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범 준비부터 첫 챔피언 탄생까지
대망의 한국농구연맹(KBL) 출범, 그리고 역사적인 첫 경기.
1983년 시작된 농구대잔치를 발판 삼아 겨울철 대표 스포츠로 잡은 농구는 국제적 흐름을 따라 프로화를 추진해왔고, 이날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SBS 스타즈와 대우 제우스의 첫 경기는 8시간만에 매진사태를 겪는 등 뜨거운 관심을 얻었다.
첫 경기는 성공적이었다. ‘테크니션’ 제럴드 워커(SBS) 그간 미국 프로농구(NBA)에서만 볼 수 있었던 묘기를 선사했고, 일찌감치 든든한 팬층을 형성했던 ‘저승사자’ 정재근(SBS)과 ‘황태자’ 우지원(대우) 등의 플레이에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공식 집계된 관중은 6,066명. SBS는 108-107로 대우를 꺾고 첫 승을 거두었다. 첫 득점의 주인공은 SBS 소속의 이상범. 3점슛으로 KBL의 문을 열었다. 워커는 22득점 10어시스트 8스틸 6리바운드로 첫 경기만에 스타로 눈도장을 찍었다.
이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들이 있으니 바로 윤세영 KBL 초대총재와 프로농구 출범의 삼파 역할을 해온 김영기(KBL 2대 총재), 이인표(현 KBL 패밀리 회장), 최종규(전 삼보 감독) 등이었다. 1994년 프로농구 설립준비위원회에서 시작된 작은 모임은 아마추어 농구계와의 계속된 대화와 토론, 그리고 타협을 거쳐 이날에 이르렀다.
프로농구는 농구가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대중 스포츠로 확고히 자리하고, 내적으로는 농구계를 좀먹고 있던 과열 스카우트 경쟁을 뿌리뽑기 위해, 또 농구의 저변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출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왔다.
마침 94-95시즌 농구대잔치가 40만 관중을 돌파하고, 13억 원 이상의 입장 수입을 기록하면서 그 과정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위원회는 프로야구와 NBA 뿐 아니라 J리그(일본프로축구), 필리핀과 중국, 홍콩 등 다양한 나라, 다양한 리그의 사례를 수집하면서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 선발된 외국선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1라운드 선발순위 순)
기아 = 클리프 리드, 로버트 월커슨
SBS = 제럴드 워커, 데이먼 존슨
삼성 = 빈스 킹, 케빈 비어드
나래 = 칼 레이 해리스, 제이슨 윌리포드
대우 = 네이트 터브스, 마이클 엘리어트
동양 = 로이 해먼즈, 토니 매디슨
현대 = 라펠 맥길버리, 토드 버나드
프로농구 출범은 그간 국내농구팬들이 볼 수 없었던 많은 제도도 가져왔다. 첫째는 쿼터제. NBA의 시스템을 차용해 그간 20분씩 전/후반으로 진행되던 농구 경기는 10분씩 4쿼터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외국선수 출전.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구단간 전력 평준화를 꾀하기 위해 도입됐다. 또 지역방어가 금지되고, 24초 공격제한 및 삼심제, 엄격한 벌금제도가 도입됐다. 마지막으로 계약금이 사라지고 샐러리캡이 적용되었다. 처음에는 반발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신고용을 전제로 했던 기존의 계약금 제도 대신, 기간제 계약을 통해 자신이 잘한 만큼 더 많은 금액을 받고 이적도 가능한 샐러리캡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원년리그는 기아의 우승으로 막 내렸다. 정규리그내내 독주했던 기아는 챔피언결정전에서 ‘돌풍’의 나래를 꺾고 실업최강의 명성을 이어갔다. 강동희는 정규경기와 플레이오프 MVP를 휩쓸었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나래도 ‘사랑의 3점슈터’ 정인교를 스타로 등극시켰다. 반면 ‘명문’ 현대와 삼성은 주축선수들의 군입대로 나란히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하는 부진을 보였다. 경기력 측면에서는 포스트 플레이가 가능한 외국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한국농구에도 센터 위주의 포스트 플레이와, 1대1 능력을 위주로 한 아이솔레이션 플레이가 정착해갔다. 초창기에 이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박수를 받았지만, 점차 국내선수의 비중이 줄어드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 프로농구의 강자들
‘영원한 승부, 뜨거운 감동’,’JUMP FOR THE DREAM’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시작된 프로농구는 두번째 시즌을 맞아 그 규모를 확장한다. 첫 시즌, 8팀이 21경기씩을 치른 반면 1997~1998시즌부터 2000~2001시즌까지는 SK와 LG가 합류해 10팀이 45경기씩을 치렀다.
원년 우승은 기아가 가져갔지만, 현대는 그 바통을 물려받아 90년대의 강자로 자리잡는다. 군 복무로 원년리그를 뛰지 못했던 ‘산소같은 남자’ 이상민과 ‘캥거루 슈터’ 조성원이 돌아오고,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이 한양대 졸업 후 팀에 합류했다. 여기에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죠니 맥도웰을 영입하면서 현대는 질풍가도를 달렸다. 특히 이상민과 맥도웰의 픽앤롤 플레이와, 리바운드 후 이어지는 시원한 속공 농구는 많은 팬을 양산하기도 했다. 현대는 정규리그 3년 연속 우승과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승리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3년 연속 우승을 노린 현대만큼이나, 3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기아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허-동-만’ 트리오가 분투한 기아는 1998년 챔프전에서 현대를 7차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외국선수 피닉스가 태업을 하고, 허재가 온 몸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보여준 투혼이었다. 기아는 7차전 끝에 현대에 왕좌를 내줘야 했지만, 팬들은 기아에게도 큰 박수를 보내줬다. 특히 부상 투혼을 보여준 허재는 최초로 준우승을 하고도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기아는 1999년, 허재가 나래로 떠난 뒤에도 한 번 더 챔프전에 올랐다. 비록 현대를 넘지 못했지만 90년대를 호령한 최강팀다운 저력이었다.
밀레니엄을 맞아 ‘현대 왕조’가 힘을 잃으면서 프로농구에는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했다.
1999~2000시즌에는 서장훈의 SK가 마침내 현대의 독주를 끊었다. 로데릭 하니발과 재키 존스가 수비에서 상대를 제압하고, 조상현과 황성인이 날카로운 외곽포를 꽂았던 SK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뒤집고 현대를 4승 2패로 제압하며 KBL 역대 3번째 우승팀이 된다. 우승 전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일어난 대형 트레이드도 화제가 됐다. 1999년 12월 25일, SK는 골드뱅크에 현주엽을 내주고, 슈터 조상현을 받으면서 우승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췄다.
2001년에는 주희정-문경은의 삼성이 새 외국선수 아티머스 맥클레리를 앞세워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전통의 명가’로 통했던 삼성이었지만, 프로농구에서 ‘1위’에 오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같은 시즌, 조성원과 에릭 이버츠의 폭발적인 3점슛을 앞세운 LG의 속공 농구도 화제였다. LG는 매 경기 110점까지도 넘보는 고득점으로 인기몰이에 성공, 마침내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했지만 높이를 앞세운 삼성의 벽에 부딪쳐 우승에는 실패했다.
▲ 새로운 챔피언의 등장
프로농구는 2001~2002시즌을 맞아 라운드를 6라운드로 확장하고, 경기수도 54경기로 늘렸다. 더 많은 경기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경기 시스템 외적인 변화도 있었다. ‘명가’ 기아와 현대가 간판을 내렸다. 모기업 사정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 기아는 모비스로, 현대는 KCC로 옷을 갈아입었고, 연고지도 부산에서 울산으로, 대전에서 전주로 자리를 옮겼다. 중립지역으로 남아있던 서울도 주인을 찾았다. 삼성과 SK는 각각 수원과 청주를 떠나 서울에서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을 차렸다. (SK는 2003~2004시즌을 끝으로 잠실실내체육관으로 홈 구장을 옮겼다)
대구 동양(현 오리온스)의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는 새로운 시대의 첫 스타였다. 두 선수가 지명될 때만 해도 이들이 프로농구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지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매직 핸드’ 김승현은 만년 최하위에 머물러있던 오리온스를 6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려놨다. 데뷔와 함께 신인상과 MVP를 거머쥐고, 팀에 통합우승을 안긴 것은 그 시작과 같았다.
그러나 2년 연속 통합우승을 노리던 그들의 질주를 막은 이가 있으니, 바로 원주 TG 엑써스의 김주성이었다. 중앙대 출신의 김주성은 일찌감치 서장훈의 계보를 이을 빅 맨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선수. 그는 2002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KBL에 입성, 승부사 전창진 감독과 농구대통령 허재를 도와 역시 우승에 목말라있던 원주에 승리의 기운을 전달했다. 수비와 조직력을 앞세운 TG는 TG삼보와 동부를 거치며 2005년과 2008년에도 통합우승의 영예를 맛봤다.
2004년 이상민-찰스 민렌드의 KCC, 2006년 서장훈-강혁의 삼성 등 전통의 강호들이 자존심을 지켜갈 무렵, 프로농구에는 또 한 명의 스타가 등장한다.
‘바람의 파이터’ 양동근(울산 모비스)이 그 주인공. 2004~2005시즌 신인상을 거머쥔 그는 데뷔 2년 만에 서장훈과 공동 MVP를 수상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그 파란 뒤에는 ‘명장’ 유재학 감독의 지도력도 한 몫 했다. 식스맨 제조기,재활공장장 등 많은 수식어가 붙은 유 감독은 이병석, 우지원, 이창수, 김효범, 우승연, 박종천 등에게 새로운 농구인생을 선사했다. 비록 2005~2006시즌에는 정규리그 우승에도 불구, 챔프전에서 삼성에게 맥없이 무너졌지만 2006~2007시즌에는 통합우승에 성공하며 감독 데뷔이래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편 2009년에는 하승진의 KCC가 정상에 올랐다. ‘이상민 시대’ 이후 첫 우승. 허재 감독이 이끌고 신예 하승진-강병현 콤비, 그리고 백전노장으로서 묵묵히 팀을 이끌어온 추승균이 그 주인공이었다. KCC가 정상에서 만난 상대는 라이벌 삼성.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KCC 출신 이상민과 강혁, 테렌스 레더가 분투한 삼성은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갔으나 KCC의 높이를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 제도의 변화, 그리고 새 스타들
프로농구가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 1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제도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동안 파워포워드와 센터 자리를 채워왔던 외국선수 제도가 손질되어 2쿼터 출전제한에서 2~3쿼터 출전제한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최근에는 2인보유 1인출전으로 개정됐다. 2011~2012시즌 1인보유 1인출전으로의 변화를 앞둔 외국선수 제도는 선발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출범 초기부터 2004년까지 트라이아웃으로 진행되다 잠시 자유계약제도로 바뀌면서 NBA무대를 밟은 스타들이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단테 존스는 2004~2005시즌, 안양 SBS(현 한국인삼공사)의 15연승 대기록 달성을 주도했다. 크리스 윌리엄스(전 모비스)는 한 시즌에만 여섯 차례 트리플-더블을 작성한 기술자였다. 스페인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던 피트 마이클(전 오리온스)은 35.1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 외 자밀 왓킨스(전 TG삼보), 애런 맥기(전 KTF), 올루미데 오예데지(전 삼성), 네이트 존슨(전 삼성/오리온스), 크리스 랭(전 SK)도 스타 선수로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국내에서도 새로운 스타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른바 ‘황금세대’로 불린 스타들은 대학무대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한국프로농구를 이끌 새 주역으로 자리잡는다.
하승진(KCC)과 양희종(군복무/인삼공사), 김태술(군복무/인삼공사), 정영삼(전자랜드), 윤호영과 이광재(동부), 김민수(SK), 강병현(KCC), 함지훈(군복무/모비스), 이동준(오리온스) 등은 막바지에 접어든 농구대잔치 세대로부터 바통을 물려받아 맹활약했다.
2009년부터는 귀화혼혈선수들이 프로무대에 등장해 새 바람을 일으켰다. 국제경쟁력 강화와 새로운 흥행요소 제공이라는 취지아래 등장한 전태풍(KCC)과 이승준(삼성), 문태영(LG), 문태종(전자랜드) 등은 외국선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며 단시간에 스타로 올라섰다. 특히 전태풍은 데뷔 첫 해에 KCC를 챔프전에 올려놨고, 이승준은 2011 광저우 아시안게임 준우승과 2010년 올스타 MVP 등의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프로농구선수 출신 감독들의 데뷔도 이어졌다. 김상식(전 오리온스)과 허재(KCC), 유도훈(전자랜드), 이상범(인삼공사) 강동희(동부) 등은 프로농구 초창기를 빛낸 선수들이었다. 2011년 올스타전에서는 최초로 올스타 선수 출신 감독(유도훈, 강동희)들이 드림팀과 매직팀을 이끌기도.
▲ 국제대회 쾌거
2010년 11월 26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전. 마지막 1분을 남기고 3점차까지 쫓아간 대한민국 남자농구대표팀은 중국의 속공 한 개에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71-77. 8년을 기다린 금메달 재탈환의 꿈을 접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 4강만 가도 잘 한 것이라는 평가절하가 지배적이었지만, 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성공해 은메달을 목에 걸며 청사진을 제공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 농구대잔치 세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었다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2002년 아시안게임서 이상민과 서장훈, 문경은, 전희철, 현주엽 등 시대를 빛낸 스타들은 모처럼 의기투합해 야오밍의 중국을 꺾고 20년만의 우승에 성공했다. 그 뒤에는 신예로 떠오른 김승현과 곧 데뷔를 앞둔 김주성, 그리고 최초의’D-리거’ 방성윤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농구는 그 뒤 긴 좌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연이은 스타들의 부상과 미흡한 준비로 급기야 2006년 ‘도하 참사’와 2009년 ‘톈진 쇼크’도 맛봤다. 변화가 필요했다. KBL과 대한농구협회가 머리를 맞대 국가대표 협의회(국대협)를 탄생시켰다. 프로농구 출범 후 처음 이뤄진 합작품이었다. 유재학 감독을 앞세운 국대협은 레니 윌킨스를 고문으로 선임한 뒤 오랫동안 강도 높은 훈련에 몰입했다. 덕분에 대표팀은 예년에 비해 훨씬 정돈된 모습으로 국제대회에 나서 성과를 이루었다. 준비 기간에서 나타난 일련의 과정들은 차기 대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 교훈과도 같았다.
▲ 기록은 계속된다
1997년 출범한 프로농구는 2004~2005시즌, 처음으로 100만 관중을 넘어서는 쾌거를 맛봤다. 2006~2007시즌부터는 3시즌 연속 100만 관중을 돌파해 흥행 열풍을 이어갔다. 특히 전통의 라이벌 KCC와 삼성이 맞붙은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한 시즌 최다관중(137,610명)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5년간 누적되어온 관중수만큼이나 의미 있는 기록도 많았다. 2010년 코트를 떠난 이상민(전 KCC/삼성)은 2001~2002시즌 이래 9시즌 연속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차지했다.
14년 연속 올스타 출전 중인 주희정(SK)은 매 경기 기록수립 중이다. 2월 14일 현재까지 수립된 어시스트 4,598개와 스틸 1,274개는 역대통산 1위에 올라있다. 정규경기 698경기 역시 부동의 1위로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또한, 주희정은 2009년에 플레이오프 탈락팀 선수로는 최초로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어시스트 누적기록에서는 한참 밀리지만, 김승현은 2004~2005시즌에 사상 처음으로 평균 두 자리 어시스트(10.47개)를 기록했다.
득점과 리바운드에서는 서장훈(전자랜드)의 아성을 넘을 자가 없다. 2008~2009시즌, KBL 최초로 1만 득점을 돌파한 서장훈은 리바운드에서도 4,893개를 잡아내고 있어 은퇴 전까지 5,000리바운드 고지를 넘을 수 있을 전망이다. 한편 통산 3점슛 성공에서는 문경은(전 SK)이 1,669개를 기록하고 코트를 떠났다. 역대 2위는 1,116개의 우지원(전 모비스)로, 현역선수 중에서는 조상현(LG, 965개)과 주희정(SK, 962개)을 제외하면 아직 900개를 넘긴 선수가 없어 이 역시도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월 21일에는 동부와 삼성이 초유의 5차 연장 경기를 치러 화제가 되기도. 동부는 이 경기서 133-132로 승리했다. 3시간 13분에 양팀 합산 265점, 윤호영의 61분 57초 출전 등 많은 기록을 양산했다. 또 2009~2010시즌에는 6라운드 54경기 제도로 변환된 이래 최초로 40승 고지를 넘긴 두 팀(모비스, KT)이 정규리그 우승을 다퉜다. 시즌 마지막날까지 계속된 우승 경쟁은 상대전적에서 앞선 모비스가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이처럼 남자프로농구는 지난 15년 간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왔다. 때로는 뜨거운 감동을, 때로는 화끈한 즐거움을 선사해온 KBL은 15주년을 맞아 그 명장면들을 팬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이버와 함께 할「KBL 명장면 15」에서는 앞서 소개된, 결코 잊을 수 없는 스타들의 명장면들을 농구전문기자들과 돌아볼 계획이다.
손대범(월간 점프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