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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병자난 이후의 불교
유학자, 불교 경제·노동력 착취
임진왜란 때 호국불교의 기치아래 승병들은 눈부신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난이 평정되고 나서 1604년 나라에서는 선조의 어가를 호위한 호성(扈聖) 공신,
무공을 떨친 선무(宣武)공신 등의 이름으로 공신 138명을 책록하였는데 스님은 한 명도
들지 못했다.
1605년 선무공신 1,060명, 호성공신 2,475명, 정난공신(이몽학 평정) 995명을 새로
추가 지정하였으나 휴정·유정스님마저 여기에 끼워주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 문도들의 요청으로 몇 군데 사당이 들어섰을 뿐이다.
곧 2백여년이 지난 뒤인 대둔사에 휴정스님의 위패를 모신 표충사를 지정하고 예관을
보내 제향을 드리게 하였다.
반면 광해군은 불교에 애정을 보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일선에서 몸소 스님들의 활동을 목격하였다.
그는 명청(明淸)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추구하여 국가의 재난을 막으려 하였다.
한데 주자학파인 배청론자들은 광해군을 군신의 의리를 저버리는 처사를 하였다 하여
맹렬히 비난하였다.그리하여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흔들렸다.
이런 속에서 광해군은 불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성지(性智)스님은 풍수설의 대가였다 한다.
그가 서울의 사대부집에 출입하다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서대문 밖에 집을 짓고 사미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많은 스님들이 이 집에 출입
하여 절과 같았다 한다. 광해군의 호불정책 그는 “인왕산 아래 왕기(王氣)가 있으니 궁
궐을 지어 이를 눌러야 한다”고 건의하여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가 수천 채를 헐어내고 승군을 동원하고 팔도의 인부와 목재를 징발하였으며
그래도 모자라자 벼슬을 팔아 재원을 마련하였다 한다.
또 금은과 소금 무쇠와 집터를 바치는 자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었다 한다.
광해군은 유정스님의 제자로 무고로 역적에 연루된 선수(善修, 浮休)스님을 문초하다가
고승임을 알고 많은 선물을 주고 서울 주변에 머물러 불법을 펴게 하였다.
이어 선수스님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명군을 따라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각성(覺性, 碧巖)
스님을 불러 올려 선교 도총섭을 삼아 신임을 보였다.
광해군은 두 승려에게 많은 편의와 물자를 대주며 왕사처럼 대우하였던 것이다.
이런 탓으로 스님들의 도성 출입 금지는 사실상 빈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왕비 유씨는 궁중불교의 전통을 이어 열렬한 불자로서 궁중에서 불상을 만들어 여러
사찰에 나누어주었다 한다.
그녀는 너그럽고 인자한 성품이어서 늘 부처님께“원컨대 내세에는 왕가의 며느리로 태어
나지 말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다.
유씨는 음모와 술수를 부리지 않고 임금의 살생을 막으려는 등 선한 공덕을 지어 실천한 참
불자로 꼽힌다. 불자를 앞에 내세우고 정치적 술수를 부려 무수한 사람을 살육한 인수대비나 문
정왕후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광해군이 폐출된 뒤에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비난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 치하에서 벼슬을 한 선비로 불교계로부터 각광을 받은 허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허균은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 교육을 받고 벼슬길에 나왔다.
그런데 그는 늘 불교를 받들었다 하여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젊을 때부터 불교의 경전을 읽기도 하고 스님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그는 늘 불경을 외우고 부처님을 방안에 모시고 조석으로 예불하였으며 때로는 먹물 옷을
입고 염불하였다.
허균, ‘불교 대중화’ 시도 그가 삼척부사로 있을 때 금강산 낙가사 건봉사 등지를 찾아다니며
옥준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옥준스님은 고승이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술마시기 말타기 활쏘기 바둑두기를 일삼았다.
그는 옥준스님에게 관아에 딸린 기생 하나를 보내주고 네 가지에서 한 가지를 더 즐기라고
당부하면서 오기가(五嗜歌)를 지어 주었다.
1602년 그가 서른 네 살 때 휴정에게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는 “남과 나 그리고 만물이 모두 공이다”라고 말하였으며 같은 해 금강산 도솔원 미타전의
비문을 쓰면서 “나라에서 이단을 막아 불교를 높이지 않는 것은 옳기는 하되 사람들이 복을
신불에게 비는 것은 또한 한 길이다.
위에서는 유학을 높여 선비의 습속을 맑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이 고를 것이다”〈성소부부고〉라고 하였다.
그는 유정스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교의를 문답하였다.
허균은 휴정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유정스님과는 친구 사이로 흉허물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가 수안군수로 있을 때 명필 한석봉에게 〈반야심경〉을 금글씨로 베끼게 하고 유명한
화가 이정에게 부탁하여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 관세음보살과 달마대사 육조대사 유마힐
거사 방온거사의 화상을 그리게 하여 찬을 짓고 거실 벽에 걸어두었다.
이를 두고 조리가 없다고 말하나 선교와 거사불교까지 아우르는 재가 불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가 삼척부사로 있을 때 언관들은 허균의 벼슬을 떼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건의하였다.
“삼척부사 허균은 유가의 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비와 형을 배반하여 불교를 믿고 불경을 욉니다.
평소에는 중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하였으며 수령이 되어서는 재를 올리고 중들을 먹이면서
여러 사람이 보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적에는 제멋대로 선과 부처를 좋아하는 말을 늘어놓아 유교의 교화를
현혹시켰습니다. 지극히 해괴합니다.
벼슬자리에서 몰아내어 선비의 풍습을 바로 잡으소서”〈선조실록〉 이런 지탄은 그의 일생을
두고 끊이지 않았다.더욱이 그는 유정스님이 열반한 뒤에 그의 탑비명을 썼으며, 유정스님이
죽을 때 제자들에게 스승의 문집인 〈청허당집〉의 서문을 허균에게 부탁하라고 일러 이를
쓰기도 하였다.
그가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쓰면서 해인사의 재물을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도 많은 재산을 끼고 안락을 일삼는 총림불교의 승려들에게 중생제도를
실천하라고 지른 할(喝)이 아닐까.
그가 마지막 신분제적 봉건체제를 타도하려 역모를 꾀할 적에 그의 수하에는 하급 무사와
중인 서자들과 함께 스님들이 많이 참여하였다는 사실도 어떤 시사를 줄 것이다.
다시 말해 핍박받는 스님을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지위 향상을 도모한 것이라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이이와는 달리 불교도임을 스스로 표방하고 변명하지 않았다.
또 관념으로만 합일을 외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 공유하는 교화를 말하였으며 계율보다 대승
불교의 실천면을 강조하여 생활불교를 표방하려 들었다.
적어도 조선시대 드러내놓고 불교도임을 표방한 유일한 벼슬아치였으며 이를 신앙만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접근한 유가 출신의 불자일 것이다.
허균은 조선 후기 불교 대중화의 기수였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낸 뒤, 유학자들의 등살에 못이겨 다시 스님들의 도성 출입을 전면적
으로 금지시켰으며 스님들이 말을 타고 시정에 왕래하는 것조차 막았다.
더욱이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을 헐어버렸으며 남은 건물은 비구니들이 사용하게 하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불교세력을 꺾으려는 조치였다.
인조를 떠받드는 세력은 철저히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파였다.
따라서 청나라는 조선을 제압하려 들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일대 항전을 결의하고 전비를 갖추었다.
1624년부터 남한산성에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벌였다.
이 때에 다시 교묘한 꾀를 짜냈다.
길이 8천미터의 공사를 벌이면서 처음에는 서울 도성 공사의 경우처럼 그 주변의 승려를
모아 인부로 동원하였다. 하지만 공사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자 각성(覺性)스님을 팔도 도총섭
으로 삼아 전국의 스님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하였다.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완성한 남한산성은 서울 방어성으로서 도성 다음 가는 큰 규모였다.
각성스님은 성을 완성한 공로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그 공적을 쓴 교지(敎旨, 현재 화엄사에 보존)와 의발(衣鉢)을 받았다.
그 동안의 예로 보아 허울뿐인 영광에 불과했다.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을 두어 군사를 배치하였는데 그 곳의 평상시 주력군은 스님들이었다.
성안에 승도청(僧徒廳)을 별도로 두어 승병을 총괄하였으며 그 안에 있는 9개의 절은 승병들의
막사와 숙소로 사용하였다.
승병조직은 지휘관 훈련관 등을 포함해 500여명으로 편제하였다.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따라 승병이 전국의 절에서 번갈아 불려 나왔다.
승병은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면서 국가의 편안을 기원하고 낮에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다.
청나라 맞서 승병 궐기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전국의 의병들이 동원
되었다. 각성스님은 화엄사에 주석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격문을 띄워 호남의 승려 수천명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묘향산의 승려 명조(明照, 虛白堂)스님은 북도에서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승병과 군량미를 모아 후퇴하는 청군을 공격하는 관군을 도왔다.
이 공로로 그에게 의승도대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사례가 조선 왕조의 마지막 동원된 승군이었으며 호국불교의 종장이었다.
아무튼 위에서 본 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기간인 50년 동안, 문정왕후가 죽은 뒤
침체되었던 불교가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나마 숨통이 트였다.
조정의 정책은 억불의 기조는 견지하되 불교의 실체를 인정하여 최대한 전후 복구 또는 경제의
착취대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승직과 승계를 주면서 의승군 제도를 두고 잡역에 정기적으로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가선대부 통정대부 등 품계를 주기도 하였고 남한산성 등 여러 성을 쌓는 일과 산릉
축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한편 스님들 사이에는 공명첩(空名帖)을 돈을 내고 사서 신분 상승을 도모하려는 풍조가 일어
났으며 사회적 대우가 향상된 것은 호국불교에 기인한다고 여겨 불교의 중심 가치를 여기에 두는
경향이 일어났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