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4 -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내려와 시가지를 구경하면서 호텔로 돌아오다!
2022년 5월 8일 헝가리 비셰그라드 Visegrád 에서 강을 건너 나기마로스 비셰그라드
역에서 체코 프라하행 기차를 타고는..... 오후 4시에 슬로바키아의 수도 인
브라티슬라바 에 도 착하기로 나와서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한후 시내 구경에 나섭니다.
대로를 따라 걸어서 대통령궁 과 분수대 를 구경하고는 네거리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 언덕길을 걸어서 다시 성벽을 따라 걸어 산정에 우뚝 서 있는 브라티슬라바 성
Bratislavsky Hrad 에 들어가 저 아래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 을 구경 합니다.
브라티슬라바 는 슬로바키아의 수도이고, 과거에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 포조니 이기도
한데..... 2020년 12월 기준 인구는 44만명, 대도시권 66만명으로 인접국들의
수도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과 비교하면 인구가 적은편 입니다.
브라티슬라바 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삼국 국경선 에 접하며, 오스트리아 의 빈과 대중 교통으로
1시간 내외면 닿을 정도로 가꺄운지라.... 그래서 많은 유럽 여행객들이 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부다페스트로 가는 중에 들리는 곳이며 체코의 남부 끝자락 국경도시와도 도로 교통으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전세계 수도 중에 유일한 두 개의 나라와 경계를 이룬 도시 로.... 브라티슬라바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삼국의 국경 이 접경하는 지점이 있으니, 해당 지점에 가면 삼국의 접경점임을
알리는 테이블 이 있어 여행객들의 사진 스폿이 돼주곤 하는데, 여타 다른 동유럽
도시들 처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공존하며 도시 가운데를 도나우강(다뉴브강) 이 관통합니다.
브라티슬라바성 Bratislavsky Hrad 은 11세기에 건립된후 1811년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 재건되었으며.... 공산주의 시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거처 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었으니 현재는 브라티슬라바성 입구에 슬로바키아 국회 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공원까지 구경하고 브라티슬라바 성을 나와 성벽을 따라 걸어서 주택가로 내려와서는 다시 언덕길
을 내려가 오래된 시가지를 구경하다가 성 마르틴 성당 Dom sv. Martina 을 지나면서 문득..... 동아일보
서정보 논설위원이 올린 글에 "가톨릭, 여성에 첫 투표권... 2000년만에 깨진 유리천장" 이란 기사가 떠오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은 재위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 제266대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
(추기경단 선거회의) 가 진행되던 중 성 베드로 광장에는 난데없이 분홍색 연기 가
치솟았다. 원래 교황 선출에 실패하면 검은 연기, 성공하면 흰 연기를 굴뚝으로 내보낸다.
이것을 본떠 분홍색 연기를 피운 것은 여성 사제 임명 등을 요구하는 가톨릭 여성단체 회원들 이었다. 여성
의 상징 색깔을 활용해 곧 선출될 교황에게 가톨릭 내 여성 지위를 향상 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였다.
로마 교황청은 26일 프란치스코 교황 의 승인을 얻어 깜짝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10월에
열리는 시노드(주교회의) 에서 여성과 평신도에게 최초로 투표권 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300여명이 참여하는 시노드에서 수도회 대표 10명 중 5명을 수녀 몫으로 할당했다. 또 주교
는 아니지만 투표권을 갖는 위원 70명 중 절반(35명) 을 여성 으로 채우기로 했다.
전체의 10% 이상이 여성 인 셈이다. 가톨릭 여성단체들은 “2,000년 교회사의
역사적 순간” ,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 균열 이 생겼다” 라는 표현으로 환영의 뜻을 표했다.
“시노드” 는 ‘함께 모이다’ 라는 그리스어로 1965년 가톨릭 개혁을 이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의 정신
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년 동안 전 세계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회에 바라는 바를 모은다.
이 내용 가운데 시노드에서 토론과 투표로 최종안을 정해서 교황에게 제출한다. 자문기구여서
교황이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자들의 여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가 된다. 이번
시노드를 위한 대륙별 준비 회의에선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을 강조 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은 그동안 가톨릭 내 여성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 조치를 부단히 취해 왔다. 지난해 7월
전 세계 주교 선출을 심사하는 교황청 주교부 위원에 여성 3명 을 포함시켰다. 이때도 “교황이
바티칸의 ‘올드 보이 네트워크’ 를 깨고 있다” 는 평가가 나왔다. 또 2021년에는 가톨릭 평신도
라도 성별과 관계없이 교황청 행정 조직을 이끄는 수장(장관) 이 될 수 있다는 교회 헌법을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사제를 보좌하는 부제(副祭) 를 여성에게 허용 할지를 연구하는 위원회
도 만들었다. 만약 부제가 허용된다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사제’ 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제만큼은 여성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최근 가톨릭 내 분위기를 보면 장담할 수는 없다. 교황청 내 추기경위원회의 장클로드 올러리슈
추기경은 지난달 “미래의 교황이 (사제를) 여성에게 허용 할 수도 있다” 고 말했다.
여성 사제라는 마지막 유리천장 이 깨진다면 언젠가 여성 교황 목소리가 불거질지도 모른다.
브라티슬라바 지역의 선주민인 켈트족 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당해서 4세기까지 로마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남았다가.... 5세기경 슬라브족 이 이주해와 정착하기 시작해 현재의
인종 구성이 이 때 자리잡았으며, 907년 마자르족의 침략 을 받아 헝가리 왕국 에 편입됐습니다.
이후 1526년에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 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 패하여 멸망 한후 그 북쪽인
슬로바키아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으나 부다페스트와 달리 점령
되지는 않았고 153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헝가리 왕국의 새 수도 가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군주들의 헝가리왕 대관식 은 브라티슬라바의 성 마르틴 성당 에서 열었는데,
1783년 수도를 다시 부다로 환도 할 때까지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로 번영했으며...... 1866년 보오전쟁의 패배 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고, 원주민들이었던 슬로바키아인은 헝가리인에게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1910년에 42% 가 독일인, 41% 가 헝가리인이었고 슬로바키아인은 15% 에 불과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공중 분해되니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산하 슬로바키아
지방의 중심 도시 가 되었으며 1938년 뮌헨협정 결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으로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브라티슬라바에 잔류하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양 이 되었습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면서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심지는 프라하 였고 브라티슬라바는 인지도 면에서 매우 낮았지만 1989년 벨벳 혁명 이 이곳에서도 일어
났으며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 됨으로서 브라티슬라바는 독립된 슬로바키아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시내 지도를 보며 이윽고 대통령궁 에 도착하는데..... 1762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된 여름
궁전으로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리며, 건물 뒤편에는 프랑스식 정원 이 가꾸어져 있어
산책 및 휴식을 할 수 있고, 브라티슬라바 출신의 음악가 훔멜(Hummel) 동상이 서 있습니다.
대통령궁 앞에 위치한 분수대를 구경하고는 계속 걸어서 공원을 지나고 다시 특이한 건물들을 구경하면서
호텔에 도착했는데... 혹시나 싶어 호텔 인근의 한국식당 “밥” 에 가 보았으나 여전히 문은 닫혀 있습니다.
그러고는 호텔로 돌아와 정원에 자리한 카페에서 맥주 한잔 을 시켜 들고는.... 방으로 올라와
샤워를 한후 텔레비전 을 켜니 나오는 장면들이 무슨 훈장 수여식 을 행하고 있나 봅니다?
슬로바키아 국립극장 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국립극장은 1776년에 최초 건립되었으나, 1886년
Fellner와 Helmer 가 재건했으며 브라티슬라바 출신의 조각가 빅토르 틸그너가 만든
'가니메데스 (그리스신화의 술시중을 드는 소년)' 분수가 유명하며 2007년 도나우강가의
부지에 신국립극장이 건립되면서, 양 극장 모두에서 다양한 오페라, 발레, 연극공연을 개최합니다.
아니면 레두타 음악홀 인지도 모르겠는데, 레두타 음악홀은 슬로바키아 교향악단 의 공연장으로 1773년
마리아 테레지아 의 명령으로 곡물 저장소로 지어졌다가 1919년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재건
되었고.... 시립음악학교 및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50년부터 교향악단의 전용 연주장으로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