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연암
연암은 중국을 기행을 벌이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記之者誰 記之時維何 乾隆四十五年秋八月初一日也를 인용한다. 記之者 의 之를 빼면 기자가 된다. 기자는 누구냐 라는 말을 가지고 조선의 최소 기자를 연암으로 삼고, 기자 처지에서 기자의 눈으로 쓴 글이다. 열하일기는 1780년 청 4대 황제 건륭의 70세 축하 칠순 잔치의 축하 사절단으로 가는 진하사절단의 정사 박명원의 자제 군관 자격으로 따라간다. 박명원은 당시 임금인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 옹주의 부마로 금성위로 봉해졌고,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으로 당내간인 삼종형제이다. 당시 사대부는 음풍농월이나 사서삼경을 흉내를 내, 시문을 짓거나 과거를 봐 출세에 심혈을 기울일 때 연암은 시대와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데 힘을 기울였다. 연암은 북경에 도착한 감회를 중국 스물하나 왕조, 삼천여 년 역사를 되짚어 보며 장황하게 서술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를 되놈 짐승 정도로 깎아내렸다. 그러니 도무지 아무것도 볼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 부류를 上士로 보고,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 산천은 노린내와 비린내를 피우는 고장으로 변했고 언어조차 야만인의 말씨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볼만한 게 무엇인가? 십만 대군을 얻을 수 있다면 산해관으로 몰고 들어가 중국 천지를 한번 말끔하게 씻어낸 뒤라야 장관을 말할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中士의 장관론이다. “기와 조각, 똥거름이 장관이다.”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었고,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었다.” 여기에 천하의 문장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下士의 장관론이다.
흔히 조선의 실학파를 세분하면서 ‘이익’의 경세치용학파, ‘박지원’의 이용후생학파, ‘김정희’의 실사구시 학파로 나눈다. 연암은 이용후생을 가지고 열하일기를 썼고,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취재했다. 연암은 조부가 ‘박필균’으로 경기 관찰사를 지내고 아버지는 ‘박사유’는 포의다. 어머니는 함평 이씨로 서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야동은 지금의 서소문 밖이다. 연암은 감시에 장원을 하나 과거는 보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이덕무, 백동수 등과 평양과 묘향산, 속리산 등을 유람한다. 이서구가 제자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출입국 관리사무소인 책문까지 백 리의 거리는 금지로 청 황조의 선대 출생지로 봉금 지대로 설정해 사람이 살지 못했다. 그리고 책문에서 처음 본 중국의 삶의 현장 기사를 보자.” 책문 밖에서 안을 보니 여염집들이 높이 솟았고 집은 등마루가 하늘까지 높다, 대문과 창문이 정제되고 길거리는 평평하고 반듯하다. 담장은 벽돌로 쌓았다. 수레와 마차가 길을 누리며 살림살이인 그릇은 도자기다. 책문은 중국의 최변방인데 이 정도의 경제력이니 몸이 부글부글 끓었단다. 책문을 통과하는 데 쓰인 뇌물을 줄 놈은 102명으로 상품은 종이 156권, 담배 800봉, 부채 288자루, 대구 74마리를 썼단다.
그리고 처음 낙타를 보고 쓴 기사는 다음과 같다. 낙타는 하나같이 크고 엷은 흰색 바탕에 누런색을 띠었다. 털은 짧고, 머리는 말처럼 생기고 작으며, 눈은 양과 같고 꼬리는 소와 같다. 갈 때는 목을 움츠렸다 목을 드는데, 모습이 나는 백로와 같다. 무릎은 두 마디이고 발급은 양 갈래이다. 걸음걸이는 학처럼 발를 떼고, 거위와 같은 소리를 지른다.
심양의 상인들의 삶과 생각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오 땅과 촉 땅, 사람들이 심양에서 장사를 하니 고향 생각이 절실하다. 모친과 젊은 아내는 독수공방을 한다. 달 밝은 밤, 낙엽이 지는 가을, 꽃 피는 춘삼월이면 더욱 견딜 수 없다. 그래도 장사꾼을 하는 것이 벼슬아치보다 낫다고 자위한다. 고향 선비는 나물국, 소금 반찬을 먹고 공부한다. 벼슬을 얻어도 만 리 밖에서 벼슬살이하니 고향을 떠나는 것은 마찬가지고 파직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처신을 잘못해 뇌물을 먹다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자식의 손을 잡고 한탄한들 무엇하랴! 그래도 장사꾼은 사방으로 돌아다녀도 간섭받지 않고 좋은 집에서 몸과 마음이 편하고 내 마음대로 먹고산다. 농사꾼과 벼슬아치보다 어느것이 더 낫겠는가?
북경에서 황제가 열하로 오라는 명을 받은 정사, 부사, 서장관 일행은 날짜 안에 닫기 위해 말에서 잠을 자며 고생 끝에 도착한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잠시 머무는데, 열하는 만리장성 밖의 황량한 벽지다. 천자는 무엇이 괴로워 이 변방 와 거주하는가? 변방을 각박하려는 목적이다. 이유는 몽골의 강성함 때문이라 연암은 예측한다. 연암은 부민 강국의 꿈과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취재하고 기사를 쓰기 위해서도 취재했다. ‘유득공’이 쓴 열하일기 서문을 보면 목적이 아래와 같다.
중국의 노래와 가요에 관한 것, 풍습에 관한 기록도 사실은 나라의 치안에 관련된 것들이고, 성곽과 궁실에 관한 묘사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며 도자기 굽고 쇠를 다루는 것들에 관한 내용은, 그 일체가 기구를 과학적으로 편리하게 사용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이용후생의 길이 되는 내용으로 모두 열하일기에 들어 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라는 책은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중국은 외양간, 돼지우리라도 널찍하고 곧아서 법도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장작더미나 거름 구덩이까지 모두 정밀하고 고와서 마치 그림과 같았다. 제도가 이렇게 된 뒤라야만 이용이라 말할 수 있겠다.
조선은 과하마를 탈 때 낙마할까 봐 견마를 잡히고 거추장스러운 마구와 재갈 등으로, 조선 기마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나열한다. 임란에 ‘이일’이 상주에 진을 치고 숲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군관에 살펴보게 보냈다. 군관은 좌우에서 말을 몰게 하여 거둘 먹거리며 가다가, 다리 아래 숨은 직후 병의 칼에 말을 배가 찔린다. 낙마한 군관의 목은 이미 허공을 갈랐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 일을 기록하며 지적하여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연암의 한탄은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사람이 비체법으로 날아가듯 달리는 청나라를 어떻게 몰아내겠다는 것인지, 허황한 북벌론 대신 우선 목마 산업부터 제대로 진흥시켜야 한다는 말로 주장한다.
이미 중국을 다녀와 ‘이산문답’을 지은 담헌 ‘홍대용’은 열하일기에 곳곳에서 언급된다. 연암은 북경에서 홍대용이 만난 ‘반정균’을 수소문한다. 청심환은 중국인이 사신단에 요구하는 중요한 뇌물이다. 이 청심환을 얻기 위해 환심을 사려는 중국인이 자주 등장한다. 기꺼이 돈을 주고 청심환을 사 모으는 중국인 부류도 많다. 봉황성에서 점심을 먹은 ‘강영태’란 한족의 집에서 사례로 청심환을 준 기록도 나온다. 지나가는 길에서 앞의 일행이 먹은 참외 값을 내라는 농부에 참외 값을 야바위당하고 청심환을 준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다음은 기자로서 연암의 취재 기법을 필자는 소개한다. 늘 현장 중심으로 들어간다. 연암은 피서 산장에서 초대받지 않는 서열 밖의 인물이나 통역인 척 슬쩍 들어가 멀리 있는 발치서 황제의 모습을 보고 기록한다. 그래서 현장 엿보기 취재의 원조라 칭한다. 궁금증은 지나가는 길에서도 발동하여 음악 소리 요란한 집을 들어가니 상갓집이고 상주는 문상을 온 사람이라 생각해, 서럽게 울며 모시고 들어간다. 조선과 다른 상례의 방법을 슬쩍 하인에게 묻고 상주의 손을 잡과 당신 아버님은 천당에 가셨을 것이오. 말을 하고 나온다. 연암의 현상 취재 기법은 천하의 형세를 파악함이 우선이다. 사신단은 늘 청나라의 감시단이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으면 저는 변변치 못한 사람인데 그대는 귀인이신데 이리 예로 대해주시니 감사하다고 몸을 낮춘다. 그리고 무슨 공적 일로 왔냐 물으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관광하러 귀국에 왔다고 늘 답을 했단다. “취재 대상은 청나라에서 함부로 묻지 말아야 한다. 자국의 정보를 보호해야 할 사람과 알려야 할 연암이 상충하는 관계다. 여기서 취재할 내용은 묻지 않고 다른 얘기로 실정을 파악하는 성동격서 취재법을 쓴다. 열하일기 ‘황교문답’에 나오는 이야기라 필자는 말한다.
2022.12.05.~12.09
조선의 대기자, 연암-1
강석훈 지음
니케북스 간행
첫댓글
연암을
다시 만나다
이게
열하일기였구나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제
봄도 멀지 않겠지요
건강속에서
행복한 나날
되소서
경주에 잘 다녀오셨군요?
세미나 내용은 괜찮아요?
기대가 됩니다!
대한시협 차원에서도
이제 회관도 리모델링 완공 되었고 하니
회관에서
이런 연수회를 종종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