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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권보드레 지음 l 돌배개 펴냄
들어가는 글
1919년 3월 1일 오후 전국 일곱 개 도시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한반도 전역에서 이어질 시위와 봉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봄철 내내, 낮에 장터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3월 1일의 밤’부터 이어진 밤의 사건도 숱했다. 3월 1일 밤 서울에서는 수백 명 노동자가 만세를 불렀고 평양에서는 수천명이 낮보다 성대하게 악대 앞세우고 등불 손에 든 채 시내를 행진했다. 연구자에게야 익숙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3•1 운동의 밤은 다채롭다. 3•1 운동 속 그들은 어스름녘 시내에서 전차에 투석하고, 어둠이 짙어질 때 뒷산에서 봉화 올리고, 밤 깊어갈 무렵 모여서 산 너머 주재소를향하곤 했다. 그들은 잘 알려진 시공간을 벗어날 뿐 아니라 익숙한 인식론도 동요시킨다. 수많은 무명씨들, 그들에게 3•1 운동은 어떤 경험이었는지를 설명해보고 싶었다. 그들에게도 3•1 운동이 종생토록 생생한 사건이었음을 읽어낼 수 있었으면 했다.(11-12)
제1부 3•1 운동 그리고 세계
1장. 선언 : 현재가 된 미래
3•1 운동 당시 독립됐다는 소문은 ’예언적 소문(prophetic rumor)’, ‘이미 독립’했다는 소문이 ‘곧 독립’한다는 소문과 뒤섞이면서 독립했다거나 며칠 내 독립이 확정되리란 말이 돌았다. 28p 주석;「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은 당시 ‘proclamation’으로 번역되었으나 오늘날 주로 ‘declaration’을 채택한다. 어원을 ‘declaration[dɛkləˈreɪʃən]’은 경합 속에 권리를 주장/‘proclamation[prok′lə mā′shən]’은 소리 높여 의견을 공표/‘manifesto[]mænɪˈfɛstəʊ]’는 공공연하게 입장을 밝힌다, ‘미래를 당겨쓰겠다’는 의지는 manifesto에서 가장 분명하다.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declaration(déclaration [deklaʀɑsjɔ̃])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군주가 행사하는 주권적 능력을 환수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명명법이다.)선언 중에서도 민족국가의 독립선언이 집중됐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이다. 대표적 사례로 36P 그림4;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을 준수하는 동시 “해방된 인류, 민족들의 실제적 평등, 피통치자들의 동의를 정당한 권력의 원천으로 하는 정부”의 이념으로 선언들의 역사를 호출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문제를 세계사적 지평 위에 놓았다. 침략의 시대, 수탈의 시대에 역사를 함께했던 핏줄 중심의 묶음으로 자연스레 ‘민족집단’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임을 선언하노라.”「기미독립선언서」는 첫 문장에서 ‘독립’과 ‘자주’를 선언한 다음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000만 민중의 성충(誠忠)”이 그 기초임을 확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립선언은 하늘의 명령이자 시대의 대세이자 전인류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의 발로다. 민족의 명령인 동시 인류적 사명(40)인 것이다. ... “자기의 건설”이 급선무요 “타(他)의 파괴”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동양평화‧세계평화‧인류행복이라는 크나큰 목표 앞에「기미독립선언서」에는 ①“배타적 감정”을 경계하고 “질서” 존중을 역설하는 어조가 뚜렷하다.「기미독립선언서」에서는 ②‘조선민족대표’라는 명칭을 앞세웠던 것도 큰 차이다. ‘조선’민족대표라는 표현을 택함으로써 근과거인 대한제국의 기억을 우회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연호로는 ‘조선건국 4252년’을 사용했다. ③단 어떤 선언서든 구체적인 정치‧경제‧사회적 개혁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했다.(39-42) 많은 지역에서의 봉기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의해 촉발됐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한 이들은 운동의 초기 발화점이었을 뿐 결코 ‘본부’는 아니었다. 선언서는 빠르게 전염되고 변형되고 증식됐다. (43p 주석; 「기미독립선언서」 배포 경로 및 수량에 대해서는 3•1 운동 재판기록 및 그에 기반한 『한민복독힙운동사 3』(국사편찬위원회, 1988, 246쪽)의 ‘독립선언서 배포도’를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44P 그림5 참조 지하신문의 대표격인 『독립신문』을 참조) 서울에서 작성한 선언서의 일부만 인쇄하거나 ‘민족대표’의 명의만 비는 등 변형의 사례는 무수했다. 경상남도 하양에서도 “독립선언서는 그 문장이 너무 길어 한 장에 등사할 수 없으므로” 축소‧개작하는 방식으로 또는 함경남도 경성군에서는 기본적으로 천도교도들이 주도하여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 33인’을 가상하고 쓴 모작(模作; 남의 작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듦)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준다.(41-45)
이로써 3•1 운동은 증식과 변형의 운동성을 상징해냈다. 그것은 곧 3•1 운동 자체의 생리이기도 했다. 그 많던 신문‧격문‧경고문 등은 ①어떤 사전 조율도 없이 운동 와중에 결의한 개인들에 의해 발행되었다. 호당 40에서 140~150부까지 인쇄해 인근 인가에 배포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②인쇄에는 등사기를 이용했다. ③자기 집에 투입됐던 『독립신문』과 『신민보』, 또 옆집에서 얻은 독립선언서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뽑아서 되는 대로 한 편의 문서를 만들어 인쇄의 원고로” 삼았다고 한다. ④제1차 세계대전을 ‘자유’를 위해 낸 희생으로 평가하면서 “가령 일본의 강압이 있어도 육탄으로 싸워 굴하지 말라”고 선동하기도 했다. ⑤독립을 위해서는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조선인 상인들은 폐점으로 저항하며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히 퇴직해야 한다는 방책을 세웠다지만 그 또한 실질적 전략을 모색한 바 없다.(46-49)(==> 세계 전환의 흐름, 특징 개념어 ‘자유’) ⑥어떤 이적 연계도 없이, 어떠한 협력자마저 없이, 홀로 문자와 언어를 통한 선도를 담당한다. ‘문자 행위로서의 독립운동’을 실천한 사례다.(50)
3•1 운동 당시 언어는 이렇듯 수행적(perlocutionary; 발화행위(=>309p, 선언서나 신문 한 장을 구하면 수십 장을 등사‧배포하고, 자기 자신이 쓰고 덧붙이고, 다시 인쇄해내는 식의 증식과 변형에 등사기는 안성맞춤의 테크놀로지였다.)이었다. 사례 이외에도 풍부하다. ‘선언’이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를 당겨쓰는 방법이었으며, 목표한 미래를 일궈내려는 자기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 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을 ‘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 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이 일부가 되었다.(50-52)
2장. 대표 : 자발성의 기적
강화도 은세공업자, 전 육군 상등병, 34세 유봉진은1919년 3월 6일, 가게에 들른 손님으로부터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3월 8일 평소 알고 지내던 조중환과 함께 여러 사람을 불러내 시위 계획을 세웠다. 유봉진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오직 한 조각 소문뿐이었다. 독립선언도 신문도 격문도 그는 “듣지도 또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만세를 불러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주문도-외포리-거문도 먼 길을 거쳐 일요일인 16일을 기다려 교회에서 궐기를 호소했고 강화 장날인 18일에 맞춰 장터 시위를 계획했다. 장날 만세 소리에 군중은 우왕좌왕하고 대오도 없었지만 이내 유봉진의 제안에 따라 군청–객사-공자묘 순서로 행진을 했다. 그 사이 뻗대는 군수를 으르고 달래 만세를 부르게 하고 군중에게 쫓기는 조선인 순사보를 구출해주기도 하고 취한(醉漢)까지 섞여 경찰서 앞에서는 순사 잡아 죽이라는 목소리가 거셌으나 그 또한 가까스로 만류했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군중을 설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격을 가하려는 경찰을 설득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각오를 한 사람으로서 경탄할 만한 인내심이었다.(==>의식적 선택) 3월 16일 주문도 연설 당시 유봉진은 속옷에 ‘결사대’라고 뚜렷이 적은 글씨를 보여주었다. ‘결사대장’이라고 쓴 깃발도 만들었다. (…) 시위 후 도피 생활에서도 곧 독립될 날을 기다리며 구상한 깃발에도 “독립주창자 겸 결사대표 유봉진”이라는 문구를 먼저 적었다. 3•1 운동은 강화도민의 삶에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평화 시위로 시종했음에도 많은 사람이 태형에 처해졌고 약간 명은 옥살이를 했다. 당시 학생 중에는 후일 진보당 당수 조봉암도 있었다. 그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평생 그 결심에 충실했다. ‘국민대표’를 자처한 양봉식은 “나는 국민 대표자인 군산 거주의 양봉식이다”라고 외치며 “군민이 좁쌀을 살 돈이 없이 고생하는데 비싼 상묘를 사라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상묘를 심을 뽕밭도 없지 않느냐?”며 선봉에 섰다 (…) “대표로서 이 소요를 감행하는 것인즉 제군은 내 얼굴을 익혀 두라, 사진을 찍으라”고 연거푸 외쳤다. 3월 말 봉화시위를 시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리에서 밤에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대개 3월 말~4월 초 집중). 청주군과 연기군은 동시에 봉홧불을 올려 연합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장면들은(3•1 운동의 밤) 박노갑의 소설 「40년」(1948)에서, 이기영의 『두만강』(1952~61)에서는 “사면팔방으로 꽃밭처럼 불길이 타오르는” 등으로 묘사한 바 있다.(55-60)
이렇듯 3•1 운동을 통해서는 각양각색의 동기와 양태로 스스로 ‘대표’(‘대표’의 즉흥성과 비체계성)로 나선 사람들은 전국 곳곳에서 탄생했다.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봉기기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3•1 운동처럼 지역과 분파와 계층을 막론하고 자발적인 동시에 전국적인 봉기가 거족적(擧族的; 민족 전체)이었던 경우는 없었다.(8개 군만 비참여) 3월 1일 이전 일부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교부되었고 해외로부터, 서울로부터 파견된 인물이 작용한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봉기는 국장 참례 차 상경했다가 얻어 온 독립선언서라든가 만세시위 소문 외 어떤 조직적 네트워크도 없었고 어떤 ‘배후’도 없었다. 3•1 운동을 통해 광범하게 목격되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에 의지한 결의와 궐기다. 당대의 유행어였던 ‘민족자결’에서의 ‘자결(自決, self-determination결심)’이 함축하듯 국제적으로 기성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면서 저마다의 존재 주장이 그 어느 때보다 열렬했다. 독립선언서 말미에 감히 ‘민족대표’라고 서명한 33인부터 어떤 선출이나 위임 과정 없이 자격을 스스로 주장하고 선언했다. ‘민족대표’로서 자신을 기투(企投)했으며 그런 결의와 헌신을 통해 대표로서의 자격을 추인(64p 주석 참조)받았다. 3•1 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W. Wilson)에게 크게 기대했다(유럽인들도 윌슨 숭상), 윌슨은 “정복과 이권다툼(aggrandizement)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 러시아‧중부 유럽 제국의 ‘대표’들이 대표하는 것은 의회나 다수당이 아니라 군사주의적‧제국주의적 소수(전쟁의 책임자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 및 세계평화의 원칙에 합치되는 국가만이 국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래의 ‘대표’는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인민들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교체되어야 했다.(61-65)
투표 제도의 도입 및 의회의 창설과 더불어 뿌리를 내린 ‘대표’라는 개념-돌이켜 보면 근대로의 전환을 이룬 정치적 급변은 이 ‘대표’ 개념을 둘러싼, 즉 ‘통치’와 ‘대표’ 사이 관계를 둘러싼 쟁투에 다름아니다. 격렬한 인정투쟁이 잇따랐다. 대표임을 자임하는 개인 혹은 단체가 속출했고, 경합과 협조가 어지러웠으며 국제적으로 숱한 종족이 ‘자아(self)’로서의 자격을 얻기(민족자결 인정) 위해 뛰어들었다. 자결을 위해서는 당연히 자아가 전제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아로서의 자격은 모든 존재에게 동등한가? 파리평화회의 당시 윌슨의 구상은 식민지의 ‘독립’이 아리나 ‘위임통치(mandate)’였다. 윌슨을 비롯한 구미 지도자들의 눈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들은 민족국가로서의 존재를 감당할 만한 ‘자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신탁(信託)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윌슨 자신부터 필리핀을 독립시키자는 논의를 ‘무책임하다’며 반박했다.(66-67)
1919년 3월, 한창 평화회의가 진행 중인 파리에 조선의 ‘대표’로 도착한 사람은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위 양자로 당시 39세였던 김규식이다. 선교사 부부가 운영하는 경신학교에서 영어와 라틴어, 수학‧신학‧과학 등을 배웠고 미국의 르노크 대학 학부와 프린스턴 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1904년 귀국 후 한동안 기독교계 언론 및 교육 활동에 종사했으나 1913년에는 중국으로 망명 직후 바로 혁명운동에 가담했으며 중국과 몽골‧러시아를 오가며 사업을 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에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것은 1918년의 일이다. 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몽골어‧산스크리트에까지 통달했으니 신한청년당에서 파리평화회의에의 대표 파견에 김규식이 담당자로 선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조선이란 나라를, 조선인이라는 사람을 대표할 정통의 정치체제가 구축돼 있지 않았던 당시, 민족과 인민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대표임을 자처하는 방향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당시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한족중앙총회)에서는 윤해와 고창일을,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이승만과 조한경을 대표로, 일본 유학생들은 여학생 송복신을, 유림계에서는 심산 김창숙을, 여성계 도쿄 유학생 신마실라를, 대종교에서는 김성(김병덕)과 정신을 대표로 뽑았다. 대부분 여권과 여비 문제로 좌절하고 말았다-당연하게도 파리에서 김규식이 조선 대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인정과 협조가 필요했다(70p 주석참조). 이관용‧황기환‧장택상 등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다른 조선인들도 김규식이 머물고 있던 샤토당 거리 38번지에 찾아와 그를 보조했다.(68-70) 1919년 봄의 파리는 다채로웠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의 ‘5대 강국’의 공식 대표들과 스스로 대표이기를 결의한 이들이(72p 그림6 참조) 파리에 모여들었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결’의 원칙은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했다-‘대표’ 개념 역시 활발하게 토의하고 재구성했다-그러나 그들의(세네갈 제외) 민족자결권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식민지라는 조건상 의회주의적 선거와 의회제도로써 공인된 대표(=>윌슨의 문제의식)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 투쟁하던 민족 중 초청은 폴란드‧세르비아‧체코슬로바키아 대표뿐이다. 알바니아‧크로아티아‧에스토니아‧페르시아‧시리아‧레바논‧예멘‧튀니지‧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나 아일랜드의 신페인당까지 ‘대표’를 자처하는 다양한 군상 또한 1919년 파리에서 활동했다. 정식 대표단을 파견했던 중국마저(74p 그림7, 8, 9 참조) 거듭 소외당하고 묵살당했으며 ‘5대 열강’ 중 하나로 급부상하는 일본의 위세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일본의 권리만을 편드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은 더더구나 무시당하고 배척당했다. 파리평화회의 관련 문서에서 김규식의 이름(78p 그림10, 11 참조) 은 없으며 조선의 국명은 한 군데에, 3•1 운동이 거의 저문 5월 말, 미국인 신문기자가 일본 대표를 회견한 기록에 참고자료 삼아 첨부돼 있을 뿐이다.(71-73)
대표와 인민 사이-유토피아적 직접성의 논리; 민족대표 33인’은 대표성의 어떤 체계도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로에는 무관심했다.(73-75)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의 필란드혁명(내전)과 독일혁명, 1919년 5‧4 운동, 1919년 헝가리혁명은 볼셔비키 등의 조직적 지도자나 군인들이 핵심이 된 봉기였다. 3•1 운동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재하는 중심, 불확실한 소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1789년 프랑스혁명과 1790년 아이티혁명, 1857년 인도 세포이항쟁 같은 사건과 유사하다. ‘십일세‧여주세와 수렵금지령이 폐지됐다’고 여겼던 ‘대공포’ 속의 프랑스 농민들, ‘본국에서 이미 농민들, ‘본국에서 이미 노예해방령을 선포했는데 노예주가 숨기도 있다’고 믿었던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 ‘영국인이 탄약 재료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금기시하는 소‧돼지기름을 상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도의 토착 병사들-이들은 부정확한, 그러나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강렬하게 실어나르는 소문에 의해 스스로르 일으켰고 그럼으로써 현실을 바꾸는 동력을 만들었다. 이들은 의회제도나 대표의 정체는 그들이 생활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들은 궁핍과 억압과 차별에 대한 분노, 안전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하여 ‘혼돈의 개방성(chaotic openness)’ 속에 뛰어듦으로써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를 형성했다.의회제도 자체부터 이런 직접 봉기(immediate uprising)의 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변형됐다고 할 수 있으리라.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직접성-즉각성(immediacy)이 유례없을 정도로 고양된 시기였다. 선언이라는 발화행위가 언어와 현실 사이 무매개성-직접성을 기념하듯 시간 의식에 있어서도, 정치적 구성에 있어서도 직접성의 형식이 도약했다.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파국 이후의 세계에서는 “유토피아만이 실제적(practicable)”이다.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토피아냐 멸망이냐 사이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77-79)
윌슨이 ‘대표’ 개념의 갱신과 재구성을 제안했다면 레닌은 ‘대표’ 개념 자체의 해체를 제안했다. 레닌은 은행 및 시디케이티를 국유화함으로써, 즉 자본주위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사회주의로 직행하는 파격적 경로를 제안 추진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평의회(Soviet) 모델이야말로 레닌이 지향한 모델이었으며, 그는 제헌의회를 소집하고도 즉시 그것을 해산시켜 버림으로써 새롭고도 무모한 정치적 실험을 개시했다(82p 그림12 참조). ‘국가의 사멸’, ‘자본주의의 사멸’, 즉 “국가의 폐지 (…) 즉 모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의 폐지”를 제안한 레닌의 테제와 어긋나게 국가 기국 자체가 강화‧폭압화 되면서 스탈린 시기에는 천만 이상의 막대한 인명이 희생 당했다. ‘1국 1당’을 강제함으로써, 즉 나라마다 ‘유일한 공산당’을 요구함으로써 ‘대표’될 권리를 둘러싸고 경쟁이-심지어 혈전-벌어졌고 중국이나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인들은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현지 공산당에 가입해야 했다.(80-83) 3•1 운동에 있어서는 ‘대표’는 이런 세계사적 격동 속에서 태어났다. 지금껏 계승되고 있는 ‘33인 민족대표’라는 명칭, 이것은 ‘대표’ 개념 자체가 해체‧재구성되고 있던 상황에서 시도된 숱한 실험 중 하나였다. 그 정당성은 미중봉기에 의해 추인됨으로써 ‘민족대표’는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구성까지 이어지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임시정부’로서 스스로를 표명한 단체가 많았던 1919년 봄(84p 주석 참조), 3•1 운동의 폭발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될 수 있었다.(84)
3장. 깃발 : 군왕과 민족과 대중
일련의 기억담이 해방 후 대한민국에 정착한 3•1 운동상을 만들어왔을 터다. 많은 증언과 달리 3월 1일 서울 하늘에 태극기는 휘날리지 않았다. 기억‧변형한 소산임이 분명하다. 당대의 문자나 시각 자료에서 즉 신문조서나 사진 등에서 이 날짜에는 태극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손수건, 모자를 벗어 던졌다.(89P 주석 예외 사례). 그나마 태극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3월 1일 오후 1시 열린 평양의 죽은 황제의 봉도식을 겸한 독립선언식이다. 3,000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 선언서가 낭독‧배포됐고 ‘구속되어 천년을 사느니 자유를 찾아 백 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요지였다. 3월 1일의 선언식은 본래 천도교계, 기독교계, 서울 시내 학생, 최소 세 개 조직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준비했던 독립선언 내지 청원이 합류한 사건이었다. 3월 5일 학생들은 본래의 독자적 계획의 일부나마 실현했다. 독립선언이 일회적 사건이 아님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다.(87-89) 보성전문의 강기덕과 연희전문의 김원벽이 인력거에 탄 채 대열을 지휘했고 ‘조선독립’깃발을 휘두르며 전단을 나부꼈다. 시위에 앵당목(櫻唐木)의 출현이 사회주의 출현이라는 독해는, 당시 윌슨주의의 유행 속에서 각국 형명 소식도 ‘개조’로 수렴돼 이해됐던 시절이었던 만큼, 3월 5일의 학생들이 유독 사회주의에 친화적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배포는 3월 5일 현장에서도 했지만 전날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김재익이라는 학생이 3월 4일 밤 거리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배포를 부탁했단다. 그중 한 명이었던 도쿄 물리학교 1년생 고재완은 자신이 맡은 것은 두루마리 두 뭉치였다고 진술한다. 독립기와 붉은 천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당시 조사과정에서는 심문자나 피의자나 그 두 종류의 깃발에 주목했을 뿐 태극기에 대해서는 별달리 언급하지 않았다.(87-92)
태극기는 독립된 한반도를 상기시키는 강력한 기호다. 태극기는 특히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재탄생한 이래 국민의례가 정착하면서 근대 국가의 상징으로 각인된다.(89-94) 3•1 운동 당시 죽은 황제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대단했다. 고을고을마다 망곡과 봉도의 예식을 행했다. ‘독립불원서’에 서명 거부를 이유로 독살당했다는 풍문은 ① 왕과 왕실에 대한 묵은 기억이 어떠했든 3•1 운동 직전 거의 만장일치의 추모와 공분이었다. ② 더이상 공화의 경쟁자, 억압자가 아니었다. ③ 고종을 ‘최후의 군주’로 대접하는 동시에 조선 왕조가 완전히 멸망했다고 진단하는 시각은 여러 풍설에 의해 공통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대한제국기의 깃발을 꺼내 들더라도 그것이 옛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오인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3•1 운동기 고종에 대한 고양된 추모는 부활 대신 구체제를 끝장내버린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실제는 3•1 운동을 통해서 어떤 각성과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명확히 이해‧정리하지 못한 채 3•1 운동의 결과로서의 대중 심리를 수용한 측면이 크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0년간 3•1 운동을 회고하고 평가할 때 겪었던 혼란은 3•1 운동 자체가 지닌 혼란의 반영이기도 하다. 4월 23일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공화만세’라고 쓴 깃발이 등장했다. 남대문‧동대문‧서대문 세 방면에서 각각 시위대가 집결했던 이 날 각 행렬의 선두는 자동차를 탄 채 ‘국민대회’와 ‘공화만세’ 깃발을 휘둘렀다. 1911년 중국 신해혁명 이후 근왕(勤王)주의가 동요했고, 세계적으로 군주정이 붕괴하고 있던 1910년대, 공화정은 무조건 선진적이요 왕정은 무조건 후진적이라고 전제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에서 정체(政體)의 결정은 본격적 토의의 조정이 필요한 과제였다.(92-105)
태극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태극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1 운동 당시 제안됐던 다양한 임시정부들이 모두 공화제를 채택했다. 3월 1일의 서울, 그리고 4월 23일 국민대회 날 서울에서 태극기가 목격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태극기 대신 ‘조선독립’, ‘국민대회’, ‘공화만세’ 등을 대서(代書)한 깃발과 태극기와 독립기를 함께 게양, 태극기 한 장과 독립기 두 장, 상부에 태극을 하부에 대한독립기, 태극기 여백에 ‘한국독립만세’, ‘대한 독립 만만세’를 써넣는 등 태극기를 변형‧보충하는 방식으로 ‘(조선/대한)독립만세’라는 글자를 활용한 유사 깃발은 운동의 전 시기 전국적으로 발견된다. 요컨대 3•1 운동에 있어 태극기는 1900년대와 1910년대를 통해 국기의 의미 자체가 변화했기에 3•1 운동에서도 등장할 수 있었다. 즉 ① 군주의 통치권을 표상하는 측면이 약화되고 국가-국민의 일체화 쪽으로 중심축이 옮아갔기에 태극기는 1910년 강제병합 후 민족 상징으로 살아남았다. ② 고종의 독살소문, 즉 일본에서 요구에 불응하여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는 평판은 재위 시절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③ ‘식민 이전’을 상기시키는 깃발로서 태극기는 3•1 운동기 내내 우세종이었다.(106-110)
공화정을 향한 움직임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부터 본격화됐다. 박영효는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다고 한다. 1888년 일본 체류 중 상소문에 유학 경전에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여러 문구를 찾아 인용하면서 부강과 민지(民智) 향상 사이의 관계를 천명하고, 나아가 부강을 위해서라도 군권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정부의 방향이 백성의 뜻과 어긋날 경우 백성은 정부를 ‘변혁’해 그 큰 뜻을 지킬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정변 성공 후 하인들에게 직위를 부여할 정도로 신분제에서 어지간히 자유로웠음에도 평등주의적‧공화주의적 심성의 최대치는 입헌군주제였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05~1910년에는 다기한 애국‧계몽의 담론이 있었으나 막상 정체 문제에 대한 담론은 미약했다. 아마 황제가 이미 무력화 되어 전제(專制)가 아니라 외세가 투쟁의 초점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1890년대부터 각국 ‘혁명사’와 ‘망국사’를 통해 수용되기 시작한 공화주의는 중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공화 혁명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정체에 대한 의문을 키워갔다. 문제는 그것을 논할 장소의 부재였다.
3•1 운동은 봉기의 터전일 뿐 아니라 공론의 토대였다. 유럽에서 같이 살롱과 카페와 공원에서의 대화와 토론과 연설을 통해 형성되는 공론의 장일 수는 없었다. 언어와 사상이 무르익은 후 행동과 제도화가 뒤따르는 장기적 과정일 수 없었다. 총칼에 맞서 종기를 조직하면서, 선전(宣傳)전을 펼치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가면서 3•1 운동의 대중은 언어와 행동이 하나된 식민지의 공론장을 개척했다. 그들은 독립이 박두했다는 소문에 고무돼 만세 부르며 일어나, 그 이후의 몇 달을 거쳐 이후의 정치체제와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될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3•1 운동은 각성의 과정이자 자아 형성의 과정이었다. 1907년 고종 폐위 후 이즈음부터 각종 출판물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범람하기 시작하고 공화국 헌법의 사례가 공범하게 토론되기 시작한다. 곧이어 닥친 1910년의 국망 속에서 왕정과 공화정 사이 긴장은 실종되지만, 「대동단결선언」에서 조선의 왕은 1910년 ‘합병조약’을 인준함으로써 주권을 포기한 셈이므로 사실상 주권은 국민에게 양여되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3•1 운동 이후 왕정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3•1 운동 전부터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였던 복벽(임금의 귀환)주의와 공화주의가 변화‧통합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충군’의 의병 계열과 ‘애국’의 계몽운동 계열은 대한광복회(1915)로 최초의 조직적 합류를 보였고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군주제와 결별을 선언했다. 3•1 운동으로 대중적으로 승인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1919년 봄의 짧은 시기 동안 이토록 극적으로 대중의 이념적‧감성적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0년간의 침묵 끝에 연대와 공공성의 세계를 만난 대중은 옛 황제와 황실이 수동적 안전한 생애로 도피해 있는 동안, 오래된 지배계층이 무력화되고 보수화되어 향촌에서조차, 대중은 (망명) 공화국을 추동해냈고 또한 스스로 공화국의 (잠재적) 국민이 되었다. 지금은 식상할 만큼 익숙한 태극기, 그것은 3•1 운동을 통해 대중이 피로써 새로이 그려낸 새 나라의 깃발이었다.(110-115)
4장. 만세 : 새 나라를 향한 천 개의 꿈
(…) 그 때 헌병들의 총격이 개시됐다. 다섯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흩어졌던 사람들은 (…)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분대를 내놓아라”, “우리를 죽여라”며 육박했다. 격앙된 상태이나 무장 시도는 없었던 듯하다. 헌병들은 다시 총격을 가했다. 여덟 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선두에 섰다 총을 맞았던 이영철은 재판정에서 시위 동기를 “인류의 행복을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고 마침내 2,000만 동포 전부가 이러한 뜻을 품으면 세계의 공인을 얻어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분명 이러한 사건을 보고 들었을 텐데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120)
3•1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나 독립적 권리(independent right)를 획득하지 못했다. 대신 1910년대를 통해 유예됐던 일본에 대한 적대를 확고하게 했고 ‘독립했더라면’ 맞이했을 미래에 온갖 유토피아적 소망을 투사하게끔 했다. “소원대로 독립을 이루고 굶어죽으라”는 식민자의 저주와 독립 후 독재와 저발전의 덫에 걸린 사례(아이티, 알제리)가 있음에도 미래로 고려됐던 적은 없다. 마르티니크처럼 독립과 자주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주권(sovereignty)를 유보한다는 노선은 더더구나 논의되지 않았다. 원(原근원)-민족주의(proto(원생의) nationalism(민족주의))의 역사가 오래됐고 정치‧문화적 자원이나 행정‧통치의 경험 또한 풍부한 한반도의 특수성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3•1 운동 이후 자치권, 참전권을 주장한 측은 모두 식민권력에 굴복한 자들이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은 불가침의 신성한 서약이 됐다. “조선민복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驅逐)(123) 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라는 명제가 최고의 정치적‧윤리적 정당성을 발휘해온 것이 이후의 역사였다. 1910년대 후반 조선은 제1차 세계대전의 병폐를 전가당한 채 세금‧물가‧소작료가 모두 인상되던 참이라, 불만은 팽배했고 조세 저항이나 노동쟁의 등이 최초로 표출되고 있었다. 민족 내부의 불만이 없었을 리 없건마는 3•1 운동을 통해 내전(內戰)의 양상은 목격되지 않는다. 3•1 운동의 전국적 폭발력은 모든 불만을 민족화하는데 성공한 결과다. ‘독립만세’ 혹은 ‘만세’는 불만의 승화이자 희망의 표현, 새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축원하고 환영하는 기호다. 미정(未定 아직 정해지지 않은)형으로 저마다 현재의 부조리를 보상할 만한 새 나라를 꿈꾸었다.(124-125) ‘만세’ 동학(動學)은 “희망과 요구, 불쾌와 평화의 모든 의사”라든가 “희열과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감동”, “시원히 소리 한번만” 등으로 표현되며 민족독립에의 염원으로 수렴됐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희망과 요구, 불만과 기원을 실어나르는 민중의 발성(음향)장치로 재탄생했다. 국가의례에 접할 일 없던 민초(民草)들에게 ‘만세’는 비일상적 어휘였으나 ‘만세’ 소리의 감염 효과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옆 마을에서 만세성이 들리면 변소 다녀오는 길 집안에서도 따라 불렀고, 술 마신 후 비틀거리는 귀갓길에도 외쳤다. 누구는 종로 네거리에서 대성통곡하며 만세를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춤추며 외쳤다. 이 다양한 상황을 관통하여 넘쳐흐를 듯한 희열은 공통된 정서였던 듯 보인다. 또한 그 희망‧요구‧희열‧공포의 방향이 명확치 않았으나 “잘 살아야 겠다는 의식에 마음 태우면서도 잘 살 수 없는 그들의 운명(현실), 새 문명과 새 세상에 대한 그들의 동경은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살아오면서 그들의 심리는 좋거나 언짢거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려고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세’는 그 순간의 발성법이었다.(127-131)
3•1 운동기 ‘만세’는 1910년대의 폭력과 억압과 차별은 ‘일본’이라는 기로호 압축됐으며 ‘독립’은 온갖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재산을 균분’한다는 소문은 조선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며 동서양 구별도 철폐될 것이라 했다. ① 이때, “빼앗긴 땅을 되찾”으리라는 기대는 민초들이 ‘만세’로써 불러올 ‘새 나라’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토지 소유는 중층적‧관습적 형태였다. 소작농이라 해도 단순히 계약직 노동자가 아니라 엄연한 부분적 소유권자인 경우가 많았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배타적 사적 소유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작농의 권리가 축소되고 소작료가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국유지 경작에 안 내던 세금도 내야 했다. ②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천도교도들일 것이다. 동학의 후신으로서 동학농민운동이 폭발시켰던 ‘개벽(開闢)’에이 소망을 잇는 한편 1910년대에는 가상 국가에 가까운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안의 망명정부=소국(小國)’과도 같은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천도교에 있어 ‘독립’은 교단 기구의 사회화 및 천도교인들에 대한 보상의 실현을 의미했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일본인들 중에서는 ‘개조’의 물결을 타고 조선독립과 동양평화와 세계의 진보에 기여코자 했다.-그 밖의 생활주의‧현세주의적 기대(홀로 뒤떨어질 수 없다는 자의식, 지역별 인정투쟁의 구도), 노인단, 개조(평등사상)의 물결을 탄 일본인 등-(132-142)
파리평화회의를 논하는 농민들; 3•1 운동의 봉기 대중은 모든 층위에서의 ‘개조’을 원했다. 2•8 독립선언 제안, 파리평화회의에의 대표 파견까지 3•1 운동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한청년당의 경우 1919년 초 당수 격인 여운형이 미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 R. Crane)을 면담한 경험으로써 결정적 동력을 얻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열렬한 호응은 이러한 아메리카니즘의 집약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3•1 운동의 대중은 민족자결주의가 윌슨의 독자적 발명품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뚜렷이 의식했다.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등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이 먼저 있었고, 윌슨의 “도덕적 동기와 선의”란 그 투쟁을 인정하고 명명(命名)한 데 있었음을 간파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매일신보』와 『도쿄아사히신문』, 『오사카마니이니치신문』 등은 물론 영자(英字) 신문까지 섭렵하면서 ‘민족자결’에 대한 정보를 탐욕스럽게 흡수했고, 문맹자들은 풍문에 의지하여 ‘민족자결’을 의욕적으로 학습했다. 농민, 부녀자 등이 ‘민족자결’이며 ‘독립만세’ 같은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게 된 시절이었다. ‘자결’의 사상에 따라 약소민족이 궐기했을 뿐 아니라 열강이 그 사실을 추인하고 공론화했다는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여 조선인들은 개벽(開闢)이라 할 만한 신세계를 목도했다. 조선인들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를 발빠르게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민족자결을 외치고 요청하고 정당화했다. 황해도 곡산의 천도교 농민 문창환은 “만국평화회의도 눈앞에 닥친 오늘 조선의 독립은 그 회의의 문제가 되어 좋은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 사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폭압적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평범한 조선인이 지역과 민족과 세계를 의식하며 사고하고 행동했다. 3•1 운동의 ‘만세’는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지향했으며, ‘독립’이라는 말로써 상상한 미래상 역시 전 지구를 겨누었다.(143-147)
3•1 운동의 대중이 ‘독립’이라는 말로 꿈꾸고 ‘만세’라는 구호로써 소환하고자 했던 새 나라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있어야할 세계’였다. 유럽 제국들의 목락으로 미국이 세계의 구원자로 등장했으며 러시아가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서 기대를 모으고 있던 당시, 세계는 유럽의 노회한 정치가들마저 대중 유토피아의 이념을 조형하고 있었다. 파워 폴리틱스(현실참여정치)는 그 순간에도 틀림없이 작동했다. (물론,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암살하려던 김원봉 같은 사람도 있었다.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 전후 본격화되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결정에 올랐던 역사적 유토피아니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전체의 지배 사상이 순도 높았던 때가 3•1 운동 전후다. ‘있어야 할 세계’를 둘러싸고 전 인류가 윤리적 대화를 나누었던 미망(迷妄)의 시기, 실제로 파리평화회의 이후 잠시 잊힌 듯 보였던 국가 간 이권다툼은 덕 극심한 형태로 분출했다. 과연 20세기의 역사는 ‘진보’와 ‘유토피아’의 사상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생생하게 증명했다(2차 세계대전). 대중 정치와 유토피아의 이념이 결합할 때의 무시무시한 부작용은 오늘날 세계가 짐 지고 있는 역사적 과제 중 하나다.
『매일신보』는 ‘괴사(愧事)‧참사(慘事)’라는 표제로 두 가족 총 11명이 자살을 기도 사건을 보도했다. 죽은 현씨 부인의 유서 독해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조선이 “옳은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은 세계가 미쳐 다 바뀌지 않은 탓이다. 11명의 죽음의 희생으로써 메꿔 재생하여 세계의 개조에 일조할 수 있다면, “결사대가 되어 바닷속으로 부처가 되어 간다”고 자부할 수도 있겠다. 병적 과대망상이라고 치부하면 그뿐이겠으나, 사건은 ‘만세’의 한끝을 보여주는가 싶기도 하다. 적어도 이들이 희생을 통한 불사(不死)를 믿고 머나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도래해야 할 신세계를 기대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만세’는 실체론적 말세 신앙에까지 닿아있는 구호이기도 했다.(15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