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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들의 난동 축제 "맑시즘 2007"에 초청된 붉은 원숭이들 A : ("린지 저먼" 어떤 여자인가?)>
구국결사대의 맑은샘.
6월, 헌법강의, 한국좌익계보사에 관한 글이 미쳐 다 끝나기도 전에 화급을 다투어 7월달에 “고려대학교”에서 “맑시즘 2007”이라는 좌익들의 국제학술대회를 빙자한 축제가 열린다.
나는 단연코 이 대회를 붉은 원숭이놈들에게는 축제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상황과 좌파정권종식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입장에서는 단연코 “난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학술대회를 빙자했지만, 현재 한나라당의 상황이나, 김정일의 농간, 김대중의 입장과 꼼수, 깨어지는 듯 위장을 하는 열우당과 노사모 그리고 한나라당을 장난, 농락하면서, 새로이 위장 통합할 새 여권의 위장창당의 행태를 보아서는 좌파세력의 총결집을 위한 계책의 일환으로 본다.
아니다 다를까, 순수한 학술대회로 보기에 너무도 말이 안 되고 이상한 것은 이 대회에 청와대에서도, 열우당에서도, 민주노동당에서도 지지, 참석하는 연사들이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현재 고려대학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이 대회에 비협조적이기는 하지만, 과연 계속 이점이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이에 이들의 생각과 주 안건은 무엇인지 미리 점검해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여러 자유애국동지들께 고하고자, 이 대회에 초청된 “해외 맑시즘 이론가”는 누구이며, 어떤 인물인지에 대하여 몇몇 연재물을 표하고자 한다.
이 좌익들의 난동 “맑시즘 2007”을 통해서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국내좌파들의 행태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통한 노선의 내용뿐만 아니라 , 중요한 점은 “구 쏘련이 붕괴되고 몰락한 후의 세계에 혼재되어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이념과 생각, 그리고 붉은 무리들의 새 이슈, 그들의 살기위한 새 진로 모색, 국내좌파들의 베껴무스 정책들”을 조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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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린지 저먼 어떤 여자인가?)
린지 저먼은 현재, 영국 ‘전쟁저지연합’ 사무총장으로, 2003년 2백만 명의 강력한 반전 시위를 조직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원이었고 “신노동당”에 맞서는 새로운 좌파 ‘리스펙트’(RESPECT) 런던 시장 후보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성.계급.사회주의)" , “(노동 계급에게 문화는 있는가?)” ,“(여성해방의 정치학)”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 등이 있는데, 우리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이므로 우선 이 저서들을 통하여 그녀를 좀 살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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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린지 저먼의 성, 계급, 사회주의에 대하여)
린지 저먼은 이 책에서 “여성 해방은 세상을 변혁 하고자 하는 운동에 있어서 큰 목소리를 차지해 온 갈래이다. 19세기 중.후반 이래로 여성 해방을 위한 운동은 늘 있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여성 억압에 관한 논쟁 또한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운동 안에서 늘 있어왔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전히 변혁 운동에서 큰 논쟁 거리 중 하나이다.”고 하면서, 기존의 여성해방운동이나 폐미니즘을 “고전적 마르크시즘으로 끌어 들이고, 마르크시즘으로 이를 해석, 비판하고 있지만, 주 목적은 ”비판을 통한 수용“으로 여성해방운동세력을 좌파적, 마르크시즘의 영역으로의 수용,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린지 저먼의 이 저작은 이러한 여성 억압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통하여 여성 해방을 고민하는 다른 폐미니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되게 비판하고 있는 이론은 ”급진 페미니즘“과 ”가부장제 이론“이며, 기존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린지 저먼에 의하면 이들 이론은 ”관념적인 문제에 치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마르크시스트 입장에서, 분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저작의 중요한 점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대부분의 저술들이 그러하듯이-- 이론을 이론으로서 반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페미니즘에 입각한 이론을 택한 많은 조직과 개인은 고전 마르크시스트가 보기에 ”계급을 희석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성.계급.사회주의"는 페미니즘 관점을 흡수한 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특히 후자를 통하여) 진정한 여성 해방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하면서, 기존의 여성해방이나 폐미니즘 운동을 마르크시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마르크시즘의 정치적 세력 확장을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의도가 나타난다 하겠다.
*원래의 “폐미니즘”이란? 우파의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비롯되어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페미니즘의 시초는 자유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에 의하면”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의 원인이라고 보고, 따라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기회와 시민권이 주어진다면 여성의 종속은 사라진다고 보는 견해이며,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현대 사회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미 우리 현행 헌법은 모두 “양성 평등권”을 존중하고 이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급진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법적 ·정치적 구조와 사회 ·문화적 제도가 여성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것 외에 생물학적인 성(性)이 여성의 정체감과 억압의 주된 원인이며, 여성해방은 출산 ·양육 등의 여성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참된 기회균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성억압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부터 시작되었다고만 사기쳤으며, 자본주의가 바로 여성억압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었다.
이에 대해 그로부터 발전한 신사고적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성별 특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하고, 여성억압은 노동자 억압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한 가지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좌파내에서도 오로지 급진적 여성의 입장만을 강조,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단하게 생각해 보아도 과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각 부분들과 대성공들을 한 여성 CEO들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그래서 린지 저먼의 주장은 “고전 마르크시즘의 입장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변형에서 나간 좀 비정상적인 ”급진적 폐미니즘“과 ”가부장제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이들의 좌파세력에서의 정치 세력적 분리적인 요소를 비판하는 것일 뿐이지, 페미니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해방의 정신 중 긍정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측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정상적인 사람들, 자유주의자, 우파가 보나, 고전적 사회주의자들이 보나 좀 비정상적인 현대 급진 페미니즘의 부정적 요소와 광란을 책임 있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낡아빠지고 쓰러져가는 마르크시즘의 정치세력확장에 주된 목적이 있을 뿐이며 그 도구적 이론이라는 것일 뿐이다.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도, 가부장제의 억압에 의한 급진적 여성해방도 사실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의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라고 단순하게 보면, 지독한 가부장적 문화도, 비정상적인 “여성만 강조 급진 폐미니즘”도 문제가 있다.
인간에게 있어 “性이란?” 필자의 관점으로는 “하늘이 내려주신 가장 지고지선의 신성한 능력”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성교행위를 하게 되어 있고, 종족 보존의 신성한 의무를 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인간이 동물하고 다른 점은 이 性에 대하여 “각 문화권 마다 독특한 윤리와, 타부, 그리고 제도로까지 보장”이 되어 있으며, 특히 우리 헌법은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현대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권,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 등으로도 이어지고 민법상 “가족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현재 우리 헌법과 우리 법 어디에도 “여성차별”에 관한 규정도 없으며, “양성동등” “일부일처제”, “사회적 기회균등”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잘 생각해 보자...
정상적인 사람들, 즉, 지금 막 삶의 희망과 미래의 꿈에 부풀어 정상적인 이성교제를 하는 젊은이들, 갓 결혼할 배우자감을 준비하고 이제 막 만난 연인들, 갓 결혼한 부부, 중년의 부부, 은막의 노인 부부들을 생각해 볼 때, 요즈음은 정상적인 연애와 결혼을 하려고 해도 매우 힘든 세상이다.
최소한 정상적으로 내마음에 드는 연인과 배우자감을 만날려고해도 무척 자신들에 대한 준비와 노력이 드는 실정이 사실이며, 그렇게 정상적으로 노력도 해보지 않고 대학 서클룸의 음침한 곳에서 이놈 저놈과 별희안한 짓거리를 다하고, “내가 제일 잘났다”라는 희안한 몽상과 착각에 젖어 페미니즘을 변형한 희안한 급진 페미니즘에 젖어 무슨 남자보기를 똥개 궁둥이 보듯 하는 현대판 플레이 걸들과, 여자 보기를 무책임의 극치로 보는 플레이 보이들이 정상인가?
젊은 후배들은 이 말을 매우 똑똑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렇게 힘들게 토플에 토익에 매달리고, 취업준비시험에 매달려도, 겨우 합격해서 겨우 만난 연인이 가끔 그렇게 형편없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러나 가난하게 태어났던 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던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회균등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자기의 노력여하이다.
내 마음에 드는 상대, 행복한 사랑을 못하게 하는 근원적인 현재의 사회적 요인도 바로 이들 좌파들 때문이라는 요소가 있음도 지적해야 한다.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인류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나름대로 그 문화적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모두 다 그렇게 만들어지기까지 깊은 인간역사의 시험과 노력을 거쳐서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글을 쓰는 필자도 지금, 나의 하나만의 아름답고 성실한 여자친구를 생각하면 역겹기 그지 없다.
사회에 나와서 앞에서는 좌익 여성해방운동이고 뒤로는 머리에 노란물 들이고 밤의 환락가에서 추잡한 짓거리를 넘어 무슨 하리수의 트랜스 젠더를 긍정하자며 마약먹는 넘들이 정상인가? 이런 부류들이 사실상 급진적 폐미니즘론자들이고, 린지 저먼은 단지, 이런 찌꺼기들을 자신들 사회주의세력의 확장의 도구로 이용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윤리로 비판은 하면서도 긍정,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 어느 한 사회의 권력구조라는 것은 우파나 좌파나 그 사회체제를 유지해야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인데, 너무 급진적이면 사회주의로서도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인 아주 간단한 이유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원숭이들의 사회체제는 사회체제로서 정당한가? 라는 물음으로 귀착될 것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이들의 결과는 “결과적 평등.”과 ‘지독한 통제독재“로 인류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 역사에서 증명해 준 바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린지 저먼의 주장은 “유치하고 골빈 붉은 암원숭이 한마리가 한국에 와서 발달되고 발전한 고도 문명의 인간사회를 전복시키고자 인간사회의 쓰레기 돌덩이 막대기들을 주워다가 나는 내 우리의 세력을 확장한다”. 라고 주장하는 바와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가 아무리 발광하고 떠들어도,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참된 기회균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사기치는 핵심이 이미 알다시피 잘못 되었기 때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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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린지 저먼의 “노동계급에게도 문화가 있는가?” 에 대하여)
“린지저먼”은 이렇게 말했다.
“오페라와 시는 종종 지배 계급의 취미로 치부됐다. 그러나 문화와 계급의 관계는 복잡하다. 또, 이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이 무시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술의 문제는 종종 혁명 정치에서 중심이 돼 왔다. 린지 저먼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검토하고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지 살펴본다.
문화에 관한 토론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러나 문화를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예상할 수 있는 답변들이 이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답변은 문화를 정치적 타당성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만약 어떤 영화나 책이 여성을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하면 그것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진보적인’ ― 유색인종 차별이나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예술이 계급 사회의 병폐들과 계급 사회 내의 관계들을 완벽하게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중간 계급’ 예술(때때로 모든 예술)에 반대하는데, 이것은 이런 예술이 노동 계급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주장들이 이런 생각과 연관돼 있다. 하나는 모든 ‘고급 예술’ ― 특히 비싼 관람료를 내는 극장 예술, 오페라, 갤러리 들 ― 을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거부해야 하는 배타적이고 중간계급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런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TV 드라마, 록 음악, 축구와 경주 같은 ‘노동 계급 문화’를 ‘고급 문화’와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주장들은 “나는 베토벤을 좋아하지 않아” 같은 주관주의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알고 있어”와 같은 일종의 속물주의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예술과 문화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 전체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와 그 속의 개인들 모두의 발전 수준을 측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로 이 때문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문화 문제에 결코 무관심한 적이 없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 ― 특히 마르크스·엥겔스·트로츠키·그람시 ― 는 많은 시간을 들여 그런 문제를 다룬 글을 썼다. 그들은 특정 종류의 예술을 감상하는 데서 시작했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를 사회 발전의 지표이자 인간 업적의 정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문화 이론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트로츠키였다. 그는 언제나 예술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를 “사회 전체나 적어도 지배 계급을 특징짓는 지식과 능력의 유기적 총합”이라고 묘사했다. 따라서 문화는 사회와 연관돼 있는 동시에, 그 사회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특정 형태의 예술은 특정 사회의 산물이며 그 사회와 동떨어져서 평가될 수 없다.
“쾰른 대성당의 건축 설계도는 토대와 아치의 높이를 측정하고 본당 중회석 세 개의 치수와 기둥의 치수와 위치 등을 결정하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도시가 어떠했는지, 길드나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어떠했는지 모르면 쾰른 대성당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예술이 사회의 발전을 반영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서사시나 그리스 비극은 여전히 예술적인 흥미 거리가 되겠지만, 세계를 훨씬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인쇄기와 전신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더는 우세한 예술 형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인의 상상과 그리스 예술을 만들어 낸 자연관·사회관이 자동 기계, 철도, 기관차, 전신의 시대에 가능할까? … 모든 신화는 상상 속에서 그리고 상상을 통해서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의 힘을 지배하게 되자마자 신화는 사라져 버린다. 여신 Fame이 프린팅 하우스 스퀘어(Printing House Square)와 어떻게 나란히 존재하겠는가 …
“… 아킬레스가 화약이나 총탄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일리아드가 인쇄기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노래 부르기, 암송하기, 뮤즈들이 인쇄기가 등장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서사시의 필요 조건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자본가 계급이 생산하는 예술과 문화는 이러한 사회 발전의 반영이고 마르크스 시대에는 그 전 어느 때보다 훨씬 빼어난 예술 작품들이 생산됐다. 부르주아지, 즉 새로운 자본가 계급은 옛 중세 사회의 태 내에서 발전했다. 이들은 실제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이미 몇 세기에 걸쳐 어마어마한 힘과 부를 발전시켰다. 도시, 대학, 인쇄술의 발전은 모두 성장하는 부르주아 문화의 증거였다.
부르주아의 문화적 산물은 방대했다. 르네상스 회화와 건축, 셰익스피어의 희곡, 밀턴의 시, 공연 음악의 발전. 그럼에도 부르주아 문화가 그 성과를 구축하고 세련되게 하며 발전시키는 데는 수백 년이 걸렸다.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은 계몽주의의 등장부터 위대한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유럽 전역에서 구질서에 대항한 1848년 혁명까지 약 1백년 간의 시기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부르주아 발전의 정점을 반영한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으로 무장했으며 이미 영국·프랑스·미국에서 구질서를 전복한 자신감 넘치는 혁명적 계급은 이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에 걸맞은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됐다.
그 산물 중에는 특히 부르주아 혁명가인 베토벤의 교향악, 스콧·발자크·디킨스와 점차 등장한 러시아 작가들의 위대한 소설들, 성장하는 도시들의 고전 건축들이 포함됐다. 그 문화는 자신감 넘치는 세계관을 표현했다.
1848년은 전환점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여전히 훌륭한 부르주아 예술은 나왔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더는 혁명적 계급이 아니게 된 때는 결정적으로 바로 이 때부터였다. 그들은 옛 봉건 질서를 싫어했으나 노동 계급의 혁명을 훨씬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소심해져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봉건 질서와 타협하면서 완전히 성숙한 부르주아 혁명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일단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더는 혁명적이지 않게 되자, 그들의 세계관도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최상의 예술 가운데 일부는 점점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를 경축하는 게 아니라 그에 반대하면서 나왔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운동은 이러한 일관성 부족을 반영하는 기법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이 조각난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이 운동 속에는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이룬 기술 발전을 찬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고 또 다른 많은 예술가들은 체제 전체에 도전하려 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1917년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선명한 사회주의 예술이라는 사상에 몰두하게 됐다. 그들은 예술을 갤러리와 극장에서 떼어내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기법들을 시도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본가 계급이 혁명을 성공시키기 전에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부르주아 예술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는 것을 뜻했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미술가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프롤레트쿨트’ 운동은 과거의 예술은 노동 계급에게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1918년 프롤레트쿨트 첫 대회에서 한 연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라는 짐을 진 채 새로운 삶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르주아 문화의 성취라는 또 다른 과중한 짐을 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 되면 우리는 과중한 짐을 진 낙타처럼 조금도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부르주아 문화라는 낡은 쓰레기는 죄다 내던져 버립시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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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저먼의 이 주장을 찬찬히 읽어 보면 참 교묘한 원숭이 논리에 젖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이다. 이 주장은 “기존의 하층문화와 고급문화를 분리시키는 감정적, 유아적 반체제 논리가 마르크시즘이 아니고 마르크시즘은 부르죠아의 고급문화를 알고 인정했다는 논리”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국내 좌파들의 노선투쟁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급스러운 문장의 시, 오페라같은 유럽 상류계층에 있었던 문화를 저주, 비난하고 있었던 단순 무식한 주체파와 좀 세계적이고 유연한 문화도 긍정하는 그람시나 트로츠키를 좋아하는 PD파 사이의 노선투쟁이나 갈등을 종식시키고, 원래 마르크시즘도 이런 문화적 갈등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고 대변하고 있다. 이점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데, 구 소련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설자리가 없어져 가는 사회주의자들의 말장난, 변명일 뿐이다.
일례로 현재, 미국의 뉴욕에서는 노동자도, 돈 많은 자본가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브로도웨이의 어떤 오페라도, 어떤 대중문화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점을 사기치고 있다. 실제로 이글을 편집하며 쓰고 있는 필자도 가끔 창작시도 쓰고 필자 본인은 무슨 고급문화니 대중문화니 구별이 없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필자의 글을 통해 여러분에게 발표하고 있지 않는가?
이 린지 저먼의 주장에서 우리가 유심히 발견해야 할 점은 다른 것이 아니고, 기존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갈등을 만들어 놓았던 사회주의, 좌파들의 논리가 이제 점점 유럽에서도 설자리를 잃어 간다는 점이다.
문화갈등을 유발해서 대중적 표풀리즘 문화로 고급문화를 공격했던 논리가 설자리가 없어지는 이유는 현재에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자신의 여권 한도에서 얼마든지 여가생활을 즐기고 별 장르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인터넷 정보화시대”와 “자유민주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회주의자들은 이점을 철저히 숨겨야만 한다. 그래서 린지는 표시 나게 거짓말 할 수는 없고, 마르크스시대에 마르크스가 각 문화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마르크시즘을 창시했다고 역설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마르크스가 그랬다는 것이 일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적 한계는 린지 역시, 쓰러져가는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키고, 세력확장하자는 목적의 한계를 대변한다는 점이고, 다만, 모르고 순진한 젊은층을 향하여 외쳐, 노동자의 열악함을 호소해서 좌파세력확대의 꾐으로 이끈다는 것 뿐이다.
분명한 점은 대중문화든 고급문화든 인간이 문화생활을 충분히 향유하려면, 문화는 물질생산과는 다른 정신생산의 측면이 있기 때문인데, 정신문화생산은 물질생산의 富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절대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노무현의 “노네상스”가 역겹고 유치한 것이 원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의 국제교역과 무역에 바탕을 둔 부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마르크시스트들은 철저히 숨긴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낮에는 군경을 피해, 밤에는 빨갱이들 피해 살았던 육이오때의 한국농촌사람들과 전쟁통에 부산 피난시절의 빌어먹던 거리에서 무슨 오폐라를 감상하고 쇼팽의 피아노 선율을 감상할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루종일 막노동을 갔다 와도 밤에는 맑은샘의 고급스러운 ^*^글과 시, 음악을 즐길 수 있고, 하루종일 기획실에서 일류경제서류와 시름 했어도 밤에는 와인을 한잔 하며 맑은샘의 우스꽝스러운 “몽키매직”을 볼 수가 있다.
이 자체가 바로 “자유주의 사상의 승리”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발전한 세계11위의 경제대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각설하고, 그런관점에서 본다면 린지의 “노동계급에게도 문화가 있는가?”는 주장은 역시
(사소유권을 부정)하는 마르크시즘의 논리오류를 숨긴 붉은 암원숭이의 시끄러운 꽥꽥거림일 뿐 아니 겠는가? 요즈음은 노동시간이 너무 유연하고, 너무 펑펑 놀아서 탈이다 원숭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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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린지 저먼의 “주식회사 G8을 말한다”에 대하여)
G8은 세계 8대 부자나라들의 모임이며 매년 회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린지 같은 좌파들의 반대여론을 피해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서 만나고 있는데 이들은 선진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모임이라고 보면 된다.
린지의 이 책에서 “노암 촘스키, 수전 조지 등 전 세계의 진보적인 저술가와 활동가들 21명이 이 G8에 대하여 오만방자한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좌파적 입자에서의 악행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자유무역이니 하는 ‘좋은’단어들이 그 추악한 본모습을 얼마나 교묘하게 잘 숨기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바 그 주장들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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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G8에 반대한다!!
요즘 론스타의 ‘먹튀’ 뉴스가 경제면을 장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미 FTA, 스크린 쿼터 축소, 미국 쌀 칼로스 수입, 의료 시장과 교육 시장 개방 등 신자유주의에 관련한 뉴스가 매일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 얼마만큼 ‘자유’스러운지, 세계화가 얼마만큼 ‘세계’적인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정치, 경제 뉴스는 머리 아프고 ‘자유’라니깐 그저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
“G8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세계 선진국 8개 국가 정상의 친목모임이다. 스스로를 세계정부라 착각하며 전 세계를 멋대로 주무르고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친목모임 이상의 범죄 집단이다. IMF, 월드뱅크, WTO 등의 많은 국제기구와 FTA, GATT 등 수많은 협약들이 이들의 악행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다국적기업과 이들 정부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다국적기업의 이익은 곧 자기들의 이익이므로 다국적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해 이들 정부들은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
“이들은 자유무역이니 비교우위니 하지만 자기네 무역장벽은 굳건히 세워둔 채 가난한 나라들의 무역장벽 해체, 공공서비스 민영화, 시장 개방 등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건 가난한 나라들의 가난을 더욱 심화시키기만 하는데도 그런 결과는 안중에도 없다. 석유 자원 때문에 거짓말을 해가며 전쟁까지 일으키는 정도니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
“고통은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 일본, 프랑스 할 것 없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공고해져가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시스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노동자들,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 빚만 불어나는 농부들,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빈부격차…. 왜? 왜냐하면 8대 부자 나라들의 이익이란 것은 사실 그들 나라의 국민들의 이익도 아닌 몇몇 정치가들, 다국적 기업가들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사실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자기 나라 국민이 어찌되든 이들은 관심 없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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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노암 촘스키, 수전 조지 등 21명의 활동가와 저술가들이 전쟁, 민주주의, 무역, 보건, 아프리카, 환경, 식량 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까발리고 있다. 그리고 신문의 다른 면을 각각 차지하고 있는 많은 뉴스들이 ‘지구를 끝장낼’ 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들이 모두 사실일까?
필자가 아는 한 천만의 말씀이다. 우선 “노옴 춈스키”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기꾼인가는 익히 우리 우익진영에서도 이상돈 박사님의 번역서를 통해 밝혀졌고, 또 필자도 언급한 바 있다. (맑은샘의 신좌익사상비판 시리즈 참조) 고로 춈스키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문제는 이 주장들이 얼마나 가치 없고, 역겨운 사회주의에만 경도된 주장인지 조금이라도 “국제법”과 “국제 경제학”, “국제경제법”을 공부한 사람, 그리고 “국제기구들이나 국제조직”에 대하여 공부, 연구해 본 사람들이라면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엉터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솔직히 이 주장들은 하나 같이 각국 좌파 원숭이들의 “모듬 썩은 고구마탕“의 시각일 뿐이며 경제적 생산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며, 국제관계의 기본도 모르는 얼치기 주장일 뿐이다.
문제는 이 주장의 해악에 대하여 좀 대중적으로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우리가 IMF 구제금융의 치욕적인 경제대란의 사태를 맞이했었어도, 사실상, 그럼 당시 IMF가 없었고,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얻지 못했으면 어떠했을 것인가? 를 독자들에게 자문하고 싶다. 그럼 대답은 간단하지 않는가?
문제는 당시 김대중 정권의 무슨 큰 뽀뽀 빅딜이다 뭐다도, 확실하고 공정한 워크아웃을 단행해야 하는데 뒤로 뒷돈 받아먹고 아부 잘하는 놈 살려주고 밉게 군놈 퇴출시킨 잘못된 선무당 사람잡아식 워크 아웃도 문제였다는 점이었다. 이는 당시 정경유착을 비판하면서 나선 정부가 사실은 그 보다 더한 신정경유착을 했다는 사실이며 좌파가 좌파다울려면 이 점을 비판해야 옳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경제가 살길은 끊임없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며 말로만이 아닌 한국병 치유와 생산성 확대, 쓸데없는 규제철페, 새 시장 개척, 확대에 있는 것이지, 이들 주장대로 G8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묻고 싶다.
영국의 붉은 개코 암원숭이 ‘린지 저먼’이여..... 세계적 “원숭이 모듬 썩은 고구마탕”이 맛있는가? 많이 먹어라....... 그래 보았자.....붉은 바이러스에 의한 네들 설사만 유발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동조하고 고개 숙이고 뱉지달고 똥 핱으러 가는 한국의 더 골빈 원숭이들은 무엇인가?...............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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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올라탄 건방진 붉은 원숭이들에게 (현대시)
맑은샘 지음.
십자가에 올라타서 님을 흉내내는 붉은 꼬리의 유인원들이여
네들만 넓은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란다
네들만 민족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가 네들과 다른 것은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도 靈魂을 가진다는 것이며
네들은 님을 모르는 유인원이라는 것이다
한같, 털복숭이 흉칙한 손가락을 턱에 괴고 고민하며 붉은 벽돌집의 레고놀이에 여념이 없는 네들은
이름하여
평화 빤지고, 통일 우탄일 뿐
십자가를 시건방지게 올라타고 님의 흉내를 내지만
네들은 저 무식한 정일릴라에게 매일 얻어맞고 꽥꽥되며 진상품만 갖다바칠 유약한 하등동물이란다
알겠느냐, 빤지야, 우탄들아
하늘을 우러러
십자가에 올라탄 시건방진 원숭이들이 여기 저기 시끄럽게 꽥꽥 대느니
네들외침이 붉은 애볼라, 애이즈 바이러스처럼 세상을 물들려도
네들이 올라탄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닌 나무 막대기란다
네들이 원숭이가 아니고 싶거든
네들을 낳아준 어미의 붉은 엉덩이와 음부를 보라
네들 아비들의 생식기를 보라 유인원들이여
우주 너머에서 숙련된 기능공 릴라들의 음성이 들리거든 이렇게 외쳐보라
"오 그람시여 원숭이의 神이시여
저희를 궁휼이 여기사 붉은 바이러스를 창궐하게 하소서"
"오 마르크스여 유인원의 황제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 우리를 통일시켜 주소서"
그러나 유인원들이여
통일은 그렇게 오지 않고, 네들이 추앙하는 저 김릴라가 골로 갈 때
네들 조잡한 붉은 레고의 비밀을 네들이 인간이 되어 풀수 있을 때 찾아 온단다
왜 21세기에도 인간이 되지 못하고 아직도 고민고민하며 유아스런 레고 맞추기만 하느냐?
평화를 흉내내는 빤지여 , 통일을 외치는 우탄들아
그렇게 꽥꽥 되어서 유인원보다
어떤 더 흉칙한 괴물로 진보할꼬?
심히 불쌍하노니
고민이 되더라도 담배를 거꾸로 물고 불붙이지 말거라
네들 필터가 타느니라
릴라야, 빤지야, 우탕들아,
거울속 네들 모습이 보기가 좋으냐
십자가 놀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란다
네들의 우주적 고통스러운 대설사를 선언 하노라
불쌍한 원숭이들을 위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