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납작 엎드릴게요 & 탈주
예술은 종종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 역사책이나 사회학 서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궁극적으로 그 내용이 신문이나 뉴스의 경우라도, 소일이ㅣ나 영화를통하면 새롭게 다가오는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은 미적 창조의 영역에 갇혀 있지 않은 사회적인 무엇이다.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은 사회와의 더욱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경황을 보인다.
이처럼 사회적 대중예술인 영화의 성격으로 인해 우리는 전혀 가른 영화들이 동시대 사회의 어떤 측면에 관한
은유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최근 개봉한 두편의 한국 양화도 그런 사례다.
먼저,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절의 부속 출판사에서 일하는 '혜인'의 직장 생활을 담은 영화다.
혜인은 입사 5년차지만 출판사의 막내다.
출근 후 첫 번째 하는 일은 예불을 드리는 것이다.
몰려오는 졸음에 굴복해 꾸벅꾸벅 졸지만 예불에 빠질 수 는 없다.
혜인 혼자만이아니라 절의 모든 직원이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혜인이출판사에서 맡은 업무는 교정과 교열을 보는 것이지만 그외에도 다양한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고에서 오래된 책을 우편으로 발송하는 일 같은
직장인이 가장 기다리는 점심시간이 와도 별로 행복하지 얺다.
구내식당의 메뉴는 항상 콩나물비빔밥이고, 어쩌다 외부 음식을 시켜 먹는 날도 반갑지 않은 손님 때문에 기분을 망치기 일쑤다.
5년 전 출판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 혜애개는 기대와 설렘만 있었다.
좋아하는 통나물비빔밥을 매일 먹는 것도 좋았고 절에서의 모든 일이 새롭고 재밌었다.
누구나 그랬듯이.
5년 차 출판인 혜인의 일상, 그녀가 겪는 일들은 그가 사찰 출판사에서 근무하기 떄문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영화 속 혜인이라는 인물이 결코 남 같지 얺다.
하루 종일 작업한 원고를 저장도 하기 전에 컴퓨터가 꺼져버리는 것도, 우채국 마감 전애 도착하기 위해 뛰어가다가
슬리퍼가 찢어지는 것도,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혜인은 왜 회사를 떠나지 않고 출슨하는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저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보통 사람의 삶이지 않은가.
또 그런 평범한 하루 끝에 언젠가 다가올 꿈울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냉소적인 제목과는 달리 담백하고 솔직한 영화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을 더 객관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이 영화가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경험을 소박하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재현한다면,
'탈주'는 젊은이들의 맘 속에 들끓고 있을 심연을 은유적으로 담은 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탈주'는 자신의 계급 떄문에 원하는 것을 해볼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북한을 떠나 남으로 탈주를 시도하는 북한군 병사
'규남'과 그의 탈주를 막으려는 보위부 장교 '현상'의 긴박한 추격전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첫 탈주의 실패부터 아슬아슬한 위기들을 거쳐 지뢰 지대를 지난 군사분계선을 넘기까지 긴박한 상황을
스릴 넘치게 전개해 간다.
규남이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하는 이유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10년간의 군 복무를 끝나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에 맞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규남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미래를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남쪽에 가도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다는 말에 규남은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실패할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폐쇄적인 북한과 자유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남이 '실패할 자유'를 말할 때 과연 우리 사회에 그런 자유, 다시 말해 개인의 의지에 따라 미래를 선택할
온전한 자유가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한때 공무원과 교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직업이었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길 원했던 것은 공공 행정이나 가르치는 일 자체를 좋아하기 떄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그 직업이 안정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한 선택은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종종 빈칸의 주관식 답안지가 아닌 제한된 수의 선택지가 미리 정해진 객관식 답안지에서 하나를 고르면서
그것을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착각한다.
'오나전한 자유로운 선택'아런 영화 속 규넘처럼 목숨을 걸 만큼 열망과 의지로 실천에 옮겨야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는 규남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면 그 응원은 어쩌면 나의 심연에 억눌러 있는
그 자유를 향한 것일 거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와 '탈주'는 전혀 다른 장르, 다른 재미, 다른 쾌감의 영화다.
이 두 영화가 2024년 여름에 짝을 이뤄 우리에게 도착해 있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억눌린 이상를 깨우는 관리자로,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의 자화상으로 성진수의 시네툭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