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마음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연해야 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어 그러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빌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진절머리와 전갈머리는 무슨 관계인지 거울 속에 겨울이 있잖아 말 많은 세상 발밑을 조심해 그럼, 이제부터 그림 공부나 해볼까
- 202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정희안 시인 - 1968년 부산 출생 - 제7회 부산국제차어울림문화제 茶詩 공모전 대상 수상
◆ 심사평
- 가벼운 언어와 무거운 현실 균형감 잘 갖춰
심사위원들은 대략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천여 편의 응모작을 살폈다. 첫째, 참신함이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시의 원형을 보여줄 수 있는 참신함이 있는가를 살폈다. 둘째는 정확함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공감을 위해서도 어설픈 시적 허용에 기대기보다 정확하게 문장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함께 살폈다. 마지막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시의 눈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폈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에서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눈이 시적인 도약을 이룬다. 그것이 또한 시의 꿈일 것이다. (...) 정희안 씨의 작품은 유사한 발음의 단어로 언어유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세목을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을 담보하고 있는 점이 미더웠다. 특히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는 한없이 가벼운 언어와 한없이 무거운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으로 말의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함께 성취한 수작이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