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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라는 것은 지금이야 말로 많이 생각해 볼 때이기도 한데요. (그림) 이런 큰 재단 위에 무언가 풍성하게 차려진 것! 이 예(禮)가 풍성하다는 뜻을 가지기도 하지만, 별도의 뜻으로 옆에 보일 시(示)가 붙으면서 이 풍성하다는 뜻을 가지고 특이화 된 거죠.
어떤 공동체의 축제장이 풍성한 것! 전체로 보면 공동체가 풍성한 것이죠. 그 풍성한 것이 기준이라는 거죠. 그 기준이 풍성해야 되는 이유는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울려 산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공동체 풍성을 전제로 해서 어울려야 된다는 겁니다.
누군가 공동체를 몰락시키면서 자기들끼리는 어울려 살 수도 있죠. 공동체의 풍성이 목표이고, 그리고 그 공동체 풍성의 또 다른 조건으로서 자기 것을 공동체에 내놓을 수 있는 것! 그게 의(義)라는 개념에서 나왔었죠.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서 내놓는 양(羊)이 클(大) 때 그걸 아름답다(美) 혹은 정의롭다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나오는 그 과정의 모습들을 1편에서 하나하나 다뤘던 거예요.
2편 위정편(爲政篇)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2편 위정(爲政) 편은 크게 보면 여덟 장씩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24장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앞에 있는 여덟 장은 높임과 낮춤, 그 가운데 특히 높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오늘 드리는 2편의 1장부터 8장까지는 효(孝)에 대한 이야기, 즉 높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주: 4-1 파트는 4장까지만)
여기에서도 몇 가지 개념들을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정치(政治)할 때의 정(政)자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게 뜻이 뭘까? 계속 이 용어가 나오니까요.
정(政)이라는 것은 크게 보면 어딘가 목표점을 지향해 가는 거예요. 정(正)을 구성하는 이 지(止)는 발걸음이고, (위에 있는) 이 일(一)은 목표점이에요. 어떤 목표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정(正)이에요. 이것이 바를 정(正)자예요. 그것을 사람이 장악하는 것(우측의 文)이죠. 어딘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장악하고 있는 게 정치인 거죠.
정(政)이라고 할 때 이 정(政)이라는 것은 우리가 요즘 생각하면 시스템 비슷한 거예요. 어떤 공동체의 시스템, 그 시스템의 핵심은 뭐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핵심은 누구에게 뭔 일을 하게끔 하는 것이죠.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의무가 되겠습니다만, 예전에는 그걸 부역(賦役)의 역(役)이라 그랬습니다. 役을 부여하고, 그 역을 한 만큼의 권리를 주는 거죠.
그러니까 의무와 권리의 상관관계를 축으로 해서 짜 놓은 공동체 운영 시스템인 거죠. 그걸 政이라고 그럽니다. 오늘날 폴리틱스(politics)하고 조금 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사회 운용의 체제나 체계! 이렇게 보면 되는 게 정(政)이에요. 그러니까 정은 자체로서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는 거죠.
이 이야기를 이제 꺼내는데요. 2편의 1장입니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자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위정(爲政). 위정은 사회 시스템을 운용함에 있어서, 영위하는 거죠. 이 사회 운영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으로 하느냐? 이(以)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를 가지고 오죠.
한자에서 대개 문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앞으로 문장에서 자주 나올 수 있으니까요. 여기 “이(以)A 위((爲) B”가 되면, “A를 B로 여기다”예요. A가 생략될 수도 있죠. 따라서 ‘이위(以爲)~’는 ‘~라고 여기다’ 가 되죠. A가 사이에 들어가면 ‘A를 B라고 여기다’ 이런 건데요. 여기는 반대로 위(爲)와 이(以)가 바뀌어 있죠. 위정이덕(爲政以德)입니다, 그럴 때 이 이(以)는 이제 표준이죠. 즉 덕에 따라서! 德이라는 말이 또 나오죠.
德이라는 건 제가 이미 말씀을 그렇게 드렸습니다. 길을 갈 때 있어서 길의 좌표, 그 좌표가 되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면, 즉 시간의 과정상에 있어서의 나의 좌표, 그 좌표가 늘 새로워져야 되니까 덕과 관련되는 새로움이라는 어떤 덕목이 나오는데요. 그러니까 덕목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좌표의 모습인 거죠.
그래서 주어진 공동체의 좌표에 따라서 사회 운영 시스템을, 사회적인 시스템을 운영한다면, 비여(譬如)는 ‘비유컨대 뭐와 같다’입니다. 북신(北辰)의 신(辰)은 별 진(辰)자인데, 별 신(辰)으로도 읽고요. 생신(生辰)으로도 읽고 또는 진(辰)으로도 발음하기도 해서 ‘신’과 ‘진’이 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진’으로 읽어야 됩니다. 별자리일 때는 ‘진’이라고 읽어야 되니까, ‘북진(北辰)’이라고 읽어야 맞는데, 통칭적으로 지금까지 신(辰)으로 읽어왔죠.
그리고 ‘신(辰)’으로 읽으면 다른 뜻이 돼요. ‘신’으로 읽으면 ‘농(農)’ 자가 돼요. 누에 농(農)자가 돼요. (그림)이 별 진(辰)자의 모습은 누에 발을 흉내 낸 거예요. 근데 이 누에 발이 이렇게 나와 있고, 벌레가 이렇게 이렇게 다니잖아요. 여기 이렇게 머리도 있잖아요. 이 모습을 그려낸 게 별 신(辰)자예요. 원래는 이게 누에 신(辰)자예요. 발음을 별 ‘진’으로 바꾸면서 하늘을 쳐다보니까, 별들과 별들 사이를 이어보니까 다 누에의 발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늘에 있는 별들도 이 글자로 표현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발음을 바꿔서 ‘진’이라고 불러요.
‘신’이라고 읽으면 이건 신농씨의 신(神)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농(農)사 지을 때 여기에 이 진(辰)자 나오죠. 농사라는 것의 밑에 별 진(辰)을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농(農)이라는 건 어느 사람의 이름이죠. 곡(曲)이라는 땅에서 처음으로 누에 농사를 지은 사람이 신농(神農)인 거죠.
신농이라는 사람은 농사의 신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과 관련된 어떤 개창자의 의미로 설화화 돼 있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옷을 해 입을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곡(曲)은 곡땅, 중국이라고 치면 산동성 지역인 현재 곡부(曲阜) 같은 곳인데요. 그 곡땅을 우리는 ‘앗땅’이라고도 읽어요. 쉽게 말하면 우리 설화에 나오는 ‘아사달’ 땅이에요.
앗땅에서 처음으로 누에 농사를 지은 사람이 신농의 농(農)씨이고, 이 발음이 농사 농(農)자인데 용(龍)과 발음은 똑같아요. 문구는 똑같고,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죠. 아무튼 별 진(辰)자는 별로 읽을 때는 ‘진’, 누에로 읽을 때는 ‘신’! 이렇게 되는데 그냥 오랫동안 읽어왔으니까 ‘북신’이라고 그냥 그대로 읽을 게요.
(다시 본문입니다) 비유컨대 뭐와 같다! 북신(北辰)은 북쪽에 있는 별이고, 통상 북극성을 이야기하죠.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는데, ‘거기소(居其所)’ 그 자리에 있는데 중성공지(衆星共之)입니다. 여러 뭇 별들이 북극성을 공(共)하고 있다!
이 공은 그냥 이렇게 (그림처럼) 공이지만요. 손을 같이 모았으니까요. 이게 나중에 이렇게 공(共)이 되거든요. 여기에다 그냥 손 수(扌)자를 또 써주는 것이 여기 공(拱)이고요. 이것 공(共)만 있는 문헌도 있고, 이렇게 손 手가 있는 공(拱)으로 쓴 문헌도 있어요. 같은 글자입니다. 감싸 안는 거예요. 손과 손을 모아서 감싸 안는 것까지 같이 표현하는 게 공(共)인데요.
그래서 옛날, 중앙에 있는 핵심적인 남문(南門)이나 혹은 북문(北門)을 나타내기도 했죠. 가령, 운남 외산(巍山)에 가면 외산고성에 있는 북문 이름이 공진루(拱辰樓)에요. 그러니까 북극성을 감싸고 있는 누각이라는 뜻이에요. 그때는 또 공신루라 안 하고 ‘공진루’라고 읽어요. 아무튼 ‘감싸안다’는 의미예요.
북문(위)과 남문(아래)
그러니까 해석해 보면 이렇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동체 시스템을 운영함에 있어서, 시대적 좌표에 따라서 한다면, (이는) 비유컨대 마치 북극성은 그 자리에 있는데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감싸고 있는 거와 같다.”
베스트와 가장의 차이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우리말 하나가 떠올랐어요. 우리 말 가운데 ‘가장’이라는 말 아시나요? 얼마 전에 국립국어원 한글 학자가 유튜브에 나와서, ‘가장’을 영어 베스트(best)하고 똑같이 푸는 거예요. 하지만 전혀 달라요. 베스트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라는 말로 쓰긴 쓰지만요. 그러면서 그 분은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것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틀렸다는 거예요. 그분은 ‘가장’을 하나라고 말하는 거예요. 베스트하고 똑같이 보는 거예요. 하지만 베스트와 ‘가장’은 언어적으로 접근하는 그림이 달라요.
이 best는 선분이에요. 베스트라는 말이 라틴어 베타라라는 말에서 오는 건데, 어떤 물건의 품질의 우수함을 뜻하는 거예요. 우수하면 우수한 정도가 있겠죠. 마지막 꼭대기를 베스트라고 하죠. 선분을 눕혀 놓거나 선분을 세워도 마찬가지죠. 제일 꼭대기를 베스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베스트는 선분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가장’은 면적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가장자리’라는 표현을 쓰죠. 그 가장자리의 ‘가장’이에요. 가장자리가 뭐죠? 다르게 번역하면 끝자리이죠. 중심이 어디에 있든 간에 가장 끝에 있는 이 지역이 ‘가장자리’죠. 자리로 표현하니까 가장자리지만, (그림) 이게 가장이에요. 물가 할 때 ‘가’, 끝없어 할 때 ‘가’ 등, 그 끝이라는 의미예요. 끝자리이니까 끝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끝은 사방의 면적을 내서 놓으면 베스트가 4개예요. 팔방으로 나누면 베스트에 해당하는 가장은 여덟 개예요. 360개로 나누면 가장은 360개예요. 그래서 가장 좋은 풍경들 가운데 하나라 그래도 돼요. 선분에서는 ‘가’가 하나일 수밖에 없어요. 면적에서는 수많은 ‘가’가 있을 수 있어요. 이 속에 있는 모든 게 다 자기 자리를 갖고 있죠.
그렇게 자기 자리를 갖춘 그것을 전부 우리는 무어라 그러죠? ‘무’라 그러죠, 뭇 것 즉 ‘뭇’이라고 그러죠. 한 글자로 ‘뭇’이라고 하죠. 가의 자리를 ‘갓’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쭉 이야기 마당에 사람들이 멍석을 펴고 앉아 있어요. 멍석이 참 넓어요. 그냥 100여 명이 앉아 있어요. 그러면 갓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일까요? 여러 명일 수 있잖아요. 그런 개념이에요.
갓이라는 것이 면적으로 볼 때냐, 선으로 볼 때냐 하는 건데요. 품질을 중심으로 개념이 나왔던 라틴어에서의 베스트는 직선 선분 개념의 끝이에요. 그런데 그 선분 개념이 면적화 됐을 때는 가의 자리는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거죠.
물가를 따라 사람이 쭉 둘러앉았어요. 누가 제일 끝에 앉았다고 말하기 힘들죠. 내가 있는 입장에서 보면 전부 다 끝자리이죠. 그래서 ‘갓’이라는 게 달라요. 그래서 우리 말에 현재 이런 말에 시옷(ㅅ)들이 다 사라지죠.
우리 말에서 사라진 받침들
우리 말에 재미있는 게 많아요. 예를 들어 이런 게 또 있어요. 돌 아시죠? 돌 모르시는 분이 없잖아요. 돌도 원래는 아래 받침이 ‘ㄺ’이에요. 여기서 기역(ㄱ)이 사라졌죠. 아니 사라지지 않았어요. 표준어에서만 ‘돌’이에요. 돌을 독이라고도 읽어요. 전라도에서 아이들이 막 돌 던지고 노는 걸 ‘독 싸움’이라고 그래요. 돌 싸움이라고 하지 않아요. 사실은 ‘돍’ 싸움이에요. 맞으면 머리 깨질 수도 있어요. 험하게 놀았죠. 거기에 기역(ㄱ)이 있는 거예요.
이 기역(ㄱ)이 독도에도 남아 있어요. 독도가 돌섬이잖아요. 돍섬이죠. 그 중에 기역(ㄱ)이 채택된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 바닷가의 남쪽 및 그 약간 위쪽, 충남 이남, 경북 이남, 바닷가 지역에서는 여전히 기역(ㄱ)이 더 강했던 거예요. 전라도도 남원 쪽으로 가게 되면 독이 아니에요. 그냥 돌 싸움이에요. 근데 저기 바닷가 영광 무안 이런 데 가면 독 싸움이에요.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오’와 ‘아’는 같아요. 우리가 ‘아기를 낳다’라고 하지만 ‘아기를 놓다’라고도 하죠. 표준어로서 ‘아기를 놓다’고 하면 촌스러워 초등학교도 안 다녔나 봐 하지만, 사실은 다 써요. 자기도 모르게 쓰기도 해요. ‘아’와 ‘오’는 거의 왔다 갔다 해요. 어느 지역에 따라서는, 그런 경우 많아요.
‘돌’이 ‘다’가 될 수도 있죠. 아의 기역(ㄱ)이 붙잖아요. 그럼 일본도 독섬을 다께라고 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다께(たけ )섬이죠. 섬은 시마(しま, 島)가 되죠. 그러니까 다께시마이죠. 그런데 대나무를 썼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 땅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자기들 땅이라고 썼으면 다께시마라고 읽고, 석도(石島)라고 읽어야죠. 아무튼 받침 fr과 관련해서 볼 게 참 많아요. 우리나라에 받침이 리을(ㄹ)로 돼 있는데, 이 ‘ㄹ’이 ‘ㄺ’인 게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튼 엉뚱한 얘기 좀 했습니다. 공동체는 면적이라는 거고요.
두 번째 장입니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자왈, 즉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삼백(詩三百)! 시 300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누가 물었겠죠. 그 당시에 떠돌아다니던 시(詩)를 공자계서 다 모았어요. 다 모아가지고 편집을 했어요. 그걸 처음 편집한 사람이 공자죠. 공자가 하고 나니까 누가 물었겠죠?
“선생님! 어떤 기준에 의해서 다 끌어 모으셨는지요?” 혹은 “선생님이 만드신 편집된 300편의 이 시경의 일관된 종지는 뭐죠?”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뭐죠?” 그랬더니 얘기하는 겁니다.
시삼백(詩三百)을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여기서 ‘폐(蔽)’라고 하는 것은 ‘덮을 폐’입니다. 말 그대로 (그림) 이렇게 나무 잎으로, 기둥에 옷감도 걸려 있고, 수건 같은 것 걸려 있고요. 그 다음에 이 나무 같은 것을 누군가 이렇게 잡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이게 폐예요. 덮을 폐이죠. 이 나뭇잎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사람 살아가는 내용들은 손에 잡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손에 잡고 있는 것들을 풀로 덮어주는 거예요. 덮개 혹은 한마디로 커버라고 치면 돼요.
시삼백(詩三百)을 한마디로써 커버하자면, 일언이(一言以) 폐지(蔽之)한다면, 그것은 왈 ”사무사(曰思無邪)” 즉 “생각에 사(邪)가 없다.”
시(詩)
그러면 詩가 뭘까? 시 하니까 우리 머릿속에는 벌써 포임(poem)이 들어오니까요. (그림) 시라는 것의 앞에 있는 이 언(言)은 나중에 붙었겠죠. 이것(寺)은 처음에 있는 글자이죠. 이것은 무얼까? 위에 있는 것은 흙 토(土)자처럼 보이거나, 선비 사(士)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까 말했던 ‘발’이에요. 밑에 있는 이것은 손이에요. 즉 발과 손이에요.
손과 발은 따로 안 가죠. 손과 발은 같이 가죠. 그러니까 손 움직이면 발 움직이고, 발 움직이면 손이 움직이죠. 그래서 “손과 발이 움직이는 하나의 움직임의 단위”를 말해요. 다시 말해서 운(韻)을 말해요.
詩라는 것은 그 안에 함축돼 있는 의미소가 아니라 형식소예요. 그러니까 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은 시가 의미를 함축시켜 놓은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거나 상상해낼 수 있는 어떤 압축된 언어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원래 시의 뜻은 이것을 손과 발의 리듬,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그 운율 단위를 말해요. 그러니까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에요.
그러니까 ‘시삼백’ 안에 들어있는 것이 공자 시대 때는 그 안에 있는 가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그것을 읊을 수 있는 것! 그래서 공자가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어느 나라의 시는 참 아름답다!” “어느 나라의 시는 정말 착하다!” 했는데요.
내용을 읽어보면 ‘왜 착하고, 왜 아름다운지’는 그 가사를 갖고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듣고 나니까 3일 내내 또는 몇 개월 내내 밥맛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인데 그게 가사를 두고 한 것이 아니에요.
음(淫)과 너무
중국은 그 안에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있죠. 어떤 음악은 음탕하더라! 그런데 음탕(淫蕩)이 뭐죠?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음하다’는 것에 대한 우리 말이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이걸 우리 말로 번역을 제가 정확하게 해 드릴 게요.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라는 건 넘어서다는 의미잖아요. 좋아하는 걸 넘어선 거예요.
공자께서 낙이불음(樂而不淫)이라고 그러잖아요. 즐거운데 음하지 않는다! 즐거운데 그 즐거움을 넘어서면 음한 것이에요. 슬프잖아요. 슬픈데 그 슬픔의 범위를 벗어나면 상(傷)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이불상(哀而不傷) 낙이불음(樂而不淫) 이런 얘기를 하죠.
‘너무’라는 말은 어떤 표준이 있는 거예요. 그 표준을 넘어서는 거죠. 너무 작아! 그러면 뭔가 쓸 양이 있는데, 가령 6개를 갖고 왔는데 너무 작아 할 수도 있어요. 6개를 갖고 왔는데 5개만 필요하면 너무 많아가 될 수 있어요. ‘너무’라는 것은 내가 지금 설정하고 있는 이 기준을 넘어갔다는 얘기죠. 그 기준에 못 미쳤거나요. 그러니까 기준에 미달했을 때는 너무 적다가 되죠. 너무 많다, 너무 크다, 너무 적다 등등 할 수 있는데 현재는 막 써요.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해 버렸어요. 사전을 보니까 ‘너무’라는 것은 매우라는 의미와 같은 것으로 인정해버렸어요. ‘매우 좋다’고 말이죠. 그럼 현재는 이걸 번역하면 ‘너무 좋다’가 ‘매우 좋다’가 되니까 잘못 번역된 거죠. 원래는 ‘너무 좋다’를 번역하면 ‘음탕하다’는 뜻이죠.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범위, 좋아해야 되는 정도가 있는데 그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고 지나쳐버린 거죠.
음(淫)에서 비롯한 세계화
그런데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음(淫)이예요. 욕망이 통제가 안 돼요. 우리의 세계화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음에서 시작된 거죠. 지금 먹을거리에서도 문제가 되는데요. 설탕이 돈이 되니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를 가지고 왔는데 이게 기가 막혔죠, 유럽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우리도 한번 중심 국가처럼 돈 좀 벌어보자 해서 시작한 게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사탕수수 산업이잖아요. 그래서 농사 잘되는 북회귀선 적도 있는 일대, 카리브해 쪽에 가서 잔뜩 만들어 놓는 거죠.
농사지을 사람 없으니까 아프리카에서 잡아 다가 시키죠. 월급도 안 줘도 되고 패도 되고 인간 대접 안 해도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 시켜서 돈 버는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영국이 뒤에 뛰어들죠. 늦었죠. 그러자 영국이 다시 시작한 게 목화산업이죠. 면화 산업이죠. 지금의 코튼(목화)이죠.
코튼을 맨날 사오니까 영국 사람들에게 이제 모직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돈 있는 사람들은 전부 코튼 입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코튼이 울보다 더 비쌌어요. 영국 울이 최고의 울도 아니고요. 영국이 원래 울의 판매가 자기들 나라 무역의 2분의 1이던 나라예요. 그런데 그 나라가 전부 코튼을 입는 거예요. 돈의 씨가 마르는 거예요. 그래서 코튼을 공짜로 갖고 와야 되겠네! 공짜로 갖고 오려면 어떻게 해요? 그냥 코튼을 뺏아오면 되죠. 약탈이죠. 또 매번 뺏아야 되잖아요. 매번 싸워야 되잖아요. 아예 식민지를 만든 거죠.
식민지를 만들면 뭐가 생기죠? 세금을 거두죠. 그 세금 갖고 사오는 거죠. 약탈을 안정적으로 구조화시켜 놓으니까 그런 점에서 점점 식민지가 나오고, 저기 다른 인종들은 차별해야만 되는 거죠. 자기들의 음(淫)을 위해서 차별해가지고 인간 아닌 존재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 시키고, 밤에는 공장에서 일 시키고, 이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세계화라는 걸 맞이한 거예요.
오늘날의 세계화는 우리 인간의 지나친 즐김 즉 음(淫)이 불러온 결과예요. 따라서 이 세계화 속에서 도리는 없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사람들은 노예가 안 될 수 없잖아요, 누구는 노예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들끼리 부딪혔을 때 노예가 되고 안 되고는 결국 종족의 문제죠. 그 시대는 민족주의가 제일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민족이냐에 따라서 노예 민족이 되고, 어느 민족에 따라서 노예 부리는 민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음(淫)을 깨기 위해서, 민족과 민족의 문제 즉 민족 평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과제로 등장하죠. 어쨌든 알고 보면 우리 현대의 세계화라는 과정이 이렇게 처참한 거예요. 그 이후로 달라진 것 같죠? 따지고 보면 지금의 세계화도 하나 다른 게 없어요. 여전히 공자의 이 이야기는 지속되어야 할 상황이에요.
詩는 운율
아무튼 시(詩)라는 건 그런 거예요. 시(詩)라는 건 운율이에요. 운율 자체가 지나치지 않고 잘 맞아져 있다는 거예요. 사람의 심성이나 욕망을 자극하거나 하는 거는 빼 버리고 공자가 모은 거예요. 가사가 좋아서 모은 게 아니고요. 모은 걸 보면 아(雅)라는 것도 있고, 송(訟)이라는 것도 있고, 풍(風)이라는 것도 있고 하는데요. 다 일종의 리듬이에요. 그래서 시경은 리듬집이죠. 다만 리듬집을 달리 모을 수 없으니까 가사를 갖고 모은 거죠.
현재 그가 모았던 리듬은 <시경>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오디오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악보가 있어요? 정관보(참고: 조선 시대 때 세종 대왕이 소리의 길이와 높이를 정확히 표시하기 위하여 만든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숫자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까 운율은 안 남아 있고 가사만 남아 있죠. 시경은 원래 가사를 읽는 법이 쭉 내려와요.
시경은 논어처럼 그렇게 읽으면 안 돼요. 전부 운율에 맞춰서 읽어줘야 돼요. 그런데 그 운율에 맞춰서 읽어 주는 건 중국도 한국도 이미 다 사라졌어요. 예를 들어서 누가 <반야심경>을 읽어요. 절에서의 리듬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유행가처럼 부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운율이 안 맞죠. 이상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시경>도 현재 성균관에서 읽는 것처럼 읽으면 시경이 아닌 거죠. 그것이 전해지고 끊어지고 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대한제국 교과서가 탄생한 1897년에 이루어지죠. 그 교과서를 읽는 방식에 의해서 시경 읽는 방식이 해체가 돼요. 그 얘기 좀 복잡한 얘기인데요. 아무튼 그래서 시는 그렇게 안 읽힌다는 거고요. 원래 읽는 방식이 따로 있어요. 왜냐하면 그 운율을 최대한 지키려고 해왔던 노력들이죠. 아무튼 그 시삼백(詩三百)을 뭐라고 하느냐? ‘무사(無邪)’라 그랬어요.
사(邪)
이 ‘사(邪)’자에 대해 문헌들을 최대한 뒤져보세요. 중국어 잘하시는 분들이 찾아봐도 이 글자에 대한 풀이가 없어요. 그러면서 이건 원래 지명이었다고 그래요. 드라마 랑야방(琅琊榜) 아시나요? 랑야(琅琊)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그 야(琊)라는 지명은 진나라 때 설치돼요. (논어에 등장하는) 이 글은 언제 때예요? 춘추시대 때예요. 그런 풀이가 없는 거예요.
이것 아(牙)는 이빨이죠. 아니 이빨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 邪(사) 글자의 원래 글자는 이렇게 (그림처럼) 되는 데, 그 가운데 이 부분이에요. 이게 뭐냐? 집을 허물고 있는 거예요. 이것 아(牙)만 보면 기울어 있는 셈이에요. 이빨 나온 것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기울어 있는 모습으로 보시면 돼요.
그리고 이 부(阝)는 뭐냐? 이건 (그림처럼) 어떤 자기들의 삶터가 있어요. 삶터 앞에 사람이 있는 거예요. 삶터와 사람을 결합한 거예요. 이게 나중에 이 읍(邑)이 돼요. 이 부(阝)는 읍(邑)하고 같은 글자이죠. 그래서 오른쪽에 있는 이 부(阝)를 놓고 보면 마치 귀처럼 생겼잖아요. 오른쪽에 있는 귀 부(阝)를 놓고 ‘읍(邑) 부’라고 읽는 이유가 바로 이 글자(阝)는 자기들이 사는 성터, 삶터 그리고 사람 그러므로 사람과 그 성터를 뜻하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이 사(邪)에 대한 뜻풀이가 없는데, 이렇게 뜻풀이가 안 되는 몇 글자 가운데 하나예요. 그러면 이 邪는 뭐냐? 도시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사(邪)’라고 그래요. 邪라는 것은 허물어뜨리는 걸 말해요. 사라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세워가고 넓혀가고 운용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걸 허물어뜨리는 걸 말해요.
우리 말로 이걸 번역하면 뭐죠?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뿐’이죠. 옛날식으로 쓸게요. ‘나뿐인’ 거죠. 셀피쉬(selfish)죠. 셀피쉬(selfish) 하면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사(邪)’를 우리 말로 번역하라면 ‘나쁘다’고 번역하면 돼요. ‘나쁘다’는 건 배드(bad)가 아니에요. 배드는 그냥 뭔가 도덕적이라든가 하는 어떤 기준에 의해 안 맞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말로 나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셀피쉬(selfish)에요. 나만 챙기는 것! 그게 결국은 공동체를 허무는 거죠.
나만 챙기는데 공동체가 유지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邪라고 하는 건 삿되다, 정당하지 못하다, 부당하다, 부정하다 이런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의 의미는 이기적이어서 공동체를 허무는 것과 연관돼 있어요.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혼자서 짜먹으려고, 뜯어먹으려고, 공동체를 약탈하려고 그러는 거죠.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번 더 공자가 얘기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까 공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편성한 시경 300편을 한마디로 이렇게 부제를 달자면,
“허물어뜨림이 없는 것, 나만이라는 이기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함께하는 것이다! 내가 편성한 300편의 시라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더불음이다! 공존이다! 그게 잣대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래서 사(邪)자와 기울어질 사(斜)자는 뜻이 같다라고 하기도 해요. 기울어지는 거니까요. 이 얘기를 바로 이어서 합니다.
3장입니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지이정(道之以政) 제지이형(齊之以刑)! 도(道)와 제(齊)라는 개념이 나오죠.
길을 내다
여기 ‘도(道)’자는 ‘길을 내다’의 의미도 되지만, ‘이끌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어요. ‘이끌다’도 되고 ‘길을 내다’도 되고 하는데, 사실 같은 개념이죠. 길 내는 게 이끄는 거니까요. ‘이끌다’는 번역을 제가 왜 피하려고 하는가 하면, 앞서서 길 내고 가면 사람이 저절로 따라오는 게 ‘길 내다’이기 때문이에요. 원래 그게 ‘이끌다’예요.
그런데 지금 ‘이끌다’라고 그러면 강제로 데리고 가는, 인위적인 선(線)집합의 모습이 느껴진다는 거죠. 집합체를 끌고 간다는 의미가 느껴진다는 거예요. ‘이끌다’가 끌고 간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거예요. ‘끌고 간다’는 의미가 없는 ‘이끌다’는 ‘이끌다’라고 해도 돼요. 끌고 가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이끌고는, 하나하나 막 이어가지고 끌고 가는 거예요. 2는 3이랑 손잡고, 3은 4랑 손 잡혀가지고 이어서 끌고 가는 거예요. 잇다! 이끌다! 연결되죠.
앞서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보셨죠? (그림) 이 초(艸)를 우리 말로 읽으면 뭐가 되죠? 풀이잖아요. 풀이 원래 우리 말에서 풀이 아니었죠. 불이었죠. 검불이었죠. 검어진 풀이 ‘건불’ 아니에요? 새까매진 풀이 검불이죠. 어디 읽다 보니까 강화되어 ‘풀’이라고 읽기는 하죠.
이 풀을 이어 놓은 게 뭐죠? 이불이죠. 이불이라는 게 처음부터 덮고 잤겠어요? 그래도 천 없으면 안 덮고 자나요? 우리 배가 하얗게 힘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풀을 이어서 덮고 잤겠죠. 그게 잇풀 즉 이불이죠. 지금은 풀 이어서 덮고 자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이불이라 그래요. 한 번 쓴 건 잘 안 바뀌어요. 이불이 풀을 이었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 수 있겠지만 그게 이불의 우리 말이에요.
아무튼 ‘이끌다’는 하나하나 끌고 간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내가 먼저 길 내면 줄줄 따라오고 함께 가는 그런 의미의 도(道)지만, 곡해하지 않는다면 ‘이끌다’라고 하죠.
정(政)과 형(刑)
정(政)으로서 시스템으로서 이끈다는 얘기잖아요. 아까 정(政)이 나왔잖아요. 그 사회 운용의 시스템에 따라서 이끌고 가면, 길을 내고 가면, 제지이형(齊之以刑)에서 제(齊)라고 하는 것은 유니포머티(uniformity)예요. 유니폼(uniform)이라고 하면 제복이라고 그러죠. 그냥 동일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가지런하게 만든다’라는 의미하고 같을 수 있는데 좀 달라요.
가지런한 게 뭘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죠. 울퉁불퉁 하게 있을 수 있죠. 이것을 가지런하게 하려면 아래에 맞춰 잘라도 되죠. 위를 맞춰 키워도 되죠. 공자는 결국 그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죠.
그 뒤에 형(刑)이라는 게 벌이죠. 刑이라는 게 어쨌든 벌을 부과하는 거니까, 결국은 압박이고 통제죠. 벌이라는 게 통제 수단이죠. 우리는 벌을 준다고 할 때 벌이 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엄밀하게 보면 벌이라는 것 자체가 통제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인데, 우리는 그 수단의 현상적인 모습을 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죠.
刑 자체는 통제의 의미가 더 우선이에요. 통제에 의해서 가지런하게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에서 누구는 열 개를 갖고 있고, 누구는 두 개를 갖고 있고, 누구는 다섯 개를 갖고 있으면, 봐 가지고 열 개 갖은 것 좀 뺏아가지고 두 개 갖은 자에게 주고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통제를 하면 시스템이 강화되죠. 시스템이 결국은 공동체를 약탈하게 되죠. 시스템이 점점 거대해지는 이유는 시스템이 거대 해질수록 시스템 운용자에게 시스템을 통해 공동체를 뜯어먹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그걸 노자(老子)는 싫어했던 거예요. 시스템이 공동체를 뜯어먹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뜯어먹을 것이 없는 정도의 공동체, 아니면 공동체가 크더라도 뜯어먹을 만한 것이 없는 시스템! 노자가 말하는 소국(小國)이라는 것은 사람 수는 적고 정말 그 나라가 적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나라를 운영하는 통제 시스템이 적은 것일 수도 있어요.
통제 시스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들에 의해서 공동체 약탈이 커져요.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내야 되는 돈이 많아져요. 열을 벌면 나중에 다섯은 내야 돼요. 이렇게 하는 게 제지이형(齊之以刑)이라는 거죠.
사회 시스템에 따라서 그 사회가 길을 찾아가고 그리고 통제라는 방식에 의해서 주민들의 소리를 좀 잠재워 가지런하게 만들 때, 그렇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든 피하려고만 하고 귀가 안 빨개진다면! 치(恥)라는 것은 귀가 빨개지는 거예요. 실제로 귀가 빨개질 때 심장이 두근두근하죠.
그런데 무치(無恥)니까 귀가 안 빨개진다는 거예요. 사람이 ‘나는 안 뜯겨야지’ 어디 숨겨놓고 소위 짱 박아놓고 어떻게 해야지, 이러는데요.
덕(德)과 예(禮)
그런데 (공자는) 반대로 얘기해요. 비슷한 얘기인데 다르게 얘기해요. 길을 내는데 뭘 하느냐? 그 시대에 그 공동체의 좌표를 들어서 길을 낸다는 거죠.
우리 공동체는 이리 이리 가야 됩니다!
우리 공동체는 이러이러 해야 됩니다!
(물론 그것도 시스템을 통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 가야 됩니다!
현재 이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향은 뭐냐? 공동체의 공존과 구성원들의 공존과 그리고 풍성함이죠!
그 방향으로 가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가지런하게 시키느냐? 공동체의 풍성함을 추구해서 거기에 의해서 보태 줘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가지런하게요. 그런데 이렇게 무치(無恥)가 나오잖아요. 통제로서 가지런하게 했을 때 하고 반대로 하면 사람들은 내 이익만 쫓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보태 주기로 하잖아요. 결국은 이(利)를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익(益)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보태 줘서 가지런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런 얘기들은 철학자들은 많이 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운영되는 사회 시스템이 있었던 적이 있는가? 저는 그런 시스템이 있으면 울 것 같아요. 실제로 과거에 9세기경, 8세기경에 대리에 있었던 남조국의 중기 모습과 대리국의 초기 모습을 보고 저는 울었어요.
(사계마을)
그 설명을 했을 때 삼성경제연구소 소장하던 분이 같이 가셨어요. 그 얘기를 듣고는 돌아서서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이렇게는 살아야지!” 하셨어요. 그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해요. 사람이 그렇는 한번 살려고 애를 써봐야죠. 애써봤다는 소리라도 한번 하고 가야죠.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도 보면 시스템 하나 개선하잖아요. 즉시 시스템은 늘어나요. 단순화되는 것을 개선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 뜯어먹는 게 또 생겨요. 누군가 뜯어먹는 게 또 새로 생겨나요. 뜯어먹는 양이 넓어질 수 있어요. 그러므로 시스템을 장악한 사람에 의해서 공동체를 뜯어먹는, 공동체의 것을 공적이라는 이름 아래 사적으로 약취하는 이걸 막아야 돼요.
공동체라는 걸 갖고 있다 보면 풀어야 될 게 있어요. 풀어야 하는 걸 못 푸는 게 있잖아요. 못 풀어온 것, 그것을 제시하는 게 덕(德)이에요. 그것을 제시하는 게 시대적 과제예요. 시대적 과제는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계속 풀어오지 못했던, 쌓여 있는 것을 풀자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찌꺼기를 안 남기고 가는 거예요.
이명박 전 대통령을 한번 볼까요. 그가 서울시의 시장이 되면서 청계천 삼일고가를 허물어버렸어요. 그 공간은 서울에 사셨던 분들은 아시지만, 수십 년 전부터 허물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30년이 쌓여온 거죠. 크든 적든 옳든 그르든 간에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건 조금 해결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쌓여왔는데 아무도 손 못 댔어요. 그걸 풀어버린 거예요. 그건 덕이 맞아요. 나름대로 좌표에 입각해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시장으로서 성공했죠.
그런데 자기는 그 좌표를 제시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을 못하고, 이렇게 길 내고 물 정리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외형을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더 큰 물을 건드린 거죠. 4대강을 건드리신 거예요. 4대강은 국민들이 정책으로 4대강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거예요.
단 한 명도 4대강을 생각 안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마치 옛날부터 있던 과제인 것처럼 제시했어요. 이미 그건 덕이 아니에요. 사적인 목표예요. 그래서 결국 청계천 사업을 토목 내지 치수 사업으로만 외형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확장했다가 망한 정권이 되는 거예요.
한국도 한국 나름대로 쌓여온 게 있을 게 아니에요. 지역에 쌓여온 찌꺼기 한을 풀어주면 지역 지도자이고, 나라에 쌓여온 것을 다 풀면 나라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아무튼 시스템으로 가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저는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약탈 없는 대한민국! 지금의 대한민국은 약탈 때문에 못 살아요. 시스템에 의해서 완전 약탈 국가가 돼 있어요. 돈 벌면 뭐 해요? 돈 벌면 돈 번 대로 약탈해가고, 없으면 없는 대로 약탈해가는 게 현실입니다.
아무튼 이제 시대적 과제에 의해서 사람들이 같이 가요. 억지로가 아니라 진짜 같이 가요. “이 시대에 우리 이걸 합시다!” 그게 뭐든 간에 그걸 제시해야 돼요. 그걸 제시하고 그러고 나서도 보태 주고요. 공동체의 풍성함이라는 걸 기준으로 해서요.
4장입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워낙 유명한 글이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십유오(吾十有五) 즉 나는 열하고도 다섯에 지우학(志于學)했다! 배움이라는 것은 앞에 1장에서 많이 말씀드렸으니까요. 배움이라는 것에 뜻을 세웠고 혹은 뜻을 두었고! 삼십이 돼서 그 배움의 방향이 섰다(而立)! 배움의 방향이 섰다는 것은 나 자신이 성립됐다는 얘기죠.
그리고 사십이 돼서 불혹(不惑)! 여기서 혹(惑)이라고 하는 것은 유혹(誘惑)이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유혹이 아니라 사기(詐欺)를 말해요. 사십이 돼서는 내가 배운 것의 기준이 딱 서니까, 그 기준 이외의 것에 의해서 나를 속이지는 못했다! 그런 거고요.
오십이 돼서 천명(天命)을 알았다! 命이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게 문제겠죠. 하늘의 명을 알았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얘기를 지천으로 들으셨죠.
天命의 명(命)이라고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에너지! 이 에너지라는 게 옛날에는 번역하기 참 힘들었을 거에요. 그리고 내게 주어진 처지, 이 두 가지예요. 이 두 가지의 함수 관계가 명(命)이예요.
내가 어떤 처지에 있고 그리고 내게 주어진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에너지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와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알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가 안 생겼다는 거예요. 사람은 ‘너무’ 때문에 다 사기당해요. ‘너무’가 없으면 사기 안 당해요.
부자 되려고 해서 사기당한 게 아니라 너무 부자 되려고 사기당한 거죠. 그래서 명이라는 건 뭐냐? 결국은 자기 처지와 자기에게 있는 에너지, 이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진정한 N분의 1이 된다는 거예요. N분의 1로 규정되는 N분의 1이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N분의 1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N분의 1이 되는 것, 플러스 알파가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이것은 아직까지 혹하고 있는 거죠.
지천명과 알투스 인디
그러니까 지천명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처지와 내가 할 수 있는 에너지에 대한 자기 이해를 말해요. 그러면 진정한 그 공동체의 N분의 1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진정한 N분의 1이 된다는 것은 뭐냐? 라틴어로 치면 ‘알투스 인디’가 되는 거죠. ‘격조 있는 개인’이 되는 거예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운동이 있다면, 제가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 혁명가로 나선다면, 제 목표는 ‘알투스 인디’ 운동이에요. 아마 제 삶의 끝은 그렇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각각 진정한 N분의 1로서 당당하게 설 때 최강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회는 누구도 깰 수가 없어요. 그 공동체는 천군이 와도 못 깨고, 만마가 와도 못 깨요.
그런 의미에서 지천명(知天命)이라는 것은, 포기나 좌절 그리고 적당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진정한 당당함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삼십에 입(立)했다면, 그 立이 마침내 진정한 立으로서 이루어진 거예요. 지천명은 자기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엄청난 긍정적인 자기에 대한 모습이에요.
격(格)
앞에 有恥且格(유치차격)에서 격(格)자를 지나갔네요. 제지이형(齊之以刑) 앞에 유치(有恥)라는, 귀 빨개짐도 있고 그리고 또 아울러 격 즉 차격(且格)도 있고 했는데요. 여기서 격(格)은 오늘날 번역하면 개성이에요. 시대적 좌표, 공동체의 좌표, 함께 가야 되는 좌표, 내 인생의 좌표도 그 개성 안에서 나오겠죠.
그 좌표에 따라서 길을 열어가고 그리고 공동체의 풍성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두고 보태 가면, 그렇게 보태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겠죠. 가령 신발장이가 보태는 게 다를 거고, 옷쟁이가 보태는 게 다를 거고, 음식하는 사람이 보태는 게 다르겠죠. 사람마다 보태는 방법도 다르고, 보태는 내용도 다르고, 보태는 시기도 다르고, 왜 보태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다르겠죠.
그러나 어쨌든 보태 가고 있는 거예요. 시대적 좌표에 따라서, 그것이 자기 삶의 좌표이기도 하고 그리고 보태 주기에 의해서 살아갈 때 귀도 빨개지면서 그가 보태 주는 그 모습이 바로 격이고 개성이에요. 다른 건 개성이 아니에요. 다른 건 별난 거예요. 오늘날은 별난 걸 개성이라고 많이 해요. 별난 사람들이 지나가면, 다 ‘저분 개성이 참!’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렇게 개성 강한 분들 많이 보셨을 것 아니에요.
사실은 남을 위해서 배려하는 자기만의 배려의 방식이 개성이에요. 그게 한자로 격(格)이에요. 그런 격 있는 인간이 바로 라틴어로 알투스 인디예요. 격조 있고 독립된, (주고받으니까 서로 의존하지만) 적어도 자기 삶에 있어서 N분의 1로는 당당하게 선 사람이에요. 육십이 됐더니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거슬리는 게 없더라는 거예요. 이순(耳順)처럼 그렇게 되는 거죠. 이제는 뭐 누가 뭐라고 해도 귀가 혹하지도 않고 홀딱 넘어가지도 않는 거죠. 아무튼 격이 그렇고요.
칠십이 되니까 마침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아까 좌표에 의해서 길을 내 가면 (시스템을 운영해 가면) 북극성은 그 자리에 있는데도 뭇별들이 감싸고 돈다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돼 버리는 거예요. 그 뭇별 가운데 하나가 된 거예요. 그 모든 뭇별도 또한 스스로는 다 북극성일 수 있어요.
N분의 1이 되는 순간 자신은 곧 북극성도 돼요. 그냥 뭇별도 되고요. 당당히 자기의 궤도를 지키고 있는 뭇별이자 동시에 우주 간에 보면 뭇별과 북극성이 다르지 않아요.
별나고 튀려고 하면 별이 안 되는 거예요. 먼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침내 ‘N분의 1이 됐다’라는 거에요. 진짜 N분의 1이 돼 버렸다라는 거예요. 비여북신거기소(譬如北辰居其所)의 중성공지(衆星共之)의 모습이 돼 버렸다는 거예요.
그때 공자 얼마나 좋았을까요!
(4-2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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