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新羅)의 철문관(鐵門關) [11편]
옛 조선(朝鮮) 강역(疆域), 유라시아(Eurasia)를 넘나들다.
2022년 02월 13일
○ 철문관(鐵門關)에 대해서 옛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되는 것들만을 골라본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것들을 설명(說明)하려 하니 많은 분량(分量)이 되기 때문에, 가능(可能)한 짧게 해설(解說)코자 하다 보니 아쉬운 점도 많다.
1. 유주(幽州) 대도독부(大都督府)에 속한“철문관(鐵門關)”
“유주(幽州)는, 幽都(유도) - 幽陵(유릉)”과 같으며 北方(북방)을 뜻하고, 유명(幽冥)과 같다. 본시(本是) 요동요서(遼東遼西)의 북(北)쪽이 “한해(瀚海)이며, 북해(北海)”다. 간단(簡單)하게 설명(說明)하고 본론(本論)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1) 山海經 : 《北海之內,有山名曰,幽都之山,黑水出焉,中略. : 북해지내(北海之內)에 유도산(幽都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山)이 있는데, 흑수(黑水)가 나온다. 중략(中略)》하였고,
【흑수(黑水)는, 북정도호(北庭都護) 경내(境內)에도 있다고 하였다.】
(2) 通典 :《幽州今理薊縣.古之幽州,蓋舜分冀州為之,置十二牧,則其一也.言北方太陰,故以幽冥為號.幽州,因幽都山以為名也.山海經有幽都山,今列北荒矣. : 유주(幽州)는 계현(薊縣)에서 다스렸는데, 옛 유주(幽州)로, 순(舜)이 기주(冀州)를 나누어, 설치(設置)한 12목(牧) 중의 하나이다. 북방(北方)은 태음(太陰)【달(月)을 태양(太陽)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을 말하는 것으로, 고로 유명(幽冥)이라고 부른다. 유주(幽州)는 유도산(幽都山)으로 인하여 이름(幽州)이 되었다.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유도산(幽都山)이 있는데, 북황(北荒)에 늘어서 있다.》고 하였고,
(3) 史記地名考. 上谷 : 《㰌里子甘茂傳 : 趙攻燕,得上谷三十城[案,索隱,國策云,三十六縣], 韓王信傳:聞冒頓居代上谷. [正義:上谷, 今嬀州也. 在幽州西北] 通典:造陽在嬀州北. : 霍里子甘茂傳에 의하면 : 조(趙)가 연(燕)을 공격(公格)하여 상곡(上谷)의 30개 성을 얻었다.[안(案) : 색은(索隱) : 국책(國策)에서 이르기를 : 36개 현(縣)이다.] 韓王信傳에 따르면 : 모돈(冒頓)이 대(代), 상곡(上谷)에서 사는 것을 들었다. [정의 : 상곡(上谷)은, 지금의 규주(嬀州)다. 유주(幽州) 서북(西北)에 있다.] 통전(通典)에 따르면 : 조양(造陽)은 규주(嬀州)의 북(北)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4) 同文廣考(동문광고)에서는 : 《“遼陽以東(요양이동)으로, 동(東)쪽은 바다에 닿고, 북(北)쪽은 사막(沙漠)에 접하였으며, 남(南)쪽으로는 조선에 미치기까지가 모두 그 구역이다.”》하였다.
유주(幽州) 땅은, 〈요양(遼陽)의 동(東)쪽에 있으며, 그 동(東)쪽의 끝은 바다에 땋고, 북(北)쪽은 사막(沙漠)에 닿으며, 남쪽은 조선(朝鮮)에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땅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라면, 세상(世上)이 또 한 번 뒤집어져야 가능(可能)한 일이다. 「곧 불가능(不可能)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땅으로 지세(地勢)를 따라가보면,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이 모두 해당(該當)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重要)한 포인트(Point)는, 「유주(幽州) 땅에 유도산(幽都山)이 있어야 하고, 그 산에서 흑수(黑水)가 발원(發源)해야 한다.」 이게 유주(幽州)라는 땅의 첫 번째 조건(條件)이 된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그 북(北)쪽이나, 요녕성(遼寧省)이나 그 북(北)쪽 땅에 “유도산(幽都山)”이란 산(山)이 있는가? 이 산(山)에서 흑수(黑水)가 나오는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곳 땅은 자고이래(自古以來) “유주(幽州)” 땅이 된 적이 없다는 뜻이다.
20세기(世紀), 『근세(近世)의 서구열강(西歐列强)+일제(日帝)+서남세력(西南勢力)+그들의 하수인(下手人)을 자처(自處)했던 극소수(極少數)의 조선인(朝鮮人)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에 의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을 거쳐,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것일 뿐이다.』이게 팩트(Fact)다.
〈유주(幽州)의 본(本) 고향(故鄕)은, 총령(葱嶺)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다.〉
➤ 지도출처(地圖出處) : 두산백과
(1) 《新唐書 地理志 / 《媯州媯川郡 懷戎縣 : 天寶中析置媯川縣,尋省.媯水貫中.北九十里有長城,開元中張說築.東南五十里有居庸塞,東連盧龍,碣石,西屬太行,常山,實天下之險.有鐵門關.西有寧武軍.又北有廣邊軍,故白雲城也. : 규주(嬀州) 규천군(嬀川郡) 회융현(懷戎縣) : 천보(天寶)중에 규천현(嬀川縣)을 나눴다. 규수(嬀水)가 관통(貫通)하는데, 북(北) 90리에 장성(長城)이 있다. 개원(開元)중에 장설(張說)이 쌓았다. 동남50리에 거용새(居庸塞)가 있고, 동(東)쪽으로 노룡(盧龍)과 갈석(碣石)에 연하였고, 서(西)쪽으로 태행(太行)과 상산(常山)에 속했으며, 실로 천하(天下)의 험한 곳으로, 철문관(鐵門關)이 있고, 서(西)쪽에는 녕무군(寧武軍)이 있다. 또 북(北)에는 광변군(廣邊軍)이 있는데, 옛 백운성(白雲城)이다.》라고 하였다.
➤ 이 설명(說明)속에 등장(登場)하는 지명(地名)이나 유적지(遺蹟地)에 대한 것 중에서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은,
➊ 갈석(碣石)은, 산해관(山海關)의 바닷가에 있다고 하는데, 실제(實際)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산(山)은 그 존재(存在)자체가 없다.
➋ 거용새(居庸塞)는, 진(秦)때의 장성(長城)의 요새(要塞)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진(秦) 장성(長城)은, 몽념(蒙恬)의 죽음과 동시에 황하(黃河) 북안(北岸)의 양산(陽山)으로 향하던 중 중단(中斷)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위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거용새(居庸塞)는, 조작(造作)된 지명(地名)일 뿐이다.
➌ 이곳에 ‘철문관(鐵門關)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실체(實體)는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그 존재(存在) 자체(自體)가 없다.
➍ 노룡(盧龍)은, 조선사(朝鮮史)에서 ‘험난하기로 유명한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고 하였다.
➎ 규주(嬀州) 규천현(嬀川縣)은, 규수(嬀水)가 가운데를 관통(貫通)해 흐른다고 하였다.
(2) 舊唐書 地理志 / 《媯州.隋涿郡之懷戎縣.武德七年,討平高開道,置北燕州,復北齊舊名.貞觀八年,改名媯州,取媯水為名.長安二年,移治舊清夷軍城.天寶元年,改名媯川郡.乾元元年,復為媯州.中略.媯川,天寶後析懷戎縣置,今所. : 규주(嬀州)는 수(隋) 탁군(涿郡)의 회융현(懷戎縣)이다. 무덕7년. 고개도를 토벌하고, 북연주(北燕州)에 두었다. 복구하였는데 북제(北齊)의 옛 이름이다. 정관(貞觀) 8년에, 규주(嬀州)로 고쳤는데, 규수(嬀水)의 이름을 취했다. 장안(長安)2년에는, 옛 청이군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천보원년 규천군(嬀川郡)으로 이름을 바꿨다. 건원원년에 다시 규주(嬀州)라고 했다. 중략(中略). 규천(嬀川)은 천보(天寶) 후에 회융현을 쪼개 두었는데, 지금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규주(嬀州) : 규수(嬀水)라는 하천(河川)의 이름을 취하여 그곳 지명(地名)으로 하였다는 뜻이다.
➤ 위의 글 (1)+(2)를 보면 : “규주(嬀州)는, 규수(嬀水)라는 하천의 이름을 취하여 지명으로 하였다.”는 것이고, 그곳 주변에 “철문관(鐵門關)” 이 있었다는 것이다.
(3) 燕行紀 제4권, 起燕京至鎭江城 / 《경술년(1790, 정조 14) 9월 10일(정해) / 灤河。在府城西五里餘。源出獨石口外。東北經舊開平界。流七百里。爲九流河。至喜峯口外。有柳河,寬河。鐵門關水俱注之. : 난하(灤河)는 부성의 서쪽 5리 남짓한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이 독석구(獨石口) 밖 동북쪽에서 나온다. 옛날의 개평(開平) 땅을 지나서 700 리를 흘러 구류하(九流河)가 되어 희봉구(喜峯口) 밖에 이른다. 유하(柳河), 관하(寬河), 철문관(鐵門關)의 물이 있어 모두 여기에 흘러든다.》고 하였다.
➤ 조선사(朝鮮史) 연행기(燕行記)에 따르면 : 철문관(鐵門關)은, 난하(灤河)와 관계(關係)가 있다는 뜻이다.
(4) 규주(嬀州) :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 규주(嬀州)는, “규수(嬀水)의 이름을 취하며 마을 이름을 규주(嬀州)”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곳에 ‘철문관(鐵門關)이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산서성(山西省)’ 접경(接境)쯤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철문관(鐵門關)”이란 곳은 없다.
➤➤➤ 〈철문관(鐵門關)과 더불어 유명(有名)한 것이 아무다리아(Amu, Darya)강이다.〉 이 하천(河川)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다’라고 한다면 : “그것은 인류(人類)가 멸망(滅亡)하고 난 뒤, 신천지(新天地)에서나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즉 ‘아무다리아(Amu, Darya)강’인 “규수(嬀水)”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다는 말이다.
“규주(嬀州)나 규천군(嬀川郡)”은, “규수(嬀水) 또는 규천(嬀川)”이라는 하천(河川)의 이름을 취(取)한 것이다.【구당서(舊唐書)지리지(地理志) / 改 名 媯 州 , 取 媯 水 為 名】, 이 하천(河川)은 “오호수(烏滸水 : 烏滸河)”를 말하는 것인데, 이 하천(河川)이 바로 중아[中亞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 있는 “아무강 또는 아무다리아강”이다.
➤➤➤ 烏滸水 : 「오호수(烏滸水)=오호하(烏滸河)=아무다리아강(Amu, Darya, 러시아어: Амударья, 페르시아어:آمودریا, Darya (바다를 의미함)」이다. 파미르(총령:蔥嶺) 고원(高原)에서 발원(發源)을 해, 힌두쿠시[Hindu Kush] 산맥(山脈)을 빠져서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국경(國境) 지대의 북서(北西)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아랄[Aral] 해(海)로 흘러서 들어갔지만, 현재는 사막(沙漠) 쪽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다리야"는 터키어로 "강"의 의미이므로 "아무 강"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규수(嬀水)”가 “오호수(烏滸水 : 烏滸河)”이며, “아무다리아강”』인지를 알 수 있는가? 당연한 질문(質問)이며, 또한 당당(堂堂)하게 고증(考證)할 수 있다.
(5) 讀史方輿紀要 / 安息國 : 《漢西域傳:安息治番兜城,臨媯水,去長安萬一千六百里,北與康居,東與烏弋山離,西與條支接 : 한(漢)서역 전(西域傳) : 안식(安息)은 “번두성(番兜城)”에서 다스렸는데, 규수(嬀水)에 임(臨)했으며, 장안(長安)은 11,600 리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강거(康居)와, 동쪽으로는 오익산리(烏弋山離)와 서쪽으로는 조지(條枝)와 접해있었다.》
讀史方輿紀要 / 吐火羅國 : 《吐 火 羅 國 都 媯 水 北, 為 王 庭. : 토화국(吐火國)의 서울은 규수(嬀水) 북에 있는데, 왕정(王庭)이다.》
讀史方輿紀要 / 嬀塞國 : 《媯塞國在吐火羅南塞.西戎別種也.臨媯水而居,因名 : 규새국(嬀塞國)은 토화라(吐火羅)의 남쪽 변방에 있는데, 서융(西戎)의 별종이다. 규수(嬀水)에 임해 살았다. 이로 인해 이름이 되었다.》
讀史方輿紀要 / 嬀水 : 《媯水在吐火羅北.源出蔥嶺,西南流,入於西海.其水深廣,長千餘里,遠近諸水匯入焉.亦名烏墅河. : 규수(嬀水)는 토화라(吐火羅)의 북쪽에 있다. 물의 근원은 총령(蔥嶺)이다. 서남(西南)쪽으로 흐른다. 그 물은 깊고, 넓고, 길이는 천여(千餘)리이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물이 돌고 돌아 들어온다. 또 이름이 오서하(烏墅河)이다.》
(6) 嬀水 : 通典, 西戎 安息國 : 《去長安萬一千六百里,在蔥嶺之西,北與康居,東與烏弋山離,西與條支接.最大諸國.地臨媯水[今謂烏滸河] : 안식국(安息國)은, 장안(長安)까지 1만1천6백리이 떨어져 있으며,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다. 북(北)쪽으로는 강거, 동(東)쪽에는 오익산리(烏弋山離), 서(西)쪽에는 조지(條支)와 접했다. 여러 나라중에서 가장 크다. 땅이 규수(嬀水)에 임했다.[지금의 오호하(烏滸河)이다.]》
大夏,媯水南.去漢萬二千里. : 대하(大夏)는, 규수(嬀水) 남(南)에 있다. 한(漢)까지는 1만2천리 떨어져 있다.
大月氏,漢時通焉.理藍氏城,居媯水北,其南則大夏,西接安息四十九日行,北則康居,去長安萬一千六百里. : 대월씨(大月氏)는, 한(漢)때 통하였다. 람씨성(藍氏城)에서 다스렸다. 규수(嬀水)의 북(北)쪽에서 살았다. 중략(中略). 장안(長安)까지 1만1천6백리 떨어져 있다.
挹怛,至隋時又謂挹怛國焉.挹怛國,都烏滸水南二百餘里.中略. : 읍달(挹怛)은, 수(隋)때에 이르러 읍달국(挹怛國)이다. 읍달국(挹怛國)의 서울은 오호수(烏滸水) 남(南)쪽 2백여리에 있다. 중략(中略) 【오호수(烏滸水)는 오호하(烏滸河)이며, 규수(嬀水)이며, 아무다리아(Amu Darya)강(江)이다.】
➤ 위에서 보듯이 “규수(嬀水)”는 ‘아무다리아강’의 한자(漢字) 음역(音譯)이다.
➤ 烏滸水: 『오호수(烏滸水)』는 아무다리아강(A m u, D a r y a, 러시아어: Амударья, 페르시아어:آمودریا, D a r y a (바다를 의미함)는 파미르(총령(蔥嶺) 고원에서 발원을 해, 힌두쿠시 산맥을 빠져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 지대의 북서(北西)쪽에서 흐르는 강이다. 이란(Iran)어로는 Wakhsu/Vaksa인데, 한자(漢字) 규수(嬀水)는 이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 더불어 아랄해(Aral Sea)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으로 시르강【시루다리야강】, 아무강【아무다리야강】사이에 트랜스옥시아나【ransoxiana, 河中, 즉(卽) 兩江間(두 강 사이)】의 땅으로, 소그드【Sogd, Sogdania】라고 불렸고, 소그드인【Sogd, Sogdania】들이 살던 곳이다.
또한 두 강 사이에 제라프샨강【소그드강】이 있는데, 이 강의 주변에 많은 오아시스(Oasis) 도시 즉(卽) “사마르칸트(Samarqand), 부카라(Bukhara), 타시켄트(Tasjkent)”등이 있는데, 이들 도시(都市)는 실크로드(SilkRoad)에 중요(重要)한 거점(據點)이었다.
제라프샨강[제랍샨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제라프샨 강【우즈베크어: Zeravshon 제라프숀, 타지크어: Зарафшон 자라프숀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길이는 877km이다. 제라프샨은 페르시아어로 "금이 퍼지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자라프샨'(페르시아어: زرافشان)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약 300km 정도를 흐른 다음에 판자켄트를 거쳐 우즈베키스탄으로 흘러들어간다. 우즈베키스탄 국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흐른 다음에 사마르칸트, 나보이, 부하라 인근을 거쳐 사막지대까지 흐른다. 제라프샨강은, ‘소그드’강이라고도 불린다.》라고 하였다.
➤ 이러한 곳에 옛 ‘범양국(范陽國)’이 있었고, 당(唐) 시대에 ‘범양절도(范陽節度)’가 설치되었으며,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소그드인【Sogd, Sogdania】들을 위한 반란(叛亂)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 「갈석성(渴石城)의 철문관(鐵門關)은, 번인(蕃人)들이 수비(守備)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은, 이들 ‘번족(蕃族)들의 언어(言語)에 능통(能通)하여 호시랑(互市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鐵門峽在渴石城之西.懸崖絕壁,高數十仞,徑路崎嶇,深二三里.蕃人守此.亦名鐵門關】
‘당(唐)’이란 나라가 실존(實存)했다면, 이곳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을 것이며, 사가(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 왕조(王朝)였다면, 당(唐) 왕조(王朝)는 신라(新羅)를 왜곡(歪曲)하여 만들어 놓은 모조품(模造品)에 불과(不過)할 뿐이다.
곧 대륙(大陸)의 ‘당(唐)’은, ‘신라(新羅)’를 말하는 것이며, 실제(實際) 역사(歷史) 무대(舞臺)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서남(西南) 땅에 당(唐)이 있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여러 결과(結果)로 보면 : ‘규수(嬀水)=규천(嬀川)’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무다리아강【Amu, Darya 江】임이 확실(確實)하다.
○ 결국(結局) 본래의 ‘철문관(鐵門關)’은, ‘유주(幽州)’ 땅에 있었으며, 그곳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규수(嬀水)’가 자리 잡고 있는 일대(一帶)로써 이곳이 바로 「유주(幽州)였다」는 말과 같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더불어 본래(本來)의 상곡(上谷) 역시(亦是) 위에서 설명한 규수(嬀水)【아무다리아강【Amu, Darya 江】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상곡(上谷)은, 이후 돈황(燉煌) 주변(周邊)으로 이동(移動)되었고, 또 다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방지대(北方地帶)로 마지막 이동(移動)된 것이다. 이러한 지명(地名) 이동(移動)을 감안(勘案)치 않는 역사(歷史)연구(硏究)는, 일백(一百)년을 쏟아 부어도 진척(進陟)이나 발전(發展)이 있을 수 없다.
---------------------------------------------------------------------------------------
2. 또 다른 곳에 있었다던 가짜 철문관(鐵門關)
(1) 新唐書43下.志第33下.地理7下.羈縻州.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 / 原文本文 [3-2]편에 《自 焉 耆 西 五 十 里 過 鐵 門 關》이 있다고 하였다. 즉(卽) “언기(焉耆) 서(西)쪽으로 50 리를 지나면 철문관(鐵門關)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2) 讀史方輿紀要 西域 /《鐵門關,唐志:在焉耆西五十里.又龜茲西出有拓厥關 : 철문관(鐵門關), 당지(唐志) ; 언기(焉耆) 서쪽 50 리에 있다. 또 구자(龜茲)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척궐관(拓闕關)’이 있다.》
위의 ‘➀+➁’의 철문관(鐵門關)은 똑같은 곳에 있었던 철문관(鐵門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記錄)들을 살펴보면 :
『진(秦)나라 때 설치(設置)한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진(秦)나라의 영토(領土)가 롱서(隴西)지방을 지나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지나, 현 신강성(新疆省) 중서부(中西部)까지였다.』는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은 어디에도 없는 꾸며 낸 이야기이다.
더구나 『현재의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건설되었고, 당(唐)나라 때는 이곳에 관리들을 상주시켰다.』는 설명(說明)은 현대(現代)의 대륙(大陸) 정권(政權)의 영토(領土) 야욕(野慾)에 의한 과장(誇張)되고,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역사해설(歷史解說)일 뿐이다.
➤ 여기서 한 가지 다른 방향(方向)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즉(卽) 진서(晉書) 재기(載記)에서 “진(秦)”나라는, 〈림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단절(斷絶)하여, 현토 (玄菟)를 싸고 돌아 황하(黃河)를 막았는데(款), 이는 이적(夷狄)의 난동으로부터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이다【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라고 하였으니,
당시의 ‘진(秦)’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서부(西部)와 총령(葱嶺)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 땅을 영역으로 하는 조그만 소국(小國)’으로 조선(朝鮮)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번국(蕃國)으로 제후국(諸侯國)에 불과(不過)했고, 그 동(東)쪽은, 조선(朝鮮)의 태왕(太王)이 직접(直接) 통치(統治)했던 땅으로, 동이(東夷)들의 무대(舞臺)였다.〉는 것이다.
➤ 이는 근대(近代)의 기록(記錄)인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말해주고 있는 사실(事實)이다. 즉(卽)
東 人 主 即 震 旦 : 동(東)쪽 사람들은 곧 진단(震旦)이며,
故 自 古 以 震 旦 為 中 國 : 자고이래 진단(震旦)은 중국(中國)이며,
夫 中 華 在 蔥 嶺 之 東 : 중화(中華)는 총령(葱嶺)의 동(東)쪽에 있으며,
西 洋 在 蔥 嶺 西 : 서양(西洋)은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다.
(3) 讀史方輿紀要 : 《鐵門關在東印度國.宋嘉定十五年,蒙古鐵木真侵西域,至忻都國鐵門關,大掠而還,是也. : 철문관(鐵門關)은 동인도국(東印度國)에 있다. 송(宋) 가정 15년【AD 1,222】, 몽고(蒙古)의 철목진(鐵木眞)이 서역(西域)을 침노하였는데, ‘흔도국(忻都國)’ 철문관(鐵門關)에 이르러, 크게 약탈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기록(記錄)에 따른다면 〈“오늘날의 파키스탄 동북(東北) 땅인 인도대륙(印度大陸)의 북부(北部)”가 “동인도(東印度) 땅이 될 수 있으려면, 당시(當時)의 인도(印度)는, 「현재(現在)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이란[Iran] 땅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인도(印度)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란[Iran] 땅”에 놓고 보면 : 오천축(五天竺)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가 자연스럽게 잡히게 된다.
위의 글 (3)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몽고(蒙古)의 철목진(鐵木眞)【칭기스칸=성길사한(成吉思汗)】이 진실(眞實)로 “동인도(東印度)”에 쳐들어가 약탈(掠奪)을 하고 귀환(歸還)했다면 : 오늘날의「방글라데시[Bangladesh] 또는 네팔[Nepal] 땅」을 약탈(掠奪)한 것이 되는데, 이러한 기록(記錄)이나 역사해설(歷史解說) 또는 정황(情況)이나 그 어떤 흔적(痕迹)조차 없다는 것은, 이러한 사건(事件)은, ‘그곳 땅에 없었다’는 뜻이다.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인도대륙(印度大陸)
이러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한마디로 ‘주먹구구식’(式)이다.
늘 변함없이 주장(主張)하는 말이지만, 문제(問題)는 역사통설(歷史通說)논자(論者)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重要) 핵심요소(核心要素)는, 자칭(自稱), 타칭(他稱)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인 ‘한반도(韓半島)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사탕발림 역사해설(歷史解說)에 세뇌(洗腦)되어 내가 정말 역사세뇌(歷史洗腦)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조차도 구별(區別), 구분(區分), 분별(分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국민(國民)들의 피땀어린 혈세(血稅)로 만들어지는 국가예산(國家豫算) ‘수억(數億)∼수십(數十)억∼수백(數百)억 원’을 투입(投入)하여 한다는 짓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거짓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확고(確固)하게 만드는 일에 쓰이고 있는 현실(現實)이 이를 증명(證明)한다.
○ 조선사(朝鮮史)는, 세계사(世界史)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사(朝鮮史)와 비견(比肩)될 만한 역사기록(歷史記錄)이 존재(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사(世界史)라고 해서 지금 우리들 책상(冊床)앞에 놓여 있는 것들은 모두 ‘급조(急造)된 이야기책’ 일 뿐이다. 이걸 간파(看破)하지 않으면 조선사(朝鮮史)를 찾을 수 없다. [11편/끝]
2022년 02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제12편]에서는,
"북정도호부 경내에 삼한(三韓)과 임(臨)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를 해설해보고자 합니다.
이로 보면(기록으로만 이를 바라보면)
당시의 삼한은,
오늘날의 "신강성 중서부로부터 대륙 중원 땅을 영토"로 했던 왕조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영주"님!
늘 관심을 갖고, 성원을 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로,
논거가 있는,
조선사를 찾아,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잘 읽었습니다.
문무님의 글을 정독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중임을 감사드리니다.
우선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중국이 과연 동이만 이동시켰을까요?
서융 북적 남만 지역을 당나라시대 확장을 하고 지명이동이 되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청말까지 積石山을 지금의 하주 약간 서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직선거리 240km 떨어진 밑에 표시하고 있습니다.(황하 첫번째 하곡 서쪽)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가면 토곡혼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고증한 문헌 역시 존재합니다.
잘 생각하시면 지명이동의 모순이 보이실 겁니다.
또한 임조라는 지명이 농서현 서북부에 있는데 원명이 狄道입니다. 즉 중국의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임조 역시 임조군이 원래 있던 지역(남으로 100km)에서 여기에 상주하다 지명이 남아서 후에 임조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시말해 조그마한 중국이 고구려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고 모든 지명을 이동시켰으며
마치 발해 신라가 수복한 것처럼 조작하여 하상주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영토라고 조작했다고 봅니다.
757년을 기점으로 군현의 개혁이 있었으며 원화군현지로 완결하고 이를 두우의 통전으로 세상에 인식시켰다고 봅니다.
그래도 시대에 따라 조정에 목숨이 아까워 아부하여 주석을 그들 입맛에 맞게 적은 경우도 있지만
송 명 청 시대 목숨을 걸고 보이지 않게 진실을 후세에 전달한 분들의 고뇌에 깊은 공경심을 느낍니다.
이 자료들이 하나씩 쌓여나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봅니다.
(명나라가 모두 조작했다고 생각했지만 송대의 확실한 자료가 있어 이는 어렵다고 보이며
청말에 모든 사서를 조작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다고 보인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碣石은 오늘도 진장성유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것이 연장성이라 생각하며
그 곳에 마치 용이 엎드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碣石山은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쪽에 있는 두 군데를 놓고 자료조사 중입니다.
@탐구자 하나 더 첨언하겠습니다.
상기 저의 주장처럼 원래 요동에 있던 지명을 현재의 보정시쪽으로 당나라가 이동하였다고 봅니다.
이 곳에 당연히 오늘의 주제였던 철문관이 있다고 봅니다.
명칭은 다소 다르지만 래원현 동쪽에 鐵嶺關이 있습니다.
이 곳 근처가 명나라가 현재의 북경쪽으로 지명이전 하기 전 규주 지역입니다.
또한 철령관 근처에 姜女關까지 지명을 만드는 치밀함까지 있습니다.
@탐구자 님글에 모순이 보여 말씀 드립니다.
역사조작의 본질의 핵심 파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1.명은 역사를 조작하였으나,?
2.송대의 기록이 명의 역사조작 반박에
근거제시 가능하다 라는 것?과,
3.청대의 역사기록은 조작 불가하다?
4.님이 따로 자료를 추적한다란 것인데,?
5.4처럼 123 모두의 오류가 있는 한,
님의 주장에 지나지 않겟지요.
6.서양의 역사도 조작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의 유럽인이 있었으며,
7.짱게 중국의 중국역사학전공 학원강사가 중국은 역사가 있긴 한가라고,유튜브같은 매체에서 말했다가,현재 근황이 궁금해 지구요.
8.님의 관점이 종교적(자칭도인 증산계)으로 치우쳐서 해석하고 있다면,
심히 역사왜곡의 짱게와 왜구와 별다르지 않구요.
9.김종윤 선생님 강의https://youtu.be/Fd61w-lQWIQ
손문에 의한 역사 조작,
중국 25사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10.핵심 9를 전혀 이해 못하면,
님이 어떠한 글을 올려도 퇴보된
"님과 다른 누군가에 목적에 의한" 대륙조선사카페를
우롱하는 것이 되겟지요.
11.현재에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역사도 찬양일색으로 왜곡되어 있는것
또한 현재 진행중인 한국의 역사왜곡이지요.
PLAY
@노다가세 1.한서지리지에 동북 幽州의 진산은 의무려산이요 내천은 河와 泲이고
현토군 고구려현에는 요산에서 요수가 발원하며
요동군에는 무려현이 있고 응소가 말하길 무려는 의무려라 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의무려산을 기준으로 서쪽은 요주 요산에서 요수가 발원하고
반대편은 요동군 의무려의 제수가 나오다는 말입니다.
제수는 태행산맥에서 발원하여 高邑과 柏鄕을 걸쳐 영진현 寧晉泊으로 흘려가는 강물입니다.
다시말해 산서성 요주 요산 반대편에 있는 강물이며
요산과 의무려산은 같은 태행산맥에 연이어 있는 산이라는 말입니다.
여기가 의무려산이고 오늘날 의무려산은 요령성 광령에 있습니다.
그럼 누가 그 멀리 옮겼을까요?
1번 답변입니다.(이건 정사에 의한 답변이며 저는 다른 장소를 검토중임을 밝힙니다.)
@탐구자 2.宋대 六經圖의 十五國風地理之圖로 답변을 하려다
위의 글이 의무려산으로 답변했기에 동일한 맥락이라
元대에 만들어진 十五國風地理之圖拓片으로 설명하겠습니다.
拓片 내용중에 東海今鎭東省이라 기록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게 진동대장군이라는 봉작을 준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拓片에 장성 위로 의무려산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장성의 동단이 산해관이거나 당시 인지하던 연남장성이라고 해도
진동성은 장성 안쪽이며 중국 동해안에 고려가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강태공의 고향이 東海上人이며 오늘날 하남성 輝현 사람입니다.
넓게는 동해는 태행산맥 우측의 넓은 지역이고 좁게는 청주와 창주지역입니다.
또한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에 河南 > 彰德府 > 林縣 > 常山護衛가 있습니다.
북악 항산을 지키는 군대가 왜 여기 하남성 안양시 임현 즉 임기현에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기록이 아닙니다. 중국의 기록이니 그들이 답변해야겠지요.
2번의 답변은 가능하다고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탐구자 3. 3번부터 마지막은 같은 내용의 중복이라 함께 쓰겠습니다.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라는 명제를 해결하려면 선결과제인
우리가 어떻게 조선말에 한반도로 들어왔다를 증명하여야 합니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하나의 가설일뿐 많은 이들이 인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우적도, 대명일통지 등 많은 문헌과 유물 그리고
조선 역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여지승람의 동람도 등 많은 기록을
청말에 모두 조작했다는 요지가 대륙조선사 주장입니다.
대륙조선사를 부정하는 기록이 헤아릴 수 없게 많기에 여기서 줄입니다.
먼저 선행조건인 조선말(청말) 어떻게 한반도에 왔으며
모든 조선인이 올 수 없다면 남은 그들은 왜 아무 기록도 안남겼으며
중국의 90%정도는 조선인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되었는지
이를 증명해야 저와 같은 많은 이들이 동참하겠지요?
저 역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탐구자"님!
관심과 성원, 감사합니다.
'동이'의 지명을 옮겼다는 것은,
그것과 함께 주변에 있었던 대부분의 것들이 함게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집니다.
종족과 부족, 이민족, 하천, 산의 이름, 특이지형의 이름등등 모두가 함께 말입니다.
갈석(渴石)과 갈석(碣石)은 같은 곳을 말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일까?
용만(龍灣)은, 대만(大灣)과 용퇴(龍堆)의 줄인 말인가? 등등 중요지명의 이동과 그 지리적 위치 및 특이지세는,
지명의 원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아지는데, 그 단초를 찾는 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조선사에서는 철문관은 철령 주변에도 있다고 하며,
안변도호부에도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명(明)은 조선의 제후였는가?
조선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였는가? 등등
의문점이 수없이 많습니다. 명(明)이라는 나라의 왕들을 보면,
조선왕조의 것들을 차용, 분리시켜 만들어 놓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우리들의 놀이터에서, 우리들만의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어제 댓글을 쓰다 글이 지워졌고 중요한 자료를 공개한 김에 제 사견을 얘기하겠습니다.
지금 위에 써진 댓글은 우리역사를 전환시킬 수 있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문무님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많은 분들의 글에는 허점이 너무 많아
반박시 답변이 곤란한 경우의 글들이 난무합니다.
허나 문무님의 글은 사서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모습이 인상에 남아
간혹 중요한 정보를 노출시켰습니다.
오늘은 제가 대륙조선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와 부탁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병인양요 때 수탈된 자료라고 생각되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자료 중에
17세기 조선이 요령성 요양에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이 요양에 있을 경우 임진왜란시 서쪽 몽진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또한 서쪽 어디인가 평양일 것이고 압록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무님이 쓰신 글의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탐구자 또한 연경의 이동이 있어야만 한다고 느껴집니다.
역사의 문외한이 아직 고구려 이전 옛지명 복원도 역량부족이라 부탁드립니다.
사견으로 현 하북성 정주시 서북으로 연경에 대한 지명이 다수 남아 있어 이를 고찰하시어
왜 우리영역이 축소되었는지 이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병자호란시 영역이 축소되었거나 일제에 의해 축소되었거나 등의 심도있는
연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탐구자"님!
옛 조선왕조의 땅이, "반도였는가" 또는 "중원대륙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주무대를 말하는 것이고,
반도 땅 역시 조선의 것이었고, 중원대륙 또한 조선의 것이었다는 이야깁니다.
여기서 "반도" 땅이 옛 조선의 땅(주무대)이었는가? 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고대의 수많은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르는 유물유적이나 그 흔적은 반도 땅에 곳곳에 존재해야 하고,
특히 도성과 궁궐과 그외 수많은 축조된 성곽들이 즐비해야 합니다. 또 더불어 "왕릉"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 외 왕족과 제후, 대신과 장군등의 무덤등과 연결되면 한반도 땅은 국토개발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봅니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90년대 까지의 국토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관심을 끈다거나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유물유적들은 단 하나의 것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학계는 일제패망이후,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그 교육과정을 100%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특히 역사교육은 아예 일제의 것을 그대로 갖다가 복사하여 의무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주입시켰습니다.
일제군국주의자 즉 제국주의자들은 지들 민족을 우월하다며 "천손민족"이라고 주입하고,
조선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2등민족"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옛 조선왕조를 그대로 재현하여
역사교육을 시켜겠습니까? 이 건 하나만 봐도 조선의 역사는 태반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정말로 조선왕조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무엇때문에, 왜, 옛 조선의 영토흔적이 사서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오늘날의 동구라파로부터 중앙아세아까지에 걸쳐 흔적과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명나라 때의 본기나 마문승, 또 해국도지 저자는 분명 중국인이라고 했지만 그 곳에 들어있는 기록내용은,
조선은 반도가 아닌 대륙을 터전으로 하는 옛 왕조였다는 것이며, 삼한이나 동이의 터전은 반도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구이 중 "람이(藍夷)"는 "람씨(藍氏)"입니다. 이러한 "람씨는 중잉아세아" 땅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가들은 이를 두고 소무9성중의 하나라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이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죠.
마한의 월지국을 사가들은 "目"자의 오류라고 하면서 천안 땅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목지국이라는 해괴망측한 역사해설을 합니다.
댓글이 길어집니다만,
중원대륙의 조선이 어떻게 망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겠지요.
이걸 해결하면, 옛 조선왕조의 역사이야기는 그대로 끝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걸 밝혀낸다면,
더 이상의 역사왜곡이 조작은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밝힐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옛 조선의 많은 분들이 반도에서 살고 있고, 그 후예들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주를 했던, 본시부터 살아왔던 간에, 선대는 옛 조선이었고,후예들이라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여기서 이주문제는, 중요한 사대부가들이 대거 이주를 했다는 것은, 그 명문가들이 반도에 있기 때문이며, 어떻게, 선발하여, 어떤 방법으로이주를 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연구대상입니다. 만약 중원대륙에서 이주를 하지 않았는데도, 반도 땅에 명문가 본가들이
존재한다면 이건 가짜, 조작된 명문가일 겁니다. 그렇치 않겠습니까?
해방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도 그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당사자들이 숨기고, 정권에서 숨겼기 때문이죠.
하물며, 옛 조선왕조와 관계되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만천하에 공개할까요?
결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서구열강'과 '일제'와 '서남아세아'의 여러나라들이 모두 깊숙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선사 연구는, 한반도로의 이주문제, 옛 조선왕조의 해체과정등이 중점적으로 연구대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교 하죠.
백인, 천인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듯이, 역사연구과정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반도조선이나 중원대륙 조선등 연구하는 분들마다 다소의 다툼은 필연입니다.
모두가 '조선을 위한다'는 뜻이나 목표는 같습니다.
의문점을 끝까지 캐보는 끈기와 용기가 필요하도 봅니다.
앞으로의 게재글을 보시면 왜 "옛 조선은 왜 중원대륙에 있어야만 하는가!" 에 대한 논거들이 나올 것입니다.
게재 글로 많은 의문들을 대신하겠습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