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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라, 토끼풀 같은 삶일지라도
고린도후서 13:11-13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Trinity)이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삼위(三位)는 세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다. 성령이 강림하신 후 첫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킨다.
성부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으로, 성자 하나님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몸인 예수님의 모습으로, 성령 하나님은 교회의 출발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영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유대교 숫자는 ‘하나’(에핫드)를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숫자는 ‘셋’이다. 1과 3은 유일신교와 삼위일체 신앙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부인한다. 오직 하나의 모습이신 하나님만을 믿는다면, 그리스도교는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모습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는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양태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다.
세 분 하나님은 독립되었으나,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연관되고 통합한 하나를 상징한다. 이렇듯 신비한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체계이다.
1)
성경에는 두 개의 중요한 축도문이 있다(고후 13:13, 민 6:24-26).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축도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
이 축도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축복문이다. 편지 끝에 인사말로 사용하였다. 한국교회 모든 개신교회는 예배를 마치면서 고린도후서 13:13의 축복을 축도문으로 사용한다.
또 다른 축도문이 있다. 민수기 6:24-26의 아론의 축도문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제사제도를 가르치시며 이를 제사장의 축복으로 사용하도록 하셨다. 마틴 루터는 이 축복문을 공식화 하였기에 독일교회는 일상적으로 아론의 축복문을 사용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용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아 약간 생소하다.
두 개의 축도문 모두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삼위일체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아직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에 관한 완성된 교리적 가르침은 없었다. 다만 뭇 사람들에게 경험된 하나님 이해가 축복기도의 내용에 반영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신학자 델리취는 아론의 축복기도에 담긴 세 가지 ‘여호와 이름’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주시는 복으로 구분하여 이해하였다. 또한 매튜 헨리도 이 축도문에 ‘여호와’ 란 이름이 세 번 나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삼위이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축도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그리스도교의 신부와 목사가 위임받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특별한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축복은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생명력을 부여받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축복은 하나님과 깊은 신뢰와 교제를 가져온다.
신학자 레티 럿셀은 ‘삶을 경축하는 행위로서 신앙’을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참 좋구나!’(창 1:31) 하셨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과 친밀감 속에서 사랑과 믿음이 움트고, 이러한 이해와 신뢰, 고백이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한다. 이렇듯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가운데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2)
우리가 주일예배를 마칠 때마다 반복하는 고린도후서 13:13은 모든 축복의 결정체인 ‘삼위일체 축복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
이 축도문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삼위의 이름이 모두 언급되어 있고, 세 분의 핵심적인 속성(은혜, 사랑, 교통)에 의지하여 축복을 빈다. 삼중적 축도라고 부른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이 값없이 의롭게 된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와 연민이며, 오래 참음과 관용이다. 성경은 이렇게 그 사랑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또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랑 보다 크고, 완전하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교통’(코이노니아)은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은 물론 성도 간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활동으로 올바른 교회가 성립되고 유지된다.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에, 또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다.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복음을 전할 능력을 얻으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축복에서 보듯 복은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이다. 복은 하나님 주도의 절대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그 복을 간구할 수 있는 축복의 은총을 주셨다.
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 아일랜드를 좋아한다.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영국의 부속물처럼 여겨진 작은 섬나라였다. 그런데 아일랜드에는 특별한 영성이 있다. 그만큼 고난이 많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일랜드를 가리켜 땅 끝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로마 문명권과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미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5세기에 영국에서 온 성 패트릭이다.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한 성 패트릭은 ‘땅 끝에서 양치는 목자’라고 불렸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그 땅에 가장 흔한 토끼풀의 세 개 잎으로 보기를 들었다. 가장 어려운 교리를 아주 손쉽게 풀어낸 것이다. 토끼풀은 현재 아일랜드의 국화인 ‘샴록’(Shamrock)이다.
아일랜드를 녹색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온 땅이 토끼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기도는 축복으로 가득하다. 이런 축복기도문이 있다.
“주님! 내 손이 만지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귀가 듣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눈이 마주치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입이 단어 하나하나를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이웃을 축복하기 원하고 그가 나를 축복하기 원합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축복하라, 토끼풀 같은 삶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에서 배제된 사람, 그런 존재는 아무도 없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엄격한 변론과 논쟁이 담겨있다. 특히 이 두 번째 편지에는 서로 주고받는 가슴 아픈 다툼도 있고, 사도의 입장에서 준엄한 꾸짖음도 있다. 바울은 이 교회 때문에 오래 동안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러나 결론은 바울과 고린도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평화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더욱 극적이고, 활기차다.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향해 당부한다. 축복의 언어로 가득하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11).
여기에 사용된 다섯 가지 단어는 형제자매 사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행해야할 내용이다.
‘기뻐하라, 온전하라, 위로하라, 마음을 같이 하라, 평안하라.’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체험하라는 의미이다. ‘온전하라’는 환자의 몸이 회복되듯, 무질서한 생활에서 바르게 되듯, 정상적인 삶을 의미한다. ‘위로하라’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격려하라는 의미이다. ‘마음을 같이 하라’는 복음 안에서 같은 생각으로 일치하라는 의미이다. ‘평안하라’는 위 네 가지의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평화 그 자체이다.
이전의 고린도교회 모습과 비교해 보라. 그런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복한다. 우리는 잠시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앞으로 나아가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내게 화해와 평화의 은혜를 허락하신다.
3)
내가 1989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껏 축도를 해왔다. 그런데 가장 헤매는 것이 축도이다. 종종 말이 꼬인다. 그래서 긴장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왜 그럴까? 그만큼 내가 주어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목사가 평소처럼 축도하려고 앞에 서서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축도문의 시작 부분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짧은 축도문을 잊을 리 없으니 원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긴 나이가 들면 아내 이름도 잊어버릴 때가 있다더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초긴장을 하며 기억을 떠올렸다. 어떻게 시작하더라? 겨우 떠오르긴 했는데 헷갈렸다. “지금은...”인가? 아니면 “이제는...”이던가? 그래서 절충안을 냈다. “요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목사들이 하는 우스개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사에는 가장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예절이 있다.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1).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든 평화의 인사에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축복이든, 평화의 인사든 하나님이 우리의 축복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임마누엘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자기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축복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복이란 하나님이 나와 하심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불신자는 아무리 성공하고 번영하여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인은 실패하고 또 죽음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보기에 참 좋구나!’(창 1:31) 하셨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친밀하신 하나님의 얼굴과 마주하면서 사랑과 믿음이 자라나고, 따듯한 이해와 고백을 통해 내가 변화하고, 믿음이 성숙한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가운데에서 나아간다.
삼위일체는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세 가지 모습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삼’이란 숫자에 대해 강한 신뢰를 지니고 있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작심3일’이란 말을 한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삼세번’을 해야 결정이 난다. 사도 바울도 신앙의 세 가지 원리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고전 13:13)를 강조하였다. 삼위일체의 믿음은 이러한 든든한 고백을 느끼게 한다.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하고 안정된 믿음, 소망, 사랑의 ‘정립(鼎立)형 신앙’을 지녀라.
눈앞의 현실에 실망하지 말고 대안적 모습을 찾는 예수님의 길처럼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3의 날’을 모색하라.
인내심으로 용서와 배려의 ‘삼 세 번의 신앙’을 추구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과 고백 위에 같이 하신다. 비록 내 인생이 종종 토끼풀 같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삶을 은총으로 도우시고, 복 주신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라. 비록 토끼풀 같은 내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은 내 인생의 땅 끝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다.
삼위일체의 축복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사는 우리 모두 위에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