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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1월19일(일요일) 도봉산 [만월암&포대 정상&망월사&원효사&쌍용사] 산행일정
산 : 도봉산 [만월암&포대 정상&망월사&원효사&쌍용사]
산행코스: [ 도봉산역 1번 출구 ~ 광륜사 ~ 도봉 대피소 ~ 만월암 ~ 포대 정상 ~ 포대능선 ~ 망월사 ~ 원도봉 계곡 ~ 도봉산 원효사 ~ 도봉산 쌍용사 ~ 망월사역 ]
일시 : 2023년 11월 19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도봉구 도봉동 최저기온 2도C, 최고기온 13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3분 소요)
09:03~10:17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도봉산역으로 이동한 후 도봉산역 1번 출구로 나옴 [1시간14분 소요]
10:17~10:33 서울 도봉구 도봉동 298-4 번지에 있는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도봉구 도봉산길 86-1 번지에 있는 광륜사(光輪寺)로 이동
10:33~10:45 광륜사(光輪寺)를 탐방
[신정왕후 별장 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신정왕후의 별장 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길 86-1
도봉산 입구에 있는 광륜사(光輪寺)라는 절은 원래 신정왕후[1808~1890], 곧 조대비(趙大妃)의 별장 터이다.
신정왕후는 조선의 추존왕 문조(효명세자)의 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이며, 순조와 순원왕후의 며느리이다. 조선 말 '다섯 전하' 중에 가장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며,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4개월 11일)하였으며, 가장 오랜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 한국근현대사에서 흔히 말하는 '조 대비'가 이 사람이다. 대비로서의 공식 명칭은 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지만, 후대에는 '조 대비'가 통칭으로 굳어졌다. 세도정치 시기,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신정왕후는 1857년(철종 8) 순조(純祖)의 비인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신정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자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고종)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정왕후는 고종 즉위 후 1866년(고종 3)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6년(헌종 12) 아버지인 영돈령부사 조만영이 죽은 뒤, 신정 왕후는 현재의 도봉동인 도봉산 입구에 별장을 지었다. 도봉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별장 터로 적격이었을 것이다.
1947년에 도봉산의 서원 마을로 들어온 정경근의 증언에 의하면, 신정왕후 별장 터는 큰 저택으로 안채에 비해 바깥채가 높았다고 한다. 고종 대에는 신정왕후의 별장에서 흥선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6·25 전쟁 중에 미군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1980년 훼손되기 전까지 영화 촬영장으로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신정왕후 별장은 이후 매각된 뒤 헐리었고 별장 터에 금득사라는 개인 사찰이 설립되었다. 2001년에 성륜 문화 재단에서 금득사를 인수하여 중창 불사를 하였고, 2002년에 광륜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현재 광륜사의 대웅전 등 전각 대부분은 금득사 때 그대로라고 한다.
신정왕후 별장 터에 들어선 광륜사의 삼성각에는 신정왕후의 초상과 영가(靈駕)를 두어 신정왕후와 광륜사의 인연을 보여 주고 있다.]
10:45~11:35 만월암(해발 500m)으로 이동
11:35~11:45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알려진 만월암(滿月庵)을 탐방
[만월암(滿月庵)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도봉산 만장봉(萬丈峰)에 있는 절.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보덕굴이라 하여 수선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에도 참선수행하는 승려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기간 :661∼681)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건, 중수하였고, 1940년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로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하여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에도 참선 수행하는 승려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과 만월선방(滿月禪房), 요사채가 있고 능선 위에 산신각이 있다. 법당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좌상이 있으며, 뒷면에는 후불탱화가 있다. 법당 뒤에는 석굴이 있는데, 이 곳에서 엽전과 도검·방패·화살촉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11:45~12:10 포대능선의 최고봉인 포대봉(해발 716m, 포대 정상으로도 부름)으로 이동
[예전에 북한의 남침을 대비한 대공포대가 있어서 포대능선이라고 부른다.]
12:10~12:25 간식 후 휴식
12:25~13:00 포대능선을 거쳐서 망월사(望月寺 , 해발 589m)로 이동
13:00~13:20 경기 의정부시 망월로28번길 211-500 번지에 있는 망월사(望月寺)를 탐방
[도봉산 망월사
[불교신문 3365호/2018년1월31일자]
기자명=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강대국에 치여 시름하던 ‘조선의 눈물’ 현판에…
구한말 청나라 사신 원세개
임오군란 진압 차 조선 원정
1891년 가을 ‘망월사’ 올라
현판 쓰고 자신의 이름 남겨
10여년 간 조선 정치 좌우
청일 전쟁 직전 귀국 길에
조선인 3명 첩으로 데려가
손자는 노벨상 후보 오른
세계적 물리학자로 명성
조선 500년 수도였던 서울의 사찰은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 창업에 얽힌 이야기가 절 곳곳에 서려 있고, 근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은밀한 회합 장소도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6·25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도 녹아있다.
도봉산 망월사도 그 중 한 곳이다. 국철 1호선 망월사역에서 1시간30분 가량 올라가 포대능선 정상 아래에서 서울과 의정부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 639년 해호 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경주 월성을 바라보며 왕실의 융성을 기원했다 해서 망월사(望月寺)라고 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맞대는 최전선이었다. 추풍령 아래 척박한 땅에 갇혀 지내던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여 기세를 떨치던 때다. 최전방 산중 사찰은 접경지역 주민 선무(宣撫) 역할과 함께 군대 지원 역할도 했다. 망월사도 당시 똑같은 역할을 부여 받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3·1독립운동 33명 중 만해와 함께 불교를 대표했던 백용성스님이 1905년 선원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길렀다. 제자들 중에 석우 동산 고암스님 등 3명의 종정이 나왔다. 동산스님은 백용성스님이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자 망월사와 종로 대각사를 오가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스님도 같은 이유로 투옥된 스승 만해스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스님은 동산스님과 함께 서울의 형무소를 오갔는데, 두 ‘상좌’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스승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춘성스님은 일제에 이어 정화 당시 다시 망월사를 찾아 한국전쟁으로 허물어진 가람을 중수하고 매일 지금의 역까지 오가며 도량석을 돌았다. 머리가 좋아 <화엄경>을 거꾸로 외우고 항아리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공부를 해서 잠을 이겨낼 정도로 뛰어났으며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금오스님도 망월사를 지켰다. 맏상좌 월산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했다.
지난 18일 도봉산에 올랐다. 자운봉과 다락능선 포대능선 뒤편은 온통 눈 밭이다. 포대능선은 6·25 한국전쟁 때 포병부대가 있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온이 뚝 떨어져 등산객들의 발길도 뜸했다. 천중선원은 고요했다. 1994년까지 조계종종립선원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선원이다. 백용성스님과 금오스님의 선기를 잇는 선원이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북쪽 포대능선과 달리 망월사 쪽은 바람도 없고 따뜻하다.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주지 스님 집무실 등 요사채가 있는 건물 무위당(無爲堂)에 한자로 망월사(望月寺) 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 내용이 특이하다.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광서 신미중추지월(光緖 辛未仲秋之月)’이 눈에 들어온다. 광서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를 말한다. 1891년 가을에 원세개가 썼다는 뜻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12대이니 기울어 가던 청나라 사신이 옛 제후국에서 한껏 호기를 부린 셈이다.
원세개는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나이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청군(淸軍)과 함께 조선에 왔다.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은 급격한 개혁정책에 반대한 군인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은 조선에 대한 주권을 갖고자 했다. 청은 명성황후 등 민씨 일파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좌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과 아직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던 일본은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 남의 나라를 놓고 제 멋대로 요리했다. 국운은 다하는데 왕은 무능하고 지배계층은 나뉘어 반목하니 주변 강국이 우습게 여기고 마음 껏 농락한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만 힘든 법. 참지 못한 백성들이 일어서 동학농민전쟁을 벌였다. 원세개가 들어오고 10여년이 지난 뒤 역사다. 결국 텐진조약이 동학전쟁을 진압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10여년 간 힘을 기른 일본은 청나라를 타격해 승리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조선 땅에서 일어났다. 피해는 고스란히 이 땅의 백성들 몫이었다.
원세개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발발까지 혼란했던 19세기 말 조선 정국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으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을 진압하는데 앞섰고 갑신정변이 발발해 고종이 개화파에게 납치되자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고종을 구출했으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납치했던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키는 등 한중일 삼국이 어지럽게 돌아가던 정국의 중심에 늘 원세개가 있었다.
1885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산대신이 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고 청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그는 망해가는 청을 구하지 못했고 동북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일본을 막지도 못했다. 조선은 원세개를 마지막으로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망월사 현판은 120여년 전 어지러웠던 동북아를 말없이 전해준다. 당시 서울에서 의정부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왔으리라. 도봉산은 어떻게 올라갔을까? 그의 신분이 일제강점기 총독과 다름 없었으니 걸어서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에는 유력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이 쓴 현판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북한산 문수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뒤 귀국해 문수암에 올라 남겼다. 그의 어머니가 문수암에서 기도를 드린 뒤 낳아 이 대통령은 문수암을 각별하게 대했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2시간 넘게 오르는 등산로는 지금도 멀고 험하다. 이대통령은 가마를 타고 올랐다. 그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망월암은 문수암에 비하면 길이나 험하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다.
원세개는 청나라로 돌아가면서 조선 여인 세 명을 첩으로 삼아 데려갔다. 그 중 한 여인은 안동김씨 성을 썼다. 원세개와 안동김씨 조선 여인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커원(克文)이다.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조선 피가 흐르는 차남이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를 꿈 꿀 정도였다.
원세개는 쑨원을 강제로 밀어내고 중화제국 황제에 즉위했지만 100일 만에 열강의 반대와 전국에서 번진 반원(反袁) 움직임에 밀려 퇴위한 뒤 실의에 빠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커원의 아들, 즉 원세개의 손자 지아류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어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다. 그의 외아들 웨이청(袁緯承)도 아버지를 이어 물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시 한반도 간섭하는 중국
원세개는 경북궁 주변의 북한산을 비롯해서 많은 산과 사찰을 두고 서울에서 먼 의정부까지 가서 도봉산에 올랐을 까? 여러 사찰에 현판을 남겼는데 이 곳 만 현판이 훼손되지 않고 남은 것일까? 이에 대해 중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한 한 외교공무원은 “원세개는 출세욕과 야심이 많은 사람으로 젊은 시절 망월사 현판을 쓴 것은 망월(望月)이 과거 신라의 수도 월성을 바라보면서 왕실 안녕을 빌었다는 순수한 의미와 달리 멀리 떨어진 북경(北京)을 보며 출세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는지 모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나라가 바뀌는 혼란한 시대에 야망에 찬 정치인이 황제를 꿈꿀 수 있다. 그러나 글씨는 야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처음 글씨를 배우는 아동처럼 얌전하다. 현판에서 정치적 야망을 읽기가 쉽지 않다.
원세개가 현판을 쓴 중추지월(中秋之月)은 가을이 절정인 음력 8월 추석 즈음이다. 가을의 도봉산 정취를 만끽하러 올랐을 것이다. 교교(皎皎)한 달빛 아래 도봉산을 보노라면 어지러운 마음이 가라앉고 세상의 물욕 출세욕은 저만치 달아났을 것이다. 자연과 부처님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구한말처럼 중국이 다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 일어서고 있다. 사드 배치를 핑계 삼아 간섭하려 드는 모양이 구한말과 다름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세계 최강국 사이에 한반도의 운명은 120여년 전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망월사 원세개 현판이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 시절이다.]
13:20~13:40 원도봉 계곡의 두꺼비 바위로 이동
[두꺼비 바위는 도봉산 원도봉계곡에 있는 기암바위이다. 바위 모양이 두꺼비의 머리 앞 부분을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13:40~13:45 사진촬영
13:45~14:15 경기 의정부시 원효사길 86 번지에 있는 도봉산 원효사(元曉寺)로 이동
[원효대사 스쳐간 도봉산 원효사, 높은 산 큰바위 지혜로운 사람 사는 곳
중부일보 기사 입력일 : 2021.07.05.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전국 어디에서나 가능한 ‘원효순례’
전국에 원효대사와 관련한 사찰은 몇 곳이나 될까. 창건하고 중수한 절을 비롯해 지나가다 잠시 머문 절, 오랫동안 수도한 절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 영향을 받은 절이 수없이 많다. 대부분 구전된 이야기들이라서 매체마다 집계된 숫자가 다르고 조사를 거친 데도 몇 곳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모르긴 몰라도 전국 968개 전통사찰 중 108개 이상은 되지 않을까. 웬만한 한국 전통사찰에는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고 갔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숱한 절이 욕심 내는 원효대사는 그만큼 시대를 초월한, 우리 불교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불교계에서는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사찰을 도는 ‘원효순례’가 종종 행해진다. 보통 원효대사의 출생지라는 경산 제석사에서 시작해 그의 주 활동무대인 분황사, 황룡사지, 기림사, 골굴사 등 경주시 일대를 도는 일정을 따른다. 그렇지만 전술한 이유로 원효순례는 전국 어느 지역에서든 할 수 있다. 경기도로 한정한다면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토굴 근처에 창건된 평택 수도사를 비롯해 원효사, 상운사, 삼막사, 염불사, 흥국사, 신륵사, 망해암, 자재암 등 10여 곳의 사찰을 연계할 수 있다. 이 사찰들은 경기관광공사가 2018년 내놓은 관광상품 ‘경기도 원효성지 순례 프로그램’에 포함된 바 있다. 이중에서도 원효대사가 도드라지게 노출된 사찰이 평택 수도사와 의정부 원효사다. 평택 수도사는 경내에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이라고 이름 붙인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의정부 원효사(元曉寺)는 사명부터 원효대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국에 원효사라는 동명의 사찰이 10개가 넘지만 도봉산 원효사는 도량에 원효대사 동상을 모시고 치적을 기리는 천년고찰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이곳 나한굴에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물길 따라 산사 오르는 묘미
도봉산과 사패산을 포함해 북한산 자락에는 유수의 천년고찰이 많은데 그중 의정부 방면 도봉산 일대에선 망월사, 회룡사, 원효사가 유명하다. 저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들로 지근거리에 모여 있는데 세 사찰 모두 계곡을 벗해 가벼운 등산 삼아 다녀오기에 좋다. 모르긴 몰라도 원효대사가 원효사에서 수도했다면 근처 절들도 한 번씩 다 둘러보지 않았을까.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국토대장정’급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스님이니 도봉산에서는 원효사를 베이스캠프로 이 절, 저 절 이동하며 대중과 만나셨을 듯싶다.
원효사는 물길을 따라간다. 망월사와 회룡사도 계곡을 옆에 두고 걷긴 하지만 걷는 길과 계곡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거나 둑과 축대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원효사에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물길이다. 식당이 드문드문 있는 산의 초입을 지나 쌍용사라는 절을 지나고 나면 내내 물가를 걷는다. 장마철에 물이 불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콸콸콸 보다는 졸졸졸 흐르는 얕고 맑은 계곡이다. 물기 없는 바위을 골라 발을 디디며 조심조심 걷다보면 산사(山寺)로 향하는 묘미를 깨닫게 된다. 평평한 바위와 물이 고인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앉아 발을 담그고 싶기도 하다. 같은 길을 걸어 원효사 석굴까지 올랐을 신라 고승을 상상하면 짜릿함마저 인다. 원효대사가 걸었던 수만 갈래의 길 중 오늘날까지 풍경이 달라지지 않은 길이 얼마나 될까. 인공자재를 덧대지 않은 산길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비구니 사찰에서 만난 두 비구(比丘)와 낯선 석탑
걸을 수 있는 물길이 더 이어지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등장하면 원효사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다. 비탈을 올라 코너를 돌면 바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양쪽이 다 암벽이고 그 사이로 단정한 돌다리가 있다. 시야에 확 들어오는 가람이 아니라 층층이 산 경사를 따라 자리 잡은 사찰이라 비밀스럽고 조용한 수행처의 분위기가 전해진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비탈길을 오르면 오른편에는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인 선화당이, 정면에는 스님들이 안거 수행하는 송라선원이 보인다. 원효사는 1954년 재창 때부터 쭉 비구니 사찰이었다.
두 건물 사이에 2기의 동상과 1기의 석탑이 자리한다. 원효사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겐 사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다. 서 있는 동상이 원효대사, 중간의 좌상은 송담대선사, 그리고 사뭇 낯선 양식의 가느다란 칠층석탑이 있다. 원효대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노승이 아니라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소실된 원효대사 초상화 원본을 모사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일본 승려의 작품을 참고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30대 후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원효대사는 일명 해골물 사건으로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우치고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려던 도반스님인 의상대사와 작별했다.
작은 절에서 큰 사람 ‘원효’를 생각한다
1400년 전 종교인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단순히 불교의 대중화와 화쟁 사상을 주창한 위인이기에 앞서 입체적인 매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잣거리의 소성거사(小姓居士)를 자처하며 쉬운 말로 불법을 전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유행가처럼 퍼뜨린 기인,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설총을 낳은 파계승, 무애사상(無碍思想)을 칭하며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른 채 가무를 하고 주막집을 드나들던 보헤미안…. 원효대사에 대한 야사들은 가십거리처럼 회자되지만,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서로 통했던 『대승기신론소』, 불교이론을 10문으로 정리한 『십문화쟁론』 등 그의 저서들과 통불교적 사상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떨쳤다. 원효대사의 파격적인 행보는 그의 철학?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나 주인 된 자세, 즉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심출가(心出家)한 출가자가 아닌가.
‘바위굴로 염불당 삼고 기러기로 마음 벗 삼으라’
원효대사 동상 옆에 안경을 쓰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계신 분은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에 힘써온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이다. 가장자리의 칠층석탑은 일본 대마도에 있었는데 2009년에 원효사로 모셔온 귀한 몸이다. 본래 전북 서남부 지역에 있던 탑으로 일제강점기 때 대마도로 옮겨간 것을 조선통신사 연구자인 홍종필 오키나와연구소장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왔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은 아니어서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문화재로 보인다. 동상들과 탑이 품고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이렇게나 풍부한데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인지 별도의 안내판이 없는 점이 아쉽다.
동상 위 계단을 따라 오르면 곧바로 석굴이 등장한다.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재위 때 수도했다는 곳이다. 그가 수도한 바위굴, 마당바위, 봉우리 역시 한 두 곳이 아니지만 어찌됐든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건축물이고 원효대사뿐 아니라 수많은 수행자들이 머물렀을 테니 그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장소다. 원효대사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승려들이 출가해 입문서로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의 하나인 『발심수행장』의 저자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 책에 ‘높은 산 큰 바위 그늘은 지혜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고 푸른 소나무의 깊은 계곡은 수행자들이 거처할 곳’이라 적었다. 원효사 석굴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수행처의 조건에 들어맞는다. 그는 또 ‘소리를 울려주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울면서 날아가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아야 한다’고도 적었다.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원효대사의 말씀을 받들어 이 굴 안에서 염불을 외고 인내의 시간을 가졌을까. 석굴은 현재 18나한을 모신 나한굴이 되었다. 16나한 외에 두 분의 나한은 누구일까 궁금하다. 자연석굴이지만 보강을 위해서였는지 전면에 별도의 돌을 쌓고 지붕과 기둥을 덧대 반(半)인공석굴이 되었다. 게다가 내부는 민트색 페인트를 칠해 석굴의 격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 뭐든 마음먹은 대로 보이기 마련이라지만 미감(美感)이 아쉬운 이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눈이 닿는 곳곳 숨은 이야기들
나한굴 옆의 맞배지붕 건물은 2002년에 지은 대웅전이다. 도량의 전각들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구전된 원효사의 창건 시기는 원효대사가 활동하던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1954년 재창 때 절터에서 고려시대 유물들이 여럿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비구니 우일스님이 수락산 용굴암에서 기도 중 꿈에서 석굴을 발견하고 원효사를 다시 세운 때다. 대웅전 앞에 서면 정면에 웅장한 수락산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오래된 문화재가 없어 다소 아쉬운 듯하지만, 원효사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196호인 『묘법연화경』을 소장하고 있다. 『묘화연화경』은 도를 이룬 부처가 세상에 나온 뜻을 전하는 경전으로 원효사 소장판은 조선 인조4년에 혜원 상궁이 만들었으며 다음 생에는 비구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길 기원한다는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나한굴에서 한번 더 계단을 오르면 가람의 최상단인 미륵전과 삼성각이 나온다. 미륵전은 팔각건물로 내부에 백색의 미륵불을 모셨다. 이 미륵입상이 한국 현대조각 1세대인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이라는 것을 주수완 교수가 쓴 본지의 지난 기고를 통해 알았다. 김영중 선생은 세종문화회관의 외벽부조 ‘비천상’, 독립기념관의 상징조형물인 ‘강인한 한국인’ 등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조각해 세상에 내놓은 예술가다. 이미 절을 다녀온 후에 접한 사실이라 ‘작품’을 알아보지 못한 심미안을 탓하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놓고 나한굴의 미감을 운운했으니 어리석은 중생에게 원효대사가 설파한 배움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14:15~14:25 도봉산 원효사(元曉寺)를 탐방
14:25~14:45 경기 의정부시 망월로28번길 201 번지에 있는 도봉산 쌍용사(雙龍寺)로 이동
[도봉산 쌍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망월사역에서 망월사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쌍용사는 좁은 절 입구 주변으로 계곡물이 가로지르고 있다.
절 입구에서 경내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면 계단 꼭대기에 빼꼼히 보이는 대웅전 건물과 계단 오른쪽에 있는 범종각과 천불전, 그리고 그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대웅전과 그 보다 조금 커 보이는 천불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안에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천불전에는 불단중앙의 삼존불과 함께 작은 크기로 조성된 천불이 법당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삼존불은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하여 그 양옆에 지장보살과 석가여래가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천불전 뒷편에 자리잡은 미륵보살입상은 대략 10미터 가량 되어보일만큼 거대했는데, 부드러운 인상과 함께 사실적으로 묘사된 신체비율이 특징적이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대웅전은 작은 규모에 평범한 문살 등 장식을 최소화한 모습이었는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 삼존불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날씬한 형태의 칠층석탑과 함께 석조대좌에 앉은 아미타불 좌상이 있는데, 칠층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아무런 조각이 되어 있지 않아서 소박한 모습이고, 아미타불 좌상은 석조대좌와 광배 등 불상의 장식 방법은 장곡사의 국보들을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인다.
한구의 범종만 걸려있는 범종각은 육각형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범종에는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가진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공양상과 같은 모습의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쌍용사는 절의 역사와 규모는 소박하지만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는 내실 있는 절이다.]
14:45~14:55 도봉산 쌍용사(雙龍寺)를 탐방
14:55~15:20 망월사역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5:20~15:40 망월사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40~16:52 망월사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 지하철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12분 소요]
도봉산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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