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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출 12: 31-36
우리가 살다보면 내 생각과 달리 자신이 있는 위치가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있는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는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또 같이 자녀들을 낳아서 키웠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거역 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도 선택권이 있어 국가나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왜 나는 이렇게 생겼는가? 나는 왜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야곱과 그에 자녀들이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 총리로 있는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들어가 400백년이란 세월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살다보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여 인구 말살 정책까지 이중고를 당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태어나고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40세까지 자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보겠다고 이스라엘백성을 학대한 감독을 죽입니다.
그로인하여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 피신하여 40년을 보낸 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80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 들어왔다가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불순종 할 때마다 재앙을 내렸습니다. 본문은 10번째 재앙 후 바로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는 자신이 살 수없음을 알고 이제 강제로 나 갈 것을 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택하지 않는 백성으로 나누어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래도 그 고난은 구원을 위한 단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a
이런 궁금한 것을 어떤 학문이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나 기타 즐거움들이 감사의 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향한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담의 불순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언제나 자신의 경험과 기득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이 자신의 힘이 생기면 그 힘을 가지고 왕의로부터 말단 공직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개치 않는 말씀으로 그래서 신28장을 통하여 복 받는 사람과(신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저주 받는 사람을 구분하여 신 28:15-20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이처럼 철저하게 기록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1.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떻게 순종합니까? 31-32절
열 가지 재앙을 당한 후에야 그가 순종합니다. 마지막 재앙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는 장자의 죽음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좀 빨리 순종했더라면 애굽의 모든 재산의 손실과 장자의 죽음의 슬픔은 없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만 그렇습니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많은 재물에 손실과 육체의 파괴가 되어 깨닫지 못하다가 죽음 직전에 깨닫고 돌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삶속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발견하여 불순종하는 삶을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령 안에서 제한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강퍅한 심령은 더욱 더 하나님의 진노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순종하는 습관적인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지적에 무감이 되더니만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반자라는 또는 비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Iskariwvth\"가룟, 이스카리옷 이스카리오테스 또는 이스카리오드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별명이다. 혹자는 \'가리옷\'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혹자는 시카리오스(sikavrio\": 자객, 비적)와 관계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바로왕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더 큰 재앙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재촉하여 보내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짐승을 다 가지고 가되 속히 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슬픔의 자리에 이스라엘의 재산적 가치가 무가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바로의 강퍅함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해롭게 한 사람을 위하여 축복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바로처럼 이스라엘을 신속히 보내게 된 것 같이 여러분의 문제가 신속히 해결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2. 떠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모세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35-36절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애굽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한대로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주에 종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사람들도 모세의 말을 무시한 사람들은 좋은 것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림에 떡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가 어려서 저희교회 부흥집회를 하는데 목사는 눈은 풍년이요 입은 흉년이라는 말을 하면서 눈에는 많은 먹을 것이 보이는데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면 다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눈이 풍년이면 입도 풍년입니다. (마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그러나 성경에 구하여도 얻지 못한 이유가 있다느것입니다.(약 4: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요 3:36 아들을 맏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 니라) 여러분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씀에 순종하여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애굽사람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원하는 은금 의복기타 구하는 대로 취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순종의 결과입니다. 순종으로 오는 복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34)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출애굽한 시간의 긴급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죽한 밀가루가 발효되어야 빵을 찌면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반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떠나라고 하면 반죽 그릇을 가지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긴급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떠나라고 하면 즉시 가야 한다는 긴급성과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우리를 부르실지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들의 생명을 거두시면 내 방법과 기술로 돈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하나님 앞에 가야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말씀을 통하여 긴급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먼저 성령 안에서 내 성품을 고쳐야 합니다. 어떤 성품으로 말씀에 순종한 성품으로 고쳐야 합니다. 이 성품이 고쳐지면 성령 안에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으로 고쳐 하나님의 긴급한 말씀에 순종하기시 바랍니다.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 인지 알 수없으나 그날은 꼭 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한대로 응답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미루지 말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언제 라도 오시면 잘했다 칭찬 받은 성도의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밤
출 12: 37-42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출 12장 29-42절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집집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장자가 다 죽은 것입니다. 바로의 궁전에서부터 저 시골 오막살이 집, 심지어 옥에 갇힌 죄수의 집에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축들 가운데서도 초태생이 모두 다 죽었습니다. 애굽 땅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죽은 장남의 시신을 안고서야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급히 모세를 불러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오히려 빨리 떠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호와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한 애굽 사람들은 또 무슨 일어날까를 두려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대로 은 금 패물과 의복을 다 내어주었습니다.
이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명령이 모세를 통해서 하달됩니다. “출발!” 애굽 곳곳에 흩어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밤에 라암셋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서로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여호와의 위대한 역사에 놀라며 찬양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곡소리로 가득 찬 애굽 땅을 떠나 저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가나안 땅을 향해 힘 찬 발걸음을 내 딛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길고도 긴 밤을 보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니 자자손손 잊을 수 없는 놀라운 밤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이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불렀습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무더워지면 영화나 TV 프로그램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소위 ‘납량물’들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옛날 납량물들 예를 들어 ‘전설의 고향’이나 ‘월하의 공동묘지’ 같은 것들은 주무대가 무덤 가입니다. 그리고 꼭 등장하는 것이 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머리를 산발로 늘어뜨리고 입가에는 피를 머금고 나타납니다. 으스스한 배경음악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나타납니다.
‘여고괴담’이니 ‘폰’이니 하는 현대 납량물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주무대가 무덤이 아니라 학교나 마을이나 회사와 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 대신 여러 종류의 캐랙터들이 괴기스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배경 음악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공포감을 배가시킵니다.
그런데 고전 납량물이나 현대 납량물의 공통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들이 어둠이 짙게 깔린 한 밤중에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신이나 도깨비나 드라큐라 같은 공포의 대상들은 모두 밤에만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흰 소복 입은 귀신은 절대로 대낮에 길거리 한 복판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드라큐라도 절대로 백주대낮에 등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사탄의 세력, 악의 세력,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세력들은 모두가 어둠 속에서 활동한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반면에 우리를 축복하고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세력은 빛 가운데서 활동한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을 무서워했습니다. 그 반면에 여명을 기다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의 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밤에도 활동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이 지배하고, 어둠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한 밤중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으시고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신 시점이 주로 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을 구원해 내실 때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제자들을 구원하실 때도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신랑이 되셔서 다시 오실 때도 밤일 것이라고 예언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밤에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크고 놀라운 구원은 오히려 한 밤중에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와의 밤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밤은 여호와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밤을 뜻합니다.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 보셨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야곱의 일가는 계속되는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마침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애굽에 정착하여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정말 딱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부리는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나 그 능력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계하게 되었고, 견디기 힘든 핍박을 가해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견디기 힘든 세월이 무려 430년이라고 두 차례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끔찍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면서 저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저들에게 이 긴 세월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짙은 어둠이었고, 그야말로 역사의 길고도 험한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의 긴 밤을 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결코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출 2:23-5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당할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7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 이르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고통의 긴 밤을 보내고 있는 동안 저들을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자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밤이 구원의 밤으로, 저주의 밤이 축복의 밤으로, 절망의 밤이 소망의 밤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 가운데 깊은 절망의 고통의 긴 터널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네 단지 조금 늦을 뿐이라네."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과 육체를 단련시켰습니다.
이 수용소에 한 젊고 유능한 외과 의사가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매일처럼 가스실과 인체실험실로 끌려가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바라며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방에서 밖으로 나가 작업하는 시간이 되면 흙 속에 몰래 파묻어 둔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꺼내 그것으로 면도를 하며 얼굴을 단정히 하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의 외모를 가꾸는 일은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라 남들은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얼굴을 다듬었습니다.
나치들은 면도질로 말끔한 절망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일찍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죽을 차례를 자꾸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치가 패망하는 날을 맞았고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를 떠나던 날 그의 소지품은 단 한가지, 그것은 바로 깨진 푸른 유리 한 조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스웨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유월절이 올 때면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약간 수정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늦는 법이 없다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이라네."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며 수용소의 깊은 절망의 밤 한 복판에서도 자기와 함께 하시고 자기를 돌아보셨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때로 인생의 고통스러운 밤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지금 나를 돌아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고 나를 위해 이미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다가 정하신 때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끈질긴 바로의 저항을 끝내 물리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지리적인 이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포로에서 풀려난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저들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귀중한 민족 문학서로 꼽는 책 가운데 “학가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안에 유대인들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부분은 이런 구절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두고 두고 자자손손에게 알리고 깨우쳤습니다. 다시는 남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롬 6:16을 보면 원래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고 했습니다. 롬 5:21을 보면 죄가 왕 노릇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 노릇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종이었던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시 한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쓴 시입니다. 그는 신부이면서도 알콜 중독자로 오래 고생하다가 치유가 돼서 지금은 천주교 알콜 사목센터 소장으로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은 한 밤중까지 술을 마셨고, 아침 미사 시간에도 술에 취해 흐느적 거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 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하느님을 좀더 사랑했을 텐데.
알콜 중독자들은 이렇게 술에 종노릇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그저 술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술이 그에게 왕노릇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원래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러시아 일국을 다스릴 줄은 알지만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 속에 죄의 세력이 던져 넣은 탐욕, 교만, 거짓, 시기, 불신앙, 비겁, 음란 이런 것들을 뿌리칠 능력이 없습니다. 늘 이런 것들에 끌려다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바로를 물리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애굽에 마물러 있지 않도록 애굽으로부터 출애굽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롬 8장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지 못하도록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법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 따라 우리는 내 마음 속에 죄가 뿌려놓은 온갖 악한 마음을 이겨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단호하게 죄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 죄가 나를 지배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거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죄의 유혹과 죄의 지시에 단호하게 “No"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밤에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켜주셨습니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출발을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할 때 특별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출 12:2에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고대에 나라가 바뀌거나 왕이 바뀌면 년호가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이 바뀌었습니다. 바로가 왕이었다가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밤이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영접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나면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선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과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아온 민족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땀흘려 노력해도 노예일 뿐입니다. 너무도 긴 세월 노예로 지냈기 때문에 노예 근성이 뼛속까지 깊이 배어있어서 해방을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이라는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해 진군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목표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채 마치 다람쥐 체 바퀴 돌 듯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을 해도 사업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자식을 키워도 자식을 키우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하루하루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의미있는 삶, 이유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삶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애굽에서 바로의 지시를 따르며 살았습니다. 바로의 채찍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노예로 복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바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바로의 노예가 아닙니다.
특별히 본문 4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해 싸울 거룩한 군사들이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함과 동시에 이들은 거룩한 여호와의 군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군대의 특징은 우선 철저한 복종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군대의 특징은 충성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여호와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여호와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잊을 수 없는 여호와의 밤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 크신 은혜로 죄의 종으로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를 돌아보셨습니다. 그 놀라우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새출발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고센은 축복의 징검다리 일뿐
출애굽기 12: 37-51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었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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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징검다리에서…
오늘부터 시작하는 ‘광야에서의 동행’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이 조금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고센 땅에서 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고센과 라암셋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하게 된 이야기는 창세기 46장 28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이렇게 가나안 땅에서 가뭄으로 고난을 겪던 야곱의 일가는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고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애굽에 정착하게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제일 사랑했던 아들이지만, 어린 요셉을 잃고 맙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것이지요.
성경이 늘 그러하듯이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끝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수없이 많은 고난이 따랐지만, 그는 신앙을 지켰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이스라엘이 가뭄으로 고난을 겪을 때 그는 예비된 사람이 되어 그의 식구들을 다 살리게 되지요.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고난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꼭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고난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후 430년이 흐르고 70명이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60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곳에는 다른 족속으로 함께 종 되었던 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을 모르는 새 왕들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성함을 축복하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낀 애굽은 이제 그들을 노예로 삼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핍박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팔복 말씀 중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했지요.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은 애굽의 은인이었습니다. 7년 흉년과 풍년을 지나는 동안 그의 탁월한 치리로 말미암아 애굽은 강대국이 됩니다. 곡식을 보관할 창고들을 만들면서 건축도 발달하게 되고, 주변의 모든 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은인의 가족이었고, 아마도 그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도 아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46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요셉이 가족들로 하여금 고센 땅에서 머물도록 전략을 짰을 때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애굽은 사하라를 비롯해 알렉산드리아 사막 등 전 국토의 95%가 사막입니다. 그러나 고센은 완전히 다른 땅입니다. 고센은 지하 170m 이상을 파도 암반이 전혀 없는 천혜의 비옥한 땅입니다. 고센이란 이름이 ‘땅 중에서 좋은 곳’ ‘축복받은 땅’(창 47:6)이란 의미가 있는 것을 보아도 말입니다.
라암셋(Rameses)은 애굽의 나일 강 하류 델타 동북부에 있던 삼각주의 중앙 부분에 있는 성읍으로 나일 강의 타니데익 지류 동쪽에 있는 국고성이며 요새 성읍입니다.
바로는 요셉과 그 친족(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애굽에서 가장 비옥하고 살기 좋은 땅인 고센 지역을 거주지로 허락하였는데 라암셋은 고센 지역 중 고정된 한 구역입니다(창 47:6, 11).
라암셋이 성경에서 유명한 것은 야곱 이후 400년 동안 그 후손이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룬 후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할 때 출발지였기 때문입니다.
라암셋은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사막 가운데 있는 고센 지역은 주위의 사막 지역과 달리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여 양배추가 우리나라의 것에 비해 2∼3배는 더 커 보이는데, 이는 나일 강이 가져다준 결과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고센 지역은 강수량은 아주 적으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나일 강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곡창지대입니다. 오늘날에도 카이로는 역시 강수량은 적은 지역입니다.
라암셋은 150년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지하수 분출로 일부분만 발굴돼 있다. 관람이 가능한 곳은 아몬 대신전과 말기 왕조시대 왕가의 네크로폴리스(낮은 지역의 도시)뿐이다. 그중에는 애굽의 바로였던 시삭과 오솔콘의 무덤이 있으며 대부분 라암셋의 석상과 우물터가 발굴되어 있다.
특히 거대한 크기의 오벨리스크가 7개나 된다. 출애굽기 1장 11∼1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라암셋 건축을 위해 고초를 겪으며 벽돌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아직도 이곳에는 당시 흙으로 만든 벽돌이 많이 남아있다. 특이한 사실은 벽돌 일부에는 짚이 있었으나 또 다른 벽돌에서는 짚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기록에 나타나 있듯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짚을 공급받아 벽돌을 만들었으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요구한 이후 바로는 그들에게 짚을 주지 않고 이전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도록 한 사실을 상기시켜준다(출 5:6∼14).
라암셋은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모세로 하여금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다(출 3:7∼10).
지역설명은 이 정도만 하도록 합니다.
고센 땅은 분명히 축복의 땅이고, 그곳에서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을 보고 어떻게 애굽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요셉에게 은혜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은혜보다는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구분하는 것’이었겠죠.
이제 이스라엘은 고센에서 자유인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노예가 되었고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더 번성한 민족을 이루자 모세가 태어날 당시 태어나는 모든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요셉을 모르는 왕들이 나타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여유를 잃어버리게 되죠. 이제 이 민족을 통제할 최후의 수단에 이르게 된 것이죠. 게다가 아주 힘든 노역을 시킴으로 인해 민족적 자존감을 빼앗아 가려는 통치 이념이 작용을 했겠죠.
아마도 우리 민족에게는 잘 이해가 되는 부분일 것 같기도 합니다. 36년의 일제 강점기하에서 우리는 언어를 잃어버리고, 하층민으로 전락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참 많이 들었던 말이 ‘빠가야로!’라는 말이었죠. 몹시 나쁜 말인데,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민족에게 많이 했던 말입니다.
민족적 자존감을 해치는 것 중의 하나가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탄광 농부로, 사할린으로 만주로 노예처럼 끌려간 사람들, 목숨을 구걸하며 돈에 끌려 알게 모르게 위안부로 끌려갔던 사람들.
이것은 단지 노역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훌륭한 문학가와 독립 운동가들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많은 이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깨어있는 선각자들이 희망을 품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참으로 적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고, 위대한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고난이 와도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민족이었고,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느낄수록 고난은 심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고난의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눈에 보이는 바로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갔습니다.
택하신 백성에게 왜 환란과 고통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고,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택하신 백성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누리는 축복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축복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센은 단지 축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고센 땅에 머물도록 이끌어 오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만들어 가고 계셨습니다.
고난이 왜 유익입니까? 만일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서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징검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다 죽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편안함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애굽의 신을 섬기다 그렇게 세상의 백성처럼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라암셋 2세에 의해 그들에게 부여된 노역은 애굽을 바라보고 살던 그들의 눈을 돌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의식을 바꿔놓는 것처럼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과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23~24절을 보십시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에게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축복받는 사람들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은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선조들의 믿음으로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센 땅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은 당연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사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센은 축복의 땅이었지만, 그 속에서 안주하지 못하도록 주어진 고통은 징벌이 아니라 진정한 축복을 향하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한 축복의 땅 ‘고센’은 여전히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끊임없이 고센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의 땅을 향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시발점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출애굽 하기까지의 어려운 과정을 지나서 막 떠나려는 순간입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바로가 얼마나 완악한지도 알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무서움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를 넘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죽음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 풍요의 땅, 그러나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던 고센 땅을 떠나기 위해 ‘라암셋’에 모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잡족’이란 이스라엘 자손과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압제 받던 다른 소수 민족으로, 이들은 아마도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으로 깨닫고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과 혼혈한 자들과 여호와를 믿는 신앙으로 개종한 셈족들과 애굽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출애굽에 참여한 사람은 순수 이스라엘 백성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약속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두에게 열린 축복의 흐름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축복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43절부터는 유월절에 대한 보완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
51.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양고기를 먹는데 “이방인은 먹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혈통적인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고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된 사람에게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며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못했던 원인은, 그들이 돈을 위해서나 다른 계약 관계로 이스라엘에 잠깐 머물렀을 뿐, 그들을 머물게 한 그 요인이 없어지면 언제든지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할례받은 자는 영구히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머물며 유월절 예식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할례 의식을 통하여 정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혈통에 의한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누구든지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편입될 수 있는 열린 공동체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핵심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부르짖음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 땅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이죠. 또한, 그 위대한 구원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같은 고백을 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축제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축제’가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의 가장 큰 장애가 교회의 담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임에도, 다른 이들에게 임하는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얼마 전에 읽은 필 라이큰의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 참 멋진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것만 줄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어야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알아야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의 구세주가 될 수도 없고, 그들의 죄를 씻어줄 수도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들에게 구세주에 대해 들려주는 것,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쉽게 나눌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상을 나누신다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경험했다.
오늘 라암셋에서 출발하는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요?
“출발!”
애굽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밤에 라암셋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서로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여호와의 위대한 역사에 놀라며 찬양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통곡소리로 가득 찬 애굽 땅을 떠나 저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가나안 땅을 향해 힘 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길고도 긴 밤을 보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니 자자손손 잊을 수 없는 놀라운 밤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이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불렀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42절)
‘밤’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지난여름을 지나며, 아니 매년 여름을 지나며 우리는 소위 ‘납량특집’이라는 드라마와 영화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하얀 소복 입은 귀신이죠. 꼭 머리는 길고 눈과 입에는 피가 묻어 있죠.
요즘은 소복 입은 귀신보다 학교에서 많이 나타나죠. 자살을 하기도 하고, 또 스마트 폰을 자주 쓰다 보니 ‘폰’을 주제로 한 귀신도 등장합니다. 또 하나의 트렌드는 달밤에 등장하는 늑대, 그리고 뱀파이어와 드라큘라 같은 서양귀신도 한몫을 합니다.
이 모든 귀신의 특징은 절대로 낮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우리는 밤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두려움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시간이 ‘여호와의 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밤에 역사하신 일이 참 많습니다.
오늘의 사건도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제자들을 구원하실 때도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언된바, 장차 주님께서 신랑이 되셔서 오실 때도 밤일 것입니다. 오늘 이 밤도 여호와께서 역사하시는 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밤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악한 영에 대하여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밤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밤이 두려움과 심판의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기대의 밤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이 가장 강렬하게 비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억눌림과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던 밤의 세력이, 여호와의 밤이 되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며 예배하는 자들에게 오늘 여호와의 밤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고센인가요?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단지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이제 위대한 여정을 하기 위해 우리가 ‘라암셋’에 모였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해 봅시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하나님의 군대
출 12: 40-4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나올 때에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도를 여러 가지로 호칭했습니다. ①‘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 마귀의 종, 장차 멸망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②‘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예수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주님(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③‘성도’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따로 구별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④‘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호칭한 것은 그들이 광야생활 중에 각 지파를 단위로 해서 군대 편제로 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 무장을 하였고, 출애굽 여정 가운데서 전쟁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성도를 ‘하나님의 군대’라고 호칭했을까요?
첫째, 성도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군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렇게 저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악의 영(마귀)들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귀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처럼 전투자세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9절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마귀가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과 싸우는데, 모든 악한 영들을 다 동원해서 싸워도 하나님의 천사들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빛 앞에 어두움의 권세가 내쫓기듯이 사단 마귀는 성도들 앞에 내쫓기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단 마귀가 구원받은 성도들과 싸우기 위해서 최후로 발악하고 있는 이 때에 성도된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①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3) 내가 싸워서 이기려고 하면 집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항상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찬송가 384장 2절) 군사는 항상 무장을 하고 있어야 되는데, 성도의 제일 큰 무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됩니다(엡 6:11~17).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구원의 소망),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때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군대는 군번이 다르고 병과가 달라도 지휘관을 중심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성도는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인체의 구조를 보면 손, 발, 눈, 입, 코 등 많은 지체가 있지만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 된 우리의 총사령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한 지체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5절을 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우리는 각각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4장 3절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군대 된 성도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는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을 절대 복종하며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질서와 복종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모든 행군과 전투가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모든 창조물이 다 질서 있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질서 있는 군대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동체생활에서는 절대 개인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내가 하고 싶다고, 내가 가고 싶다고,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공동체로 움직여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을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군대는 고난을 극복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이겨내야 합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자신을 깨뜨리는 자만이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의 영들과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을 절대 복종하는 삶을 살아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