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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종가에서 해마다 여름철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나누고 조상의 덕을 기리며 보양식으로 해 먹어 온 흑염소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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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11남매 가족·친척 모여
이야기보따리 풀며 情 나누고
채소·감자가루 넣은 흑염소찜
건진국수와 먹으며 氣 보충
예절교육·조상 음덕에도 감사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간재(簡齋) 변중일(1575~1660) 종택. 종택 뒤는 낮은 산이 두르고 있고,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봉정사로 가는 도로 옆에 있는 종택은 홍살문 뒤로 간재의 충효각을 비롯해 안채와 사랑채, 정자(간재정), 사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 지난해 연못 위에 지은 ‘금학정’이 종택 앞에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평소 조용하던 이 간재종택에 지난 8월16일 사람들이 몰려들며 북적거렸다. 간재종가 11대 종손 변성열씨(1960년생) 친척 가족들이었다. 종손의 누님(10명) 가족과 외가 가족 등 70여명이 찾아든 것이다. ‘열친회(熱親會)’ 모임을 위해서다. 20여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가족 모임이다. 매년 여름 8월15일을 전후한 주말에 모인다. 이들은 사정에 따라 1박 또는 2박을 하며 서로 정을 나누고 조상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열친회란 이름으로 모인 것은 아니지만 그 전에도 가까운 친척 모임은 있었다. 이 모임은 간재종가에서 오래전부터, 최소한 종손의 조부 때부터 계속돼 오고 있다. 이 모임에 항상 빠지지 않는 여름철 보양식이 있다. 개나 염소를 잡아 요리하는 찜요리인 흑염소찜과 개고기찜이다. 수육과 탕도 함께 준비한다.
◆가문의 경로효친 정신 이어온 여름철 보양 음식
열친회는 종손의 부친(변용대)이 별세(1994년)하기 전에 ‘가문 화합 모임’ 전통이 사라질까 우려해 이름을 지어주며 가족 모임을 이어가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다. ‘마음을 다해 친목을 도모하라’는 의미다. 모이는 가족은 종손 11남매(1남10녀)의 가족과 종손의 사촌 및 외가 가족 등이다.
간재종가는 오래전부터 이런 모임을 가져 왔다. 한여름철에 가족이 모여 개와 염소 요리로 여름철 기력을 보충하고 예절교육, 가문의 역사 교육 등을 함께하면서 가족 간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종손의 부친 때는 물론, 조부 때도 그랬다. 그 전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종손은 말한다.
가족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학봉 김성일 종가, 경당 장흥효 종가, 단계 하위지 종가 등 다른 종가의 종손을 비롯한 어른들을 초청해서도 개고기·염소고기 찜과 탕 등을 대접했다.
간재종가의 이 같은 행사는 간재 변중일의 각별한 효친(孝親)과 경로(敬老) 정신을 잇는 일이다.
이런 모임을 가질 때 종부를 중심으로 한 집안 부녀자들이 장만해온 요리가 개고기·염소고기 찜요리였다. 미리 삶아 놓은 염소나 개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다양한 채소를 곁들이고 감자가루를 사용해 쪄 낸다. 이날 점심도 종부가 종손 누나들과 같이 염소고기와 개고기 찜을 비롯한 수육과 탕을 준비해 내놓았다. 모두 오랜만에 맛보는 흡족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행복해했다. 건진국수도 곁들였다.
종손 누님들은 이날 “염소나 개고기 찜 요리는 이 집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음식"이라며 “먹기도 좋고 영양도 많아 여름철 보신 음식으로 최고"라고 자랑했다.
변성열 종손은 “우리 집안에서 옛날부터 여름철에 날을 잡아 가까운 가족은 물론 마을 어른들을 모셔 보양 음식을 대접하는 전통이 시작된 것은 간재 선조의 남다른 효심을 기리고 이어받으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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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종가 건진국수. |
◆남다른 효심의 간재 변중일
간재 변중일은 ‘하늘이 낳은 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효심이 각별했다. 또한 나라를 향한 충성심도 남달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전장에 나아가 생사를 돌보지 않고 싸웠던 인물이다. 그의 효행과 충성심은 당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사후 100여년이 지난 후 지역 유림은 그의 충효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그를 불천위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간재의 효심을 드러내는 일화가 전한다. 간재는 대추나 배 같은 것을 얻으면 자신이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드리는 등 효심이 각별했는데, 어느 땐가 어머니가 병이 났다. 진맥을 한 의사는 “꿩고기를 먹으면 낫는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큰 눈이 내려 변중일이 꿩을 잡으러 갈 수도 없어 애를 태우고 있는 중에 우연히 꿩 한 마리가 그의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꿩을 잡아 모친에게 요리해 드리자 효험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효심에 하늘이 감응한 결과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이다. 왜적이 안동까지 밀려들자 동네 사람들 모두 숨기에 바빴다. 당시 변중일은 18세로, 집안에 늙고 병든 조모와 함께 있었다. 조모는 여름 더위에 이질까지 만나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위중했다. 그래서 조모를 간호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결국 왜적이 총을 쏘며 마을에 들이닥쳤다. 집안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황망해하는 가운데, 그는 먼저 모친을 업어 빽빽한 삼밭 속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다시 조모를 업고 피신하려고 했으나 조모가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옮길 수가 없자 죽음을 무릅쓰고 곁에서 간호하며 무사하기만 빌었다.
마침내 왜병들이 집으로 들어와 그를 때리며 끌고 나가 칼을 빼들고 죽이려 했다. 이에 변중일은 간절하게 빌며 부탁했다. “조모님은 연세가 80세 넘는 데다 병환을 앓고 계십니다. 불효한 손자인 저는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조모님만은 꼭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진심 어린 말을 들은 다른 왜병들이 변중일을 죽이지 못하게 급히 말리고는 부축해 일으킨 후 다시 방에 들어가 조모를 간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 왜병이 “실로 하늘이 낳은 효자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떠나고 난 후에 다른 왜병이 오면 화를 또 당할 수도 있으니 신표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 뒤 깃발 하나와 칼 한 자루를 주며 “뒤에 왜병이 오거든 이것을 보이며 사정을 이야기하라"고 설명했다.
당시 왜병으로부터 받은 일본도는 지금도 간재종가에 전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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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호를 ‘간재’로 지은 까닭은
책 한 권과 연꽃 몇 뿌리…간소한 삶이 나를 기쁘게 해
변중일은 만년에 고향 집 동쪽 언덕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간재(簡齋)’라고 지은 뒤 그 이유를 담은 ‘간재기’를 남겼다. 그 일부다.
“큰 일을 경륜해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으며, 섬 오랑캐의 난리에 온 나라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몸을 바쳐 수치와 분통을 씻고 갚지 못했으니, 내가 이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몸을 숨기고 나의 뜻을 담아 내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로 한 것은 주거의 ‘간’이고, 담장에 흙을 바르고 단청을 칠하지 않은 것은 꾸밈의 ‘간’이다. 책상에는 거문고와 책 한 권이 있으니 그 즐거움이 번거롭지 않아도 내 정신을 기쁘게 해주고, 못에는 연꽃 몇 뿌리와 버들 몇 그루가 있으니 많지는 않아도 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간’자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또한 무릇 예가 번잡하고 화려한 것이 간소한 것보다 못하고, 일도 번거롭고 갖춰야 할 것이 많은 것이 간략한 것만 같지 못하며, 말이 수다스럽고 교묘한 것이 간단하고 서툰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니 ‘간’이란 것이 중(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래 도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간으로써 내 삶을 즐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