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과 나 / 조이섭
잘 깎은 연필에서는 사과 냄새가 난다. 전투에 나가는 병사가 총기를 손질하듯, 농부가 벼 베기 전에 낫을 벼리듯 나는 글 쓰기 전에 연필을 깎는다. 나무의 속살이 넉넉하게 보이도록 깎은 다음, 까만 심을 날씬하게 다듬는다. 잘 깎은 연필을 가까이 두면 글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의 최면이다.
내 책상에는 몽당연필과 장다리를 합쳐 서른 자루 정도가 연필꽂이에 꽂혀 있다. 바깥나들이는 항상 장다리 몫이고 몽당연필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다. 외려 짧을수록 더 애틋하다. 깎여 없어진 상처는 자신을 희생하여 나의 어쭙잖은 글로 맞바꾼 흔적이기 때문이다. 몽당연필의 공과 결실이 적지 않으니 귀한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종이, 붓, 먹, 벼루가 문방사우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요즘은 컴퓨터와 키보드, 태블릿과 마우스를 신 문방사우라 일컫는다고 한다. 누구는 모두 다 뭉뚱그려 스마트폰 하나만 내세우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연필과 지우개, 컴퓨터와 프린터를 신 문방사우라 정하고, 그중에서도 연필을 가장 먼저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필이 붓, 먹, 벼루의 세 가지 역할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연필은 내가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가감 없이 종이에 고착시킨다. 연필 심(芯)이 제 몸을 갈아 나의 마음(心)을 붙들어 매는 순간 말이 글로 바뀐다. 생각이나 가슴의 울림이 머릿속에만 머물 때는 내 것이 아니다. 울림이 글이 되어야 비로소 나로 남는다. 연필은 말이 샘솟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 주고, 잠시만 틈을 주면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생각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어 두기도 한다. 이렇듯 내 안에 고여 있던 언어, 생각과 느낌을 탈출시키는 것은 오롯이 연필의 몫이다.
연필의 역사는 유구하다. 연필은 약 2,000년 전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둥근 납덩이로 노루가죽에 기호를 표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초기에는 흑연을 끈으로 감싸서 그림을 그렸다. 18세기 말에는 프랑스의 콩테(Conte)가 흑연과 진흙을 섞어 심을 고온에서 굽는 방법을 고안하고 실용화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연필 모양은 둥근 모양이었으나 제작 과정을 기계화하면서 육각형 모양이 연필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흑연과 진흙의 비율에 따라 연필심의 단단한 정도가 다르다. 9H부터 1H, F, HB, 1B에서 9B까지 수많은 종류가 있다. 연필을 분류하는 데 쓰는 기호인 ‘H’는 Hard의 약자이며, 숫자가 클수록 더 단단하다. ‘B’는 Black의 약자인데, 숫자가 클수록 무르고 진하다. 심이 무르면 종이에 흑연이 잘 묻고, 잘 번진다. 심이 단단하면 자국이 잘 남지 않고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닐 때, 기계 제도를 하느라 2H 연필을 사용한 것 빼고는 습관적으로 HB 연필을 써왔다. 그러다가 심을 따로 넣는 샤프펜슬이 나오고부터는 연필 사용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타자기와 컴퓨터를 쓰면서부터 더욱 뜸하게 되었다.
퇴직하고, 수필을 배우면서 다시 연필을 많이 쓰게 되었다. 글의 얼개를 짤 때 스케치북을 이용했다. 얼개 짜기가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이 어디 한 번 만에 뚝딱 되는 일이던가. 썼다가 지우고, 또 고치다 보니 HB 연필은 딱딱하여 잘 지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지우고 나면 파인 흔적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2B 연필로 바꾸었더니 종이 위를 스치는 감촉이 부드럽고 농담도 적당했다. 거기다 지운 흔적까지 거의 남기지 않아 금상첨화였다.
2B 연필은 포인트 리텐션 (point retention)*이 좋은 편이 아니라 자주 깎아야 하지만,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필심을 다듬으면서 한 발 물러나 무뎌지는 초심을 다잡을 수 있어서 좋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F 등급만 쓴다던데, 나는 그때 이후로 2B 연필만을 고집한다.
2B 연필로 얼개 짜기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스케치북 위에서 사각거리는 연필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판을 두드려 만든 글을 프린터로 출력하여 퇴고하거나 교정 볼 때도 2B 연필을 사용한다. 이렇게 나의 수필은 2B 연필로 시작하고 2B 연필로 마무리하는 셈이다.
젊었을 때는 심이 단단한 연필을 주로 썼다. 새파랗게 세운 날은 강하고 날카로웠다. 단단한 연필심으로 쓰면 잘 지워지지 않듯이, 한번 세운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날카로운 심으로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이제는 무르고 진한 2B 연필을 사용한다. 너무 진하지 않고 딱딱하지도 않은 2B 연필심이 어울리는 나이가 된 것이다. 힘의 강약을 조절해서 연하게 쓸 줄 알고, 한 번 쓴 것을 흔적 없이 지우기도 한다. 연필만 무른 거로 바꿀 게 아니라, 글도 딱딱하지 않고 사고(思考)도 부드러워져야 할 터인데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글을 쓰다 보면 연필을 지탱하는 오른손 중지 첫 번째 마디에 굳은살이 박인다. 굳은살은 내 글쓰기의 성실함을 재는 바로미터이며 흔들리는 나를 단단하게 붙들어 매어 주는 심(芯)이다. 게으름을 부리다 굳은살이 빠지거나, 글이 중심을 못 잡고 가리산지리산으로 헤매는 날은 심이 무뎌진 연필을 몽땅 꺼내 놓고 하나씩 깎는다. 맵시 있게 잘 깎은 연필을 연필꽂이에 가득 채워두면 까닭 없이 포만감에 휩싸인다. 그예 글을 쓰고자 하는 전의가 불타오른다.
연필심을 깡총하게 다듬듯이 글도 잘 벼려야 한다. 연필에 심(芯, core)이 있듯이 사람도 가벼이 흔들리지 않는 심지(心志)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장이 목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면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데, 마음은 다듬지 않고 아직도 연필타령이나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그러나 몽당연필은 나를 글쓰기의 치열함으로 안내하는 지팡이다. 어찌하다가 생명을 얻어 훨훨 날아간 내 글이 하나 있어 독자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면 그것은 짧아진 연필의 공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애꿎게 손질 당한 몽당연필들이 내뿜는 나무 향이 방안을 감싼다. 몽당연필과 내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권기(書卷氣)가 내려와 너울너울 춤추는 꿈을 꾸어 본다. (15.9)
*포인트 리텐션 (point retention): 연필을 다시 깎기 전까지 연필심의 뾰쪽한 끝을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를 나타낸다.
* 서권기(書卷氣):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