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琉璃)는 중국에서 전파되었을까? 한국의 많은 문화의 근원지인 중국은 그러나 유리제품에 있어서만은 예외라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박세욱 경북대 강사는 최근 '퇴계학과 한국문화' 제39호에 '유리의 동아시아 전파에 관한 일고찰'이란 논문에서 "한국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유리를 서방에서 해로나 육로를 통해 독자적으로 수입했으며, 나중에는 이를 중국에 전파하기도 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시대 신라는 이미 로마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응용한 가공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따라가 보자.
5~6세기 경 신라고분에서는 모두 18점의 유리제품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형태, 색깔 등에서 대체로 후기 로만 글래스에 속한 것으로, 4~5세기 경에 지중해 연안지방에서 제작된 후 흑해를 북상하여 전해진 것이다.
이 시기 신라는 2백년간 중국과 단 두번의 조공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따름이며,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고구려를 위에 두고 어떻게 신라에 후기 로만 글래스 양식이 북중국을 거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라고 중국전파설을 공박한다. 이는 고구려 유적에서 유리제품이 발굴되지 않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박 씨는 이미 고조선의 항해기술은 일본과 제주도에 갈 만큼 정도가 됐고, '삼국유사'를 보면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그녀의 아버지가 꿈에서 만난 상제의 명에 따라 수로왕의 왕비가 되기 위해 석탑을 배에 싣고 동쪽으로 바다를 지나 가락국의 남쪽 끝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가야국을 표현한 명칭들이 불교 연관 인도어라는 점, 김해 神魚山 銀河寺에 보이는 쌍어문(雙魚文)으로 짐작해 볼 때 기원후 1세기 전후에 동남아, 인도까지 갈 해양기술은 됐다고 추증한다.
게다가 가야와 신라의 묘에서 발견되는 대량의 유리구슬은 색과 제조수법에 있어서 인도, 태국, 광서, 그리고 일본 구주 유리구슬들과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어 이 쪽 해상루트의 심증을 더욱 굳히게 한다는 것.
이와 연관해 박 강사는 흥미로운 사료를 소개한다. 청나라 진원룡이 편찬한 1백권으로 된 '격치경원(格致鏡源)'이라는 백과사전을 보면 고려의 유리에 대한 평이 나온다. "고려에서 나는 것은 성격이 견고하고 칼로 베어도 끄떡없다. 그 색은 하얗고 두께는 반촌이다. 점등하면 더욱 밝아 魚煎 유리보다 훨씬 뛰어나다"라 되어있다.
박 강사는 "고려의 유리제품들은 시라 이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한 결과로서, 비록 초기에는 외래의 것을 받아들였지만, 곧 소화해 거꾸로 수출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우리 문화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 특히 중국 이외의 지역들로 향하는 해로와 지역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허나 박 강사의 연구는 중국의 고대문헌에 대한 꼼꼼한 해석과 검토는 돋보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미 학계를 넘어 "신라시대 유리 공예품의 무늬는 페르시아 유리 제품이 홍수를 이루었고, 귀족들의 집에는 페르시아 카펫이 깔렸"으며 "로마 또는 페르시아를 출발한 유리는 초원의 길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지나는 바닷길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와 종착점인 신라에 이르렀다"는 정도의 얘기는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입력 : 2007년 03월 07일 17:53:55 / 수정 : 2007년 03월 07일 18:16:46
첫댓글 언론보도만으로만 보면, 박씨의 주장은 심대한 장애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라고분 출토품은 커트글라스로서 지중해 연안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직접 들어오다니? 최소한 쓰리쿠션 이상 되는 '도매'를 거쳤습니다. 그 항로는 중국 남안입니다. 이를 통해 상륙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