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경망스런 잔머리와 경솔한 입 -
권다품(영철)
내 고향은 경남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다례동, 겨울에도 포근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참 아담하고 아늑한 그런 시골 마을이다.
요즘은 경지정리를 하고, 구불구불 했던 도로도 바로 닦아다보니, 모교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편리하긴 했지만, 내 가슴에 젖어있던 학교가는 길에 대한 정서들이 그만큼 지워져버린 것 같아, 어릴 때의 그 정서들이 많이 없어져 버려서 어떤 안타까움도 있다.
옛날, 어릴 때 학교가는 길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비탈 좁은 길도 있었고, 개울도 건너야 하는 길이었다.
학교갔다 오는 길엔 개울로 내려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작은 물고기나 미꾸라지를잡기도 하고, 소래고디(다슬기)를 잡아서 신발에 담아가던 그런 예쁜 추억들이 흠뻑 어린 그런 길이었다.
어리고 짧은 다리로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리던 돌길이었지만, 우리는 그 험한 길에서 온갖 장난을 다 치며 학교를 오가지 않았던가!
그 꼬부랑 비탈 길이나 산비탈, 논밭 등 곳곳에다 우리들의 추억과 웃음, 그리고 눈물들도 뿌려놓았는데, 지금은 도시처럼 쫙 뻗은 길이 빠르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그 아름다움들을 다 걷어가 버린 것 같다.
힘은 들었지만 우리 가슴 깊은 곳에다 그 아름다운 추억들이 묻은 길이었다.
그 예쁜 추억들이 묻은 길을두고 친구들은 객지로 객지로 흩어져 갔는데.....
그동안 사느라고 바빴고, 자식들 키우느라 참 바빴다.
그렇게 바쁘고 빠듯한 시간들을 보내다보니, 늦은 밤 잠자리에서나 옛날 그 모습들을 기억해서 더듬는 고향이 괴고 말았다.
마흔이란 나이가 넘어서야 다들 그 코질찔이 동기들이 보고싶다며, 모임을 시작했다.
뭐가 좋고, 왜 좋은 지도 모르고, 모이면 어떤 점이 좋은 지 얄팍하게 따지는 친구도 없었다.
누가 공부를 많이 했고, 누가 돈을 많이 벌었는지 따위는 필요없었다.
그런 걸 따지는 친구도 없었고, 그저 어릴 때 친구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술도 마시고, 옛날에 부렸던 말썽들을 얘기하면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고, 뒤로 넘어가는 그런 자리였다.
특히 나는 더 좋았다.
말썽을 피우고, 동네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리고, 손가락질을 받아오던 나였기에, 반갑게 맞아주는 그 모임이 참 좋았다.
친구들이 모인다는 연락만 오면, 어떤 모임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따지지도 않고 나갔다.
그저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동기 모임이 일 년에 한 번, 망년회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개별적으로 전화를 해서 동기 모임을 몇 번을 더 하자고 했다.
많은 친구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그러자고 했다.
나는 친구들의 좋다는 말을 듣고 '이제부터는 일 년에 몇 번씩 만나서 옛날 얘기들로 꽃을 피우며 술잔을 나누며 즐거울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르는데도 기척이 없었다.
'바빠서 그렇겠지! 내 년부터는 자주 모일 수 있겠지!'
그러면서도 틈틈이 동기회 간부를 맡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언제 모일 때 우리 기수도 자주 모알 수 있도록 존체적으로 의논을 한 번 해 보자"고 했다.
그때마다 다들 "그러자"고 하긴 하는데, 그 이후에는 도통 모인다는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우리 국민 학교의 선후배가 다 모이는 총동창회가 다가 왔다.
'어차피 여태 못 모였으니, 그때 얘길 나누면 되겠다'싶어서 어렵게 수업을 바꾸면서까지 총동창회엘 참석했다가, 무안에서 우리 기수들만 따로 모였다.
평소엔 남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내가 모처럼 한 번 앞으로 나가서, 그간 여러 친구들과 전화로 대충 조율된 의견을 말했다.
"언제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망년회만 하겠습니까? 분기별로 네 번을 모이든 지, 그렇지 않으면 전반기 후반기 이렇게 두 번이라도 모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싶어서 내가 친구들한테 전화를 쭈욱 해봤습니다. 친구들도 좋은 의견이라며 다 그러자고 합디다. 몇몇이 모여서 하는 계모임도 좋지만, 그건 그것대로 따로 모이고 전체 동기회를 활성화 시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맞다. 맞다. 철이 말 좋은 말이다."
여러 친구들이 박수를 쳐며 찬성을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박수를 치고 내가 말을 끝내고 들어가려는데, 한 친구가 앞으로 나왔다.
"잠깐만, 잠깐만..... 방금 영철이 친구가 차~암 좋은 말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부산에서 차를 같이 타고 올라오면서 친구들한테 의논을 해 보이끼네, 마 이대로 하는 게 좋다고, 이대로 하자고 합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말을 하려면, 내가 나가서 말을 하기 전에, '얼라오면서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 고, 미리 나를 불러 얘기를 해 줬어야 하지 않는가!
또, 그 말을 하기전 창문을 내다보며 나랑 둘이서 담배도 같이 피우지 않았던가!
그때 얘길 했더라면 내가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의논을 했다는 사람의 수가, 고작 부산에서 올라오는 8~9명의 말로서 그렇게 다수의 박수를 받는 의견을 짓이겨 버린단 말인가?
화가 났다.
그러나,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즐겁게 노는 자리에서 언성을 높여 분위기를 깨는 건 아니다 싶어서 화를 눌러참고 그냥 조용히 들어왔다.
마칠 때도 그 친구가 앞으로 나가더니나 마무리 인사로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자~, 우리 오늘 즐겁게 놀았으니까, 다음에 망년회 때 또 모여서 또 한 번 멋지게 놀아봅시다."
솔직히 화가 났다.
'80명이 넘는 동기들의 의견을, 같은 차를 타고 온 열 명도 안되는 저희들 맘대로 저렇게 결정을 해 버린단 말인가? 그러면, 그 8,9명외의 나머지 친구들 의견은 뭐란 말인가? 또, 어찌 시작도 안해보고, '안 될 것 같다'는 짐작만으로 그렇게 결
정을 해 버린단 말인가? 그러니까, 총동창회 참석을 위해 부산에서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이미 그렇게 결정이 된 상태란 말 아닌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많은 친구들 앞에서 열을 올렸나 싶고, 평소에는 좀처럼 앞에 나서지도 않던 놈이, 앞에까지 나가서 의견이랍시고 낸 내가 부끄러웠다.
혹시, 자기들끼리 올라오면서 '영철이가 일 년에 몇 번씩 만나자고 하던데, 그러면 우리 "둘둘 모임"이 곤란해질 수도 안 있겠나! 그러니까 동기회는 일 년에 망년회로 한 번만 만나자'고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몇 명 안 되는 계모임을 위해 전체 동기회 모임을 줄였다는 잔머리 아닌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더 기분 나쁜 일도 있었다.
도대체 그 친구는 내가 없는 동기 모임에서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길래, 내가 그 말을 할 때, 전체 동기회 모임에는 나오지도 않던 여자동기가 입에서 "니는 사나 자석이 아~가(애가) 와그래 초잡노?"란 말을 할까?
그 무식한 여자 동기 입에서 그런 말을 나왔다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을 얼마나 합리화 시키고, 나를 얼마나 헐뜯었다는 말인가!
자세히도 모르면서 남의 말만 듣고 그런 경망스러운 말을 하는 여자동기도 경멸스럽지만, '동기 모임을 한 번만 하지말고 몇 번 더 하자'는 동기를 나쁜 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가진 그 친구의 경멸스러움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 하다.
인품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면 지우는 게 맞겠다.
모르겠다.
혹시 내가 동기회 전체 모임이 아닌, 개별적인 모임인 "둘둘 모임"에 빠진 것 때문에, 나를 계속 나쁜 놈으로 씹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정도밖에 인간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라면, 솔직히 내게서 떠나주는 게 어떤 절대자의 보살핌일 지도....
그 이후 다른 자리에서 나와 마주칠 때, 그 사람들은 죄진 듯이 흘끔흘끔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그 잔머리들과는 헐 수 없이 건성으로 인사만 나누고는 눈길을 내려깔며 무시해 버리고....
2010년 8월 18일
권다품(영철)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