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갖는 가장 큰 딜레마는, 관객들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종 승부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스포츠 경기 소재의 영화라면, 영화의 결말에 대한 긴장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프로 복싱 챔피언에 도전했다가 링 위에서 사망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를 그린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처럼, 최종 승부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실제 스포츠 경기 소재의 영화에서는, 승부가 노출된 채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 상실이 대중적 흥미를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다른 방법으로 내러티브 구성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자대표 핸드볼팀을 소재로 한 임순례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역시, 최종 승부는 이미 공개적으로 노출된 것이다.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한국 여자 핸드볼 팀은 두 차례의 연장전까지 동점을 기록하다가 마지막 승부던지기에 져서 은메달을 땄다. 심판의 오심과 편파적인 판정에도 굴하지 않고 세계 최강의 장신 군단 덴마크팀을 맞아서 투혼을 불사른 한국 여자 핸드볼팀의 경기는, 당시 전국민을 감동시켰다. 금메달보다 더 값진 은메달이라는 수식어도 따랐다. 하지만 그런 환호와 격려만으로 영화적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영화다.
군 입대할 나이의 스무살 무렵 청년 세 명을 주인공으로 삶의 막막함과 허무함을 깊이 있게 드러낸 데뷔작 [세친구]나, 비속한 삶의 남루함을 차가운 이성으로 응시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잃지 않은 [와이키키 부라더스]를 통해 높은 완성도와 진정성 있는 리얼리즘으로 삶의 형상화에 성공한 임순례 감독은. 실제로 아테네 올림픽에서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여자대표 핸드볼 팀의 경기를 영화로 만들면서도 소재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덴마크와의 피 말리는 마지막 결승전 경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임순례 감독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경기 그 자체가 아니다. 핸드볼 팀의 주역이었던 선수들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스포츠가 아니라 땀 냄새 나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흔한 스포츠 경기 소재의 영화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동선은 국가 대표 핸드볼 팀의 아테네 결승전을 향해 선형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첫 부분은 소속팀이 해체된 후 마트에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국가대표 12년 경력의 미숙(문소리 분)의 삶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된다. 미숙은 운동하다 만나 결혼한 남편(박원상 분)이 사업하다 빚을 지고 도망자 신세가 된 후, 여섯 살 된 아들과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선수 시절 미숙의 라이벌이었던 혜경(김정은 분)은 일본 프로팀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대표팀 감독 대행을 맡아 귀국한다. 노장 선수들이 은퇴한 후 최약체가 된 팀의 전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예전의 핵심 멤버를 불러들여야겠고 판단한 혜경은, 미숙을 비롯해서 한 번도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응어리를 안고 은퇴한 정란(김지영 분) 등을 국가대표로 발탁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을 향해 달려가는 수직적 구조 아래서, 감독 대행인 혜경과 한때 그의 동료였던 노장 선수들, 그리고 거기에 반발하는 후배 선수들간의 갈등과 불화가 전반부에 펼쳐진다. 팀 내의 불화에 책임을 물어 감독 대행직에서 해고된 혜경, 그리고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선수 출신의 안승필(엄태웅 분)과 노장 선수들 사이의 갈등은 후반부 갈등의 핵심이다. 또 수평적으로는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던 미숙이 우승 사례금을 미리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가 그 돈이 감독 대행인 혜경이 사비로 마련했다는 것을 알고 팀을 이탈하는 것이나, 혜경과 한때 연인 사이였던 신임 감독 안승필과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서 기 싸움을 펼치는 내용이 수직적 구조 사이로 전개되면서 수평적 균형을 이룬다.
물론 덴마크와의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세밀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숭부던지기에서 져서 은메달을 땄다는 것을 알고 다시 보아도 명승부가 갖는 긴장감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핸드볼을 소재로 한 세계 최초의 영화다. 결승전의 긴박감은 임순례 감독의 연출력과 3개월동안 핸드볼 훈련을 받으면서 국가대표로 거듭한 배우들의 열정이 만든 합작품이지만, 임순례 감독의 연출에서는 전작과 다른 여유가 묻어난다. 한 치의 공간도 낭비하지 않고 감정선을 자로 잰듯 계산해서 연기를 지도하고 화면을 만들던 임순례 감독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는 넉넉한 여유로 웃음을 주고 관객들의 감정이 개입될 공간을 열어준다.
임순례 감독의 이러한 변화는 관객들의 대중적 지지로 이어질 것이다. 분명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임순례 감독의 다른 두 편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약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와이키키 부라더스]에서 보여준 꽉 짜인 구도와 빈틈없는 연출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임순례 감독은 과장하지 않고 비루한 삶의 사실적 연출로 획득한 깊이 있는 울림 대신, 대중적 유머와 보편적 감성을 얻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것인가 논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겠지만, [와이키키 부라더스] 이후 7년만에 작품을 만든 임순례 감독으로서 지금 절실한 것은 대중들의 지지다.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의 결승전이 궁금하다면 당시의 TV 방송을 다시 시청하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결승전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데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임순례 감독은 잘 알고 있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결승전에 집중된다고 해도, 밖으로 보여지는 긴박감 넘치는 경기 장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승부처다. 그러기 위해서 임순례 감독은 도입부에서부터 선수들 개개인의 문제를 시시콜콜 끄집어낸다. 남편의 빚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미숙, 성숙한 기량을 갖추었지만 한 번도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고 은퇴한 후 남편과 설롱탕집을 운영하는 정란, 감독 대행에서 해고된 후 옛 연인이 신인 감독으로 부임한 팀에서 자존심을 접고 다시 선수로 뛰는 혜경, 노장 선수들 중 막내이며 신참 선수들중 맏 언니격인 골키퍼 수희(조은지 분) 등의 캐릭터가 손에 잡힐 듯 살아나기 때문에, 후반부의 땀냄새나는 인간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의 핵심 캐릭터인 미숙 역의 문소리는, 삶의 고단함에 지친 주부 선수의 내면을 힘 있게 표현하고 있다. 선수로 올인하지도 못하고 주부가 되지도 못한 미숙의 딜레마가 성공적으로 보여지지 않았다면 작품 자체의 진정성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문소리는 작품의 내적 중심을 잡아가면서 고단한 선수들의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감독 대행이었다가 자존심을 접고 옛 연인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팀에서 선수로 다시 뛰는 혜경 역의 김정은은, 지금까지 다른 코미디 영화에서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다면 김정은이 과연 배우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큼 김정은의 연기에는 진정성이 묻어 난다. 현실에서 한 발자국 허공으로 떠 있던 그녀의 두 발은 탄탄하게 땅에 붙어서 캐릭터의 사실감을 육화한다. 걸쭉한 사투리와 욕설로 좌중을 제압하는 정란 역의 김지영도 지금까지 그녀의 이미지에서 떠올려지지 않던 전혀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08년 한국 영화계가 거둔 첫번째 수확이다. 얄팍한 상혼 대신, 넘치는 과장과 화려한 거짓 수식어 대신, 삶의 진정성을 선택한 이 영화가 얼마나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지 살펴보는 것은, 한국 영화산업의 내적 성숙도를 파악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