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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Renaissance, 14세기말∼16세기 후반)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로 트레첸토(trecento, 14세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 15세기), 친퀘첸토(cinquecento, 15세기)라 부른다.
문화 전성기의 상징처럼 쓰인다.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흔히 문예부흥(文藝復興)으로 번역된다.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한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가톨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19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르네상스 시기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년∼1897년) 시대에는 르네상스가 명백한 시대구분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게르만계 학자들의 중세 재평가 작업에 의해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중심이 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된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아랍의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고, 현세지향적(現世指向的)이 되고, 인쇄술(印刷術)의 발달로 지식이 확산될 토양을 확보하고, 예술에서 새로운 기법과 실험을 시도하게 되는 등의 변화를 말한다. 이 관점은 르네상스시기에 유럽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로 상징되는 경제성장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종종 근대의 시작으로 간주되곤 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미술, 문학, 철학 등이 변화된 유사혁명 정도로 본다. 오직 극소수의 가진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세였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본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에 대해 적었던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민중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년∼1945년)는 르네상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였는가에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르네상스는 중세 말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시기에 파괴된 것이 더 많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예를 들어, 라틴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자연적인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던 살아있는 언어였는데, 고전 순수주의라는 강박관념으로 화석화시켜버린 것이다. 로페즈는 르네상스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Sarton, 1884년∼1956년)과 손다이크(Thorndike, 1874년∼1949년)는 르네상스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를 시간적, 지역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여러 곳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중세가 언제 어디서 끝나는지도 얘기할 수 없다. 보통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를 제현인물로 피렌체 출신의 ‘단테(Dante)’가 있다. 그는 정적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중 대표작인 ‘신곡(神曲)’을 완성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지옥, 연옥의 안내인으로 등장시키는데, 영혼의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고전문학과 가톨릭을 조화시켜 대서사시를 그려내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인간이 최고의 것을 성취했고 그 이후 점차 부패하여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를 종교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진보로 간주했으므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문헌을 모으고 라틴어로 시와 책을 쓰다가 이러한 식으로 고전 교양을 모아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색하는 방식을 ‘인문주의(人文主義)’라고 불렀다. 그는 속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온고지신(溫故知新)적인 태도는 이후의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최초의 인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Giotto di Bondone, 1266년∼1337년)’이다. 그는 시공간을 다룸에 있어 고대의 스타일을 원용하였다. 법률에 있어서는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체계화를 이룬 사람은 ‘바르톨루스(Bartolus 1313년경∼1357년)’다.
이러한 움직임은 1348년의 흑사병과 각종 정치적인 격변으로 더 이상 꽃피지 못했다. 이러한 인문주의가 다시 꽃피게 되는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을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서 찾는 관점도 있다. 그것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비잔티움 제국, 그리스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페스트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인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르네상스와 중세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초에 고대, 중세, 근대라는 3시대 구분법은 14세기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며 잊힌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부활했다고 선언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14세기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는 시기다. 중세의 끝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 혹은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거의 대부분의 동로마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피난을 왔었다.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기독교 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피렌체에서 발달했던 초기 르네상스는 16세기를 기점으로 베네치아에도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두 도시는 교황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 새로운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그리스와 아랍어로 된 자연과학, 철학, 수학에 집중한 중세 전성기와 달리,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학, 역사, 연설문 수집에 집중했다. 신곡으로 잘 알려진 단테 “인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페트라르카 등 초기 휴머니스트들이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리비우스, 세네카의 저서를 찾아 유럽의 도서관을 수색한 것이 14세기였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문학, 역사, 연설문 등은 라틴 세계에서도,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도 무시되고 있었고, 오직 동로마 학자들만이 보존하고 있었다. 1396년 초청을 받아들여 피렌체에 이주한 동로마의 외교관 겸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를 시작으로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수많은 공헌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피렌체가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의 패권을 차지하고 예술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The Medici)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어떤 역사가들은 1348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黑死病)을 맞이하여 피렌체 시민들이 경험한 세계관의 동요를 들기도 한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은 15세기 초 토스카나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렌체의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꼽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건축은 기술적으로 고딕(Gothic)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북쪽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로마의 건축 유산을 잘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모방을 넘어 고딕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고딕이란 명칭 자체가 이탈리아인들이 비하의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높은 성당과 거기에 들어간 기술 -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볼트(Rib-Vault) 등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자존심이나 미학적인 취향의 다름으로 인해 고딕의 새로운 구조를 높이에만 집착해 추한 덧댐으로 마무리된 불완전한 구조로 규정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과 다르게 건축물의 높이는 좀 낮더라도 건축의 “질서”에 집중한 것. 기둥과 창의 엄격한 배치와 구성(오더),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를 가진 장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기술적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11세기 즈음부터 토스카나 지방에서 주로 보이던, 십자형 로마네스크 교회의 중심에 팔각형 혹은 둥근 작은 돔이 올라가던 양식도 계속 계승되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성당들이 인상적인 거대한 돔을 구현하며 기술적인 성취도 이루었다.
피렌체의 두오모가 대표적인 예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작품. 다만 이 두오모를 비롯한 이 시기의 많은 건물들은 돔을 여전히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는 좀 다른 과도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오늘날에 와서는 이탈리안 고딕 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후 후대 건축가들의 실험과 도전이 계속 된 결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주장한 그리스-로마 건축으로의 회귀를 내세운 산탄드레아(Sant'Andrea) 교회(1472년∼1494년)에 이르러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1441년∼1481년) 등 기둥과 보를 이용한 경쾌한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두꺼운 벽 구조와 둥근 드럼 천장 등으로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탄드레아 성당은 이후 궁극적인 성당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원형이 되었으며 수많은 건축물들의 모범이 되었다. 더해서 알베르티는 원근법에 대해 체계적인 안내를 했고, 건축과 조각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수학적 비례를 제시하고 정립하였다.
알베르티 이후의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러한 특징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제대로 연구해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이 계기이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한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가 16세기에 고전적인 균형미와 조화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하게 되었다. 매너리즘(Manierismo, 마니에리스모)은 일반명사로는‘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지만, 고유명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기존의 양식에 대한 심한 탈 법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한 시대 상황의 산물인 측면이 많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을 대체하지는 못했고,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로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또한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르네상스 애호가였던 프랑수아 1세 때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에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려서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1세기가 지난 16세기의 영국에서도 뒤늦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과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년∼1603년) 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스튜어트 왕조가 개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이 필요해졌다.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되었고, 이니고 존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따라서 독창성도 부족했다.
독일의 경우 영국보다도 더욱 침체된 상태였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어휘를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불거진 신ㆍ구교 갈등이 폭발한 30년 전쟁과 같은 외부 요인 때문이었다.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등장한 ‘고딕 매너리즘’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에 기초한 윗 문단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독일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 실제로, 독일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초기 르네상스에는 기베르티 로렌초에 의해 새로운 기법이 탄생했으며, 도나텔로는 조각이라는 장르를 건축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르네상스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사실주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작품인 가타멜라타 장군의 기마상도 그의 작품, 더불어 실물크기의 누드상인 다윗상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는 다르다. 도나텔로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모양도 다르다.
천재적인 건축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완벽함의 상징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비견될만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당시 발굴된 고대 조각의 최고 걸작인 라오콘 군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후 파묻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조토는 사실적인 표정의 묘사와, 투시, 명암 등으로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마사초는 최초로 선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수태고지를 그렸고 보티첼리는 앞서 세 화가와는 달리 그리스의 고전 신화의 주제를 그림으로 그렸다. 앞서 세 사람이 르네상스 기술의 선구자들이라고 한다면 보티첼리는 정신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 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게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발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대륙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의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도리어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것도 메디치가 피렌체 시의 절대권력이 된 이후에 등장한 소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혹은 ‘피렌체 르네상스’만에 국한된 것이다.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굉장히 사랑했고, 르네상스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