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내려갈 때 게리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의 반이 보였다. 나머지 반은 니롤륨 바닥에 맞닿아 있었다. 한쪽 눈이 유리구슬처럼 차갑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제 피는 멈춰 있었다. 시체로 다가가 바닥에 엎드린 채 목에 박힌 병의 일부를 잡고 홱 잡아당겼다. 그러나 병은 쉽게 빠지자 않았다. 등뼈나 근육에 꽉 끼인 듯했다.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픽처》 중에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기만적인 미국인들이 싫다며 영국에서 주로 살아가고 있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풍자적인데 그의 대표작인 《빅 픽처》도 스릴리를 표방해서 미국 상류사회의 허상을 풍자하고 있다.
뉴욕에서 한창 잘나가던 변호사였던 벤은 아내의 불륜에 분노해서, 이웃집 남자 게리를 찾아갔다가 말다툼 끝에 충동적으로 살해한다. 그는 요트 사고로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몬태나 주의 작은 마을에서 사진작가 게리로 살아간다.
독자는 숨죽이며 도망자의 삶을 쫓아가고,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인생은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진다.
분노는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해왔다. 우리에게 무척 친근하면서도 무거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분노라는 감정을 폭발시키면 기분이 상쾌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울적해지기도 한다. 분노는 다이너마이트처럼 잘만 다루면 유용한 감정이다. 하지만 잘못 다루면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망가뜨린다.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화내는 건 무척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적절한 상대에게,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법 안에서 화를 내기란 무척 어렵다.”
그렇다면 분노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화가 나 있는 감정 상태’라 할 수 있다. 분노도 불안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원초적인 분노’는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져 있다. 적이 나를 공격했을 때 우리의 인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분노한다.
신경전달물질인 아드레날린과 ‘분노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해서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뇌와 근육에 필요한 산소와 포도당을 신속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그와 동시에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소화 작용을 돕던 혈류의 양을 줄임으로써 입안에 바짝바짝 침이 마르고, 동공이 확대되고, 땀이 나면서 체온이 떨어진다.
‘원초적인 분노’는 문명의 발달로 상당 부분 감소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생명의 위협을 가하던 야생동물들은 더 이상 인류의 적이 아니다. 여러 이유로 전쟁을 일으켜서 살생과 약탈을 일삼았던 종족들도 대부분 하나가 되거나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럼에도 현대인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원초적인 분노’는 감소했지만 여전이 나 자신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또 다른 정글이다. 그러다 보니 ‘인격 보전을 위한 분노’가 늘어나고 있다. 나의 가치를 폄훼한다고 판단했을 때,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노한다. 또한 ‘신념 보전을 위한 분노’도 늘고 있다.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개인의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든 나의 신념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훼손된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그 외에도 각종 스트레스에 따른 ‘돌발성 분노’ 또한 증가 추세다.
분노는 외부의 위협이나 공격에 대한 자기방어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이를 표출한다고 해서 적절하게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하면 뇌가 각성 상태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과잉 반응을 일으킨다. 분노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사고의 위험이 높아질뿐더러 싸움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해를 넘어서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각자의 가슴속에 다이너마이트처럼 잠들어 있는 분노라는 감정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다스릴 필요가 있다. < ‘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당신에게,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감정에서 탈출하는 법(한창욱, 정민미디어, 2019)’에서 옮겨 적음. (2019.09.04.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