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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예정론의 최고난제 토기장이의 비유를 해석할 수 있게 되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예정하셨다고요?』라는 책을 쓰기는 했으나, 그 책은 로마서 9장을 칼빈의 예정론이 아니라 예지예정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의도성이 강한 책이었고 로마서 9장 본문 자체를 충실히 따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저는 견인의 교리와 달리 예정론에 대해서 말을 아껴왔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로마서 9장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려왔습니다.
저는 존 웨슬리를 비롯해서 저의 신학교 동기인 김인승 목사,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종국 목사, 그리고 장로교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견인의 교리뿐 아니라 예정론에도 반기를 든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나 글에서 '혹시 로마서 9장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흥미롭게 보고 읽었습니다. 모두 독특하고, 일리가 있고, 논리적이고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해석들이 로마서 9장의 한 부분을 해석하는 데는 매우 탁월해 보여도 9장 전체의 문맥에 맞이 않아 항상 제동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 1월 29일,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로마서 9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반대하고 예지예정론을 견지하면서도 로마서 9장 전체 문맥에 의해 제동이 걸리지 않는 해석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로마서 9장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저나 다른 이들이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해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로마서 9장을 읽을 때 칼빈의 절대주권이냐 아니면 알미니안의 예지예정이냐 이런 고정적인 틀을 가지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틀을 버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문맥을 통해 정직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제가 2018년 1월 29일에 한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그날 저는 칼빈의 예정론이냐 예지예정론이냐?를 내려놓고 문맥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결이 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답이 보였습니다.
아시겠지만,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뭐든 정확히 파악하려면 부분을 보기 전에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9장을 이해하는 데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을 이해하는 데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만 설명하지 않고 11장까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로마서 9장 풀이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장이 있다면 바로 로마서 9장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교부들 중에 로마서 9장 14-19절을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의 견해를 인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입니다(Schelkle[341-43]을 보라. 여기에 Origen, Diodorus, Mopsuestia의 Theodore, 그리고 Chrysostom의 이름이 나온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15-19절을 적대자의 말로 보았습니다. 에라스무스도 생애 초기에 비슷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석기들도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무시하는 표현 때문에 당황합니다. 예를 들어, 도드(Dodd)는 이 장에서의 논의를 '일종의 실족'이라고 비판했습니다(Dodd, 157). 그는 19-21절을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취약한 점'이라고 규정했습니다(p. 159).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닐(O'Neill)은 예정론이 '철저하게 부도덕한' 교리라고 주장하고, 많은 교부들의 예를 따라 이 불쾌한 구절들을 다른 사람이 삽입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닐은 14-23절을 후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이 장과 관련하여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로마서 9:11-23은 늘 나를 괴롭혔으며, 특히 21절이 그랬다."
심지어 칼빈주의 신봉자인 로이드 존즈도 『부흥』이라는 책에서 이 장에 대해 거듭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 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계시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 정말 저는 모릅니다. ... 저도 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한 사람중 하나입니다. 갈수록 저는 그것이 이상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로마서 9장 때문에 가슴앓이를 합니다. 일부는 시험에 들고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칼빈이 틀렸습니다!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코란에 언급된 알라의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코란은 알라가 모든 주권을 갖고 있으면서 우주를 변덕스럽게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17세기의 루터교 신학자들이 칼빈주의자들이 이슬람교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문제의 로마서 9장을 함께 해석해볼까요?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고백에 잘 나타나있듯이,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바울의 고통스러운 의문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선민입니다.
로마서 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러나 바울 당시 이스라엘은 거의 집단적으로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대거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지만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선민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진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 의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로마서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참 이스라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당시 유대인의 표준적인 견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상속자인 야곱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야곱의 후손인 12지파에 속했다고 다 참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구원이 인간의 혈통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2장 25-29절에서 참된 유대인은 육체에 할례를 받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9장 27-29절에서 언급한 '남은 자' 사상과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진짜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주장 즉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두 이야기를 꺼냅니다.
먼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로마서 9:7-9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가 불임일 때 약속을 주시고(9:9) 그 약속을 따라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이삭을 통해서 난 자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9:8 참고. 갈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므로 진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논증은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릅니다. 그래서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같은 경우는 다르다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삭과 리브가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로마서 9:10-13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과 에서는 한 어머니인 리브가에게서 태어났습니다(9:10). 더구나 쌍둥이입니다. 그런데도 둘 다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진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도 적용시킵니다. 유대교에서는 야곱 다음부터 모두 선민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선택된 자들이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지서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고 증거로 제시합니다(롬9:27, 1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선민이고 따라서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중 오직 남은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의 형편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책에 그렇게 반발한 것이 아닐까요?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전자를 닮았고 웨슬리안들은 후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닌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킴으로 남은 자 즉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한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실 때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지예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지예정과 반대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단지 구원을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우리가 전도할 때 악한 사람은 전도 안 합니까? 선한 사람만 전도하나요? 그렇지 않지요.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세리도 전도하고 창기도 전도합니다. 선과 악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왜 이 말이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예지예정을 부인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것을 앞의 구절과 비교해보십시오. "택함을 입은 자" 중에 선한 사람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은 사람은 택함을 입었고,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택함을 입지 못했습니다.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영접해서 거듭나느냐 거듭나지 않느냐가 선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예복을 입었고, 어떤 사람은 '자의적으로'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말은 중요한 것이라서, 이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혼인잔치니까 예복을 입고 와야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스스로' 예복을 입었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을 쫓아내시고, 예복을 입은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은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이 아니라 예지예정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선택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의 이 비유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정론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두 구절이 보여주듯이 택함은 인간의 선이나 악과 무관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율법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선택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런데 예지예정론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바른 반응을 보셨다는 것이지 선이나 악 혹은 율법의 행위를 보고 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다"는 것은 예지예정과 조금도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연이어, 바울은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도 예지예정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다"는 것에 대한 보충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둘 다 단지 태어나기 전에 즉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이 두 가지에 대한 그럴듯하지만 그릇된 설명을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가지를 자신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근거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들이대며 "보라. 여기에 칼빈이 말한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과 유기가 나오지 않는가?"라고 말해왔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이 두 가지는 야곱의 구원이 아니라 장자권에 대한 것이다.' 혹은 '야곱과 에서가 아니라 그 후손들에 대한 것이다'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매우 그럴듯한 주장인데, 어떤 것인지 아실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의 논쟁」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들은 로마서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 즉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롬9:12-13)라는 말씀에 대하여 반대할 조건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의심없이 야곱이나 에서 그 개인들에 대해 말함이 아니요, 야곱의 후손들과 에서의 후손들에 대해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형(에서)이 동생(야곱)을 섬긴 것이지, 에서 자신이 동생 야곱을 섬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야곱을 몸소 섬긴 일은 전혀 없고 형의 후손이 동생의 후손을 섬겼다.
사도 바울이 인용한 다른 성경 말씀은 이러하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1:3). 여기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유산을 황무케 하셨나? 그것은 에서가 소유했던 유산이 아니요, 그의 후손들(에돔인들)의 유산이었는데, 그것은 여러 예언자들이 언급한 대로 그들의 많은 범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아무 사람에게도 단순히 하나님의 '지상의 의지'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정죄하셨다는 사례는 하나도 없다."
놀랍게도, 장로교 통합 소속 김동호 목사님도 CBS 성서학당에서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잖아요. 이것도 예정론에 대한 얘기가 되는데 똑같은 얘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야곱은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 것이고, 에서는 멸망받도록 선택하신 것이냐? 그게 아니에요. 누가 누구를 섬길 것이냐에 대한 선택까지였지. 에서가 지옥 갔을까요? 그건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야곱을 사랑하시고 장자권, 축복권에 대한 얘기였지, 구원권에 대한 얘기까지는 너무 확대 해석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선택은 하시지만 그냥 복중에 있는데 '너는 지옥, 너는 천당' 그런 논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매우 설득력이 있고 흥미로운 주장이지요! 인터넷에 보니 목사님 같은데 박노길 씨도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9:11-13을 봅시다.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예정론자들은 옳거니, 이 구절이야말로 '창세전 선택'을 지지하는 가장 훌륭한 구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구절이다. 그런데 그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섬김'에 있다.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라고 되어 있지 않는가? 형 에서는 불택자이고 동생 야곱은 택자로 대비하라는 근거를 대라! 여기서, 선택의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 야곱의 혈통에 따라 메시아 라인이 형성될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
또 하나, '야곱'과 '에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대표한 집합명사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예정론자들이 이 구절에 개개인이 받아야 할 개인적 구원교리를 적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하물며, '에서는 미워하였고'에서 이 구절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미리 작정된 '버린 자들(불택자)'을 미워했다는 근거 구절로 적용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워하였다.'라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
에서라고 하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미워하셔서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에서의 후손이 이후에 하나님을 대적한 죄의 결과로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1,400년 동안 그들의 후손이 저지른 죄를 살피신 후 그를 국가적 의미에서 미워하셨다. 지금 로마서에서 인용된 것은 말라기 1:1-3이다. 이미 이때 '에서'는 '에서의 후손'을 의미한다. 에돔이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다. 그들의 죄의 결과였다. 야곱과 에서에 관련한 예언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창세기에서 이뤄졌다. 거기서는 에서를 미워할 것이라는 예언이 없다. 즉, 창세기 25:23에서는 미워한다는 예언은 없고 단지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내용만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미워할 사람, 사랑할 사람을 정하셨다'고 함부로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마라. 하나님은 아무 까닭 없이, 그들의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견해를 가장 자세히 그리고 잘 설명한 분은 김경규 교수입니다. 그분은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9장 11-13절에서, 바울은 '선택'을 이스라엘 민족 태동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사용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한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운명을 선택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로 예정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라! 저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자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음의 창세기 25장 23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또 하나는 다음의 말라기 1장 2-3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 선지자에게 이러한 말씀을 해주신 것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저들의 생애를 마친 다음입니다. 그것도 대략 1,500여 년이 지나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은 저들의 삶을 지켜보시고 난 다음 이야기입니다. 결코 저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말은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창세기 25장 23절 말씀에만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개인 에서와 개인 야곱의 운명에 대해 예언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인용한 다음의 창세기 25장 23절 말씀 바로 앞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창25:23a).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용한 말씀은 바로 이 말씀에 이어진 다음의 말씀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b). 즉, 큰 자와 어린 자에 대한 예언은 저들 개개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장차 저들 후손을 통해 형성될 두 민족 공동체에 대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NLT)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주 적절하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너희 큰 아들의 후손들은 너의 작은 아들의 후손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창25:23, NLT)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한 말씀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에서와 야곱 개개인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닌, 택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대한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헨드릭슨(Hendrickson) 같은 분입니다. 그는 '창세기의 본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그 출발은 분명히 개인에 대한 섬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도 이 예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인 것은 인정합니다. 그는 '예언의 출발은 개인의 섬김에 있지 않았느냐?'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성경을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옳지 않음을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그의 주장처럼,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긴 예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을 성경은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삼하8:14)
'그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었고, 유다의 왕이 임명한 대리자가 다스리고 있었다.'(왕상22:47, 새번역)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은 어느 개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설득력이 있고 매력적인 해석이지요!
저도 처음엔 '이게 답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의 문제점은 로마서 9장 전체의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옳다면, 로마서 9장이 구원에 대한 예정과 무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로마서 9장이 구원에 대한 예정과 무관할까요? 그리고 야곱에 대한 말씀이 장자권에 대한 것일 뿐 구원에 대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