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뒤에 숨겨진 조용한 역사
고해성사 뒤에 숨겨진 조용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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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는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고해성사는 보통 고해성사소 안에서 진행된다.
고해성사는 회개가 요구되는 행위이자 용서와 속죄의 전조이며,
고해성사는 사제와 자신의 죄를 나누고 반성하는
안전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고해성사는
가톨릭교회의 비밀과 신비한 힘을 상징했다.
그렇다면 고해성사는 어떻게 추문에 싸이게 되었고,
고해성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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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커튼을 열어보자.
고해성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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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형태의 고해성사의 기원은
적어도 16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 보로메오 추기경 (1538–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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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년부터 1584년까지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카를로메오 추기경이 고해성사소를 디자인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는 이후 사제와 참회자 사이에 금속 막을 추가로 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톨릭과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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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메오의 고해성사소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1천년 동안 수도원에서 시작된 고백은 13세기까지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요구된 것은 아니었다.
성찬을 거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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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성직자가 교회에서 의자에 앉아
개인적인 형태로 성찬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참회자는 그의 옆에 서거나 앉아 면죄부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심문으로서의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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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대부터 고해성사는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번만 행해졌는데,
이는 성직자들이 참회를 심문하고
그들이 이단자가 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신부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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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와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성직자는 중세 초기에 강력한 인물이었다.
면죄부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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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신자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용서가 없다면 죽음은 연옥이나 더 나쁜 것,
즉 지옥으로의 영원한 저주를 가져왔다.
고해성사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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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작부터, 고해성사의 수행은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매우 다양했다.
고해성사의 날인을 받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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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성직자들은 동정심과 용서,
그리고 자백의 봉인을 충실히 지켰지만,
다른 성직자들은 그렇게 독실하지 않았다.
추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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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에는 성직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성찬으로
포착한 정보를 이용한 많은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성직자들에 의해
성범죄에 대한 비난이 유포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피터 데미안 (c. 1007–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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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승 피터 데미안(사진)은
이 신뢰의 남용을 인정했고 종종 참회와 고해성사 관계로
시작되는 미성년자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성직자들을 비난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다미안은 그 당시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를 덮고 있던 추문들을
교황 Gregory VI가 처리하도록 촉구했던 개혁가로 여겨진다.
고해성사의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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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세기 후, 또 다른 저명한 성직자가 자백을 받아내는
신체적 학대의 혐의들을 의식적으로 다루곤 했다.
그가 디자인한 그 상자는 사제와 참회를 분리시켜,
어떤 신체적 접촉도 예방했다
고해성사소를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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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미오 추기경의 고해성사소는 사제가 앉아 있고
가운데 칸이 있는 나무 구조물이었다.
양쪽에는 참회자들이 말을 할 수 있는 격자무늬의 입구와
그 위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고해성사라는 단어의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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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된 것은 1600년대 중반쯤이다.
이 용어는 원래 순교자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의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매장된 장소로 적용되었다.
고해성사를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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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는 다른 신자들에게 보여졌지만,
이 시기의 고해성사소의 배치는
사제의 가시성을 제공했다.
오늘날 많은 사제들은 고해성사의
막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선호한다.
성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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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 동안, 그 고백들은 비밀과
가톨릭 교회의 신비한 힘을 상징했다.
범죄에 대한 법의학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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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비밀을
밝히도록 설득하는 심문관으로 여겨졌다.
자백은 죄를 조사하는 법의학적 증거로 알려지게 되었다.
회개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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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회개의 필요한 행동이며
참회와 속죄의 필요한 전조로 여겨졌다.
신과의 친밀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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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고해성사와 성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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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1년에 적어도 한 번
성찬이 여전히 요구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정기적이고 빈번하게 성찬례의 이점을 활용하도록 권장된다.
캐논 법전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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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매주 또는 매일 성찬례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에 특히 그렇다.
이러한 경우, 교회법전에 따르면,
그들은 "중대한 죄를 의식"할 때마다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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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은 인정하지 않은 죄는 삶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교감을 막는다는 것이다.
대중을 위한 고해성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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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소는 교회 안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
이곳 2014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알바로 델 포르티요 시복식에 앞서 열린
미사에 앞서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했다.
대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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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가톨릭 신자들이
프랑스 서부 생 앙느 도레이에서 열린
2016년 "대사면" 종교 행렬에 참석하는 동안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이 가톨릭 순례는 명백한 브레톤의 전통이며
1625년부터 진행되었다.
교황의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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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교황들도 고백한다!
이 이미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사순절 셋째 주 금요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참회 미사에서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기독교 예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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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소는 때때로 교회의 건축 계획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러한 기독교 예술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라노 대성당의 역사적인 고해성사소는
샤를 보로메오 추기경에 의해 구상된 것들이다.
과거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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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화려한 고해성사소 중에는
프랑스 툴루즈 대성당 것도 있다.
17세기에 연마된 오크 재질로 지어진
이 성당은 유물의 예배당에 서 있다.
종교적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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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네베르 대성당에는
16세기 호두나무로 만든 고해성사소가 있다.
현대의 고해성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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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가
디자인한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성당의 고해성사소들은
지난 50여 년간의 고해성사의 재창조를 반영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