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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으로 몸 팔러 나간 "카라유끼상"으로 불리는 일본 여성들
이 여성을 "카라유끼상"(唐行さん)이라 부르며
19세기 후반에 꼬임에 빠져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등지로 건너 가서 창부로 일한 일본 여성을 뜻한다. 카라유끼상의 어원은, 한자로 외국(중국)을 의미하는+唐, 간다+行き, 사람(님) + さん의 합성어로 당시에는 "외국으로 나간 사람"이란 뜻로 이렇게 불렀다.
"카라유끼상"들
그러나 당시에는 "카라유끼상"이라 하지 않고, 추업부(醜業婦), 천업부(賤業婦), 밀항부(密航婦) 그리고 출신지역에 따라 시마바라족(島原族), 아마쿠사녀(天草女) 등과 같이 경멸적인 의미로 불렸었다.
대부분이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와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출신의 여성이 많았으며 이곳이 "카라유끼상"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으며 점차적으로 일본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바다가 인접한 지역으로 옛부터 유럽의 선박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이국의 풍물에도 익숙해져 "이인환대"(異人歡待)의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풍 속에, 바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적으로도 동경에 가는 것 보다 배로 외국인 상해로 가는 것이 더 가까웠다.
사족(蛇足) : 16세기 중후반에, 일본 전국시대인 오다 노부나가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유지를 이어 받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크리스천에 대해 호의적으로 일본의 국교지정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갑짜기 크리스천을 멀리하게 되고 탄압하게 된 동기에는, 그들이 진출한 나라에서 포교 뒤에 한결같이 포르투갈 령이나 스페인 령의 식민지로 변해 가는 사실과, 더욱이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의 빈곤 가정출신의 수 많은 여성이 노예선에 태워져 인도방면으로 팔려 나간 사실 등을 알게 되고서부터 였다.
: 山岡莊八저 역사문고 講談社 발행 "?川家康" 제20권 중에서
"카라유끼상"의 발상지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와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카라유끼상"으로서 외국으로 나간 일본 여성들은 농촌, 어촌 등의 가난한 가정 출신의 딸들이었다. 첫번째 원인은 빈곤이었다. 당시 일본은 빈곤한 사람이 많았으며, 돈벌이를 위해 딸들이 팔렸다. 또 일본은 무로마찌 시대(室町時代, 1336-1573)부터 시작된 공창제도가 있어, 부모가 딸들을 팔아, 받은 돈으로 생활하는 풍경은 당시로는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즉 나라가 그러한 권한을 부모에게 인정하고 있었다. 집안과 형제자매를 위해 스스로 고행에 몸을 투신하는 딸은 효녀로 보는 것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한 딸들, "카라유끼상"은 돈벌이 장소의 무대가 이번에는 외국으로 옮겨졌다.
그녀들을 외국의 유곽에 넘긴 가교역할을 한 사람들은 외국 선원과 밀접한 "삔뿌"(嬪夫, ピンプ)라 불리는 알선책 업자와 제겐(女衒, ぜげん)으로 불리는 국내 모집책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런 제겐(女衒, ぜげん)들은 가난한 농가, 농촌을 돌아 다니며 적당한 연령의 처녀를 찾아 내어, 외국으로 취업시켜 준다고 유혹하여, 그녀들의 부모에게 현금을 건넸다.
*제겐(女衒, ぜげん) : 돈에 곤궁한 집을 찾아 전국 각지로 돌아니며, 주로 젊은 여성을 사들여 유곽 등의 성풍속 관계의 일을 강제적으로 시키는 인신매매의 중개업자. 제겐들은 그녀들을 매춘업자에게 넘기므로 수입을 얻었으며, 이러한 돈으로 자신이 직접 외국에서 유곽 경영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判人"이라고도 한다.
"카라유끼상"이 된 가장 많은 원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혹이었다. 달콤한 돈벌이의 꼬임에 속았다. 제겐이란 "일본판 노예 거래업자"들은, "싱가포르에 가서 호텔에 취직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라고 유혹했다. 그리고 잘 통하는 외국선 선원에 건네어 밀항도록 했다. 여기에 든 수수료 비용이라며 당시 약 500엔(현재 500만 엔 상당)이 본인의 채무로 떠 안게 되었다. 이것을 갚기 위해 팔려간 땅에서 어떤 일을 해서라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라유끼상""(からゆきさん) 관련 출판 서적들
유혹당해 온 "카라유끼상"은 현지에 도착한 현지의 유곽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500엔의 채무를 갚지 못하면 집에 있는 부모로부터 대신 갚도록 한다."라고 하는 협박에, 그녀들은 울면서 창부의 세계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분발로 자포자기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몸을 버린 셈 치고..."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던 유럽인들로부터 그녀들의 인기는 높았다. 백인이 유곽을 지나면 그녀들은 "카민사-"라고 말을 건넸다. "Come in, sir"의 서투른 일본식 발음이었으며, 백인들 사이에서는 "카민사-"라는 닉네임으로 그녀들을 불렀다.
이국인 상대의 "카라유끼상"에 대해 "일본 여성은 순종적이고 정직하고 친절하다. 다른 외국 여자와 달리 악랄한 거래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로 일본여성은 믿음이 있고 순수하다. 두 번째로 돈을 너무 밝히지 않고, 세 번째로 훔치는 버릇이 없다. 네 번째로 누구나 친절하다."라는 이방인들이 평가였다.
이 무렵 시베리아의 "카라유끼상" 가운데 친일가로 잘 알려진 안톤 체홉(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은 "카라유기상"과 하루밤을 보냈다.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다. 미소로 대답하고 있다."라고 그의 친구에 보낸 편지가 있다.
다른 작가 서머셋 모음(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Neil MacAdam"이란 작품에는 "일본여성은 눈 언저리에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하고, 그녀들은 방에 들어가면 먼저, 머리를 공손히 숙여, 그리고 예의 바르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라고 쓰고 있다.
비록 그녀들은 빈농의 가정에 태어나 유혹으로 이국에 팔려와 생활하며, 한편으로는 추업부(醜業婦), 천업부(賤業婦), 밀항부(密航婦) 등으로 불기도 했던 어두운 그녀들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신선한 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외국 도항은, 당시 여론에서도 "낭자군"(娘子軍)으로 불리며 상당히 긍정적으로 선전되기도 하여 메이지 말기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인의 화교에 비교될 정도로 그녀들도 세계 구석구석에 진출했으며 한때 그 숫자는 20-3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있어서 일본의 지위가 차츰 높아지자 그녀들의 존재는 "국가의 수치"라고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1920년 "유곽 폐창령"과 더불어 외국에 있는 일본 유곽도 폐지되게 되었다. 대부분이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그녀들의 특별한 갱생대책이 없어 현지 잔류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로, "카라유끼상"의 존재는 "전쟁 전 일본의 취부"로써 일반에게 알려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카라유끼상" 진출 분포도
"카라유끼상"의 도항처는 주로, 중국, 홍콩,필리핀, 보르네오,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지 그리고 미주지역과 아프리카였다. 특히 당시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서구열강의 군대로부터 강한 요망있었던 지역으로 많은 일본 여성들이 파견되었다. 또 멀리는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캘리포니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의 자치령)까지 진출한 일본 여성도 있었다.
문학 "산다칸 8번 창관"
1972년 야마자키 토모코(山崎 朋子) 씨의 논픽션 문학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Sandakan 八番娼館, 1974년 영화화)이 출판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촉매가 되어 많은 연구서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サンダカン八番娼館 望鄕"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여우상 수상
주연 여우 타나카 키누요(田中 絹代, 1909-1977, 여배우, 감독)
-- "산다칸", 현재 말레이시아 사바주에 있는 상업도시 Sandakan(보르네오), 중국어로 山打根으로 표시한다. 주위는 망그로브(Mangrove) 숲과 오랑우탄의 보호구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유곽 경영자가 만든 일본인 묘지가 있으며, "카라유끼상"(해외 매춘부)으로 몸을 팔러왔던 그녀들의 묘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기도 했었다.
"카라유끼상"들의 근로조건
유명한 "카라유끼상"의 한 사람 키타카와 사끼(北川サキ) 씨의 보르네오에서는 예로는, 창부목의 수입은 50%, 이 가운데 빛 변제분이 25%, 나머지에서 의상비, 잡비 등에 충당했다.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매월 약 20여 명의 손님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빚 문제에 대해서는 "갚을 생각이 있으면 더 열심히 일하면 금방 갚을 수도 있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최소한 월 120명의 손님에 상당하며 매달 100엔 정도씩 빚 변제가 가능했다고 한다.
보통은 손님이 적었으나,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어느 유곽이나 만원으로, 심할 경우에는 하루 밤에 30여명의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금액으로 1박에 10원(약 1만 엔), 숙박 없이는 2원이었다. 손님 한 사람에 걸리는 시간은 3분에서 5분 사이로 이 이상 시간이 걸리면 할증요금이 부과되는 규정이었다.
(참고 : 필리핀에서는 당국의 위생국의 창부의 성병 검사는 주 1회 임질검사 그리고 월 1회 매독검사를 실시했으며, 이 비용을 그녀들이 부담해야 했다.)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증언"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증언을 토대로 "오키쿠의 생애"란 서적이 출판되었다. "오키쿠"의 생애 1899년(明治32年)에 히로시마현(廣島縣)에서 태어나 제겐(女衒, ぜげん)의 꼬임으로 1916년 17살에 말레이시아로 팔려 갔다.
카라유끼상 "오키쿠"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생애
그녀의 출생은 일본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 근세초기 이후 봉건적 신분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 혹은 차별 받는 지역)에서 8명 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오키쿠 집안은 초가집의 초라한 작은 집으로, 집 밖에 설것이대가 있는 그런 가옥이었다. 그녀가 3살 때 부친을 10살 때 모친은 유명을 달리했다.
초등학교 4년에 중퇴하고 언니 오키미가 일하는 오카야마(岡山)의 돗자리 공장에서 아이를 돌보아 주기로 했다. 오키쿠는 같은 돗자리 공장에서 일하는 오토미라는 여자로부터 유혹을 받아, 고우베(神戶)에서 밀출국되었다. 당시 대부분 카라유끼상들은 배밑에 숨어 밀항으로 출국하였다. 배는 1개월 걸려 도착한 싱가포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말레이시아 크랑에 아직도 남아있는 "20번지"
말레이시아 크랑에 있는 20번지 유곽에 500엔(현재의 화폐로 약 500만엔)에 팔린 오키쿠는, 그 빚을 갚기 위해 3년간 일해야 했다. 유곽에서 3년간 일한 뒤, 빚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된 20세 때에 싱가포르에서 독립하여 인도인과 결혼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약 10여년 간의 이 "자유"가 오키쿠에게는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그녀는 다른 일본인들과 같이 인도에 억류되었다.
"오키쿠" 부부
1946년 석방되었을 때 그녀는 47세. 말레이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현지에서 보내다, 1973년 57년 만에 귀국했다. 일본 매스컴은 그녀의 귀국을 크게 보도함으로 "카라유끼상"의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화 신청을 마치고, 아직도 말레시아에 남아 있는 옛 "카라유끼상"의 귀국을 종용하면서,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자신들의 처지와 가족의 입장을 생각해 귀국하지 못한 채 이국의 땅에 묻힌 "카라유끼상"의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3년 뒤에 사망한다.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생애"는 그러한 그녀의 77년간의 일생을 기록한 논픽션 작품이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카라유끼상"
특히 어린 그녀들은 태평양 전쟁 훨씬 전부터 외국으로 진출하여 현지 사정과 외국어에 능통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들의 지금까지 활동지역은 적지로 변했으며,
어학에 뛰어난 그녀들은 자진하여 조국을 위해 현지인들의 통역으로 몸을 바친 여성도 많았다.
카라유끼상 "오에이"(おエイ)
"오에이"(おエイ) "러시아 해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성으로 고향 나가사키(長崎)에 그녀의 기념비가 있으며, "나가사키 3대 여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여러 서적에서도 소개되었으며, 12살 때 마을을 등지고 상해를 거쳐 시베리아의 바이칼호까지 그녀의 족적이 남아있다. 특히 러시아와 관계가 깊으며, 뒤로 니콜라이 2세와 러일전쟁 사령관 크로드버킨, 노기 대장과 싸운 스텟셀 등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본명은 "道永エイ"
시베리아의 "카라유끼상"
시베리아의 "오키쿠"(お菊) 이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잡지, 신문 등에서 취급하였으나, 아직도 신비에 쌓인 부분이 많다. 1878년 야마쿠찌현에서 태어나 17살 때에 조선으로 건너, 뒤로 만주, 시베리아를 전전했다. "오키쿠"(お菊)가 일약 유명해 진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에 걸친 동란의 시기에 일본군에 협력하여 수 많은 공적을 세운 점이다. 연대장으로부터는 감사장이, 일본 상훈국 총재로부터는 금 80원의 공로금을 받았다. 현재의 하얼빈의 일본인 묘지에 잠들고 있다.
만주의 "카라유끼상"
만주의 "오키쿠"(お菊) 만주의 "오키쿠"(お菊)와 시베리아의 "오키쿠"(お菊)는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내가 조사한 자료에서는 다른 인물로 판단하고 기술하고자 한다. 그녀도 상당 부분 신비에 가려진 인물로 아마쿠사(天草) 출생으로, 7살 때에 조선의 어느 요리집으로 팔려 나 갔다. 뒤로 대륙 각지를 전전 방랑하게 되며,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때에는 일본군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만주 중대 사건으로, 일본군에 체포된 마적단(馬賊團, 유격대 조직)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처남을 처형 직전에서 구출한 것을 계기로 마적단에 투신했다. 여 두목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키쿠"(お菊)가 직접 발행한 통행증은 어디서나 가장 신뢰를 받았다. 병으로 몸져 누어있을 때인 1923년 39세의 짦은 생애를 니콜라이에흐스크 사건(니항사건, Nikolayevsk Incident)으로 영면했다.
*니항사건 : 1920년3월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때에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4천 명으로 조직된 유격대에 의해, 흑룡강(아므르 강) 하구에 있는 니콜라이에흐스크 항의 일본 육군 수비대(제14사단 보병 제2연대 제3대대)와 일본 거류민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5월 일본 육군이 원군을 파견하자 유격대는 항구를 방화하고, 거류민과 포로를 모두 살해하고 도주했다. 이때의 희생자는 6000천 명에 이른다.
"카라유끼상" 키노시타 쿠니(木下クニ)
키노시타 쿠니(木下クニ) 아마쿠사(天草) 출신으로 보르네오(현재 카리만탄)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八番娼館, 유곽)에 근무하면서, 많은 돈을 모아 같은 처지의 일본인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인 묘지를 만들었다. 그녀의 일화는 일본 영사관의 위치는 모른 사람도 "키노시타 쿠니"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 "남양(南洋, 동남아시아)의 여왕"이라고도 불렸다. "카라유기상"의 지상목표는 재산을 모아 "금의환향"이었으며,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녀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양장 모습의 "카라유끼상"
시마키 요시(島木ヨシ) 그녀는 1886년 아마쿠사(天草)에서 태어나, 19살 때에 "카라유끼상"이 되었다. 상해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 인도 폼베이(현 뭄바이)에 단신으로 진출하여 "저팬니스 마사지"를 시작했다. "일장기를 가슴에 안은 민간외교"라는 기개로, 인도의 독립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수상 등 거물의 치료도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년 고향에 아마쿠사(天草)로 돌아와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남아시아의 "카라유끼상"
코마쯔 케이(小松ケイ) 16살 때에 고향 아마쿠사(天草)를 떠나 상해를 거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여기서 커다란 회사를 경영하는 네덜란드 인의 눈에 들어, 성과 같은 대저택의 여주인이 되었다. 고향에 집을 짖고 그 네덜란드 인과 같이 살기도 했다. 이 집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현재는 그녀의 조카가 관리하고 있다. 그녀도 금의환향했다. 케이의 묘지는 -그녀가 하얀 파라솔에 하얀 드래스 모습으로 귀향했을 때의- 작은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캐나다의 "카라유끼상"
야마다 와카(山田わか) 요코스카(橫須賀)에서 태어났다. 1890년 무렵 18세 때 이미 유부녀였으나, 제겐(女衒, ぜげん)에 유혹 당해 머나먼 시애틀로 팔려갔다. "아라비아의 오야에(お八重)"라는 이름으로 8년간 일했다.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으며, 뒤로 여류 평론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창부 후생시설을 만드는 등 어려운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기적과 같은 그녀 발자취는 이국에 깊이 남겼다.
일본을 대표하는 「女衒 ZEGEN」의 한 사람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1867-1945)
전설적인 "제겐"으로 알려진 인물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伊平治, 1867-1945)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겐으로 알려진 인물.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으로 누나와 동생 2명의 4형제의 장남으로 태아났다. 부친은 1877년 토지세 개정문제로 동분서주 하던 중에 객사, 이로부터 형제들은 빈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헤이지는 주류와 야채 행상으로 가계를 도왔다.
18살 때 배로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 각지, 싱가포르, 행상, 인도 캘커다, 하노이, 대만, 동인도 제도 등을 전전하며 여관업, 이발소, 유곽, 행상, 진주 조개 채집, 통역, 식당, 노무자 알선, 야채재배, 제과 등 수 많은 일과 사업을 경험했다. 한편 유곽에서 일하는 "카라유끼상"들을 홍콩 해적으로부터 구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女衒 ZEGEN」이란 직업에 뛰어 들어 유곽도 경영했다.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의 자서전 『村岡伊平治自傳』
그의 사업들은 상당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1919년 폐창제도 개시 그리고 1937년 해외 매춘부 폐지령이 공표되고서부터 사업은 내리막 길로 접어들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의 자서전 『村岡伊平治自傳』은 "제겐"으로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하여 1960년에 남긴 것이다. 자서전이 쓰인 당시 군부의 남방개발의 굴욕 등의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발행이 되지 않았으나 전후 겨우 출판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의 "자화자찬"등 과장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산다칸 8번 창관"의 야마자키 토모코(山崎 朋子) 씨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당시 일본이 진행하고 있던 남방개발 그리고 유곽의 "카라유끼상"들의 실태를 연구하는 제1급의 귀중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되는 자서전이다.
제80회 칸느 국제 영화제 참가 영화 「女衒 ZEGEN」(제겐)
감독각본 : 이마무라 쇼우헤이(今村 昌平, 1926-2006) 주연 배우 : 오가타 켄(緖形 拳, 1937-2008)
제작일:1987년 상영시간 : 2시간4분, 배급:東映, 今村프로
주연 배우 : 오가타 켄(緖形 拳, 1937-2008)
당시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했던 "「女衒 ZEGEN」"(제겐) 중의 한 사람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1867-1945) 씨의 반생을 그린 작품. 『村岡伊平治自傳』(오카무라 이헤이지 자서전)에 픽션을 가미하여 영화화했다.
영화 「女衒 ZEGEN」의 로케는 대만 "九분"에서 촬영되었다. 여기는 일제시대 아시아 최대의 금 광산이 있었으며, 아직도 옛날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 관광지로 많은 일본이 찾기도 하는 곳이다.
The Guinness World Records 에도 올라 있고, Wikipedia 에도 올라가 있는 세계 최대 황금
황금 덩어리의 "九분" 박물관
영화 "「女衒 ZEGEN」"(제겐)의 줄거리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으로, 그는 뜻을 품고 고향을 버린지 벌써 8년이 지나고 있었다. 동료 2명과 같이 홍콩의 항구에 도착하였다. 머리카락은 엉키고 부슬부슬, 옷은 너덜너덜한 모습이었다. 호주머니에는 여유의 돈도 없었다. 무작정 "대일본 제국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1902년(明治 35年) 정월달, 伊平治는 여기서 우에하라(上原) 대위로부터 만주 밀정으로서 임무를 띠고, 시베리아 대 설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그는 봉천의 한 유곽에서 "도메"라고 하는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의 여자와 만난다. 그녀를 통해 어렸을 때부터 사귀던 "시호"가 싱가포르로 팔려 간 것을 알게된다. 홍콩으로 돌아온 "이헤이지"(伊平治)는 에치젠야의 아사나가(越前屋 朝長)라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으나, 놀랍게도 "시호"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아사나가가 싱가포르에서 그녀 사들였던 것이었다. 사랑하는 옛 연인을 다시 사들인 "이헤이지"는, 홍콩 해적에 잡혀 간 일본인 "카라유끼상"들을 구출한 것인 인연이 되어 "제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여자 무역"은 국가를 위해서 라며 자신을 나타내는 그는, 남양의 섬들을 건너 다니며 장사에 몰두했다. 한편 "시호"는, 이전에 해적으로 지금은 영국령 말레이 포트 센텐햄에 진출한 "왕"이란 남자의 허락으로, 여기에다 유곽 영업 허가를 받았다. 1904년2월(明治 37年)에 "대 러시아 선전포고"할 무렵까지 "이헤이지"(伊平治)는 많은 직원을 데리고 있었다. 장사도 번성하여 4개의 유곽을 경영하게까지 되었다.
1912년(明治 45年) 여름 천황이 서거하자 그는 할복(순사)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곧 재기한 그는 사업에 몰두하게 되었으나, 차츰 반일감정이 높아지자 일본 유곽도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919년6월(大正 8年) 폐창제도의 탄생은 "이헤이지"(伊平治)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미 세상은 빠르게 변하게 되었다. 많은 여자들이 일본으로 귀국을 희망하고 있으며, "시호"는 "왕"과 눈이 맞아 그의 곁을 떠났다. "왕"은 이러한 기회에 이헤이지"(伊平治) 소유의 모든 유곽과 "시호"를 포함해 20만 달러에 손에 넣었다.
1941년12월(昭和 16年) 태평양 전쟁이 시작할 무렵, "이헤이지"(伊平治)는 이미 70세가 되었으나, 그의 "제겐 근성"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장기(히노마루)를 선두로 상륙해 오는 일본군 대열을 향해 그는, "군이들이여! 여자라면 나한테 맡겨라..."라고 외치고 있다.
사족(蛇足)
"카라유끼상"은 외국 각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일본인 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많은 유럽인들의 전진기지가 되었던 싱가포르에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일본인 유곽이 있었으며 여기에 최대 규모의 "카라유끼상"의 공동묘지가 있다. 그녀들은 평균연령 12-14살 때에 팔려 나가, 5-6년 사이에 말라리아 등의 풍토병, 성병, 폐병 그리고 아편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국의 가족들은 딸들의 소식을 모른 채...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홍콩섬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보르네오섬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홍콩섬 Happy Valley 경마장 부근에 있는 공동묘지 일각에 일본인 묘지가 있다. 성공하여 여기에 묻힌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여기서 눈을 감고, 지금도 여기에서 잠들고 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잠든 그녀들은 조국을 향해 묻혔다.
어려서 돈 때문에, 부모 형제자매와 이별하여, 외국에서 그녀들은 모두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렇게 망향의 무념 속에 생을 마감한 그녀들은 같은 동료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이국의 일본인 묘지에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인 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행운이었던 편이며, 많은 사람이 바다에 버려지거나, 정글에 버려진 경우도 상당했다. 이국에서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세상을 떠난 "카라유끼상"의 운명적인 생애였다.
쿠마모토시 니혼키(熊本市 二本木)에 유일하게 남았던 유곽유적 "구 일본정"(舊日本亭)
메이지(明治)에서 쇼우와(昭和)에 걸쳐 큐우슈(九州) 최대 규모의 홍등가로 번창한 쿠마모토시 니혼키(熊本市 二本木)에 유일하게 남았던 유곽유적 "구 일본정"(舊日本亭) 건물의 해체작업이 9월1일부터 시작된다. 일본 전통예능 죠우류우리나 나가우타(淨瑠璃, 長唄)을 키워 온 유곽문화의 명성을 전해 온 건물해체에 지역주민과 민속학 전문가로부터 아쉬운 목소리가 일고 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의 거리 풍경
"구 일본정"(舊日本亭)은 쌀장사로 돈을 번 지역유지가 1896년(明治 29)에 세웠다. 1층은 연회장이나 유녀가 객을 맞이하는 방. 2층은 객실이 길에 이어져 있다. 전쟁 뒤로 유곽페지령이 내려지자, 한때 아파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작년 8월 노후화가 심해 "구 일본정"(舊日本亭)을 보전하기 위해 지역 유지가 모여, 지역재계 등에 협력을 호소했으나, 불황으로 충분한 자금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에 있는 "구 일본정"(舊日本亭) 건물 모습
메이지기(明治期)의 건물을 이축.보존하는 "박물관 메이지촌"(明治村, 愛知懸 犬山市 소재)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유곽의 성격상, 초중등학생의 견학자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라고 거절 당했다. 이 건물의 소유자 타케무라(竹本健治, 66)는 "옛날 분위기의 술집"(レトロな居酒屋)로 개장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건축 기준법에 의해 화재 발생시의 소화대책이 필요하다고 하여 단념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의 거리 풍경
그 옛날 "홍등가"로 불린 니혼키(二本木)를 상징하는 건물이 자취를 감추는 것에 대해, 민속학 한 준교수(熊本大 鈴木寬之)는 "니혼키는, 유녀들이 전승해 온 죠우류우리나 나가우타(淨瑠璃, 長唄), 샤미센(三味線) 등 예능의 거점의 하나. "구 일본정"(舊日本亭)은 지역의 예능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했다."라며 아쉬워 했다.
첫댓글 완월동 초석???
너무 길어서 읽다가 포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