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이승하
책 없는 도서관에서 외
이렇게 많은 언어와 담론이 필요하였나
이렇게 많은 책과 ISBN이 필요하였나
모든 고전은 거대한 무덤
생존자 저자는 한 명도 없다
그 시대 그 시절에도
人間은 사람 사이에서 아프고 슬퍼 글을 썼던 것
글 모아 책으로 펴냈던 것
동성애자였던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격을 가하자
랭보는 그때부터 시를 그만 썼고
베를렌은 옥살이 후 시다운 시를 썼다
외롭고 괴로운 어느 밤에
붓을 꺼내 들거나 펜을 잉크에 찍어
사람을 살려내고 사람을 죽이고
정음사와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계몽사와 금성출판사의 한국문학전집
살아 있는 저자는 없다
태어나면 죽는 책들
태어나면 죽는 저자들
태어나면 죽는 출판사들
도서관에도 없는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정음문고 서문문고
책이 시체가 되고 수억의 재산이 되고
제노도토스의 넋이여*
그대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확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책이 지금 몇 권 있는가?
네 차례나 화마에 휩싸였던** 인류의 정신 창고
움베르토 에코여 『장미의 이름』에서는
사람이 책을 죽이고 책이 사람을 죽이지만
지금은 스마트폰과 AI가 책을 죄 죽이고 있다네
■ 중국의 당나라 시대는 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걸출했던 네 시인을 당시사걸(唐詩四傑)이라고 일컫는다.
* 제노도토스(BC 320년경∼BC 240년경):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초대 관장. 호메로스의 시에 대한 책에 달통하여 최초의 교정판을 펴냄.
**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전쟁, 로마제국기 및 기독교 확산기, 391년 분점 세라페움 파괴, 642년 이슬람 정복기 때 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인류의 장서가 몽땅 소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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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장기를 기증하라고 한다
차에 받혀 하늘로 날아 올라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살아 있었다
높이뛰기 선수처럼 붕 날아가
아스팔트 위에 털버덕 떨어졌을 때 그는
목숨이 아니었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의식을 잃었지만 숨도 쉬고 맥박도 뛰고
두개골 안의 혈관이 여러 개 끊어졌다
피투성이 얼굴, 급격히 올라간 두개내압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동공은
연극 끝난 극장의 문처럼 열려 있었다
저승사자와 염라대왕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폐와 간이, 콩팥이 이렇게 멀쩡하다니
뇌 기능이 멈췄는데 숨 쉬는 착한 송장
예전에는 각막, 폐, 심장, 콩팥, 간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되살아났는데
지금은 비장, 췌장, 얼굴 여기저기
소 도축해 어디 하나 버릴 데 없듯이
사람 죽어 어디 하나 버릴 게 없다니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장기들 다 기증토록 합시다
한 명이 죽어 여러 사람 살릴 수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살신성인입니다
의사는 내게 간청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나는 그의 보호자
죽이면 살릴 수 있고
살리려면 죽여야 한단다
나는 보호자가 아니라 살인 명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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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됐으며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사람 사막』, 『일출』 등이 있으며 평론집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우상순』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