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궁중요리를 전수받은 황혜성 교수의 막내딸이자 전통문화음식을 전공한 한복진 교수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비결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매회 등장하는 새롭고도 진귀한 궁중음식이다. 궁중 수라간 나인(內人)들이 선보이는 궁중음식은 재미를 더하기 위해 꾸민 부분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문헌과 고증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라 음식을 실제로 만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현장감이 생생하다.
드라마 ‘대장금’은 장금이가 천민 신분으로 다섯 살에 궁녀로 들어와 최고 주방상궁이 되고, 급기야 숱한 남자 의관(醫官)들을 제치고 임금의 주치의에 올라 중종의 사랑을 받는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드라마에서 장금은 뛰어난 의술과 높은 학식으로 당시 엄격했던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최고 자리에 오르는 전문직 여성으로 그려진다.
※※ 장금은 의녀였을 뿐
장금(長今)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의녀(醫女) 중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에 오른 실존 인물이다. 중종(1506~44) 때 왕족의 병환 치료에 큰공을 세웠다 하여 이름 앞에 큰 대(大)를 붙여 대장금이라 불렸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10여 차례 나온다. 중종 10년(1515) 3월에 왕이 말씀하기를 “대저 사람의 사생(死生)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書吏)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장금이 약을 잘못 올려서 벌을 내려야 하는데 이전에 대비가 해산할 때 공을 세우고도 미처 상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이를 참작하여 벌을 줄여 장형을 내리라는 분부이다.
중종 17년(1522) 9월에는 대비의 병세가 호전되자 의녀 장금에게 쌀과 콩을 각각 10석씩 내렸다. 또 중종 19년(1524)에는 장금에게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을 전속으로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이밖에도 대전과 대비전의 병 회복에 공을 세운 기록 등이 나온다. 장금은 15세부터 45세까지 활약했고, 25세 때 왕가의 전속 의녀로 공을 인정받았다. 기록으로만 보면 장금은 의녀일 뿐^^^##** 수라간 나인이었거나 중종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음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드라마 ‘대장금’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궁중음식에 대해 알아보자. 궁중음식에 대한 문헌이나 기록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궁중음식은 단군 이래 조선왕조까지 왕권국가가 이어졌던 4000년 역사와 그 세월을 같이한다.
궁중음식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왕권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식품과 조리법이 다양해진 고려시대부터다. 개성음식이 전국에서 가장 맛난 향토음식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고려왕조의 도읍지였던 개성이 궁중음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사대부가에서 궁중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궁중음식과 유사한 음식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궁중은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곳이기는 하지만, 그 음식이 민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는 동성동본과 결혼하지 않는 우리 조상들의 혼인 관습에서 연유한다. 왕족은 사대부가와 인연을 맺어 궁중의 생활양식을 비롯한 모든 문화를 사대부가와 교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식생활 풍습이 궁중에서 민가로, 민가에서 궁중으로 자연스레 전해지게 된 것이다. 궁중 잔치가 열리면 궁 밖의 고관이나 인척 집에 음식을 하사하고, 왕족에 축하 드릴 일이 있을 땐 민가에서 음식을 궁중에 진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중에는 전국 각 고을에서 올라온 온갖 진귀하고 질 좋은 재료들이 모였고, 조리 기술이 뛰어난 주방 상궁들과 대령숙수들이 대대로 그 솜씨를 후손에게 전했기 때문에 궁중음식은 한국 음식의 정수(精髓)라고 일컬어진다. 한편 궁중에서는 국가적 행사나 외국 사신의 방문, 왕족의 탄일 및 가례 때마다 큰 잔치를 벌였기 때문에 연회음식이 유난히 발달했다. 궁중 잔치나 의례 때 차리는 고임상차림과 예법들은 민가에 전해져 혼례나 회갑 등 민가의 잔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섞어 장국이 더욱 시원한 냉면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광천수에는 발포성이 있는 탄산가스가 들어 있어 쏘는 물맛으로 냉면국물을 더욱 시원하게 만들 수 있다.
드라마에서 중종은 수라를 들 때도 곤룡포와 입석관을 쓴 상복(常服) 차림을 하고 있다. 중전과 대비도 원삼으로 성장을 하고 수라상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왕족들은 편안한 복장을 하고 수라를 받았다고 한다. 순종의 비인 윤비는 수라를 들 때 평상복으로 송화색(누른빛) 소고의에 남색 치마를 입었는데, 휘건(揮巾·냅킨)을 두르지 않고 식사한 날에는 식사를 마친 후 또 다른 송화색 소고의와 남치마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상궁이 기미(氣味)를 담당했다. 기미상궁이란 왕보다 앞서 음식 맛을 보는 상궁을 말하는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으나 거의 의례적인 절차로 간주됐다. 기미상궁은 곁반에 놓인 여벌의 수저와 빈 그릇을 이용해 음식을 덜어 손으로 집어먹었다고 한다. 수라와 탕은 기미를 보지 않았고, 기미를 본 후에는 왕이나 왕비께 ‘잡수십시오’라고 아뢴다. 또 두 명의 상궁이 식사 중 시중을 드는데, 되도록 젊은 나인이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