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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강산 원문보기 글쓴이: 김종선-강산-
법조계에 吳制道(오제도) 검사와 같은 사람은 없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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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한국닷컴 장재균 객원기자] 吳制道(오제도) 검사는 1917년 11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1939년 일본 早稻田大(와세다대) 법과를 졸업, 1977년 멕시코 아메리칸대 명예문학박사 1979년 미국 LA신학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46년 과도정부 사법부 인사과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50년 검찰청 부장검사, 1956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1957년 대검찰청 검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서 50년대 초 오제도 검사는 재직시 반공검사로서 좌익세력(현 종북세력)들에 오금이 저리게 했던 장본인이다. 1977년 종로-중구 보궐선거에서 당선 제9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1981년 제11대 전국구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49년 4월경부터 준비하여 6월 5일 발족한 “국민보도연맹”은 오제도, 선우종원 등 사상계 검사가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김준연 등 보수우익 인사들과 협의하여 만든 단체,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의 사상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했다. 해방직후 극심한 좌우대립 속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치러 200석의 제헌국회가 탄생했다. “同心會” 사건은 당시 국회소장파가 주동이 되어 1948년 10월 13일 김일성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의 외군철수동의안을 제출하면서 이들이 주목을 끌기 시작 했다. 동심회 동향을 주목하고 있던 수사당국이 여간첩 정재한(鄭載漢)에게서 압수한 남노당 암호연락문을 해독 이문원과 노일환을 비롯한 13명의 국회의원을 포섭, 이들을 이용 연관운동을 개시하여 62명의 서명을 얻어 외국군철퇴의 진언서를 UN 한위에 제출한 내용을 파악 추적 수사 끝에 13명의 프락치 국회의원을 구속했다. 당시 구속된 13명은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남노당원 노일환((盧鎰煥), 이문원(李文原), 박윤원(朴允源), 김옥주(金沃周), 강욱중(姜旭中), 김병회(金秉會), 황윤호(黃潤鎬), 최태규(崔泰奎), 이구수(李龜洙), 배중혁(裵重赫), 서용균(徐容均), 신성균(申性均)이었으며, 북괴 6.25남침 4개월 보름전인 1950년 2월 10일 일심에서 징역 8년에서 2년 선고에 불복 항고 중 6.25로 일부는 월북하고 나머지는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13인의 국회프락치는 북으로 도망친 박헌영의 남노당 특수공작원 이삼혁(李三赫)·이재남(李載南)·김사필(金思苾)·박시현(朴時鉉)등과 접선 지령을 받고 외군철수, 좌익사범 석방, 반민족자 처, 국군해체 조국방위군의 재편성, 최고입법기관의 구성, 남북정당단체대표 정치회의구성, 헌법개정 등 김일성 및 박헌영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다. 지난 4.11 총선에 앞서 3월10일 민주통합당(민주당) 한명숙과 통합진보당(민노당) 이정희가 소위 “국민 승리를 위한” 범야권 공동정책 합의문이란 것을 발표 했으며, 합의는 민노당 이정희가 일방적으로 주장해온 내용을 한명숙이 수용함으로서 북괴가 끈질기게 요구해 온 反보수, 反새누리, 진보(종북정치세력 )大聯合(대연합)을 결성 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봐야한다. 이로써 좌우 대립이 본격화 사상논쟁이 끈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월남의 패망을 다시한번 재론해볼까 한다. 월남 패망직후 드러난 사실 월맹이 월남에 남파한 간첩이 5만이 넘었으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간첩이 5만이 넘는다는 황장엽씨의 증언이 있다. 또한 당시 티우 정권타도에 앞장섰던 100여개 시민단체(위장)에서 활동한 대학교수, 목사, 승려, 학생, 용공분자들은 反戰과 인도주의와 민족주의 표방운동은 간첩과 연계된 투쟁으로 드러났다. 보라! 현재 광화문과 대한문 앞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명박 아웃을 외치며, 대통령을 쥐박이라 하는 피켓등장은 정황상 월남의 패망과 매우 흡사하다. 1917. 11. 15 평남 안주~ 2001. 7. 1 서울. 법조인. 193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1977년 멕시코 아메리칸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와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신학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년 남조선 과도정부 사법부 인사과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1950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1956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1957년 대검찰청 검사를 역임했으며, 1946년에서 50년대초 검사 재직시 반공검사로서 좌익세력 색출에 이름을 떨쳤다. 1960년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6~77년 한국반공연맹 이사가 되었으며, 1966년부터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 회장직을 맡았다. 1977년 종로-중구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해부터 국제안보연구 이사장을 맡았다. 1981년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82~84년 아시아예술제 총재직을 역임했다. 을지무공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고, 저서에는 〈국가보안법실제개요〉·〈사상검사의 수기〉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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