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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재봉틀
박정애
재산 목록에 들어갈 만큼 재봉틀이 귀했던 시절, 어머님이 결혼한 1930년대 말,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셨던 재봉틀, 그 재봉틀로 내가 어릴 때 한잠 잔 후 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서 옷을 지어신다. 틀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주면 농사일과 품앗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이 익숙지 않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집에서 짠 삼베 무명베를 가지고 오면 그 베로 일상복을 만들어 달라는 동네 바느질을 받아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가계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순간적으로 재산이 사라진다고 했다. 100여 년 전 초등학교 초대 교감선생님이셨던 증조부, 부잣집 외아들로서 신식 교육을 받으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신문물을 받아들여 좀 더 넓은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야망으로 대구에 가솔을 데리고 나와서 친구와 더불어 물산 조합에 투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왔을 때 는 문전옥답은 벌써 남의 손에 넘어가고 뙤기밭 몇 마지기 천수답 몇 마지기 그것도 남의 손으로 하니 일 년 추수가 나락 몇 섬이 고작이라고 하였다. 증조부님 한참 후 후임으로 오신 분이 어머니 친정 곳에 부임한 후 몇 년이 지나 외할아버지와 연이 되어 어머니의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그때만해도 동네에 소학교가 있었기에 대소가 할아버지도 일본서 대학 나오신 분이 계셨고 아버지 연배에 대구 서울 등지에서 공부하신 분이 많으셨다. 할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아버지는 대구 효성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진학을 못하고 대신 고향에서 한문 공부를 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나셨다.
사랑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른들끼리 약속이 결혼으로 이어져 얼굴 한번 보지 않고 결혼하는 날 초례청에서 처음 마주했던 배필, 그 날 이후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일생을 보내신게 거의 대부분 부모님 세대의 결혼생활 이었다. 그 결혼생활이 몇 년씩 사귀어 보고 이루어진 결혼보다 더 순탄하게 일생을 살아오신 부모님 세대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지금 잣대로 보면 전혀 맞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의 연이다. 몰락한 아버지 댁, 대대로 내려오는 지방 토호의 부잣집, 두 이모부는 지금의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둘째 이모부는 보성전문 출신이다. 직장도 중앙청(조선총독부) 경북도청, 아버지는 확실한 농부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그저 몰락한 집안의 맏이였다.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께서 대구고보에 다니고 어머니는 고향에서 그때 소학교를 나와 약간의 신식 공부도 하셨다. 엄마가 결혼하실 무렵에는 대구 봉산동에 살으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지주로서 추수 무렵이면 고향집에 소작인들이 한 마당 모여 농사지은 걸 소달구지에 싣고 온다고 하셨다. 영천에서 술도가도 하셨다고 하셨다. 뒤늦게 어머니의 혼처가 몰락한 집안인 줄 알고 외할머니께서 자리에 누워셨다고 하셨다. 양반댁에 파혼이 있을 수 없던 시절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하셨다. 아버지 댁 역시 몰락한 가정이긴 하지만 할머님 친정은 경주 양동이고 증조모님 역시 명문인 영천 창녕 조씨 진사 댁 따님이라고 하셨다. 살림은 갔지만 양반의 품성이 몸에 베여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가정 처사를 돌보시고 며느리를 대하시는 자애로움도 대단하셨다고 하셨다.
부잣집인 외할아버지께서 막내딸을 그냥 두시 지를 않으셨다고 하셨다. 먹고 살만큼 논밭을 사 주셨다고 하셨다. 머리가 좋으신 아버지를 공부도 더 시키려고 맘먹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병환에 계시던 증조부께서 손자를 떨어져 보내기 싫어했고 외갓집에서도 아버지가 공부하시면 살림을 더 많이 물러 주어야 했기에 적당하게만 주셨다고 하셨다. 당찬 어머님은 아버지와 의논해 군식구를 내보내고 농사를 손수 짓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외가에서 사주신 재봉틀은 농사 밑천이기도 했다. 솜씨가 아주 좋으신 어머니는 옷을 잘 만들어셨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교복도 손수 지어주시고 동네 학생들도 꽤 많이 어머니께 부탁하였다. 모두가 치마저고리 입고 바지저고리 입고 학교 다닐 때 오빠와 나 동생은 교복 원피스, 스카트,를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 의사, 면장, 도가 집, 부잣집 아이들만 입는 옷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입고 다녔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평 없이 아버지와 의논이 잘 맞았다. 아버지께서는 군 이나 면에서 보(洑)를 쌓거나 저수지 둑 쌓는 공사를 아버지께 맡겨셨다. 한 문중이 이루어 사는 동네, 길흉사 일들도 할아버지게서 편찮으신 후 아버지께서 맡아하셨다. 외가에서 물러 받은 재산은 부모님의 노력으로 조금씩 늘어나 동네서는 새 부자가 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집에 사는 친구들도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다. 가족을 위해 시골에서 근검절약과 열심히 일하는 것 이외에 딴 방법이 없어 밤낮으로 일하시는 그 모습과 자식을 위한 희생은 세월이 갈수록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시골 장날이면 대부분 아버지들이 지인을 만나 고기 국밥도 사 잡수시고 약주도 드시고 장날 오후가 되면 술 취한 사람도 길거리서 자주 본다. 술을 전혀 잡수시지도 않으신 아버지께서는 장에 갔다 오시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잡수실 소주 한 병, 생선 몇 마리 또 우리에게 줄 꽈배기 도넛츠 종류를 꼭 사들고 오시면서 때가 한참 지난 점심을 집에서 잡수신다. 밥상이라야 김치 보리쌀이 더 많은 밥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잡수 신다. 불평아닌 불평을 하시는 어머니 다른 사람 다 장에서 친구와 어울려 맛있는 거 사 먹던데 부모 자식 생각한다고 저렇게 당신 한테는 인색하다고 밥상을 차리시면서 혼잣말을 하신다. 크게 다투시는 모습을 별로 보지않았다. 할머니도 항상 엄마를 보배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화목한 가정이었다. 가족이 사랑으로 어우러질 때 사랑의 힘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하셨다. 내가 결혼 후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는 부잣집에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없는 가정에 와서 한평생 살았나 라는 나의 질문에 그것은 사랑의 힘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며느리의 허물은 감추어주시고 밖에 나가면 항상 며느리 자랑을 하니 동네 나가면 대소가 어른분들이 엄마를 추구러주셨다고 하셨다. 만나는 분마다 “부자 살림은 다 잘 살 줄 안다 없는 집에와서 이렇게 집을 일으켜 세우니 시어른이 보배라고하시지” 라며 칭찬하니 한평생도 보람있게 잘 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당시 최고의 엘리뜨인 이모부들과 아버지가 왜 비교되지 않았을까? 경제적 차이가 나는 이모들과 외삼촌 사는 모습에서 왜 부럽고 짜증이 나지 않았을까? 부리는 사람들 조차 아버지를 소홀히 대하다 외할머니께 혼이 난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을 친정에 가지를 않았다고 하셨다. 늘 미안한 맘으로 엄마를 대하는 아버지를 엄마는 힘들고 속상하게 하기 싫었다고 하신 엄마의 참사랑이 가정을 편하게 했다는 생각이 된다.
아버지께서 베푸신 자식 사랑 또한 남다르셨다. 어려운 가정에서도 삼남매를 학교를 보내시면서 이왕에 마련해 줄 돈 하시면서 등록금도 꼭 남 먼저 장만해 주셨다. 잡비를 주시면서 돈이 떨어질 때 되었는데 아무 말이 없느냐고 너무 아껴 쓰지 마르라시며 곡식이나 가축을 팔아 돈이 떨어지기 전에 얼마만큼 주셨다. 당신 자신을 위하여 한 푼을 아끼시면서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진심을 내 어머니는 가신 후 잊지 못하셨다. 처음에는 오빠와 둘이 나중에는 동생과 셋이
자취를 하면서 내가 살림을 들고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 교우지 앙케이트에 앞으로 어떤 남편을 만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내 아버지 같으신 분이라고 당당히 적어 아이들이 와아 웃었다. 아버지도 책을 보시고 빙긋이 웃으시던 모습, 딸이 보아온 아버지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우신 가시고기 아버지셨다 많은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삶이 내 삶을 이끌어 주는 거울이 되어 지난 날을 그리워 한다.
첫댓글 정말 휼륭하신 부모님을 두셨읍니다. 가화만사성이라 어떤 어려움도 화목한 가정에서는 극복할수 있읍니다.
지금은 골동품이 되어버린 재봉틀 그때엔 대단한 물건이였지요, 옛 생각이 나는글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시어른들이 참 지혜롭고 훌륭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를 보배라고 생각하시고 사랑을 주셨으니 가정이 얼마나 화목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거기에다 부모님의 각고의 노력이 가정을 새 부자로 도약하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어머님은 가정의 부흥조시고 아버지는 정신적 지주인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시고 이심전심 믿고 신뢰하신 모범가정의 표본입니다. 당시형편으로는 힘들게 딸을 진학시켜 훌륭한 교육자를 만들었습니다.부모하기 참 어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몰락한 양반집안의 살림을 일으켜 새우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와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양가 어른들이 보여주는 따사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글속에 감동을 주는 생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내 친정엄마 생각 많이 나네요. 1930년대 말에 결혼했고 재봉틀 상표가 '싱가'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훌륭하심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행복한 가정 얘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