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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38
1월17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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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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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JE5f40IRc
[서울대교구 김윤욱 루카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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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언젠가 사고의 여파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뵌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시더군요. 같이 식사를 하는데, 아무 불편 없이 젓가락질을 하는 저, 그래서 깻잎이든, 김이든, 콩자반이든 무엇이든 척척 집어먹는 저에 비해서 그분의 식사는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내적, 심리적 위축이 큰 것이더군요. 저는 상대방의 그런 상황도 모르고 반가워서 악수를 청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시며 굉장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 만날 때마다 얼마나 망설여지고 또 난감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도 손이 오그라들어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선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회당 안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오그라들었던지 모릅니다.
밥 먹고 고작 하는 일이 예수님 뒤를 캐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챙겨가며 간섭하며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라."고 외치신 대상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손을 뻗어라.”라고 외치십니다. 왜 그리도 내면이 꼬이고 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다지도 이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저리가라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던지신 예수님의 외침이 바로 "손을 펴라."인 것입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 받았지만,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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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K7NjRBFL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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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길: 행복의 변덕쟁이가 돼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않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그들 목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지, 죽이는 것이 옳은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 법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있음에도 그들의 잘못된 의도가 율법의 참 목적을 잃게 했습니다.
머리는 마음의 종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는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머리는 어떻게 물을 마실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물을 살 것인지, 수도에서 받아서 마실 것인지 등. 율법은 머리 차원입니다. 마음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아무리 좋은 율법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생각만이 옳지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아집은 우상입니다. 자아의 생각이 마치 신의 생각처럼 옳다고 믿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옵션도 있음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머리를 땅에 부딪쳤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는 녀석들은 웃고만 있었습니다. 너무 분하고 아파서 마구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놀라서 저를 집 마루에 누이고 빙 둘러서서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됐다 싶어 더 크게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섰다가는 엄살 부렸다고 창피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함께 놀던 제 친형을 비롯한 친구들은 저를 달래는 것도 지쳤는지 울고 있는 저를 혼자 두고 다들 다시 놀러 나가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울음을 그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놀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외로웠습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우는 아집은 왜 생겼을까요? 아프지 않으면 울음을 거쳐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세상과 단절되어 외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히면 행복을 잃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 더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아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한 친구가 이단 종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모든 것을 잃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친구에게 아직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믿었고, 지금은 안 믿어. 근데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
자신이 가는 길이 나락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선택의 연습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조금은 변덕스러워지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나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포먼은 길거리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깡패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에 무하마드 알리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는 알리와 다시 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를 망가지게 했습니다. 또 다른 패배 직후 죽음직전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졌는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10년 넘게 쉬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권투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알리처럼 약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알게 됩니다. 결국 45세의 나이에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행복의 변덕쟁이가 됩시다. 한 곳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집입니다. 자아는 변덕쟁이가 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하고 어떤 선택이 더 큰 행복으로 이끄는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덜 적게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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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궁궐 추녀마루 끝자락에 있는 흙으로 만든 조각물을 일컫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는 상황을 뜻합니다. 음식에 간을 맞추는데 소금 대신에 설탕을 넣으면 맛이 이상합니다. 이럴 때를 어처구니없다고 합니다. 강론 준비를 열심히 해서 저장해야 하는데 그만 저장안함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몇 시간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를 어처구니없다고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는 그래도 봐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함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세상을 정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세리, 창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 신분, 이념, 계층, 성별, 민족’의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우리는 ‘물질, 자본, 성장, 경제, 과학, 풍요, 발전’이라는 패러다임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끝 모를 욕망의 탑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속이고, 폭력도 행사하고, 전쟁까지도 불사합니다. 스스로 지구별을 떠나기로 결정한 호주의 원주민들은 이런 사람들을 ‘돌연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째서 자연과 하나 되려 하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려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먹을 수 없는 금 덩어리를 얻기 위해서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고, 동료인 이웃들을 도구로 사용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분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법과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법과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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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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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다윗의 무기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시편 23(22)편을 살펴보면 다윗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4절) 다윗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가졌고,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골리앗을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립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열심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열심’으로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데 익숙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계명과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며,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믿음은 다윗과 같은 믿음입니다. 계명과 규정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여 주는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계명과 규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들을 심판하고 싶은 마음, 비난하고 싶은 마음, 죄인으로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게 될 뿐입니다. 오늘 하루는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계명과 규정들을 대하여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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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이고,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안식일에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이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선(善)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도 늘, 안식일에는 더욱더,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1)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에 다 해당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다 해당됩니다. 이웃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이웃에게 관심 갖지 않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기준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일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 미사 참례만으로는 주일을 제대로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일을 즐기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휴일을 즐기더라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일 미사가 끝난 뒤에 나머지 시간들을 세속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또 전혀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속적으로 놀면서 지냈다면,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십계명을 안 지킨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킨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말이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일을 주일답게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고지식한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고, ‘좋은 일’(선한 일)을 해야 하는 날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인은 주일이 아닌 날에도 꾸준히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주일에는 특히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쉬란 말인가?”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정성의 문제입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싫고,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1)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라는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엇이 ‘하느님의 선(善)’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큰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만을 내세워서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신념이라면, 그것은 결코 옳은 신념일 수 없습니다. 선(善)이 아닌 신념은, 즉 악한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그냥 악(惡)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나는 옳다.”라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옳다.”라는 독선은 “너는 틀렸다.”라는 편견과 짝을 이룹니다. 그 독선과 편견 때문에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오만과 독선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과 결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옳다.”라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무조건 싫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의 시골 출신이고, 목수라는 점 때문에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조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교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도,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도, 그리스도교가 하는 일이라면 다 싫어합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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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한쪽 손을 움켜쥐는지 생각해 봅시다.
화가 났을 때, 뭔가 앙심을 품었을 때,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우리는 한쪽 손을 움켜쥡니다.
오늘 복음의 병자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는 신체 결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고, 선뜻 손을 사람들에게 내밀지도 못했고, 제대로 노동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오그라든 한쪽 손은 분노와 좌절, 절망과 앙심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회중 가운데 서게 하십니다.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어 백성 가운데 소외되지 않은 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의 치유보다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을 노기를 띠고 둘러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신체 결함보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을 더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병자를 치유하기 위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완고해진 이들에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게 손을 뻗으며 용서와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미움의 상처 때문에 외면하는 이들에게 회심을 요청하십니다.
손을 뻗어 이제 사람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도우며,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외침입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손을 움켜쥐고 살고 있습니까? 내 손을 뻗어 펼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하루를 살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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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ㅣ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신체적인 장애는 없지만 영적인 한 가지 장애 때문에 하느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바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에나 마음이 오그라든, 마음의 시선이 비뚤어진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시큰둥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선한 행동을 깎아내리고, 착한 행동에는 토를 다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신체적인 장애든 마음의 장애든 그 한 가지를 낫게 되면 사람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온전한 사람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체적-심리적-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다 장애인입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아무튼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않거나 그 장애에서 치유 받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 또한 우리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기도하러 들어가시다가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실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를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불러내어 회중 한 가운데 서게 하십니다. (3,3참조) 물론 지금껏 그 사람은 회중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늘 한쪽 구석에 서 있었습니다. 흔히 장애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기에 타인의 시선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사람들 가운데 서 있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뒤쪽이나 무의식적으로 구석 자리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애인들이 더 이상 남의 눈치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건강한 사회가 되었지만, 아직도 미흡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불러내어 회중 한 가운데 서게 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과 더불어 여러 가지 느낌들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의도는 바로 이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은 물론 그렇게 오랫동안 낡은 관습에 젖어서 죄인 아닌 죄인처럼 살아왔던 오그라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 특히 안식일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가르칠 기회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위험한 일이지만, 그만큼 신앙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르칠 기회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3,4)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회가 좋든 나쁘든 상관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서 늘 하느님께서 여기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어 당신 자비의 손길을 뻗으신다는 사실을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눈이 곧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비딱한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 비뚤어진 마음의 상태가 문제의 근원이었으며, 그런 마음이 바로 눈을 통해 드러났다고 봅니다. 콩깍지가 낀 상태에서 이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헤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3,4)라고 물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비굴한 태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노기 띤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보시고 슬퍼 탄식하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손을 펴라.” (3,5)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시고 한 편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다른 한편 그들에게 화를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저는 성깔 있는 남자입니다. 저희 형제들과 차이가 있다면 저는 어떤 면에서 형제들보다 건강한 까닭은 화를 적당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잘 아시는 것처럼 느낌은 윤리성이 없으며, 느낌은 내적 상태의 표현이며, 때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런 부정적인 느낌은 불편하지만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화, 제대로 내기」의 저자 ‘버트 게찌’는 화를 진정시키는 3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억누르지 마라.(=참지 말라), 둘째, 올바르게 표현하라, 셋째, 빨리 안정시켜라.(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의노 즉 화를 내셨지만 적절하게 표현하셨으며, 오히려 그런 마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라,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펴는 것은 자신에게 향한 개인적인 행동이라면,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타인과 세상을 향한 공개적인 행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단지 그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든 우리 모두에게 마음을 펴라, 마음을 열어라, 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이 자비롭고 인자한 명령을 듣고 세상과 타인을 향해 손을 뻗고 마음을 활짝 열어 봅시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주는 일이 바로 아버지의 뜻 곧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이는 바로 좋은 일이며 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이를 알고 있으며 믿고 있는 그리고 살고자 하는 삶은 바로 하느님 모상적 존재이고 자녀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일이 바로 아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낫게 해주는 일이 사람이 해야 할 꼭 알맞은 일이며, 좋은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 옳은 일이란 것은 결국 그 일이 하늘의 뜻이며, 하늘은 뜻이란 사람을 살리는 데 있고 그 일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단지 천명에 순응한 것뿐입니다.
● 1월 17일, 1969년 5월 사제 서품을 받고 9월 한국에 파견되어 저희와 54년 동안 함께 생활하던 손 어진 신부님(Thomson Richard Joseph)께서 건강 등의 이유로 본국 미국, 루이빌 수도원으로 돌아가십니다. 손 신부님은 관구 이적을 하지 않고 저희 한국 순교자 관구 소속으로 거주지만 옮깁니다. 부디 낯선 곳(?)에서 몸도 마음도 편히 행복하게 생활하길 간절히 기도하며,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기억하고 기도해 주길 바랍니다. 신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히 살아가길 바라며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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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의 취침 시간은 보통 저녁 9시입니다. 남들은 “아니, 어떻게 이 시간에 잘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일찍부터 이런 습관이 들어서 9시 이후에는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하긴 어렸을 때에는 텔레비전 9시 뉴스 전에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등화관제도 있었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도 있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밤낮으로 일하고 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지면 뇌가 쉴 수 있었지만, 현대는 끊임없이 뇌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편해졌고 풍요로워졌어도 지금은 항상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이렇게 다양성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염려와 힘듦을 주님 안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믿고 그 안에 머무는 이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
‘아무것도’라는 말에 머물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문장을 현재형으로 썼습니다. 지금 걱정에 갇혀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걱정과 불안 속에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엄격한 율법의 틀 안에서 힘들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가볍게 해주십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에 묶여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안식일이 사람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안식일 규정을 스스로 어기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 찾고 있으며, 실제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까지 합니다. 헤로데 당원은 유다인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보다는 로마에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보면 바리사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에 같은 편이 되고 맙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특히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다시 성하여진 것처럼,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주님을 통해 쫙 펴져서 주님께 찬미의 감사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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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날에는>
마르코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날에는>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주님의 날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 삶의 구석으로 밀어낸
나를 빚으신 주님을
내 삶 가운데로
정성스레 모시는 겁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날이니
하루하루 날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주님의 날에는
온갖 바깥 것들에 홀려
내 눈길마저 닿지 않은
주님께서 빚으신 나를
내 눈길 가운데로
부드럽게 부르는 겁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날이니
하루하루 날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주님의 날에는
차갑게 닫아버린
내 마음 밖에서 아파하는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벗들을
내 마음 가운데로
따스하게 품는 겁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날이니
하루하루 날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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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이 오그라든 병>
얼음 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다면,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또 섣불리 대처하면 둘 다에게 위험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행동으로 옮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은 다양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의 손, 악의 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손은 폭력의 손, 강도를 만난 사람을 스쳐 지나간 사제나 레위 사람의 손은 오그라든 손, 강도를 당한 사람을 간호해 준 사마리아인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며 사랑으로 활짝 펴진 손입니다.(故유광수 신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신 것은, 그를 통해서 자신의 오그라든 모습을 똑똑히 보라는 것이며 오그라든 마음을 펴주시기 위함이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치유도 어렵습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완고한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활짝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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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현역>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믿는 이들 누구나의 공통적 신원은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성서와 사막수도자들의 전통은 믿는 이들의 삶을 영적전쟁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제가 수도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론 주제로 인용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인용할 주제입니다.
“신부님, 오늘 아침 강론 중에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이라는 말씀을 깊이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묵상하며 오후 5시경 시점에 살고 있는 저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제 새벽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린 강론을 보고 즉시 저에게 카톡메시지를 보낸 70대 후반의 형제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영원한 현역으로 주님의 전사다운 삶을 사는 형제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영적전투 치열한 하루의 삶이었군요! 오늘 하루 영적승리의 삶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시며 만족해 하십니다.”
하루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산 형제에게 예수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보낸 위로와 격려의 덕담 메시지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서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형제자매들의 삶이 참 고귀하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제 경우는 날마다 밤 12:30분쯤 일어나 영적전투에 돌입한후 하루를 마감하는 끝기도후 오후 8:30분 잠자리에 들 때가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하루의 영적전쟁을 끝난후의 휴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끝기도시 독서도 기도도 참 적절하여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1베드5,8-9ㄱ)
역시 불퇴전의 주님의 전사, 베드로 사도가 영적전쟁중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격려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참 아름다운 마침기도후 잠깨어 일어나 강론을 쓰며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주님, 자비로이 이 밤을 비추어 주시고, 밝아오는 아침에 당신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건강한 몸과 기쁜 마음으로 새날 빛을 볼 수 있도록, 오늘 평화 속에 쉬게 하소서,”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속에 시작된 새날입니다. 오늘은 사막수도자들의 아버지요 영적전투의 달인이자 주님의 전사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105세까지 장수를 누리셨으니 아마 성인중 가장 장수한 분임에 속할 것입니다. 그 치열한 영적전투에 주님의 전사로 빛나는 공훈을 세우며 장수했다는 사실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이분에 대한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저서인 ‘성 안토니오의 생애’는 수도자들의 교과서와도 같았습니다. 그분을 회심으로 이끈 말씀에 즉각 순종으로 응답한 성인의 삶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복음의 부자청년은 실패했지만 안토니오는 곧장 실행으로 옮김으로 성공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성 안토니오가 우유부단한 수도자들에게 주는 깨우침이 참 큽니다. 이어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마르지 않는 샘같은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중에는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안토니오 아빠스에 관한 주옥같은 일화도 참 많습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1.“사막에 살던 거룩한 안토니오 압바가 ‘권태accidie’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수한 죄스런 생각들에 공격을 받던중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고자 하나 이런 나쁜 생각들이 저를 홀로 놔두지 않습니다. 저는 이 고통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잠시 후 일어나 나가려했을 때 안토니오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앉아 일하다가 일어나 기도하고 그 다음 앉아서 밧줄을 꼬고 그 다음 일어나 다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바로 안토니오를 교정하고 격려하고자 보낸 주님의 천사였다. 그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 ‘이대로 하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기쁨과 용기로 가득차서 이대로 행하였고 구원을 받았다.” 일상의 궤도에 충실함이 구원의 첩경이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귀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2.“성인은 또 말합니다. ‘유혹을 체험하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유혹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니 유혹을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유혹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3.“안토니오 압바는 악마들이 세상 곳곳에 쳐놓은 무수한 덫을 보며 ‘무엇이 이 덫들을 통과하게 할 수 있나?’ 탄식합니다. 그때 들려온 음성입니다.
‘겸손(Humility)’”.
참으로 모든 덕의 어머니인 겸손을 지닌자만이 악마의 덫을 벗어날 수 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4.“압바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을 금욕생활로 자기 몸을 괴롭히고 있는데 이들은 바로 분별(discernment)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새삼 영성생활에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필수 덕목인지 깨닫게 됩니다.
5.“해마다 세 제자들이 안토니오 압바를 찾아 토론도 하며 자기 생각을 펼쳤는데 그중 하나만은 언제나 침묵을 지켰고 자기에 관해서도 일체 함구할뿐이라 안토니오 압바가 물었을 때 다음 그 제자의 답변입니다.
‘사부님, 저에게는 당신만을 뵙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It is enough for me to see you, Father)’.
문득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무엇이 부족한가 물을 때마다 ‘Enough(충분하다)’ 한마디로 끝냈다는 일화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막교부들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명랑하고 지혜롭고 평화로우면 유머감각도 뛰어났던 영성대가들이 안토니오를 비롯한 사막교부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다윗이야 말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사울이 지는 해라면 다윗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주님의 용사, 소년 다윗의 다음 상대방의 거인 골리앗을 향한 호통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나왔다...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과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의 용사, 믿음의 전사로서 다윗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요 역시 결과는 거인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끝납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다윗의 승리야말로 영적승리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이 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적대자들에 대한 또 화려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공동체 한 가운데 세우시고 일언지하로 적대자들의 말문을 막으시니 예수님의 승리요, 역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질문안에 답이 있으니 이들은 묵묵부답이요 이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며 주님은 재차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말씀하시니 그 손이 성하여집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니 적대자들과의 영적전쟁은 계속되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죽을 때가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될 영적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그라든 손을 활짝 펴 주신 하느님의 전사인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고,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완전무장시키시어 우리 모두 당신 믿음의 전사로 오늘 하루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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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 장애를 보며>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오늘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 세웁니다. 사람들 가운데 중심인물 곧 주인공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한 번도 이렇게 중심에 서 본 적 없는 그로서는 얼떨떨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 그와 주님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이런 장애인을 중심에 세운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늘 자기가 중심이고 이런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몰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장애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겁니다. 자주, 아니, 한 번만이라도 그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장애인들의 수십 년 고통에 이렇게 매몰차고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안식일을 운운하며 죽이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평일에도 장애인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 고쳐주셨어도 잘하신 것이라고 주님을 칭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불편을 보지 못하는 사랑 장애를 이들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에 이 사랑 장애가 육신의 장애보다 훨씬 불행한 장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그들에 대해 분노하시면서도 다른 한편 슬퍼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저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주 분노하거나 가여워할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거나 오히려 먼저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이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어떤 때는 분노하고 어떤 때는 그들의 영적 장애와 사랑 장애에 가여워합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할 때는 분노만 하고, 저의 사랑이 차올라있는 상태일 때는 그들의 미래 불행을 내다보며 가여워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미래가 뻔히 보입니다. 불행해지라고 제가 저주하진 않지만 불행해지는 그들을 저는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내 저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밖 곧 남을 보다가 안 곧 나를 보는 것이지요
나는 내 가운데 그들을 세우고 있는가? 그들의 고통이 내 안에 있는가?
그들이 저의 중심에 있지 않고 제가 저의 중심에 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자기중심적인 저이지요.
그러니 주님처럼 그들을 공동체 한가운데 세우지도 않습니다. 공동체 가장자리에 있는데도 가운데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 장애를 저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고
슬퍼하며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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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3,2)
<배척 행위!>
오늘 복음(마르3,1-6)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서 안식일 논쟁이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3,3)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그러나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라."고 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배척합니다.
'배척 행위!'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배척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향주삼덕(向主三德)인 신덕(믿음)과 망덕(희망)과 애덕(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고, 마침내는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그런데도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바리사이들의 그 배척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다르다고, 나와 생각과 뜻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고 너를 배척하는 행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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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ZDsfzMt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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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 3, 5)
사랑으로 완성되고
용기로 뻗어나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진리입니다.
움켜잡아 오그라든
우리의 손을
사랑으로
펴주시며 손을
뻗어라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으니
빈손이 됩니다.
빈손이 되어서야
주시는 것을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말씀하시는 날
오그라든 손이 펴졌고
빠져 있는 곳에서
손을 뻗어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길은
주님을 믿고 오그라든
손을 뻗는 살아있는
순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향해
뻗어 나가야 합니다.
과거가 아닌
새로운
지금 이순간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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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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