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큰 절 대만 불광산종의 서래사
은호기
역시 중국절, 중국엘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규모의 장대함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장대함은 장대함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속에 녹아있는 유구한 역사성과 무한한 상상성이 그 장대함을 실하게 받들고 있음을 이내 알게된다. 자금성을 보면 서울의 창덕궁은 어쩔수 없이 문간채로 떨어側?말며, 만리장성을 보면 덴마크의 성채는 '살아부지할 것이냐, 죽어 없어질 것이냐'의 넋두리에 알맞은 무대장치에 그치고 만다. 지하궁전에 들어가보면 중국인 특유의 어마어마한 상상성이 현실로 바짝 다가온다. 한마디로 '대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인근도시 하시엔다 하이츠에 있는 중국 절 서래사(西來寺), 중국말로 시라이 쓰(Hsi Lai Temple)라 불리는 이 절에 가면 그 규모가 엄청난 것에 쉽게 놀라게 된다. '아 역시 중국사람답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부지 15에이커에 평면면적만 102,432평방피트, 거대하고 육중한 절이 하시엔다 하이츠시 남쪽 등성이에서 흡사 궁성같은 모습으로 시가지를 감싸안고 굽어보고 있다. 산등성이를 깎아 지은 탓도 있으리라.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길고 수많은 계단으로 연결하고 있어 건물들이 더욱 크고 웅장해 보인다.
서래사는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구성과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다른점이 중국절의 일반적 특징이라기보다는 불광산종(佛光山宗)의 특이점이 아닌가 싶다.
우선 절문의 이름부터가 다르다. 사홍서원(四弘誓願)문이라 이름 짓고, 사홍서원을 네 기둥에 한문으로 써넣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절문을 들어서러면 중생을 건지고, 번뇌를 끊으며, 법문을 배우며, 불도를 이루리라는 네가지 서원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겠다.
사홍서원문을 들어서면 굉장히 넓고-약간 넓은 게 아니다- 긴 돌계단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그 계단의 아스라히 먼 위에 육중한 건물이 서있다. 보살전이다.
보살전에는 미륵보살의 한가운데로 하여 왼쪽으로 보원보살, 지장보살이, 오른쪽으로는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이 한참 높은 곳에 나란히 모셔져있다. 사람들은 토큰을 사서 공양물을 뽑아 바치庸?무언가를 열심히 기원하고 있었다.
보살전은 한국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불전이다. 특히 한 가운데 모셔져 있는 미륵보살. 흔히 '해피부다(Happy Buddha)라고 부르는 보살이 커다란 배를 서슴없이 들어내 놓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모습에서 민중의 절실한 기원을 본다. 오랜 왕조정치에 시달린 중국백성의 원이, 그리고 초기 중국이민의 절실함을 보는 듯하다.
중국이민은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 때에 광산노동자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4년 이후에는 대륙횡단 철도건설을 위한 노동이민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반노예적 상태에서 자유는커녕 백인십장의 채찍에 시달려야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노예적 삶을 유지시켜준 것은 아마도 미륵세계에 대한 강한 기원과 무수히 외어대던 미륵보살에의 염원의 힘이 아니었을까.
보살전을 돌아가면, 뒤로 큰 마당이 나온다. 다시 마당 저편으로 수많은 긴 계단위에 대중전이 왕궁의 근정전처럼 버티고 서있다. 대웅전에는 역시 꽤 높은 곳에 부처님상이 모셔져 있으며, 대선사의 설법상이 공중에 매달린 듯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중국식 관료주의를 한 눈에 보는 듯하다. 그러나 법당은 이곳 생활을 감안한 듯 반절을 하도록 바닥에 낮은 벤취가 설치되어있다.
대웅전 앞에는 수백군사의 밥을 지을 만한 정도의 큰 향로가 눈길을 끌었다. 향을 사서 공양하는 사람의 줄이 길게 늘어 서있다. 가는곳마다 공양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다. 우리와 다른 점은, 돈으로 직접하기보다는 공양물을 사서하도록 체계화되어있다. 물론 건물마다에도 공양주의 이름이 크게, 작게 새겨져있어 철저한 중국식 상업성을 느끼게 한다. 천박하게도 보이지만 한국절에서도 배울 점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대웅전과 보살전은 긴 회랑으로 양쪽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회랑 바깥쪽으로 각각 이층 건물이 지어져있어 절 전체모양이 입구(口)자 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 회량을 끼고 있는 건물은 윗층이 동시통역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는 국제회의실, 아래층은 박물관, 기념품전, 책방, 찻집, 식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른쪽 회랑을 끼고 있는 건물은 윗층이 강당을 겸한 공연장으로, 아래층은 참선수련장, 정진방, 어린이 당수도장, 음악특기실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양쪽 회랑과 건물사이의 공간을 각각 관세음보살 뜰과 18나한상 뜰의 만들어 시각적 교육을 유도하고 있다.
절의 맨 위쪽에는 외따로 회은당(懷恩堂)이 자리잡고 있다. 회은당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아름다운 원형건물이다. 젊은 여인이 아들인 듯한 어린애를 옆 세우고 열심히 절을 하며, 누군가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비는 곳이다. 가는 곳마다 부처님상이요, 보살님상이다. 예술적으로는 다소 떨어진다 하겠으나, 배를 튕기며 찢어지게 웃고 있는 보살상을 보면 금방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같이 간 김소연 보살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얌전히 모두어 합장을 하며 절을 수없이 해댄다. 나는 그녀의 진지함에서 문뜩 어머니를 본다. 어머님은 그랬었다. 절에 가면 빌고 절하기에 바빴다. 절뿐이 아니었다. 산마루 서낭당 돌무더기에도, 등성이 돌아 서있는 돌부처님께도 합장하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이 그리 달가운 곳이 아니었다.
절간에 들어서면, 우선 상여집같은 우중충한 어둠 속의,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 같은 우중충한 우둠속의,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 같은 험상궂은 나한상의 정말 싫었다. 어처구니없이 큰 부처님, 독한 향냄새를 견디어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나는 슬그머니 어머니 손아귀를 벗어나 아직도 부리가 샛노란 산새 새끼를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다 지치면, 어머니 무릎팍으로 슬그머니 다시 돌아와 누룽지를 실컷 얻어먹고 잠에 떨어지곤 하였다. 그러니까 절은 구수한 누룽지였을 뿐이었다.
10년 걸린 절
서래사가 맨 처음 발원으로부터 개원법회를 갖기까지에는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야말로 중국인의 '만만디(慢慢地)'정신이다. 한국스님들이 상가선물을 사서 손쉽게 절로 고쳐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서래사는 물론 중국불교계에 대하여 알고 싶은 욕심에서 주지스님인 자용법사(慈容法師)와 어렵게 마주 앉았다. 인터뷰 신청을 한 지 꼭 4주만이었다. 접견실은 중국전지 크기의 중국화가 몇 점 걸려있을 뿐, 매우 검소하나 깔끔하였다 다만 커다란 창문을 통하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와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주지스님은 영어를 할 줄 말랐다. 홍보담당 의초(依超)스님의 통역으로 대담이 시작되었다. 연애경험이 전혀 없다며 맑게 웃는 비구니 의초스님의 영어는 매우 유창하였다. 주지스님이나 통역스님이 모두 여자분이어서 김소연보살과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김보살이 면담고 일정 등 모든 것을 조정한 터였지만.
Q. 스님, 서래사의 설립 경위를 좀 알고 싶은 데요.
"저는 이 절에 주지로 온 지가 삼년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설립과정을 제가 설명하기는 적절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팜플렛을 하나 건네준다.
팜플렛에 의하면, 서래사의 설립 구상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 서래사 설립계획을 하시엔다 하이츠시에 제출한 후 여섯 차례의 공청회와 백여번이 넘는 지역사회 회의를 거쳐 불교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주민들에게 설득시키고 동양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 겨우 1984년에야 계획이 승인된다. 실제로 1986년에서야 착공이 이루어지고, 1988년 11월 28일에 드디어 개원법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다. 꼭 십년만이었다.
Q. 십년만에 가질 수 있었던 개원법회는 그만큼 뜻도 깊고 성대하였겠습니다.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절의 규모만큼이나 큰 커뮤니티의 행사였을 터였다. 미국 각지에서 몰려든 불자는 물론 백인주민들의 축원도 대단하였다 한다. 그러나 축하잔치 일색만은 아니었다. 개원법회에 첨석하였던 신오성법사의 회고. 신법사는 오랫동안 불교의 국제화, 불교의 국제교류에 힘써온 '미국불교협회(American Buddhist Congress, ABC)'의 공동의장직을 맡고 있는 재가불자이다.
"개원법회에 부랴부랴 갔습니다. 그런데 절 입구에 동양사람들 사오십명이 피켓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더라구요. 피켓을 들여다보니 '우상숭배(偶像崇拜) 어쩌구 저쩌구 한문으로 쓰여있질 않겠어요. 반대 항의데모를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참, 한심하데요. 오히려 백인주민들은 그랜드 오프닝을 축하해 주는데 중국인 기독교인들이 떼를 지어 반대데모를 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분법사고 방식에 쩔어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불교-불상-가 우상으로 보일지도 모르다. 그러나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불상의 우상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한다. 실제로 중국의 한 선승은 나무불상을 쪼개서 불을 지펴 시린 엉덩이를 쪼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과연 기독교에서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강당의 십자가를 패대기쳐 불땔 수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Q. 서래사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무엇인지요?
"불광산종(佛光山宗)이 대만에서 1967년에 창단되었는데, 중주인 성운대사께서 서쪽에 불법을 전하러 오셨다해서 서래사라 이름지었습니다."
서래(西來). 우리는 여기서 한자의 당혹함을 느끼게 된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如何是祖師西來意)'은, 선가에서 흔히 쓰이는 화두이다. 이때는 서래가 '서쪽에서 온'이지만 서래사의 경우는 '서쪽으로 온' 뜻이되기에 말이다. 깊은 뜻과 장황한 상상력을 한 단어에 압축하고자 하는 중국문자의 특수성 때문이다. 불경이 한글로 하루빨리 번역되고 읽혀져야할 까닭이기도 하다.
Q.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거의가 비구니스님들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불광산종에서는 비구와 비구니를 특별히 가리지 않습니다. 이곳 서래사에는 비구니스님 30명과 비구스님 5명이 불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모두 대만에 있는 종단본부의 인사발령에 따른 것입니다.
Q. 절 규모가 꽤 큰데, 운영은 어떻게하고 있습니까?
"불전이 한 달에 한 삼만불 들어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과 활동이 철저히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자원봉사자가 300여명 있는데, 100명 정도가 매주 나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물 페이먼트가 없는 것도 큰 도움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식당엘 가나, 찻집엘 가나, 심지어 기념품가게, 박물관도 자원봉사자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문적인 서비스가 아쉽기도 하지만, 오히려 미숙함이 커뮤티니의 일체감에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Q. 신도수는 많은지요?
"일요일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가 약 2,000명 됩니다. 이중 삼분의 일이 외국인(백인)이지요."
Q. 서래사의 포교정신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가장 인간적인 불교(Humanistic Buddhism)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이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순수한 종교활동 외에도 교육사업, 문화사업, 그리고 자선사업활동으로 나누어 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스미드시에 있는 서래대학은 자랑할 만합니다."
서래대학에 대하여는 뒤에 따로 설명하기로 한다.
Q.불광산종은 세계적인 포교조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우리 종단에 국제불광회(國際佛光會 Buddha's Light International Association, BLIA)라는 국제조직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 180여 개의 지부와 사찰이 있으며 미국에만 20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우리 서래사가 불광협회 미국지부일도 맡아보고 있습니다. 총 신도수는 100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통도사와도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세계적인 포교사업을 벌이고 있는 성운대사를 잠깐 더듬어 보기로 한다.
성운(星雲, Hsing Yun)대사와 불광산종(佛光山宗, Fo Guang Shan Monastic Order) 서래사는 성운스님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리고 서래사는 불광산종 종단에 속해있다. 불광산종 역시 앞서 말한데로 성운스님에 의하여 1967년에 세워진 종단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경, 그러나 불교가 꽃피고 종교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된 때는 당나라에 들어와서였다. 서역에서 들어온 외래종교인 불교가 당나라의 찬란한 문화와 접묵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선정(禪宗)이다. 따라서 선종에는 노, 장사상을 비롯하여 중국인의 생각이 많이 스며들어있다. 선종은, 말하자면 불교의 중구고하이었으며, 중국의 문자인 한문의 특이한 구조속에 담겨지게 되었다. 선(禪)은 부처(佛)도 없고 가르침(敎)도 없다. 다만 깨달음이 있을 뿐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 철저히 개인적이고 비조직적이다.
이러한 특성이 스님들을 절방에 가두어놓고,간중에 묻히도록 하기도 하였으나, 한편 당나라 말기부터 닥치기 시작한 숱한 법난(法難)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어쨋든 당나라 때에 꽃피고 성하였던 성종은 송나라에 들어오면서 다소 시들해진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이었던 선종이 임제종(臨濟宗) 하나만 뚜렷이 남았을 뿐, 나머지는 시들해지거나 없어지고 만다. 이 임제종의 48대조(祖)가 바로 성운대하이다.
그러나 성운대사는 선종에만 갇혀있길 고집하지 않았다. 스님은 태허(太虛)대사의 세간불교(世間佛敎)의 이상을 이어받아 '인간불교(Humanistic Buddhism)'를 제창하였다. 불법과 세속생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 조화, 융화되도록 법력을 펼치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신심을, 사람들에게 기쁨을,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사람들에게 봉사를'이라는 원칙아래 중국불교를 인간화하고, 현대화하고, 대중화하고, 국제화하였다. 그러한 불법을 펴기위하여 스님은 불광산종을 1967년에 창단하고 국제 불광회라는 국제조직을 만들었다. 종단의 본부인 고웅(高雄)의 불광산사는 대만에서 가장 큰 절로 알려져있다.
성운대사는 1922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강도(江都)에서 태어났다. 열두살 때인 1934년 의흥(宜興)의 대각사에서 지개(志開)법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 1941년 서하산(西霞山)에 머물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깊은 잠속에 빠져있던 대만불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성운대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스님께서는 특히 교육사업과 문화사업에 깊은 관심을 쏟아왔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교육사업으로 인재를 기르고 문화사업으로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스님의 지론을 실천한 것이다.
서래사에서 열린 국제회의
스님은 일찍이 백탑(白塔)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으며(1941), 수산불학원(壽山佛學院)을 세워 인재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지광상직(智光商職), 보문중학을 설립하였으며, 동방불학원, 중국불교연구원, 대북여자불학원, 복산불학원(福山佛學院) 등을 세워 불교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스님 자신이 중국문화대학의 인도문화연구소(대학원) 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동해대학의 명예교수를 지내는 등 학자적인 면모를 손수보이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자기 제자스님들을 각국으로 유학을 보내 학문을 닦도록하기도 하였다. 의은(依恩)스님은 한국의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을 전공하고 있으며(성운대사 법요집 [마음의 비밀]의 편역자), 의법(依法)스님은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스님은 언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찍이 '노도(怒濤)'라는 월간지의 주간을 지내기도 했으며, '인생(人生)'이라는 월간지를 직접 편집하면서 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불교문화복무처(1957), 불광출판사 등을 차려 불교출판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불교합창단을 만드는 등 불교음악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스님은 사회복지사업에도 넓게 관여하여 왔으니, 대만 전국에 24개의 유치원, 탁아소를 가지고 있으며, 양로원을 세워 노인들을 돌보기도 하고, 운수의원(雲水醫院)을 설립, 무료의료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스님은 불교의 세계화, 국제화에 온갖 힘을 쏟고 있다. 이미 앞서 말한대로 세계70여 개 나라에 180여 개의 지부와 사찰을 설립, 국제불광회를 통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국제불교학술회의, 세계불교청년학술회의, 국제선학회의 등 굵직굵직한 국제회의를 수시로 열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님이기도 하다.
성운대사는 서방세계에서, 달라이라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나다스님과 더불어 삼대스님으로 꼽히고 있다.
서래대학(西來大學, Hsi Lai University)
서래대학은 교육사업으로 인재를 기른다는 성운대사의 특별한 관심으로 세워진 불교전문대학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들, 이를테면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 Berkeley),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UCLA), 컬럼비아 대학, 위스칸신대학 등에 불교학과가 있어 많은 기여를 해오고 있으나, 독립된 불교전문대학으로서 독자적인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대학은 아마 서래대학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겨우 통신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불교계가 사례연구대상으로 서래대학을 꼽을 만도하다.
서래대학은 로스엔젤레스 인근, 서래사가 있는 하시엔다 하이츠에서 그리 멀지않은 로스미드시에 자리잡고 있다. 10에이커의 교정에 기숙사, 레크레이션센터까지 갖춘 아담한 대학이다. 특히 불교관계 장서 5만권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은 불교도서관으로서는 미국 제일이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서래대학은 대만의 한 독지가가 천만불을 선 듯 내놓아 1990년에 완공, 1991년에 정식으로 학교문을 열었다고 교무처장 아난다 구르게(Ananda Guruge)박사가 귀뜸한다.
스리랑카 날씨만큼이나 뜨거운 날, 김소연보살과 함께 구르게 박사를 찾았다. 앞서 말한 신오성법사의 소개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달라이라마와 성운대사
Q. 박사께서는 스리랑카 출신이신데 어떻게 중국불교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제가 유네스코 대사를 맡고 있던 1988년 파리에서 성운대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그분의 인간적인 불교관, 교육에 대한 열정에 감복했습니다. 비록 제가 여기저기 대사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으나, 저의 본직은 불교학자였거든요. 이런 까닭으로 1996년 서래대학에 초청되어 지금은 교무처장직과 국제불교연구원(International Buddhist Academy) 원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구르게 박사는 스리랑카의 학자출신 외교관이다. 유네스코 대사직을 오랫동안 맡으면서 유네스코일에 깊게 관여했다. 그러면서 스페인, 알제리아, 불란서 등지의 특별전권대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유네스코 재정, 행정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한국에도 세차례 간일이 있으며, 이홍구대사 등 많은 분들을 알게되었다면서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구르게박사는 외교관이기도 하지만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고, 영어, 불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등 8개 국어에 능통하며, 무려 35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는 학자이다. 노스웨스턴대학, 캘리포티아주립대학(플러톤) 등지에서 초청강의를 하기도 했다.
Q. 박사님, 스리랑카는 철저히 소승불교인 줄 알고 있는데, 성운스님의 대승불교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조금은 당돌하고 찔러보는 질문이다. 대승불교니 소승불교니 하는 오랜 갈등을 짚어보자는 심보도 있었다.
"물론 스리랑카불교는 철저히 소승불교입니다. 승과 속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고, 스님은 무소유인 대신 철저히 받들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성운스님이 말하는 바 인간불교(Humanistic Buddhism)에 모두 귀착된다고 봅니다. 제가 외교관 생활을 오래하면서 많은 문화와 많은 사람을 접해보았거든요. 그리고 저희 학교가 '마음과 정신의 조화(Harmony of Mind and Spirit)'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 안에 대승이든 소승이든 모두가 들어온다고 저는 봅니다."
마음과 정신의 조화. 마음과 정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우선 따져져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인의 생활이 마음따로 정신따로, 따로 국밥보다도 더 따로따로 논다는 데에 오늘의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음따로 정신따로의 영역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넓어져가고 있다는 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리라.
Q. 얘기가 옆길로 나갔습니다만, 학교에 대하여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학교 교과과정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우리대학은 불교전문대학인 만큼 불교학, 종교학이 주축이지요. 그러나 외국인을 위한 영어학습프로그램도 있고, 경영학 과정도 있습니다. 이 모두 학사과정, 석사과정이 있습니다. 아직 박사과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과과정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위티어대학(Whittier College)과 포모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ifornia Polytechnic State University, Pomona)와도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Q. 학생은 얼마나 됩니까?
"한 200명됩니다."
Q. 한국학생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일화스님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Q. 교수진은 어떠합니까?
전임 20명, 초청강사 30명으로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수대학이긴 하지만, 어쨌든 미국대학수준으로 볼 때, 교수와 학생수의 비율이 꽤 좋은 편이라 하겠다. 질이 문제이겠지만.
어차피 학교를 따지려면 돈도 문제가 된다. 등록금을 물어보았다.
"과목당 100달러입니다. 그러나 경영학 석가과정은 과목당 200달러를 받고 있습니다."
장사가 되는 과는 더 받는다는 이야기다.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장학금도 따져볼 일이다.
Q. 처장님, 저희들도, 장학금으로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은데요?
"물론 환영합니다."
하면서도 선뜻 구체적인 말은 없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메마르게 하는 것으로 보아 장학금은 그리 풍부한 것 같지는 않다.
Q. 강의는 중국어로 합니까?
"영어로 합니다. 이 대학은 미국법규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운영됩니다. 중국대학이 아닙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적지 않은 한국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지식인의 경우가 심한 것 같다. 그런데 이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우리 동포사회에는 없다. 이런 분들은 서래대학으로 연락해보길 권하고 싶다. 단돈 5불이면 점심까지 대접받으면서 불교학프로그램에 대하여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니 말이다.
탐방길에서 만난 사람들
김소연 보살과 당시 주지스님
김소연보살과 나는 아침 일찍 서래사에 당도하여 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프로그램도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될 수 있는데로 많은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보려고 하였다. 주지스님이 주재하는 일요대법회에 참석하였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불교와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기도 하였다. 예불, 공양, 심지어는 합장하는 모습도 조금식 달랐다. 이에 대해서는 섬세하고 각국 불교의 의식에 밝은 김보살의 몫으로 따로 남겨두기로 한다.
이 탐방길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두 분을 기억하고 싶다. 앨버트 두퓌(Albert Duffy)씨와 메릴린 깁스(Marilyn Gibbs)부인. 두 분 다 백인이다.
두퓌씨는 참을성 있게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주말이면 절에 나와 중국어를 모르는 관광객이나 참배객을 친절히 안내해주는 자원봉사자이다. 그날도 두퓌씨는 백인 관광팀을 둘이나 안내하였다. 흑인언론인들의 취재를 열심히 돕고 있는 것도 보았다. 늘 잔잔한 미소를 뛰우면서.
두퓌씨는 펜실바니아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대학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치고 크로커(Crocer)은행에 들어가 일하다가 은퇴, 남가주 하시엔다 하이츠로 이사해 지금은 부동산 융자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 '은퇴'라는 말이 나오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제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을 마음속에 모시면서부터는 굉장히 평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늙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우연히 하시엔다 하이츠 지방신문에서 서래사 건립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때가 1984년 가을, 서래사 건립허가가 우여곡절 끝에 난 때였다. 관심은 있었으나 정작 서래사를 찾아간 것은 훨씬 뒤인 1991년.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운데 있는 동상(나중에 알고 보니 부처님)의 미소가 그를 한사코 사로잡았다 한다.
"그러나 바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십계명을 어기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지요."
그러나 석달이 지난 후, '좌석에 끌린 듯' 다시 서래사를 찾는다. 그때에 영어로 불교강의를 들을 수 있었단다. 자기가 생각해 온 종교의 모든 핵심이 불교에 들어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과거생을 보았단다. 그것도 두 번이나.
"저는 성운대사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가 1993년이었죠."
그 후 서래사 영어반 회장도 맡아보다가 대만의 불광사에 가서 정식으로 불교공부를 하게 된다.
Q. 대만 절 생활은 어떻하였습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삶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다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미래생을 보았거든요."
친구와 함게 절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마침 위에서 스님 한 분이 내려오고 있더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자기더란다.
"그리고는 바로 오계를 받았습니다."
천주교인에서 불교인으로 바뀐 두퓌씨. '하이'대신 '아미타불'로 인사를 건네면서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조용히 불법을 전하고 있으리라.
메릴린 깁스부인은 명상반(중등반)을 지도하고 있는 명상법사이다.
명상반에는 20여명이 길다란 회의테이블에 둘러앉아 깁스부인의 강의와 지도를 열심히 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백인. 부인의 강의는 단순하고 명쾌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선생 출신이어서인지 강의 솜씨가 대단하다. 우리도 그 속에 끼어 준비된 물감과 붓으로 선을 그으면서 명상훈련을 받았다. 모두들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우리를 즐겁게 맞아주었다.
명상훈련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보살이 말을 건넨다.
Q. 어떻게 불교와 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명상, 불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절을 기웃거리기 시작하였지요. 누구의 권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찾아나선 길이었죠. 그것 때문에 제 남편은 목사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Q. 목사직?
김보살의 눈이 안경알 속에서 휘둥그레진다.
"예, 제 남편은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절에 나오니까 저를 따라 몇 변 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만 교회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절에 나간다는 소문이 도니 비난이 이만저만 아니었나보다.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기독교인은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그만 둔 목사부부는 딸을 데리고 아예 대만 불광사로 들어간다. 물론 성운대사의 배려와 초청에 의해서였다. 그곳에서 2년간 착실히 공부하고 정진하였다 한다.
"불광사에서 돌아와서는 가족 모두가 서래사에서 불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명상반을 맡고, 제 남편은 기초교리를 가르치고, 제 딸아이는 아이들 중국어반을 맡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중국어를 완벽하게 하거든요."
Q. 후회는 없습니까?
"후회요? 천만에요. 우리 가족은 부처님 안에서 모두 행복합니다."
그렇게 보였다. 평온이 깃든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두퓌씨와는 달리 상당히 적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교인에서 불교인이 된 두퓌씨나 목사직을 때려치운 깁스씨, 우리는 그들과 같은 모습을 이미 달마선원(로스엔젤레스)에서 보아 온 터여서 충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의 서구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고나 할까.
일요일의 서래사는 사람들로 법석이었다. 우리는 안내에 지친 두퓌씨를 따로 쉬게하고 몇 군데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무표정하고 무겁게만 생각했던 중국인들이 상냥히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중국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우리는 약간은 당혹스럽고 무안하기도 하였다. 그 무안을 떨쳐보리기라도 하듯, 김보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당신이 중국사람같이 생긴모양이지."
했더니, 바로 아파카트로 되돌아온다.
"치이, 은씨가 중국성이면서두."
서래사-하나의 커뮤니티
서래사는 대만 불광산종이 일선 사찰이다. 동시에 국제불광회의 국제단위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래사는 독립단위로서 종합적인 기능을 충분히 하고있다고 보여졌다. 물론 종교-불교가 주목적이고, 바닥에 깔고 있긴 하지만, 종교프로그램 외에도 문화, 교육, 자선 등의 사업이 자발적이고 비영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의 착실한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종합공간으로서도 많은 분야의, 여러 계층의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역량이 엿보인다.
그리고 김보살과는 불교의 세속화, 생활화 문제를 기회있을 때마다 이야기 해 온 터여서, 성운대사의 '인간불교', 즉 불교의 인간화, 현대화, 대중화, 국제화에 선뜻 동의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우리들의 소박한 결론과 생각을 마지막으로 주지스님께 말씀드렸다. 아울러 서래사의 알찬 발전을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한국 커뮤티니의 관심과 우리들의 방문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며, 불교의 세계화와 각국 불교간의 교류에 「미주현대불교」가 힘써주길 바란다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우리는 통역을 맡아준 의초스님의 환한 웃음을 등뒤에 받으면서 주지스님의 방을 나섰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돌계단의 저 위쪽, 어스럼 속의 절집이 산처럼 다가온다. 나는 가만히 기원하였다. 저 장대함 속에 불교 2천 5백년의 역사가 착실히 스며들기를, 그리고 세계인류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자비와 힘이 가득해지길.
서산마루에 걸리었던 붉은 해가 마져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시엔다 하이츠 시가지의 불빛이 우리들 발아래 계단으로 가만히 와 닿고 있었다.
나무석가모니불.
서래사 주소
Hsi Lai Temple
3456 S. Gienmark Dr.
Hacienda Heights, CA91745
(626) 961-9697
www.hsilai.org
서래대학 주소
Hsi Lai University
1409 N. Walnut Grove Ave.
Rosemead, CA91770
(626) 571-8811, Fax (626) 571-1413
밝히는 말
"서래사 탐방기"는 김소연보살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김보살께서 사전답사는 물론 자료 수집, 인터뷰 조정 등 많은 일을 맡아 해주었다. 합장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탐방기 가운데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다.그리고 성운대사에 관한 부분은 성운스님의 법어집 '마음의 비밀(의은스님역)'을 참조하였으며, 특히 법어집에 실린 석성우스님의 글을 많이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끝으로, 고유명사 표기에 상당히 고심하였다. 중국발음 그대로 쓰는 것이 원칙이고 예의이나, 한국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한자음을 그대로 썼다. 이점, 서래사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양해를 구한다.
99년 1월 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