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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군림해오던 황선홍은 92년 독일 유학 시절의 악몽을 재현이라도 하듯 같은 부위인 무릎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96 아시안컵 조예선 3경기 이후 벌어진 이란과의 8강전에서 대표팀이 다에이, 아지지, 바게리 3총사에 농락 당하며 2-6 참패 당하는 모습을 벤치에서 바라만 보아야만 했다.
▶ 부상으로 또 다시 1년을 버려야만 했던 황새
그후 부상은 더욱 악화되어 당장 이듬해 있을 월드컵 예선 출장이 불가능 하게 될정도로 심각해져 부상 치료와 재활을 위해 다시 정든(?) 독일땅으로 떠나야만 했고 대표팀이 한참 승전보를 울리며 차범근 대통령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을때도 그는 부상 회복을 위한 눈물 겨운 재활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차감독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스트라이커였고 한참 골게터로써 정점에 오른 완숙된 기량을 지닌 그의 부재는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크나큰 악재로 다가올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최용수라는 골게터로 인해 100% 새롭게 재충전 되었으며 이제 팬들에게 본선에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한 게임 운용의 미를 지닌 황선홍, 파괴력 있는 득점력의 최용수 신.구 조합의 가능성을 심어주게 하였다.
그러나 98년 6월 4일. 프랑스 출국을 불과 하루 앞둔 그날 저녁 잠실에서 중국과의 마지막 평가전을 치루던 황선홍은 전반 초반 이상윤의 스루패스를 받기 위해 문전으로 돌진하다 첸둥 골키퍼와 엉켜 크게 넘어지면서 왼쪽 무릎 부상을 당해 씁쓸하게 상의를 벗으며 경기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것은 94년의 아픔을 잊고 재기를 다짐한 본인으로써도, 당시만해도 그의 존재가 팀의 절반의 영향을 미치던 대표팀으로써도 큰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엔트리 교체가 되지 않은채로 본선에 가세하며 본인의 결의 속에 주사를 맞고서라도 팀의 1승을 위한 마지막 벨기에 전 출장을 원하였으나 끝내 물거품 되었고 결국 황새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던 프랑스 월드컵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 1년간의 치열했던 동고동락
■ 최용수
- 1973년 9월 10일생
- 184cm, 79kg
- 주요 대표 경력: 93 호주 세계 청소년 대회, 96 애틀란타 올림픽
98 아시아 최종 예선의 히어로. 올대 시절이던 95년 A매치 데뷔를 갖긴 하였으나 역시 국가대표에서 본격적으로 최용수가 중용된 시점은 차범근 감독 체재였다. 96년 올림픽 예선의 활약을 바탕으로 본선행 엔트리에 포함 되었지만 와일드카드 황선홍의 그늘에 가리면서 예선 당시의 활약과 비교해 다소 체면을 구겼던 그는 97년 당시 주력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 난에 허덕이던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게 된다.
간판 황선홍의 부재로 고심 중이던 차범근 감독은 김도훈, 박건하, 최문식을 번갈아 가며 써보던 차였는데 마침 황새의 공백을 메울 적임자 1순위로 꼽히던 김도훈이 슬럼프에 빠지게되자 그와 함께 주전 경쟁을 벌이던 박건하를 선발로, 조커 최문식 콤비 사이에 최용수를 5월에 있었던 일본과의 도쿄 원정에서 선발로 출장했던 박건하와 교체 투입 시켜 테스트 하게 한다. 당시만 해도 대표팀의 10번은 '테크니션' 최문식이였으며 이날 최용수는 23번을 달고 피치에 서게 되는데 이후 홈에서의 1차 예선을 준비 하면서 대표팀이 소각의 개편을 하던중 본래의 10번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박건하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약체 홍콩과의 홈경기에서 상무 입대 후 성숙해진 모습으로 2골을 넣으며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면서 기세가 오르다가 1차 예선 통과가 거의 확실시 되던 태국전에서 수비가담을 게을리 하던 고종수가 차감독의 호된 지적을 듣는등 태업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이던 대표팀과 함께 득점포가 주춤하게 된다. 이후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벌어진 코리아컵을 통해 박건하가 주전 스트라이커로 가까이 근접한 가운데 최용수는 아직까지 그늘에 있으면서 최문식과 함께 보조 공격수로 활약한다.
하지만 코리아컵 이후 치열한 주전 다툼에 따른 신경성 위염에 시달리던 박건하가 극심한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서 자연스레 최용수에게 선발 출장의 기회가 오게 되었고 최용수는 그 기회를 제대로 포착하며 나이키 투어의 명목으로 방문한 호화군단 브라질을 상대로 3-6-1의 원톱으로 나서 브라질이 자랑하는 아우다이르, 콘카우베스 수비라인을 상대로 타점 높은 제공권과 움직임 등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목마르게 찾아온 원톱의 적임자로 서서히 부각되었고 이후 달구벌 대구로 불러 들인 타지키스탄을 상대로도 선발 출장하여 돌아온 완산폭격기 김도훈(2골)과 함께 득점포를 가동한다.
그리고 중국 전 이후 가진 본선행 티켓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아시아 최종 예선 카자흐스탄과의 홈경기에서 차감독이 뽑아든 카드는 예상과 같은 최용수 - 김도훈 투톱 카드.
당시 벤피카의 테스트를 만류한 차감독으로 인해 대표팀에 남게된 서정원과 물오른 왼발의 킥력을 자랑하던 하석주의 지원 속에 최용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아시아 예선의 히어로써의 육일 승천을 준비한다. 6일 뒤 벌어진 우즈벡과의 홈경기에서도 박건하의 헤딩 패스를 받아 선취골을 기록, 도쿄에서의 한일전에서 골은 넣지 못하였지만 효과적인 움직임과 함께 오무라와 이하라를 유인하며 간접적으로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을 돕는등 득점 뿐만이 아닌 도움에 까지 눈을 뜨며 도쿄대첩의 승전보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이후 UAE와의 홈경기 PK 유도, 카자흐 원정 1골, 본선행을 확정짓던 우즈벡과의 원정경기의 2골 등 이란의 카림 바게리와 함께 7골을 뽑으며 지역 예선 최다골을 기록하는 맹활약 속에 그는 어느덧 황선홍의 뒤를 이을 골게터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황선홍의 부재 속에 암담했던 대표팀 공격진의 리더인 동시에 누가 뭐라해도 소중한 본선행 티켓을 따내는데 있어 일등공신은 바로 최용수였다.
■ 김도훈
- 1970년 7월 21일생
- 182cm, 77kg
- 주요 대표 경력: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95 코리아컵, 96 아시안컵
대표팀에서 그는 언제나 2인자였다. 그에게는 비슷한 연령대의 황선홍, 최용수라는 벽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전의 기회가 없었던건 아니다. 95년 코리아컵 당시 황선홍의 음주파문으로 시끄럽던 사이에 맹활약하며 당시의 분위기는 그 아성을 넘을 정도였으며 97년 황선홍의 부상으로 고심하던 당시에도 그 적임자로는 역시 김도훈이 꼽히곤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은 역시 최용수였다.
이렇듯 97년부터 시작된 1년여 간의 싸움도 김도훈에 있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였다. 차감독의 부임 첫경기였던 노르웨이 전에서 그림과도 같은 슈팅으로 첫골을 쏘아올리며 승전보를 안긴 그는 1차 예선에서 박건하, 최문식과 호흡을 맞추며 무난한 출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웨이 1차 예선 직후 점차적으로 슬럼프 기운이 오는가 싶더니 결국 박건하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이후 코리아컵 까지 한동안 김도훈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거기에 최용수의 급부상 또한 더욱 더 입지적으로 불리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2차 예선을 앞두고 대구에서 벌어진 타지키스탄과의 평가전에서 낯선 18번을 달고 오랜만에 출장하여 2골을 넣으며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가 싶더니 결국 2차 예선 첫번째 홈경기 카자흐스탄과의 일전에 대학 후배 최용수와 선발 투톱으로 출장, 특유의 시저스킥을 보여주기도 하며 조금씩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2차전 우즈벡과의 경기에서 유상철의 오버헤드 패스로 부터 시작된 이상윤의 결승골의 절묘한 헤딩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도쿄 원정 한.일전 이후 최용수 一人天下가 지속되는 동안 김도훈은 박건하와 함께 조금씩 교체로 투입되다가 사실상 본선행이 확정된 우즈벡과의 원정 경기에서 행운의 5번째 골을 기록한뒤 UAE와의 예선 마지막 어웨이 경기를 남겨두고, 일본과의 홈경기에서 아키타에게 당한 최용수의 코뼈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원톱 자리에 박건하냐 김도훈이냐를 놓고 저울질 하던 차감독은 결국 계속 컨디션이 하락세를 걷고 있는 박건하보다는 지난 경기에서 이미 골맛을 보았던 김도훈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노상래, 박태하 등 그동안 중용되지 못했던 2진급 선수들이 상당수 포진된 이 경기에서 전반 초 이상윤에게 예리한 스루패스로 어시스트를 기록한 그는 이후 하석주의 오버래핑에 이은 크로스와 서정원의 크로스를 환상적인 2골로 마무리 하며 대표팀의 예선 통과를 경축하는데 깔끔한 마무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이 경기의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일본 J리그 빗셀 고베로 2년 임대를 가게 된다.
■ 박건하
- 1971년 7월 25일생
- 180cm, 74kg
- 주요 대표 경력: 95 유니버시아드 대표, 96 아시안컵 예선
96년 수원 삼성의 리그 입성 초기, 실업 리그 이랜드 시절을 거쳐 중고 신인으로 계약금 2억 2천만원과 함께 18번 유니폼을 받고 입단했던 '찰리박' 박건하. 그해 시즌 14골 6어시스트라는 출중한 성적과 함께 울산의 안홍민을 따돌리고 전년도 노상래에 이어 중고 신인으로써 연속으로 신인왕을 차지했으며 비록 울산에 뼈아픈 통합 챔피언을 내주긴 했지만 바데아, 윤성효, 이기근, 이진행, 조현두, 이기형 등과 함께 수원을 후기리그 1위에 올려 놓는데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는 이후 잠시 박종환 감독의 부름으로 아시안컵 예선의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본선에서는 제외 되었다가 96아시안컵 참패의 책임으로 물러난 박감독에 이어 97년 새로 차범근 감독의 취임과 더불어 발표된 대표팀 명단에 다시 포함되었다. 전년도 보여준 그의 활약도 그러하지만 일단 에이스 황선홍이 부상으로 1년을 허비하여 쓸 수 없게 되자 그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성격이 컸다. 차감독은 부임 초기에는 기본기는 다소 투박하지만 파워와 골감각을 겸비한 김도훈을 중용하려 하였으나 호주 4개국 대회를 거치며 아시아 1차 예선 이후 슬럼프에 빠지는 경향이 보이자 이후 박건하 쪽으로 무게가 쏠리기 시작했다.
신장에 비해 체중이 다소 미달인 관계로 원톱으로써의 파워와 압도적인 면은 다소 부족했지만 포워드로써 전반적인 경기 시야와 함께 상당한 패싱 능력과 볼센스가 갖춘데다 특히 장기인 탁월한 위치선정에 이은 헤딩력의 위력이 상당했기에 - 이미 호주 4개국 대회의 3번째 상대 뉴질랜드 전에서 그 포문을 연바 있었다 - 차감독의 든든한 신임을 얻었다.
이후 조커 최문식과 호흡을 맞추며 무난한 경기력과 함께 점차적으로 주전으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하였고 고비마다 헤딩골을 터뜨리며 청량제 역활을 해주기도 하였다 - 희안하게도 이 시기에 터뜨렸던 박건하의 골은 모두 헤딩이였다. 특히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박건하는 헤딩골로만 2골을 뽑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
1차 예선 홈경기를 앞두고 소폭의 개각 속에 김도훈의 9번을 꿰차게 되었고 홍콩과의 홈경기에서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한참 승승장구하던 그는 코리아컵 이후 닥친 더위와 주전경쟁에 지친듯 신경성 위염에 시름 하면서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기 시작, 70kg 초반대를 유지하던 체중이 66~67kg로 떨어지는 정상 체중에 미달이 되는 상황에 이르면서 페이스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는 최종 예선에서도 지속 되었다.
결국 최용수에 원톱 자리를 내주며 불안하게 2차 예선을 맞이하던 그는 나름대로 우즈벡과 UAE와의 홈경기에서 회복된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예선 막판 들어 점차적으로 페이스를 되찾은 돌아온 완산 폭격기 김도훈에게 2번째 스트라이커 자리까지 내주었고 다음 엔트리에 제외 되었다가 이듬해 3월 다이너스티컵 명단에 선발되며 이후 유럽 전훈 등을 거쳤으나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이번에는 신예 이동국에 밀려 결국 월드컵 무대를 밟는데 실패하였다.
■ 최문식
- 1971년 1월 6일생
- 172cm, 66kg
- 주요 대표 경력: 94 미국 월드컵 예선, 본선
그는 사실 앞서 거론한 선수들과는 달리 포워드라기 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선수이다. 고교 시절 천재 소리를 들으며 소위 랭킹 1위로 꼽히던 그는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은사 이회택 감독을 따라 포항에 입단하며 뛰어난 테크닉과 발재간을 바탕으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역시 한국의 많은 테크니션들이 그랬듯이 국제무대에서 항상 중요한 순간마다 유럽과 남미의 강호와 비교해 전력적으로 쳐지는 대표팀으로써는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이 많이 쳐지는 이들을 쓰지 못하는 식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멍에를 지니기도 했다.
94년 월드컵 예선을 풀타임 주전으로 뛰면서 김호 감독의 신임을 듬뿍 받았음에도 정작 본선에서는 이영진, 김판근 등에 밀리면서 후보로만 밑돌았고 마지막 독일 전에서도 결국 김호 감독의 선택은 '신데렐라' 조진호였던 것이다.
금호고 직속 계열의 고종수가 윤정환을, 윤정환이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최문식 또한 부상으로 쓰러진 '비운의 스타' 김병수를 바라보며 테크니션의 계보를 이어왔다. 그 정도로 그의 테크닉은 국내에서는 최고의 수준으로 각광을 받았고 이러한 기량의 그를 차범근 감독도 초기에는 상당히 중용하였다. 차감독은 최문식을 대표팀의 10번으로써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조커로 매우 유용하게 투입하곤 했는데 적어도 1차 예선까지 그 영향은 지대하였다.
주로 후반 중반 쯤 투입 되었던 그는 수비 부담이 적은 위치인 전방에 위치하여 절제되고 섬세한 테크닉과 결정력을 보여주곤 하였는데 당시 그의 장기는 승리를 굳히는 쐐기골에 있었다. 이를 테면 서정원의 크로스를 깔끔하게 헤딩으로 넣은 홍콩 전이라든가 유상철의 도움을 받은 태국 전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5월 도쿄에서 벌어진 한.일전에는 박건하 아래의 세컨드 어태커로 선발 출장하여 전반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맞기도 하였고 그렇게 코리아컵을 지나 2차 예선 전까지는 선발 혹은 조커로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정작 2차 예선이 시작된 이후 그는 최용수가 몰라보게 급부상한 인사이드 경쟁에서 밀렸고 우즈벡과의 홈경기부터 새로이 가세한 측면 공격형 미드필더 고정운, 그리고 조커로서의 입지조차 김대의, 장형석과 같은 새로 등용된 인물들에 밀리며 결국 2차 예선에서 한번도 출장 기회를 부여 받지 못한채 대회를 마치게 되었고 다음 엔트리에서 제외 되었다.
90년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군림해온 최문식의 대표팀을 향한 두번째 도전은 또 다시 악연의 끈을 끊지 못하고 아쉽게 좌절되고 말았다.
▶ 절반의 조력자들
■ '왼발의 달인' 하석주
94월드컵 이후 윙과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로 보던 그의 포지션은 당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에 의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윙백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이후 몇년간 대표팀 부동의 사이드 윙백으로써 왼쪽을 책임졌다. 97년은 그러한 의미에서 최용수든 김도훈이든 박건하든 그들이 터뜨린 골의 절반은 하석주의 왼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물이 오른 킥의 감각을 자랑했다.
곧잘 프리킥 혹은 2선 침투로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듬해 비록 본선에서 가린샤 클럽에 가입하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예선과 본선 벨기에 전에서 보여주었던 킥력, 기동력, 팀플레이로 팀에 기여한 공로는 상당했다.
■ '날쌘돌이' 서정원
차감독의 만류로 포르투갈의 벤피카 테스트 대신 대표팀을 선택한 그는 당시 3-6-1과 3-5-2를 오가는 시스템 속에 선발 혹은 조커로 활약하며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와 크로스로 역시 최용수와 김도훈의 조력자 역활을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도쿄대첩의 동점골을 비롯한 고비시 득점을 성공시키는 해결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최종 예선 이후 92올대과 94월드컵 시절 아쉽게 좌절 되었던 유럽무대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선배 황선홍이 부러워 하기도 했던 프랑스 르샹피오나(RC 스트라스부르)에 진출하며 나름대로 다가오는 월드컵을 고대하던 그는 출국 직전 수두를 앓고 있던 아들을 보살 피다 옮은 수두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게 되었고 선발 출장한 네덜란드, 벨기에 전에 나름대로 활약 하였으나 대표팀의 참패 분위기로 인해 지난 월드컵에 비해 크게 빛을 보지는 못하였다.
■ '팽이' 이상윤
97년의 브라질 전은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김도근의 선취골도, 홀로 전방을 사수하던 최용수도 인상적이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치지 않는 스테미너와 함께 사이드를 돌고 돌던 이상윤의 등장도 그에 못지 않았다. 고정운, 신태용, 한정국, 박남렬과 함께 천안 일화 3연패의 주역이였던 그는 93년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 떨어져 있던 중 97년 후반, 2차 예선을 앞두고 새로운 인물을 찾던 차감독의 부름을 받고 합류하였다.
이상윤은 윙어 임에도 심심 찮게 제2의 공격수로서 골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는데 UAE와의 홈경기에서 죽마고우 하석주의 도움을 받아 넣은 헤딩골, 접전을 벌이던 우즈벡과의 홈경기에서는 극적인 결승골로 잠실벌을 달아오르게도 하였다. 고정운의 합류로 서정원과의 주전경쟁에서 다소 우위를 보이기도 하던 그는 컨디션 난조를 보인 일본과의 원정 경기를 제외하곤 꾸준히 재치 있는 사이드 플레이로 팀의 찬스를 만들어 내며 주전 우측 윙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지만 본선 직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다친 무릎 부상과 더불어 현지 캠프에서 동료의 킥을 강타 당하며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였던 본선에서는 그 또한 세계의 벽을 느끼며 별다른 활약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Written by 신준영(juin19@hotmail.com)
피파코리아
첫댓글 옛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는군요^^
96아시안컵때 황선홍 선수 부상에 상당히 광분했었다는.. 그때 쿠웨이트 수비가 황선수의 다리를 보고 고의적인 백태클을 들어갔었죠. 심판 휘슬도 안불고, 박종환 감독이 "저거! 저거!" 하는 소리가 중계로도 들렸었다는..
이때 공격력은 최강이었죠. AC 밀란 상대로 진짜 잘했는데
비운의 천재 김병수, 축구 올드팬 분들 말씀들어보면 김병수만 사람이 아직까지 나온적 없다시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