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을 상담하다보면 대개 두 가지 정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편이다. 첫째는 직장생활이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직장생활이 (대인관계, 업무, 문화등으로) 자신과 맞지 않아서 힘들다는 것이다.
직장을 옮기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라면 괜챦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실행하기가 어렵다. 또 직장을 옮긴다하더라도 가슴뛰는 일이라는 자체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사실 상담을 해주는 나도,,, 목사라는 직업이 가슴뛰지 않고, 힘든경우가 많다.ㅜㅜ)
2. 이 두 가지 질문은 교회 안에서만 야기되는 질문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직장인들이 이야기 하는 문제들이다. 또 이전시대보다 오늘날 더 많이 야기되는 질문이다. 왜 오늘날은 이전 시대보다 이 두가지 문제를 더욱 크게 이야기 하는가? 어쩌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문화를 살아가는 문화적 네러티브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팀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계몽주의 이후의 철학의 영향으로 개인의 자아가 주체가 되는 시대가 되면서 인생의 의미를 개인이 '지어내는 것' 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개인이 스스로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3. 그래서 개인이 인생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어내야 하기 때문에 실력주의와 학벌주의등이 더 대두되고,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구글은 "세상이 놀랄만한 일을 하라" 라는 자신들의 지어낸 의미를 광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세상에 놀랄만한 일을 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다른 사람보더 더 탁월해야 하는 경쟁과 비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지어낸 의미는 개인의 이상과 현실의 갭을 크게 하기 때문에 늘 절망감을 가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 이런 '지어낸 의미'의 큰 약점은 '고난에 대한 생각'이다. 개인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삶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과 고통은 인생에 잘못 끼여든 것이 된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오늘의 고난도 어떤 의미가 있지만,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오늘의 고난은 없애야 하는 숙제가 된다.
4. 오늘날 젊은이들이 어려움과 고난을 잘 견디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필립얀시와 폴브랜드 박사가 공저한 <고통이라는 선물>에서는 "오늘날 서구사람들에게 고통이 그토록 충격적인 이유는 삶의 의미를 개인의 쾌락과 자유를 추구하는데 두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인생의 의미를 자신이 지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적 쾌락과 개인의 자유를 가장 큰 행복으로 두기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은 없어져야 하는 숙제가 된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없어지지 않는 고난은 너무나 큰 어려움과 포기하고 싶은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현대 세속주의가 만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고난 앞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빨리 회피하려고 하거나, 상황을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5.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뿌리에 있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오늘날 세속주의 세계관의 특징은 초자연에 대한 배제이다. 찰스테일러는 이것을 '내제적 틀'(immanent frame) 로 세상을 바라보는 '닫힌 자아' (buffered self)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내제적 틀'이란 초월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말한다. '닫힌자아'란 쉽게 말해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세계관은 입술로는 무엇을 고백하든지 간에, '실천적 이신론자'를 만든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구 시대적 기독교 사상이 물러가고, 인간을 보살피고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6. 찰스테일러는 이런 사상이 결국 고난에 대해서 분노하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욕구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고난에 대해서 말할 때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무엇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초월을 인정하던 시대이기에 우리가 모르지만 더 큰 의미가 있을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또 오늘날은 작은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따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사고와 이성으로 만사를 다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전제에 깔려있는 것이다. 나는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7. 직장이 힘든 문제들을 우리는 너무 피상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속주의는 고난이 끼여들어온 어떤 무엇이기에 빨리 처리하거나 원인을 분석하여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한 의미를 준다고 말한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무엇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고난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 같다. 직장을 옮기고 옮기지 않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팀켈러는 <고통에 답하다>에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고난에 대해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고난 속에서 위로를 주고,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다시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 8.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정의인지 모르겠다. 고난은 없애야 할 불행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면서 더욱 우리를 에수님을 닮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히 5:8)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멍에일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해결하려 하지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 같다. 그것이 직장을 옮기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생각한다.
물론 사직서를 낼 때도 있고, 직장을 옮겨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는 자세일지 모른다. 직장생활에서 복음이 주는 힘은 새롭게 변화를 주어서 완전히 감정적으로 기쁜 일들로 변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힘든 직장과 어려운 가정일수도 있다. 전혀 변화되지 않는 환경일지라도 복음의 은혜는 그것을 견디게 해준다.
9. 팀켈러는 이렇게 조언한다. "다른 철학이 말하듯이 다른 것을 덜 사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더 없이 큰 사랑, 목숨과도 바꿀만큼 사랑을 쏟는 대상이 하나님일 때에만 무슨일이 닥치든 고통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큰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사랑과 소망을 품고 스스로 정련되며 새 힘을 낼 수 있다."
너무 힘든 직장생활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구조의 문제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과 고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한 것 같다. 세속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고난은 더욱 힘들고 어렵기만 할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고난의 해결책이 아니라, 고난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첫댓글 함께 걸어가야 할~~
함께 동행하는 방법을 배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