은 패륜아 공세. 이후 한달여간 지속된 대투쟁은 급속히 사그라든다. 죽음에 대한 도덕성의 문제로 일관했던 투쟁의 성격은 결국 도덕성에 의해 좌절된다.
학생운동 조직
서총련과 전대협
NL은 87년 발족한 전대협, 서대협을 중심으로 활동. 88년 서대협을 서총련으로 발전시키고 민민학련 주도의 서건추를 흡수. 88년 통일운동의 첫 출발인 남북학생회담 성사 투쟁은 김중기가 대표를 맡은 조통 특위를 통해 이루어냄. 이후 학생회 체계 내에 상설기구로 조통위를 건설.
서건추(서울지역 대학생 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
CA-노해동(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CA 그룹의 후신)의 지도를 받던 민민학련은 RDF(혁명적 민주주의 연맹)의 성과로 서울대, 성대 등을 중심으로 서건추(의장 서울대 전상훈)를 결성하나 민민학련 다수파-소수파 분리로 서총련에 흡수. 이후 학생회 연합 운동은 김일성주의에 의해 완전 장악.
민민학련
노해동 내부 논쟁에 따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폐기하고 이전의 활동을 정치주의, 혁명주의, 전위주의로 비판하고 대중운동과 일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다수파와 기존의 NDR론을 고수하는 소수파로 분리. 노해동의 조직관리를 맡았던 다수파의 타락으로 인해 서울대를 비롯한 민민학련의 주요 대학 조직들이 NL로 투항하며, 서건추는 해소되어 서총련으로 통합한다. 88년 봄 선거에서 NDF 정후보, NL Left 부후보를 지원하여 당선시켰던 서울대 민민학련은 2학기 보궐선거에서 NL 후보를 지지한다. 민민학련 다수파는 91년 초 민족민주학생연합(SF)로 다시 등장하여 주사 좌파와 관계를 유지하며 명맥을 유지하다 지금은 「젊은 벗」이란 조직으로 소수가 남아있다.
ND : 통민학련 - 서민학련
노해동의 선봉 편집부의 영향을 받은 민민학련 소수파는 이후 선봉 편집부의 백태웅 등이 주도한 당건설투쟁 조직 사노맹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다. 선진학생투쟁조직 노선에 입각한 통민학련(통일민주학생연맹)으로 존재하다 89년, 조직노선이 유사한 CPC의 민투학련(민주화투쟁학생연합)과 통합하여 서민학련(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을 결성한다. 서민학련은 실질적으로 사노맹의 영향을 받는 ND 조직이 되며 CPC는 탈퇴하여 소수 정파로 전락한다.
CPC : 민투학련 - 서민학련 - 분리(PD 정파군으로)
87년 헌법제정민중회의 주장으로 CA와는 분리되어 존재했던 CPC는 88년 민민학련 몰락 이후 무주공산이 된 서울대, 경희대, 고려대 등에서 학습써클 등으로 다수의 좌파 학생운동가들을 포괄하고 민학투련을 건설했으나 PDH-선학투조 논쟁에서의 대중적-실천적 패배, 실천적 무능력, 장악한 총학생회의 무기력한 좌초(고려대), 서민학련 통합 이후 ND의 패권 장악으로 인해 소수화되었다. CPC의 기원은 학림의 이태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91년을 경과하면서 서울지역 주요 대학에서는 민중당 청학위-진학련으로 흡수되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남총련 등 전투적 NL 대오와 함께 투연전을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93년 비리의원 소환 투쟁을 전개하다가 포럼 조직을 만들며 이후 노동자신문의 우경화, 경제민주당 준비모임과의 관련을 맺으며 공상적 협동조합 운동에 기반을 둔 조직으로 전화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미미한 상태이다. 이제는 사라진 정파로 보아도 무방하다.
PDH 건추
88년 12월 7일 발행된 「민중민주 학생회 건설을 위하여」라는 문건에 기초해 89년 서울대로부터 건설이 이루어져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제기자에 대해서는 흔히 AP로 알려져있는데, 실재로는 총장실 점거농성으로 한 학기만에 물러난 88년 1학기 서울대 총학의 PD 간부들이 제기했다는 설도 있다. 각 대학 PDH 건추 건설에 있어서 AP가 가장 주도적인 정파였던 것은 확실하다. 서울대의 경우 90년 총학 장악 이후 해소 논쟁 속에서 사라졌으며, 뒤늦게 시작된 지방에서도 91년 경에는 대부분 해소된다.
AP
86년 노동운동 보임-다산에 의해 정립된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 변혁론을 수용하여 학생운동에 PDR을 도입. 노운에서는 제파로 통칭되었으나 조직적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는 노운 정파의 특징으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유입되어 학운에서 제파 PD는 AP(흔히 제파)와 AF(반파)로 구분된다. 90년 서울대 총학생회 등 주요 대학에서의 주도권 행사로 89, 90년에 PDH 건추, 서학특연, 전학투련 등을 주도했으며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전학추에도 적극 참가한다. 경제주의로 비판받는 등 사상투쟁에서의 패배와 조직화, 예비혁명가 단련 경쟁에 있어서의 패배로 인해 90년 하반기부터 AMC에 좌파 공동활동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차츰 쇠락해간다. 93년 새지평 학생정치연합이라는 공개 학정조로 전환했다가 합법-개량주의로 경도되어 21세기연대에 참가한다. 89년 「민중민주의 기수」, 90년 「선언」, 91년 「전진」, 「일보전진」, 92년 「도약」, 93년 「새지평」 등의 기관지를 꾸준히 발간했으며, 사회주의 혁명론을 주창한 전성기의 기관지였던 「선언」으로 인해 선언편집부로 불리기도 했다.
AF
제파 PD 중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숭실대 등 서울지역 주요대학에는 AP가, 서강대, 숙명여대, 국민대 등의 서울지역 대학과 인천, 충남 등의 지방에는 AF가 생겨났다. 기관지 ‘청년학도의 벗’, ‘빛’을 통해 AP의 제도개선투쟁에 대해 경제주의라는 비판을 수행하고 민중정당 건설이 아닌 국민연합 의원단을 주장했다. 91년 5월 투쟁에서도 권력 슬로건에 대해 반대하여 AMC와의 전술적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92년 공개 학생정치조직인 진보학생정치연합으로 전화하였으며, 21세기연대 참여와 관련해 조직이 이분된다.
LC-AMC
강단 학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이 결합한 노동계급 그룹의 지도를 받았던 학운 정파. 이론운동 PD라 할 수 있다. 89년 「현실과 과학」이란 합법 사회과학 학술지에 의해 널리 퍼져나간 신식국독자 - 반제반독점 PDR론에 근거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그룹의 조직적 한계, 그리고 90년 초의 지도부 검거로 인해 각 지방마다 반제반독점 PDR론에 근거한 다기한 정파가 존재하게 된다. 이진경 등 이론적 지도부가 사라진 상황에서 노운 LC는 인민노련, 삼민동맹과 통합하여 한국노동당 창준위를 결성하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학운 LC는 독자적인 학운 정파로 정립하면서 AMC라 불리게 된다. PDH건추의 사상투쟁 부재를 비판하고, 선언 편집부의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 PO 전탈벨트론 제기와 활발한 조직화 사업으로 90년 하반기 서울지역 학특연을 주도하고 91년 이후 좌파 공동활동의 중심에 선다.
서학특연, 전학투련
89년에서 91년까지 좌파 학생운동은 매 학기 특별위원회 건설을 통해 연대투쟁을 모색했다. 89년 PDH 건추, 90년 PD 간부대오(SPY), 91년 SLAY 등 미공개 선진 활동가 협의구조를 통해 각 대학 특위 및 특위 연석회의 건설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89년, 90년 1학기까지는 AP, AF 주도, 90년 2학기는 AMC, 91년은 AMC와 ND가 주도한다. 90년 반민자당 투쟁의 전개 속에서 서총련 차원의 학특연 건설이 주장되나 서총련 중상위에서 거부되면서 연합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석회의에 머무른다. 전국학생투쟁체연합은 90년 전국 각지의 다른 형태의 좌파 공동투쟁체들을 결집시킨 것이다.
사상노선, 사회구성체, 혁명론 논쟁
맑스-레닌주의 - 주체사상 논쟁
NL 진영 내에서 주체사상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이론운동 PD의 주체사상 비판이 진행. 주요한 촛점은 철학의 근본문제. 88년 팜플렛 「주체시대의 종말」, 89년 합법 사회과학 무크지 「현실과 과학」, 이진경 편저의 「주체사상 비판 1,2」(새길) 등이 대표적인 주체사상 비판이다.
NL-PD-ND의 사회구성체, 혁명론 논쟁
NL은 한국사회를 식민지반자본주의로 규정하고 혁명론으로 반제반봉건 NLPDR 노선을 고수. 「현실과 과학」을 통해 PD는 국독자 단계론에 대한 비판과 특성론 수용을 통해 신식국독자론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창휘의 연구와 제3세계 PDR론의 검토를 통한 반제반독점 NLPDR론을 정립하고 ND의 이른바 ‘낮은 생산력’을 비판한다. 88년 ‘한국사회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임무’라는 문건과 이후 노동해방문학의 PD론 비판을 통해 ND는 신식국독자로 보되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당면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는 NDR로 규정. 90년 이후 PD 진영 내부에서 PDR론의 모호함을 비판하며 AP가 「선언」 창간호를 통해 당면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선언하고, 전진 출판사에서 PTR론을 제기하나 사상적 혼란 속에서 논쟁은 더 발전하지 못함.
학생운동 조직노선 논쟁
전투적 총학생회론에서 자주적 총학생회론으로 (NL의 학생회 노선 변화)
사람중심의 조직노선을 정초하고 ‘자치조직’, ‘정치조직’, ‘생활조직’으로서의 학생회 성격을 규정하면서 학생회를 정투적으로 강화하고 학생회를 중심으로 대중을 궐기시키자는 전투적 총학생회론이 88년 고려대에서부터 제기되어 NL의 지배적인 학생회 노선이 된다. 그 실천과정에서 선진대중조직론자들에 의해 ‘학생회 일색화’, ‘조합조직 만능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90년 서울대 총학생회를 PDH에 빼앗긴 후, 전투적 총학생회론은 학우들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통큰 단결을 이루지 못했음을 자기비판하면서 ‘자주적 총학생회론’을 제기한다.
PDH - 선학투조 논쟁
민투학련과 통민학련은 88년 가을, “학생회는 대중자치조직 고유의 위상과 역할을 갖고 있으나, 남한 계급투쟁의 조건상 정치투쟁체적 성격이 덧붙여 부과된다. 그러나 학생회는 대중적 정치투쟁의 활성화를 이루는데는 구조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강력한 규율과 단일한 집행력을 가지고 미제와 파쇼에 대해 신속하고 기동적인 비타협적 투쟁을 할 수 없고, 또한 항상적, 정규적인 안정적 투쟁을 전개할 수 없으며 일상적으로 높은 수준의 투쟁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진보적 학생대중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선진학생투쟁조직론을 내세운다. PDH 건추에 대한 주장은 88년 12월, ‘민중민주 학생회 건설을 위하여’라는 문건을 통해 민투학련의 ‘반합 공개 대중투쟁 단체 건설을 위한 일 제언’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민투학련의 문제의식이 현장 PMO론의 학생판이며, 학생운동의 양-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적 대중노선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학생회를 그 실제적 대표성에 있어서나 정치성에 있어서 민중민주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며, 현 시점에서 민중민주적 강화를 위해 학생회 속의 활동가들이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미공개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중민주 학생회 건설을 위하여 2’에서는 그 연장선 속에서 학생운동의 이념적 성장을 기반으로 전체 학생대중의 힘을 학생회로 결집시키고 학생회를 조직적 무기로 노급의 동맹군으로 투쟁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선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의 명확한 분리와 PDH 건추를 건설해야 한다고 보충한다. NL 학생회와 PD 학생회를 정확히 구분했으며 학생회의 대중적 당파성에 착목했던 PDH론은 민민학련 이후의 무정파군을 건추의 대오로 인입시키고 89년 노학연대 투쟁에서 거대한 대중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낳으며 90년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30여개 대학에 민중민주 총학생회를 세워낸다. 반면 건추와 함께 도래한 PD 학생운동의 시대에 서민학련은 소수파 ND의 학생조직으로 외곽화된다.
PDH 건추 해소 논쟁과 PO론의 대두
89년 10월, 서울대에서는 사상투쟁이 부재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실무주의화되어가는 건추의 현실을 비판하는 ‘사상투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자’라는 문건이 뿌려진다. 반제반독점 혁명투쟁 학우 일동이라는 명의로 되어있는 이 문건은 사상우쟁의 계획적-조직적 진행과 이를 위한 정책실의 구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총학생회 장악 이후 건추 해소와 정치조직론으로 대립하는 논쟁으로 발전한다. 제파 PD는 건추의 과도적 역할은 해소되어야 하며 공개 학생회 간부진 대오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계급 PD는 총학생회를 장악한 것이 곧바로 학생회를 민중민주적으로 강화한 것과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PDH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건추는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건추가 맡던 역할을 정치조직이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생회의 정치적 강화는 학생회 간부와 체계에 대한 강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입각한 과학적 투쟁노선과 포괄적인 정치폭로에 의해서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고의 훈련된 활동가다운 활동가들의 통일된 대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PO의 조직적 위상은 전위조직이 대중을 지도하기 위한 전달벨트라고 규정되며, 이 전달벨트론은 지금의 학생정치조직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건추 해소 논쟁의 핵심은 대중노선에 있다기보다는 PDH 건추에서 이루어진 자 정파의 확대와 무정파군의 해소로 인해 더이상 자 정파 조직 이상의 조직이 필요함을 느끼지 못한 AP의 정파적 이해와 AP의 실무주의적 운동가 양성에 대한 비판과 선진활동가들의 공동대오를 통해 자기 확장을 이루려한 AMC의 이해가 맞부딪힌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여기서 AMC가 제기한 PO론은 그 조직노선의 관념적 조작(전달벨트)을 차치하고 볼 때, 비록 사상투쟁의 체계적-조직적 수행이라는 협애화된 방식이기는 했지만 노운 PD가 학운에 뿌리내려논 실무주의적 운동가 양성 기풍에 대한 문제제기였으며 이는 예비혁명가 양성의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고민을 촉발시켰다. 체계적인 사상투쟁을 통해 좌파 학운의 통일을 이루고 운동가 양성을 이루어낸다는 사고방식은 그 이후 PD 학생운동에 널리 확산된다.
정치노선, 투쟁노선 논쟁
88 올림픽
NL은 ‘평화올림픽 쟁취, 공동올림픽 쟁취’의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ND 진영은 ‘파쇼정부 아래 올림픽 반대’, ‘반민중적 올림픽 반대’, ‘독재 올림픽 반대’의 요구로 투쟁한다.
전두환-이순자 구속투쟁론과 파쇼악법 철폐투쟁론
88년 하반기 학생운동은 청문회를 통해 형성된 광주문제, 5공 비리 척결이 국민대중의 공감을 야기했다고 보고, ‘전두환, 이순자 구속투쟁’으로 광주문제와 반미투쟁을 상승 발전시킬 것을 설정한다. 전-이 구속투쟁은 각 대학마다 결사대를 꾸려 연희동 전두환 사택, 이동한 은신처인 백담사까지 처들어가고 사제폭탄까지 등장한다. 이 투쟁이 진행되고 있던 11월경, 인민노련은 ‘학생동지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보수야당도 동의하는 전-이 구속투쟁에 심오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파쇼악법 철폐투쟁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후 파쇼악법 철폐투쟁은 PD 학생운동 내에 확산되며, 89년 초반부터 PD 학생운동의 슬로건은 ‘민중민주, 노학동맹, 악법철폐’가 되었다. 반면 ND는 ‘민중재판소 설치’와 ‘반민주악법 철폐투쟁’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노학연대론과 노학동맹론
89년 초반 현대노동자에 대한 식칼테러 사건, 지하철 노조 파업투쟁에 대한 공권력 투입 등으로 학생운동은 NL의 경우, 상반기 투쟁의 핵심을 광주, 5공 비리 척결 투쟁으로 놓는데 반해 PD는 노동운동 탄압 저지 - 파쇼악법 철폐의 주장으로 대립한다. 특히 PD는 노동자, 민중 투쟁에 적극 결합하기 위해 기존의 노학연대의 소극적 방식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동맹으로서 ‘노학동맹’을 주장한다.
축전 참가론과 반제 평화론(반파쇼 민중투쟁 중심론)
89년 상반기 노동운동 탄압 분쇄 투쟁은 전교조 결성 투쟁, 이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등 반파쇼 투쟁으로 이어진다. NL은 이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중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 축전」이 다가오자 “열사의 시신 부여안고 가자 축전의 도시 평양으로”라는 황당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임수경 대표 파견 등 축전 참가 투쟁을 전개한다. 반면 PD 진영은 축전 참가 자체를 목표로 내세우는 것에 반대하고 남한 민중의 요구일 수밖에 없는 평화, 군축 등 한반도 평화 보장 문제와 반제 평화의 문제는 사활적 요구이므로 이를 선전-선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학특연 건설 논쟁
90년 봄, KBS 노조와 현대중공업의 파업투쟁이 진행되고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민자당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일자 PD 학운은 학생회 산하에 ‘반민중적 파쇼야합 분쇄와 민중의 민주적 제권리 쟁취를 위한 학생특별위원회’ 건설을 추진한다. 그리고 그 대학간 연합 조직인 학생특별위원회연합 건설을 추진하는데 NL의 서총련 중앙상임위원회는 사회부가 해야할 일을 침해하여 학생회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하며 건설 불가 결정을 낸다. 그리고 PD 진영 내에서도 일부는 이 건설 불가 결정에 동의를 표한다. 결국 학특연은 연합조직이 아닌 학생특별위원회 연석회의로 존재하게 된다. 서울대를 중심(5.9 투쟁에 6천여명 참가)으로 학특연이 주도한 95년 초반 투쟁의 성과는 5월 9일 민자당 통합 전당대회 날의 국민대회에 4만여명의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결집하게 하는 투쟁의 물결을 만든다. 일명 5.9 신세계 대첩
제도개선투쟁의 지위에 관한 논쟁(경제주의 비판)
89년부터 PD진영 내부에서 제파는 악법철폐 투쟁을, 노동계급은 노운탄 내지 민운탄 분쇄 투쟁을 강조한다. 양자 모두 두가지 투쟁을 수행하지만 존재했던 비중의 차이는 90년 학특연의 ‘민중의 민주적 제권리 쟁취투쟁’에 대한 지위를 놓고 다시 일어난다. 당시의 주도정파인 AP는 이를 낮은 수준의 정치투쟁이라 주장하며, AF와 AMC는 이를 제도개선투쟁으로 경제투쟁이며 이는 ‘반민중적 파쇼야합 분쇄’, ‘민중운동 탄압 분쇄’에 비해 부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선언’의 정-경투관에 대한 AMC의 ‘자생성에 대한 의식성의 자기항변’이라는 문건을 통한 경제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뒷날 AP는 이 논쟁에 대해 스스로가 경제주의에 빠져 있었음에 대해 자기비판한다.
민중당 건설에 관한 논쟁
민중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가 민중당 창당 작업을 본격화하는 90년 2학기, PD 학생운동은 민중 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학생추진위(전학추)를 발족시킨다. 전학추에는 AMC를 제외한 거의 모든 PD, ND 정파들이 참가한다. AMC의 경우 합법전술의 의의를 부정하며, AF의 경우 민중정당 건설이 아닌 국민연합 의원단 구성을 통해 통전체 강화에 기반한 합법전술을 주장한다. 민중당 전학추 내에서는 전학추의 창당 이후 조직위상을 놓고 당 외곽조직론(ND), 당 청학위론(AP)이 대립하며 결국 청학위로 정리된다. 창당 이후 민중당이 우경화의 길을 걸으면서 민중당 청학위는 좌익 세력들이 탈퇴하는 가운데 인민노련 지지 학생운동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민중당 청학위는 진보학생연합으로 이어지면서 좌파 학생운동의 합법-개량주의화, 학원파적 경향을 확산시킨다.
국회해산-조기총선 논쟁
90년 2학기 서총련 출범식에서부터 NL은 여소야대 국회를 3당 합당을 통한 거대여당 탄생으로 바꾼 것은 국민의 열망을 무시한 처사로 규정하고 민자당 일당 국회의 해산과 총선의 조기 실시를 주장한다. 이는 김대중 평민당과 이기택 민주당, 그리고 민연추 탈퇴 인사 등으로 구성된 야권 통합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보수야당 추종주의로 경사된다. PD 학운은 이를 반대하고 ‘반동권력 안착 분쇄 투쟁’을 주장한다.
권력 슬로건 논쟁
강경대 열사 타살로 인해 조성된 91년 5월의 대중적 투쟁은 5월 9일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30만이 넘는 인파를 시위로 결집시킨다. 87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대중투쟁 속에서 PD 학생운동은 이 투쟁의 방향을 어떻게 몰아나갈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전개한다. 이전까지 권력 슬로건인 ND만이 ‘임시혁명정부 수립, 임시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했는데 5월 투쟁의 국면에서 AP가 지금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권력에 대한 상이라면서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전면적인 권력 슬로건으로 제시한다. 그밖에 몇몇 소수 정파가 ‘과도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AMC와 AF는 이에 대해 ‘노태우 정권 타도, 가두 대중의 좌익화, 선전-선동의 백배 강화’ 등을 주장하며, 고양기면 대체권력 슬로건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황당무개한 정치학이며 더구나 ‘임시민주정부’는 내용적으로는 우경적인 슬로건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5월 가두투쟁에서는 NL의 ‘민주정부 수립’, AP와 ND의 ‘임시민주정부 수립’ 구호가 외쳐지고 이들 두 정파는 ‘노타-임민정 투본’을 공동 구성하기도 한다.
평가
CA의 그룹의 당건설투쟁이 지도부 침탈과 노해동으로의 전환을 통해 좌절된 이후 대중운동과 분리된 독자적인 전위당 건설투쟁은 폐기되고 PD 시대에 와서는 정파주의 당건투의 좌절만이 반복된다. 사노맹이라는 최대의 당건투 조직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패권주의와 선정주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심각한 조직침탈을 받게 된다. PD 정파들의 경우 각각 강령 중심, 전술 중심, 정치선동 중심 등 다른 경향 속에서도 정치신문에 의한 CA의 당건투 양태를 뒤따라 배우는 수준에서 모두 조직침탈이나 사상적 혼란 등으로 좌절한다. 더이상 당건투 그룹과 대중운동이 분립되어 있지 못한 형태의, 실상은 급진적 대중운동의 비공개 지도부에 불과한 정파에 의한 당건투는 좌절만을 반복하였다.
PD 운동의 시대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그 당건설투쟁에 있어서의 후퇴와 함께 학생운동의 지위에 있어서는 전대협의 압도적인 학생대중운동 외곽의 소수 반대파로 전락했다. 이러한 학생운동의 상황은 학생운동을 가장 중요한 행동부대로 하는 전민련, 국민연합, 민중당, 범국민대책회의, 전국연합 등 민중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도 좌파의 무기력을 가져왔다.
민민학련이라는 맹주가 사라진 자리를 대체한 PD 학운 정파들은 무수한 분립과 실천적 헤게모니 정파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진다. 각각의 다른 노동운동 선을 통해 유입된 PD 정파들은 출발선상에서부터 분립되었고, 더구나 노동운동 PD나 이론운동 PD 모두 학생운동의 분출하는 이론적 욕구,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웠기에 학생운동이 독자적인 지도부위를 건설하려는 상황에서 PD 학운정파가 독자화되고 이는 더많은 분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89, 90년의 AP 주도나 91년 이후의 AMC 주도라는 특징도 실천적 맹주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정파들의 공동활동을 매개하는 협의적 다수파로서의 헤게모니일 뿐이었다. 즉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안정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생산해냈다는 것만이 그들의 주도성을 보장했다. 각 지방과 대학별로 각기 다른 정파들이 맹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한 대학 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정치적 입장에 기반한 사상투쟁은 PD 학생운동가들을 자 정파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하는데 급급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의 획득은 ‘정파의 몇가지 노선과 해당 시기 정치적 입장에 의한 획득’으로 치환되었고, 실천적인 맑스-레닌주의 학습으로 포장된 몇몇 레닌 원전과 정파 문건들을 혼합한 커리큘럼들은 운동의 궁극적 지향에 대한 강인한 신념 이전에 자 정파의 노선을 합리화하는 학습으로 진행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PD 학생운동 흥성기의 그 무수한 학생운동가들이 80년대 초-중반에 비해 조직적 진출을 통한 민중운동의 발전에 공헌하는 일이 현저히 미약하며, 90년대 중반의 후예들에게 그 운동의 성과를 남겨주거나 운동력을 자기 복제해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파의 노선을 외우는 것에 급급했던 운동에 기인할 것이다. 또한 PD 운동의 시대는 부르주아적 운동 경쟁주의가 극에 달한 때였다. 무수한 논쟁과 한달에도 몇번씩 제출되는 그 입장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운동가는 정파적 기준에서의 운동력 미달로 탈락하게 되고 자 정파의 입장을 제대로 설파하는 자만이 살아남았다. 학생운동가들의 불구적 분업이 심화되어 이론전문가와 투쟁전문가가 나뉘는 사태, NL과 같은 확고한 전국적 구심과 대학별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가운데 지역별, 대학별 운동 기풍의 심각한 편차가 나타난다.
PD 시대의 무수한 논쟁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한국 운동의 이론적 수준을 일취월장시켰으며 합법 출판물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AP와 AMC간에 전개된 경제주의 논쟁은 PD 운동의 노동자주의, 경제주의를 탈각시켜내는데 기여했다. PDH론은 학생회가 지닌 대중적 당파성의 위력에 착목함으로써 좌파 학생운동의 학생회 경시풍조를 바꿔내는데 기여했으며, PDH 건추 해소 과정에서 제기된 PO론은 비록 그 주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비혁명가 단련의 문제, 분립된 정파질서 극복의 문제를 PD 학생운동에 고민으로 던져주었다. 이러한 논쟁의 과정은 노동운동 PD의 반동성이 실종시킨 민민학련의 운동적 성과들을 뒤늦게 좀더 세련된 형태로 복구시켜내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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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제5기 (91년 하반기 - 92년 대선))
역사 개요 및 사건 일지
대통령 선거 김영삼의 당선으로 보수대연합은 1차적으로 완성된다.
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로부터 예견되었던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91년 동구 사회주의의 연쇄 몰락으로 끝이 난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를 그 지주로 삼았던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심각한 사상적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91년 5월 투쟁으로부터 시작된 상설연합 논의는 결국 우파의 전횡이 관철될 수 있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전국연합은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자임하면서 대선이 다가올수록 민주연합론자들의 전횡이 관철되는 정치조직이 된다.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는 비합법 노선 폐기 등 합법-개량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한다. 3개 노운 정파의 합법화 선언과 함께 탄생한 한국노동당 창준위는 탄압을 받으면서 민중당과 통합한다. 민중당 내에서는 우경적 당권파와 변혁적 블럭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제명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제명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사상적 근본을 견지하며 보수야당 추종주의와 합법 개량주의를 반대하는 민중회의 운동이 시작된다.
민중당 내의 사노맹 지지 블럭은 민중당 활동을 지속하다 총선 직전 민중진영단일정당추진위(민정추)라는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꾸린다. 총선 패배로 민중당은 해산되고 당권파는 민사협, 경실련 등에서 활동하다가 보수 정당으로 차례로 투항한다. 한노당 창준위 세력은 진보정당추진위를 결성한다. 대선을 앞두고 사회주의 진영은 크게 민중회의, 민정추가 전화한 사회당 추진위(사추위), 진정추 등 세개의 정치조직으로 정립된다.
대선 민중후보 추대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정당 건설의 시기 문제 등으로 갈등하면서 선거운동의 실질적 준비는 지연된다. 역사와 규모에서 가장 뒤쳐지는 민중회의는 청년운동, 노동단체 등의 지지를 기반으로 민중연대 준비모임을 통해 선거운동 자금 마련 등 실질적인 대선 투쟁 준비에 돌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 정치조직과 전국노련 등 네 단체가 민중연대 추진위를 결성한다. 그리고 민중연대 추진위는 백기완 후보를 추대하고 선거운동본부로 전화한다. 전국연합은 민주연합론에 기반해 민주당과의 정책연합을 추진한다.
학생운동 내의 대립은 기본적으로 NL/PD의 대립구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총선과 대선 등 부르주아 권력재편기 대응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 전개된다. NL/PD는 크게 ‘민주연합전술’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로의 대립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대립 구도 안에서 사상적 분화 경향은 내재해있었고 그것은 대선 이후에 전면화된다. PD 학운정파는 사상적 혼란과 비교적 평화적인 시기 속에서 전술논쟁의 감소로 인해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 속에서 후퇴적인 반정파주의적 통합이 추진되지만 좌절된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운동 질서에 대한 모색들이 서서히 시작된다.
91년
8월 중순. 반동적 통일공세 분쇄와 민중연합 건설을 위한 청년학생 결의대회. 서강대
12월 1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발족
12월 15일. 노동자정당 건설추진위원회 발족
92년
1월. 총선 민중후보 지원과 민중진영 독자정당 지지 선거투쟁연합(선투련) 발족
1월 19일. 한국노동당 창당 발기인대회
2월 7일. 한노당 창준위와 민중당 통합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3월 26일. 민중당 해산
3월 30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청년연석회의 결성
4월 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 결성
4월 26일. 5월 투쟁 승리와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자 결의대회, 전국노련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후보 선출
5월 30일. 제6기 전대협 출범식, 한양대. 전대협의 민주적 강화와 올바른 대선방침 수립 촉구를 위한 백만학도 결의대회, LPT 주최
6월 8일. 민중후보 추대와 민중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민중연대」 준비모임 서명자대회 및 발족
7월 3일. 민중회의, 진정추, 사추위, 전국노련 등 4단체 「민중후보 추대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민중연대 추진위」 결의
8월 12일. 민중대통령 후보 추대 다짐을 위한 수도권지역 청년학생 학술문화제, 연세대
9월 4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중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전국학생연대 추진위 출범식, 한양대
9월 5일. 민중후보 추대를 위한 전국 학생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 고려대
10월 4일. 사회당 추진위원회 출범대회, 동국대
10월 5일.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 발기인대회 및 발족식,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10월 9일. 민중대통령후보 학생선거대책본부 발족식, 동국대. 본부장으로 전국학생정치연합 의장 탁경국(서울대) 추대
10월 10일. 전국연합 제1기 제2차 대의원대회에서 대선시기 후보방침을 1안 ‘범민주진영의 정치연합을 통해 범민주진영 후보단일화 이룩’으로 결정
11월 1일. 민중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서 백기완 후보 선출, 잠실 벨로드롬 경기장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 김영삼 후보 당선.
학생운동 조직
선투련
92년 3월 총선을 앞둔 겨울방학에 PD,ND 계열 10여개 정파가 연합한 민중후보 투쟁기구. 사상 최대 규모의 좌파 공동활동을 이루어냈으나 한차례의 전체 집회와 선전 책자 발간 이외의 어떠한 실천적 성과도 남기지 못함으로써 거대공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선투련에서 지원할 선거구 대학별로 지정해주고 각 대학별로 각 지역구 민중후보 선거운동에 결합하는 양상을 띄었다. 비대한 정책실에서 정파들간의 통합이 모색되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민중후보 추대를 위한 전국 학생추진위원회(학추위)
선투련 해소 이후 진정추 지지와 민정추 지지 학생대오는 떨어져나가고 민중회의 지지 경향의 학운 정파들이 대선준비모임의 형태로 대선투쟁 공동기구 구성을 논의한다. 그 와중에 선투련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 세력이 떨어져나가고 서울지역 최대 정파인 AMC가 AP등을 아우르며 학추위를 결성한다. 위원장은 성균관대 한경석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중대통령 후보 추대를 위한 학생연대(학생연대)
선투련의 정파협의적 공동활동이 가지는 비대중성, 비실천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사퇴없는 민중후보로 대선투쟁을 정면돌파’할 것, 이를 위해 민중회의-민중연대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할 것, 정파협의를 부차로 한 대중적 연대를 중심으로 한 동지적-실천적 연대운동의 전개를 주장하는 학생연대 건설 제안이 92년 5월말에 이루어진다. 7월경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이화여대, 충남대 등에서 초동 주체의 결집으로 학생연대 준비모임이 이루어지고 학추위 준비모임에 결합하던 일부 동지들(전남, 전북, 강원 등을 중심으로 「진격」발간)이 8월에 학생연대 참가를 결의하여 9월 초순에 공식 출범식을 가진다.
그러나 대선을 눈앞에 둔 11월경, 학생연대 참가 이후 실천적 연대 활동에 소극적이던 「진격」 동지들이 학정조 연전 주장의 사상투쟁을 제기하면서 분리된다. 이후 초동주체들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향하여」라는 슬로건을 가진 전국학생연대로, 학정조 연전 주창자들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중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전국학생연대 추진위」로 존재하게 된다. 이전의 각기 다른 정파들에서 활동하다가 초정파주의 운동정신에 대한 동의 속에서 결집된 학생연대는 학생운동 역사상 기록될만큼 빠른 시일안에 각기 다른 역사를 가진 새로운 운동의 주체들을 결집시켜내는 위력을 보였다. 대선투쟁에 있어서도 가장 많은 선거인단 모집과 만원계를 통한 선거자금 모급 등 실천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다.
진보학생연합(진학련)
민중당 청학위가 민중당 해산 이후 진정추를 지지하는 공개 학생정치조직로 92년에 발족한 것이다. 비합법 노선 폐기 등 PD 학생운동의 합법-개량주의화를 선도했다. 학생자치에 대한 고민, 폭넓은 대중운동에 대한 고민 등 좌파 학운의 기존 관성을 탈피하는 시도로 좌파 학운의 쇄신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전투적 학생운동의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학생운동의 대사회성, 전투성을 격하시키는 부정성의 화신이기도 했다. 92년 학원대개혁 운동을 전면적으로 제기했다. 각 지방마다 존재하여 92년 당시 PD 진영 내에서 전국 최대 규모였다.
한국적 사회주의를 위한 전국학생정치연합(전학련)
서민학련의 후예들이 민정추-사추위로 이어지는 흐름을 지지하는 공개 학생정치조직으로 92년에 발족하였다.
진보학생정치연합(진학정련)
진학련으로부터 비합 정파의 공개 학생정치조직으로의 전화가 확산되면서 기관지 「빛」을 내던 AF가 공개 조직으로 전화한 것이다.
수도권 민중회의 학생위원회(수민학위)
민중회의를 지지하는 학생조직을 「민중회의 학생위원회」로 묶어내자는 문제의식 하에 서울 고려대, 이화여대, 상명여대, 성균관대, 그리고 수원과 부산 등에서 학생위원회가 준비모임을 가져나간다. 역시 민중회의 지지 학생대오를 표방한 학생연대와 통합 논의를 진행하나 실패하고 수도권 지역의 일부만 수민학위를 결성하여 학선본에 결합한다. 대선 이후 전국민중연대학생회의로 전화되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논쟁
대선투쟁 전술 논쟁
대선투쟁 전술과 관련된 논쟁은 크게 민주연합론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민독정)론으로 대별되었다. 민주연합론 내부에는 ‘당선가능한 야당 후보 지지’와 ‘범민주단일후보 지지’가 대립했는데 전대협의 공식 방침은 후자였다. 민독정론 내부에는 사퇴 가능 조건에 따른 스펙트럼이 존재했고 논쟁은 주로 합법정당 건설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지지하는 민중운동 정치조직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큰 두가지 흐름과는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민중의 정치세력화, 개방적 독자후보에 기반한 민주연합’ 주장이 주체사상 좌파와 젊은 벗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서울대 이외의 대학에서는 큰 힘을 가지지 못하는 무기력한 주장이었다. 흔히 NL좌라고 불린 주체사상 좌파는 대선 이후 NL대오에서 분립, PD 진영의 합법-개량주의와 결합한다.
학생운동 조직노선 논쟁
진학련의 공개 학정조 노선으로부터 시작된 논쟁은 93년까지 지속된다. 다기한 조직의 숫자만큼 다기한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주요한 논쟁의 촛점은 비합법 폐기의 문제, 정치조직/대중조직 분리 구축의 문제, 선투련에 대한 평가로부터 학생연대가 제기한 정파주의 극복의 문제, 연대운동 방식에 대한 문제 등이었다.
진학련은 변화된 현실과 비합 정파 운동의 비대중성을 근거로 정파의 공개화를 주장하고 학생회를 올바르게 세워내기 위한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의 분리 구축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AMC 등은 원론적인 비합법 노선 폐기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비합 정파의 상당 부분을 공개화하는 공개 학정조 노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대중조직/정치조직 분리 구축에 대해서는 대중조직의 정치성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반면 학생연대는 비합법 전위당 건설 투쟁에 복무하는 학생운동을 주장하고 학정조 노선 일체를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에 대한 잘못된 사고에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직노선을 전대협의 당파적 개조를 위한 혁명적대중조직(혁대조)이라 규정한다. 혁대조론은 대선 이후에 엄밀하게 정식화된다. 또한 학생연대가 제기한 정파주의 극복의 문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러 세력들이 그를 위한 자기 입장을 천명한다. 이에 대해 학생연대는 단지 존재하는 정파들의 현 수준에서의 통합 추진은 ‘초정파주의’가 아니라 ‘반정파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평가
PD 학생운동 후반기인 이 시기는 폐쇄적이던 각 정파의 노선이 근본적으로 회의되면서 PD 학생운동의 분화와 해체가 이루어지는, 즉 PD 정파주의의 종말기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운동의 필요성을 낳지만> <맑스-레닌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회의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쉽사리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무수한 새로운 모색들은 80년대 초반에 이미 한국 학생운동에서 실천적으로 응징되었던 기회주의의 부활(무림-진학련)이나 서유럽에서 이미 파산난 이론들의 수입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성급한 교조주의로 탄생한 무수한 정치노선, 투쟁노선이 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듯이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던 성급한 재구성 또한 너무나 쉽게 반복적으로 폐기되고 재구성되었다.
87년 민민학련이 그 자체의 운동 동력이 소진한 상황에서 마지막 불꽃을 비록 사퇴로 귀결되었지만 민중후보 운동으로 불태우며, 혁명적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고의 단초를 제공했다. PD 학생운동은 92년 대선을 통해 뿌리 깊은 한국 운동의 민주/반민주 대립구도에 입각한 급진적 민주주의, 정치주의의 편향과 노동운동에 대한 맹목적 물신주의에 빠진 평향을 극복하고 근본변혁을 조직하는 운동의 시대를 열기 위한 민중후보 운동을 준비해야 했다.
후보 단일화의 미련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사퇴하지 않는 민중후보 운동을. 물론 그것은 독자정립된 대선 이후의 학생운동이 가져야 할 성격에 대한 맹아적인 관점만 내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중후보 운동의 의의는 좌파 학생운동 모두에게 동질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 투쟁은 몇 표를 얻었는가와 무관하게 ‘최초로’ 사회주의 운동을 전 국민에게 독자적인 세력으로 각인시키는데, 새로운 시대의 운동을 개척할 사회주의 운동 역량의 결집의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선을 계기로 탄생한 한 학생운동 조직이 대선 직후 제출한 팜플렛의 머리말에 나와 있듯이 정말 중요한 문제는 대선이 아니라 대선 이후의 평화적 시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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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읽어 보면 필자가 생각했던바와 유추했던 것과 거의 맞아 떨어지고 오히려 최홍재씨가 좌익 활동에 몸소 몸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점은 프로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향인지, 전향인듯 한 고백인지의 글에서도 나타나는 점은 지금 "좌파정권 종식"을 표하는 한나라당이다. "좌파정권종식을 표"하면서도 위에 나타난 글의 내용들만 가지고 그들이 전향했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문제가 있다는 점이고, 그 이유는 좌절되고 떨어져 나온 그룹의 성격으로 보아 문제는 그들이 말하고 운동하는 것의 앞으로의 결과라는 것이다. 진정한 전향이라고 우익진영 전체가 수긍한다면 우리도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인정 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그것은 한나라당에서 키워주고 키운 인물인 손학규가 배신한 점등을 보고 그들의 인맥구성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필자는 무슨 인간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정 자유애국운동, 즉, 정통 우파의 운동으로 볼 때, 진정성의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구 쏘련과 동구 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들이 근원적 맑시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유치하게는 좌파내부에서 자신들의 노선다툼만이 존재하고, 전향했다고 선언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이들이 맑시즘 자체의 문제와 오류를 인식하지 않는한, 오히려 현재와 앞으로는 더 위장하고 교활하게 그들의 운동을 전개할 것이란 점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책임"이라는 면을 볼 때, 뼈깎는 진정성이 없는 한 절대로 인정 할 수 없는 면이기도 하다. 이 사상전쟁은 무슨 인간의 자연적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북과의 대치상황으로 볼때,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는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공감하겠지만 한국의 얼치기 좌파운동에 간여한 인간치고 "권력 지향적이지 않는 인간이 없다." 라는 점과 그 실패한 권력지향 속성이 어떻게 카멜레온 적으로 바뀌어야 살아 남느냐?" 하는 점이 있는 것이고,
둘째, 이 글 이후로 벌어진 좌파들의 동향을 볼 때, 일반인들이 모르는 점. 즉, 오히려 좀 전문적으로 볼때, 신자유주의(우파)의 성격으로 좌익들도 그에 반사적으로 "좌익 글로벌"해 간다는 점 때문인데, 이는 원래의 마르크시즘. 즉, 공산 인터내셔날화 하기 때문에 지금의 젊고 순진한 학생들에게 "무너진 레닌, 스탈리즘은 실패지만 마르크시즘은 역시 건재하다..." 는 논리를 계속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무슨 "제3 인터내셔날" 어쩌고 하면서 변해가고 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 무엇이 자유주의, 우익의 진정성이냐?"고 물으면 현재, 우익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좌익 출신들의 부류들과 같이 행동한 우익진영의 일부 그룹은 이미 우익으로써 그 체면과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우익운동을 하면서도 상대 좌익에 대해 그 만큼 무지하다는 것도 반증하는 것이고, 사적인 관계를 떠나 公益의 명함으로, "국민의 이름으로"운동하는 우익으로써, 그 책임성에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당 당사자들 모두 해명, 자숙하라................
맑은샘 유머:
1. "나는 누구인가? 원래 좌익인디.....인간이 되고 싶다... 아니야 인간을 속여 먹어야쥐.........?"
2, "나는 누구인가? 우익운동 했는디?.... 내는 좌익이 뭔지 잘 몰러....나는 인간인가 원숭이인가?"
3. '나가 우익인지 좌익인지 알게뭐여? 그냥 맛나는데로 먹어버리고
소화만 잘시키면 되쥐 암..." 이름하야 쉬파리들 모이는 "중 똥 (중도)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자유애국운동"에 치명적 문제이다...........
......다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