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산(鞍山 : 295.9m).
조선 태조 때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한.,안산.
매일 저녁 봉화를 올리게 했으며, 무사하면 하나.
왜적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넘으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렸다.
그리하여, 안산 봉수대에는.,5개 봉화대.
평화로운 때 안산봉수대는 늘 봉화 하나.
안산봉수대는 각각 동서 두 봉우리에 설치.
.......................
.......................
동봉수대는 평안도와 황해도 육지에서
전해오는 신호를 남산 제3봉수대로 전달,
서봉수대는 평안도와 황해도 도서지역에서
전해오는 신호를 받아 남산 제4봉수대로 전달.
즉,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조정에 알려주는
마지막 전령 역할을 했던 안산봉수대는 전략적 요충지.
국가의 위기를 조기에 알리는 임무를 맡았던.,봉수대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안산 봉수대.
봉수를 지키는 봉수군만 포획하면 거짓 혹은 허위 정보를
후방에 보낼 수 있었고 이런 단점은 병자호란 때도 드러난다.
이괄의 난 이후에 민심은 흉흉해 인조가 피난 갈 때
한강에서 배 한척 구할 수 없었을 만큼 민심은 부정적.
인조 정권이 환도한 뒤에도 반군 도당을 신고하라고 하자,
백성 가운데 무고한 사람을 살해해 '반란군 머리'라고 보고.
조정에 거짓 보고를 올려 상을 받는 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봉수대..........
우리나라에서 봉수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 중기부터.
1123년(고려 인종 1) 송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송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번 야간에는
주변 산 정상 봉수에서 순차적으로 횃불을 밝혀
왕성까지 인도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1149년(고려 의종 3) 서북 병마사 조진약의 상소에 의해
평상시 1회에서부터 위급함에 따라 4회까지 봉수식이 정하여
각 봉수에 방정(防正) 2명과 백정(白丁) 20명씩 두어 봉수제 운영.
그후, 원 침입 때 일시적으로 무너진.,고려 봉수제.
고려사(高麗史)에는 1272년(고려 원종 13)에 삼별초가
합포(合浦)에 침입하여 몽고 봉졸(烽卒)을 잡아갔다는 기록.
이는 원나라가 고려 봉수를 점령하여
자체적으로 재사용하였음을 대변한다.
이러한 고려시대 봉수는 고려후기 왜구의 침입이 잦자
다시금 복구·재편되는데, 1351년(고려 충정왕 3)에는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송악산에 봉수소를 설치하고, 장교 2명,
봉수군 33명을 배치하여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봉수로 구축.
원에 의해 봉수와 함께 세워진 고려때 목장 조직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 폐지되었고 새로운 조직체계.
조선시대 제주 및 전국에 목축관련 조직은 국영말목장.
전국 중산간지역에 10여군데 국영말목장 설치.
당시, 울산방어진 국영말목장은 조선 최대 규모.
목자 244명, 1000 여필 말을 사육하던 목장이었다.
울산 방어진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말목장이었던 곳.
조선 세종 때 제도적으로 고려 봉수제를 재확립.
1419년(세종 1)에는 병조의 상소에 의해 2거였던
봉수 체제를 해상과 육상으로 나누어 5거체로 개편.
1422년(세종 4)에는 ‘경상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
상계(上啓)를 받아들여 각도 봉수처에 연대를 쌓고,
그 위에 화기 등 병기를 비치하여 주야로 간망하였고,
12월에는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육조와 더불어 봉수 실시.
1433년(세종 15) 한양에 목멱산 봉수 설치
지방의 5거 노선이 중앙에 집결도록 하였다.
1433년(세종 15) 북방의 4군 6진의 설치와 병행.
야인에 대한 방어책으로써 다수 연대를 축조했다.
1437년(세종 19) 경국대전(經國大典)
봉수조(烽燧條) 규정으로 봉수제 확립.
1478년(성종 9) 경상도 남해현 적량에서 사변.
순천 돌산포 봉수는 평시 예에 의거 1거만 봉화.
1491년(성종 22) 함경도 경흥 조산보 여진족 침입과
1495년(연산군 1) 8월 전라북도 남도포의 왜적의 침입
같은 해 삼수군에 야인 침입 때도 봉수를 올리지 않았다.
1504년(연산군 10) 11월 폐지 1506년(중종 1) 다시 부활.
이후에도 봉수 폐단은 나아지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대응봉수로 연결이 되지 않는 등 문제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
특히, 선조때 임진왜란과 인조 때 정유재란이 일어났지만
봉수를 올리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됨에 따라 그 대책으로
1605년(선조 38)에는 파발제를 도입하여, 봉수제와 함께 실시.
'울산 방어진 & 포항 장기곶'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후.,점차 축소.
국영말목장은 해안 도서지역으로 이전.
조선 후기부터는 도서지역에
국영말목장이 확산되면서부터
특히, 경기만 도서지역에 인구증가.
국영말목장의 확대로 인해
도서지역 행정구역도 세분화.
국영말목장은 국방의 전초기지.
국방강화와 교통, 통신, 농경의 필요성으로 말을 사육.
조선 후기 경기만 일대의 도서지역이나 해안에 많았다.
병자호란 뒤 북벌을 준비하면서 약 180여 개 목장이 증설.
1678년 허목이 제작한 목장지도에는
폐목장 63개를 포함하여 200여 개 목장.
....................................................
'태조는 안산봉수대 봉화를
왜 매일 올리게 했던 것일까?'
조선시대 안산 자락 홍제천 물길은
'왜구들이 한양으로 침입하던 공격 루트.
한강 홍제천의 물길을 통해 접근 용이한.,한성.
홍제천 물길로 왜구가 침범할 경우에
도성은 물론, 궁궐도 점령 당할.,위험성.
왜구의 창궐로 인해 국운이 기울었던.,고려.
조선 개국 초에 왜구가 창궐했고
북방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던.,태조.
위화도 회군 이후로, 명나라가 나날이 강대해져
언제, 조선을 침범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옹진군 도서지역 및 지리산에는
고려왕조를 재건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조선 개국 직후에, 국내 민심도 안정되지 않았다.
하여, 조선개국 후, 한양천도 이전에
한양 축성공사부터 먼저 완성했던.,태조.
그리고, 한양천도 후 매일 안산봉수대를 점검.
조선 개국 초, 개경 수창궁에서
한양을 오가며 정사를 펼쳤던 태조는
'한양 안산봉수대 & 개경 송악산봉수대'
두 곳을 연계하여 국방에 주력했던 것 같다.
한양천도가 완료된 시점은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조선 8도 봉수대의 중심은 개경에서
한양의 남산봉수대로 마침내 이전되었다.
.........................
.........................
안산은 '내사산과 외사산'
8산에 포함되는 산은 아니지만
한성 방어벽 중에 가장 중요한.,안산.
안산은 인왕산의 모악(母岳)이기 때문.
풍수지리 상, 인왕산은 왕재를 상징하고
인왕산은 북악과 함께 경복궁을 품고있다.
하여, 안산은 한양 도성의 모악(母岳).
조선시대 인왕산은 내사산(內四山) 중 하나.
동 낙산. 서 인왕산, 남 남산, 북 북악.,내사산.
내사산은 한양을 사방 안으로 감싸고 있는 산세.
남산~숭례문~
인왕산~창의문~
북악산~혜화문~
낙산~흥인지문 등
사대문과 도성 성벽이
도읍 한양을 감싸안고 있다.
그 밖으로.,외사산(外四山)
북쪽으로는 북한산(北漢山),
남쪽으로는 관악산(冠岳山),
동쪽으로는 수락산(水洛山),
서쪽으로는 덕양산(德陽山)
안산은 풍수지리상 인왕산의 모악(母岳)이며
안산은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이 감싸안고 흘러
서대문 밖 서지(西池)에 고인 후 여의도까지 물길을 조성.
현재, 홍제천 물길은 35km 남짓 되어
천변 좌우 제방 안에 갇혀 흐르고 있지만
조선 초, 홍제천 물길은 훨씬 넓고 길었다.
조선시대 한양 3대 물길.,홍제천.
만초천은 '마포나루~ 남대문' 물길
중량천은 '뚝섬나루~ 동대문' 물길
홍제천은 '양화나루 ~ 서대문' 물길.
현재, 홍제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해
종로구 서대문구 마포구의 일부 또는
전지역을 흐르다가 한강 하류로 흘러든다.
홍제천은 "널리 구제한다"는 뜻과 함께
조선왕조 519년 역사의 숨결이 담긴 물길.
병자호란 후, 환향녀의 회절강이었던 곳이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홍지문.
1977년에 복원된.,'탕춘대성의 정문' 홍지문은
조선 숙종때 건립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붕괴.
연산군(재위 1494∼1506)
풍류처로도 유명한.,탕춘대.
홍지문을 지나 옥천암 보도각백불(해수관음불상)
조선건국 후,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기원.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기원.
보도각백불.,'1920년 & 현재' 사진.
홍은동 보도각백불은 옥천암 바위벽에 새겨진
고려시대 마애불로서, 고종 때부터 호분을 발랐다.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과 쌍벽.
현재, 옥천암 경내에 위치한 보도각백불은
승가사 아래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과
관련이 깊은 불상이며, 옥천암은 조선 말, 왕실사찰.
동해 낙산사
서해 보문사
남해 보리암
북관음 옥천암.
4대 관음보살.,보도각백불.
1864년(고종5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정관법사가 관음전을 짓고 천일기도.
임진왜란 왜군이 침입한 경로에 위치.
유진상가 상류., 홍제천.
그 아래로 유진상가 인근 '서석개다리'는
조선시대 사신이 북행길에 건너던 첫다리.
"홍제천변 홍은사거리는 군사 1명이
1만 적을 감당할만한 천연요새.,협곡."
당나라 장수가 탄복했다는.,백제의 요새.
홍은사거리.
조선시대 홍제천의 물길은
안산 못지 않은 군사 요충지.
남대문 앞에서 서대문 앞까지.,
조선시대 넓고 깊었던.,서호(西湖).
일제강점기 서울역사 준공 전후에 매립.
서울역은 1900년 7월 8일 경부선.,경성역.
1905년 3월 24일 남대문역으로 개칭하였다가
1915년 10월 15일 다시 경성역으로 환원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후, 9월 30일 서울역.,준공.
조선시대 서호(西湖)는 한양 물길의 중심이고
홍제천은 한강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지름길.
하여, 옛 홍제천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성산동, 망원동' 지도 상에는
조선시대 홍제천 물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홍제천은
성산1동 남쪽 및 서쪽 경계와
이 경계를 따라 망원동을 지나
한강까지 난 동네길을 통해 흘렀다.
일제때 '성산'과 '새터산' 사이를 뚫어서
굽은 홍제천을 펴서 하류는 직선이 되었다.
홍제천은 왜 홍제천이라고 불리우는 것일까?
홍제역 인근.,홍제원 옛터
조선시대 홍제원(弘濟院) 곁에 있어.,홍제천.
조선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이 수백명.
환송객들과 구경 인파가 장사진을 쳤던 홍제원.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나 관리가 묶는 숙소.
천변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
세검정 인근 상류는 세검천(洗劍川)이라고도 불린다.
홍지문 & 모래내
모래내 상류.,'세검정 & 세검천'
환향녀가 몸을 씻었던 홍제원 앞 홍제천.
세검정은 조선시대 사초를 씻는 곳이었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이 검을 씻은 곳.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사초를 물에 씻어 흐려 버렸고,
장마가 지면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
세검정 정자 앞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곱게 다듬은 것 같이 여염집 아이들 붓글씨 연습장.
이곳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악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을 넘어가면
그 아래 위치한.,경복궁.
세검정은 한성 북방 인후(목구멍)가 되기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1747년(영조 23) 군사들의 쉼터 정자를 건립.
조선시대, 임진왜란 침입 경로.,홍제천 물길.'
풍수지리 상으로., 안산은 용의 몸통에 해당한다.
안산은 인왕산의 '어머니 산'이라 하여.,모악(母岳).
안산은 사실 상으로 '모악천도론'
한양의 산실이자 조선의 모악(母岳).
무악재로 이어진.,모악(母岳) & 인왕산.
조선왕조 519년간 모악 & 인왕산은
다음 보위 용상에 오를 후보자를 상징.
즉, '왕세자' 또는 '왕재'의 상징이었다.
용마(龍馬)의 말안장 산세.,안산(鞍山).
조선시대 용상은 나라를 다스리는 권좌.
궁궐에서 왕이 앉는 자리가 곧, 용상이다.
창경궁 돈화문
창경궁 정전 용상.
조선시대 한양 궁궐들.
그 일직선 상 뒤에는.,안산.
용상은.,군주가 정사를 펼치는 권좌.
안산은., 왕이 타는 용마(龍馬)를 상징.
안산을 거점으로 설계 시공된 신도시.,한양,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들이 있었던
서해 남해 도서지역 및 해안 봉수대는
안산 봉수대를 중심축으로.,운영되었다.
육지에서는 맹수가 많아 국영말목장 사육이 어렵지만
섬에서는 맹수가 없어 말을 방목하여 사육하기에도 적합.
특히, 강화도 말은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용마(龍馬).
비호(飛虎)처럼 빠른.,용마(龍馬)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였던.,한양
'역대 조선왕이 탄 말'이.,용마(龍馬).
............강화도 진강산 용마.,벌대총...........
강화도 진강산에는 조선시대 한때 국영말목장
1500 여마리의 군마(軍馬)를 사육했던.,말목장 터.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볼모로 간 봉림대군이 훗날 효종.
북벌론자 효종은 청나라를 칠 생각으로
방위 설비를 살피러 자주 강화도에 다녔고
그때마다 강화도 진강산 명마 '벌대총'을 탔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까지 효종을 모셔다 드리고나서
오는 길에 양천에서 벌대총이 졸도 후 3일 만에 죽었다.
그러자, 양천 원님은 왕에게 그 사실을 고심 끝에 알렸다.
"벌대총이 누운 지 사흘이며, 눈감은 지 사흘,
그리고 먹지 않은지 사흘이 되옵니다"라고 보고.
"아!~ 벌대총을 타고 청나라를 치려는
나의 뜻을 하늘이 버리시는구나!" - 효종 -
벌대총이 죽은 것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한 것.
그후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컫는 말이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듯 한다' - 속담.
강화도 진강산의 말은 용맹스럽고 영리한데다
달리는 것이 바람 같고, 온 몸은 흰색인데 비해
갈기와 꼬리는 푸르스름한 색깔이었다고 전한다.
.......................................................................
고려 말에도 말목장이었던.,강화도.
그곳 강음목장은 전국 10대 목장 중 하나.
당시 인천앞바다 섬들 대부분 말목장이었다.
용마 전설이 많은 인천앞바다.,옹진군.
고려 말, 이성계가 탔던.,매음도목장 사자황.
사자황은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할 때 탔던 명마.
조선이 해금정책을 펴기 이전까지는
인천은 해상교통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415년 태종은 강화도 주민 전체를 이주
이주시키고 말목장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후 한양과 인접한 인천앞바다
도서지역은 거의 조선시대 말목장.
왜 도서지역이 국영말목장이 된걸까?
국가비상사태 때 군마 수송이 용이하고
수초가 풍성하여 말 사육에 적당한 때문.
하여, 말목장 흔적이 많은 인천앞바다 섬들.
의정부시.,녹양목장은 1464년 세조 때 폐지.
목장의 폐지 이유는 호랑이의 잦은 습격 때문.
말은 물론이고 목자도 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맹수가 살지않는 섬과 해안가,
말을 양육하는 마장(馬場)으로 사용한 것.
용유도, 무의도, 영흥도, 이작도,
자월도, 승봉도, 사승봉도, 신도,
장봉도, 백령도, 거도, 동봉도. 등.
세종 때 전국 53곳 섬과 해안가
조선시대 초, 국영말목장 터였다.
국방강화와 교통, 통신, 농경 목적으로 말을 사육.
대부분 경기만 일대 도서지역이나 해안에 많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에는53개., 마장(馬場).
병자호란 뒤 북벌을 준비하며 180개 목장을 증설.
1678년 허목 제작 목장지도에는 200여 개의 목장.
일반적으로 목장에는 주로 말을 사육하였지만
경기만 일대에서는 소, 양, 돼지 가축도 함께 사육.
불교종주국 고려왕조는 살생을 죄악시
채식위주 식단이었지만 조선시대 들어와
조선왕조에서는 생선과 육식을 즐겼기 때문.
조선시대 마장은 사복시 소관.
마장 관리를 위해 감목관을 파견.
목장 주변 백성들에게
목부(牧夫)의 역(役)을 부과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국영마장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말이 도망가거나 운송 중 죽으면 벌받거나 변상.
마장 백성들은 신분이 양인이었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하여 차별을 받았다.
일명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다는 말이다.
가렴주구를 일삼는 감목관을 만나면 고역은 가중.
경종3년(1724) 심준의 상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심준은 홍원목장에 감목관을 설치하면서
관리들이 사리사욕을 한 조세를 징수하였고,
목장 안에 염전을 설치해 사리사욕을 취하였다.
조선시대 말 한필은 노비 3명과 맞바꿀 만큼
국가재산으로 관청의 중요 관리 대상이었다.
말의 수요가 많아지자 전국 곳곳에 마장을 설치.
목동, 마장동 등은 말을 키우던 최적지 중 한 곳.
청계천을 끼고,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던 마장동.
서울 마장동의 역사는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동의 말목장 역사는 기록 상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여자의 꿈은.,‘백마’를 탄 왕자님.
남자의 꿈은 왕의 사위 ‘부마’가 되는 것.
부마는 천자가 타는 부거(副車, 예비 수레)를 끄는 말.
그 말을 관리하는 직책을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한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우리나라 역사 상 대표적인 사례.
부마도위는 한무제가 최초로 설치한 관직으로,
2천 석의 봉록을 받으며 황실이나 외척들이 담당.
봉거, 부마, 기의 삼도위는 한무제 원정 2년 초에 설치.
'황제의 사위' 부마(駙馬)는 부마(副馬)를 관장.
천자가 타는 수레에 딸린 말이 곧, '황제의 사위.'
위나라 하안(何晏)이 황제의 사위로 부마도위를 제수
진나라 두예(杜預)가 선제(宣帝) 딸 안륙공주와 결혼하고,
왕제(王濟)가 문제(사마소)의 딸 상산공주(常山公主)와 결혼.
위진(魏晉) 이래로는 황제의 사위가 이 직책을 담당.
그로부터 부마는 실질적인 관직이 아닌.,황제의 사위.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고 황제가 된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부마를 찾아내
도위(都尉)에 봉하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사람들은 그를 ‘부마도위(副馬都尉)’라 불렀는데,
‘부마(副馬)’라는 말이 듣기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
‘부마도위’로 나중에는 ‘도위’도 생략 ‘부마’라 불렀고
이로부터 황제의 사위를 호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1세기 간 원나라 속국이었던 고려 말,
고려 군마는 원의 정복전쟁에 공출되고
충성 충자를 쓴 고려왕은.,원나라 황제의 부마.
조선시대 군마는 '명 & 청' 중원통일에 공출되었다.
기록 상 '고려 말~조선'시대
세계 최대의 군마 생산국이다.
조선시대 팽배했던.,모화사상(慕華思想)
중국 문물을 흠모해 섬기며 따르려는 사상.
'말안장 鞍, 뫼 山'안산(鞍山)은., 모악(母岳).
조선시대 안산 자락에 있었던 모화관은
명나라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영빈관.
오늘날, 독립문 위 독립관이 모화관 옛터.
모악(母岳)은 마치
용(龍)이 한강을 통해
황해(黃海)로 나가는 산세.
조선시대 승하한 왕이 용이 되어
사후에도 국운을 지키는 곳이.,황해.
권좌에서 축출된 왕의 귀양지.,강화도.
안산 용머리는 마포구 합정동 양화도 인근., 용두봉.
가을두,잠두봉,덜머리,잠두령 ,절두산,들머리,용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며 절두산성지가 위치한 곳이다.
조선 대역죄인들이
망나니 칼날에 의해
목이 잘려나간.,절두산.
조선시대 양화도는 오늘날.,여의도.
합정동 양화대교 인근.,'절두산성지'.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한 대표적인 곳.
대원군은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양화진 한강변에서 참수했던.,조선시대 처형장.
조선시대 용상을 범하는 대역 죄인을 참수하던 곳.
'절두산성지'는
한국 천주교 순교 사적지.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 일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략한 후에 물러난.,사건.
함대가 들어올 만큼 수심이 깊었던.,양화진.
조선 개국 초~중기에 한강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수심이 깊어
용산진까지 함대가 왕래하였으리라.
......................................
......................................
안산(鞍山)은 조선 개국 이전까지는
한양에 위치한 하나의 야산에 불과했다.
조선개국 후, 한양의 모산으로 부각된.,안산.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
'어머니의 산'이 된.,모악.
'조선 태조' 이성계.
그의 족적이 많은 곳.
.....................이성계....................
고려 말 대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에
이성계는 새 왕조를 일으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고 과감하게
정치적 판단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연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었고
전장에 나가 패배를 모르는 훌륭한 무장이었던 이성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 전술이 그를 왕으로 만든 바탕.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영흥에서
부 이자춘 & 모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전주(全州) 향리였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동북면 덕원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 터를 잡았다.
이안사는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 살던 이 지역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관리가 되었던 것.
이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 이춘(李春)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 지방관을 역임했던 가문이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총관부에 속한.,원의 천호.
이자춘은 당시 주변 정세 변화를 잘 읽고 있었다.
명나라가 새로 일어섰고 원의 세력은 약해질 무렵에
고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 영토를 회복.
이자춘은 고려를 돕기로 하고
1356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 공격때
내응해 고려가 옛영토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이자춘은 고려로부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되어
(함경도) 동북면을 안정시키는데 공헌.
어릴 때부터 장대한 기골과
총명함을 자랑하던 이성계는
무예와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남보다 갑절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쓰면서도
힘이 좋아 빗나감이 없어 명궁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조력자.
이자춘이 병마사가 된 지 4년 만인
1360년(공민왕 9) 병으로 죽자 뒤를 이어
동북면 세력가로 떠오르게 되었던.,이성계.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데 크게 활약
개혁파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
그후, 모악천도론에 따라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이성계.
............................................................................
신촌 연세대학교(연희궁 터)~봉원사~안산 봉수대.
조선시대 도성 밖 우백호에 해당하는 안산으로부터
용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따라 그곳에 깃든 문화유적들.
오늘날, 용산 지명은 용두봉에서 유래.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기'라 불리웠던.,효창공원.
조선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한.,곳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
왕세자나 왕세손의 태는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가
보위를 이어갈 경우에 태봉을 조성.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효창공원 태봉 터
풍수지리 상으로는,
용의 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태봉 터에 조성한.,효창공원.
조선왕조가 '어머니의 산' 모악(母岳)으로 여긴.,안산.
조선시대 안산(鞍山)의 지명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봉우재.
안산 무악재는 길마(말안장) 형태를 닮아.,길마재
조선시대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여.,모악산(母岳山).
모악(母岳) 자락.,조선왕조 태봉 터.
하륜이 주창한.,모악천도론(母岳天道論).
모악(母岳).,'좌청룡'용산 & '우백호'인왕산.
도읍은 신촌에., 궁궐터는 연희궁을 주창한 것.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정할 때
하륜이 안산의 남쪽을 도읍지로 추천.
조선왕조 519년 역사의 모악(母岳).,안산.
하륜이 제안한.,모악천도론
송도에서 신하들 간 탁상공론.
하여, '책상 案.,뫼 山'.,"안산(案山)".
말안장 산세라 하여 훗날.,안산(鞍山)
태조가 천도를 결심하며 만든.,관청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
태조는 궁궐수보도감(宮闕修補都監)으로 개칭.
조선 개국 때 도읍지로는 여러 곳이 검토되었고
한양천도 결정 후, 궐터 선정에 의견이 분분했다.
광희궁, 연희궁(延禧宮),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곳.
1392년 7월 17일 개경에서 즉위한.,태조.
그해 8월 조정 중신들과 임진강 건너 모악에 도착.
배를 타고 임진나루를 건너 말을 타고 모악에 올랐다.
태조 일행은 모악에서 허허벌판을 내려보며 함께 막영.
모악에 말을 타고 올라 둘러본 후
군막에서 태조 일행은 그날밤에 막영.
오늘날, 서대문구 독립문 위.,독립관 인근.
태조는 조정의 중신들과
함께 막영하며 최종 논의.
하륜이 도읍으로 지목한.,'모악(母岳)천도론'.
안산이 조운선 항로와 가까워 모악천도론을 주창..
권중화, 조준는 "모악이 도읍지로 협소하다." 며 반대.
"모악은 장래에 나라를
도둑질 할 사람이 살 땅."
"나라를 도둑질 할 괴수라면,
지리산이나 구월산에 살아야지."
'나라를 밝게 다스려야 할 군주라면
풍수지리나 도참설에 현혹되기보다는
한양 양지바른 곳을 찾아야 한다.'는.,뜻말.
무력으로 고려 왕권을 찬탈한.,이성계.
서운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앞으로 그 누구인가 찬탈할지 모를.,조선의 왕권.
사실 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때
"모악천도론"이 흠잡을 곳이 없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성하기 힘든 위치.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태조 이성계.
백전노장 태조가 고심 끝에.,던진 한마디.
"도읍 궁궐터는 모악(母岳)으로 정하자."
모악을 주산(主山)으로 한.,마포 도화동 뒷산
모악(母岳)에 궁궐이 들어서면 그 아래 신촌(新村).
서해와 이어지는 한강 물길과 인접한
모악의 입지적 조건을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려 한 것이다.
태조는 고려 말, 명장이던 시절에 이미
자신이 조선을 건국할 야망을 품었기에
남해도 금산에서 개경까지 봉수대를 건설.
한양에 천도할 경우에
안산봉수대를 구상한 것.
왜구 침입을 염두에 둔.,구상.
중신들 - "모악은 지리로 보면.
궁궐터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태조 - "좋지 못하면,
다른 대안을 내놓거나
안된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중신들 - "궁궐 터가 비좁고 비스듬하게 기울어
신도시를 건설할 경우, 배수 시설을 하기 어려워
땅을 네모 반듯하게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이때, '태조 왕사' 무악이 제시한.,인왕산 천도론.
무학대사가 지목한 인왕산 남쪽 자락., 동향 궁궐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향 궁궐터는 없읍니다.
궁궐은 남향이어야 합니다." - 정도전 -
정도전이 이끄는 유림세력이
조선의 통치이념을 유교로 확정
약 10만 불교 고려왕조 세력을 수장.
강화도 거제도에 2년간 집단 수용한 후
살기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며 바다에 수장.
삼척에서도 공양왕과 그의 측근들을 함께 제거.
조선개국 공신 유림세력은
고려왕조 왕씨 척족세력까지
이미 씨앗조차 말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건국한 새나라 조선을
고려 말, 국사였던 무학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선.,정도전 일파.
정도전 일파가 제시한 대안이., 북악산 경복궁 천도론.
태조 이성계는 봉안군 정도전이 제시한 대안에 기울었다.
정도전이 이끄는 유림세력이 조선 개국의 주도세력인 때문.
조선 개국초 통치이념은 유교관.
독실한 불교신자 태조 이성계조차
왕사 무학의 대안을 따를 수 없었다.
무학도 그러한 태조 이성계의
속마음을 알기에 참아야 했다.
하륜도 무학대사와는 이심전심.
다음날 태조는
신하들과 함께
인왕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바라본.,백악
간밤에 정도전이 제안했던
한성 도성의 깃점은.,백악(白岳).
그 남쪽 자락에 경복궁 건축을 결정.
조선건국 초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 개경 기운이 다 되었다는 이유로.,한양 천도.
1398년(정종 원년)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옮겼다.
이때 개경으로 옮겨 간 이유는 한양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골육상잔 참변 탓.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간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 이양.
태종은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의견이 분분
1404년(태종5년) 9월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
이방원 책사가 된.,하륜.
정적 정도전을 제거하고
한양 도읍을 주도해 건설.
이후,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시대 문화, 정치.,중심.
안산 ~인왕산~세종마을 ~ 경복궁.
세종마을은 이방원이 태종 즉위 전에
한양천도를 위해 임시 거주했던 곳이다.
.
훗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
수성동계곡 아래 서촌.,세종마을.
'청계천 상류' 수성동계곡 아래.,세종마을.
서촌은 한양천도 공사를 담당한.,중인 거주지.
오늘날, 중구가 조선시대 중인들의 거주지이다.
조선 개국 초, 서촌에서 시작된.,한양천도.
연희궁은 '경복궁 서쪽' 이궁(離
하륜이 지목한.,오늘날, 무악제 곁 안산(案山) 궁궐터.
안산(案山) 동쪽.,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수경궁터.
낙산(落山)까지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궁궐들.
조선개국 초, "모악(母岳)천도론"이 실감나는.,안산(案山).
한양궁궐을 모두 다 품어안은 모악(母岳).
서울대학교 병원 암센터 5층에서 바라보면
창경궁 홍화문 사이로 멀리 보이는.,모악(母岳).
'모악(母岳)' 오른쪽에 인왕산이 보이고
인왕산 오른쪽에 북악산이.,아래 사진 끝.
조선 태종 재위 당시
한양 도시계획 흔적들.
조선 최초 신도시.,한양.
.......................
.......................
1407년(태종 7) 고려 개경 송도연빈관을 모방.
'안산 자락'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건립하였고
1430년 (세종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
당시 모화관은 명나라 사신 영빈관이었지만
평상시 조선 정예군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했고
조선왕조 대군들 및 종친들이 연회장으로도 사용.
1438년 단오절에 돈의문 밖, 모화관 북쪽
반송정(盤松亭)에서 석척놀이가 벌어졌다.
세종 재위때 양녕대군이 세 아들과 함께 참석.
태종의 서자 익녕군 이치까지 합세해 즐긴 곳.
양녕대군 이제, 익녕군 이치, 순성군 개, 서산군 혜,
원윤 이녹생, 정윤 겸 및 이무생 등이 구경을 하고
혜와 겸 등은 김춘자 등 20여 명이 석척놀이를 하며
대전(大戰)을 벌여 많은 부상자 및 사망자까지 발생.
세종은 석척놀이 참가 종친들을 의금부에 하옥.
그들을 의금부에 며칠 가두었다가 방면할 계획.
하지만, 사건은 확대되어 관원들까지 탄핵의 대상.
세종은 사헌부 상소를 받아들여
의금부와 종부시 관원 대부분 유배.
대간들의 상소는 종친들까지 겨냥했다.
태종의 서자 익녕군 이치는 원평(原平),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는 진천(鎭川),
이겸은 문화(文化)로 추방되었다.
순성군 이개는
양녕대군 맏아들이라
유배를 면하고 방면되었다.
1433년 개축한 모화관 남쪽에는.,서지(西池).
(서대문 밖에서 남대문 밖까지 이르는.,연못)
모화관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독립문 & 모화관
조선 개국 초, 한양천도 후
서지(西池)에 연꽃이 만발하면
'한양의 여심(女心)이 흔들렸다.'는 곳.
서지 연꽃 관람은 도성 여인들의 최대 소망.
조선시대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해
왕족과 친척들이 모여 송별 연회를 베풀던 곳.
모화관 연회 참석은 권세가에게도.,동경의 대상.
태종 재위 때 중국 사신을
왕이 직접 영접했던 모화루.
세종 재위 때부터는.,모화관.
중국 사신이 오면 원접사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를 5곳에 보내어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사신이 모화관에 들면 왕세자가 그 앞에 나가 재배례.
백관도 재배례 후
백관은 반을 나누어
먼저 관(館)에 가서 대기.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모화관 문 밖 길의
왼쪽에 순서대로 늘어섰다가
일시에 재배례를 행하고 전송했다.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중국사신 객관(客館)이.,모화관.
현저동 고개 만 부를 때.,사현(沙峴).
신라시대 창건된 사현사(沙峴寺)에서 유래.
홍제동 '모래내' 이름을 본따.,모래재(사현).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는 고개.
조선 초, '모화관 출입구' 영조문은
병자호란 이후 영은문으로 바뀌었다.
현재, 독립문 앞에 위치한.,영은문 터.
'의주~ 홍제천(모래내)'
의주대로 길목.,'모래재'.
인조 때.,모래내가 회절강.
"회절강에 몸을 씻은
3만5천 환향녀에 대해서는
정절을 논하지 말라." -인조 -
병자호란 이후, 홍제천은
한양 도성의 길목인 .,회절강.
모래내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가문에서 버림받은 후
갈 곳이 없어., 회절강에서 자살.
환향녀는 모두 왕족 사대부 양반
권세가 가문의 신분 높은 여인들이었다.
전쟁배상금 환불조건 인질로 끌려갔던 여인들.
조선이 야만국이라고 여겼던.,청나라.
패전 후,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은.,조선.
양반 여인들은.,1인당 60냥.
왕족 여인들은., 1인당 100냥.
조선은 전쟁배상금을 갚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정절을 잃었기에
환불조건 인질을 포기.
6만5천명이 인질로 끌려간 후
청나라 조선여인방에 집단수용.
그곳에서 2만명 여인들이 숨졌다.
청나라는 조선여인방 관리비가 많이 들고
조선이 전쟁배상금 인질을 찾아가지 않자
4만5천 환향녀를 조선에 돌려보내기로 결정.
조선으로부터 최소한 속전을 받고.,결정.
전쟁배상금 환불조건을 어긴 죄값이 속전.
그러나, 1만명은 조선 귀국을 스스로 포기.
3만5천명 여인들은 이미 정절을 잃고 귀국.
특히, 청나라 사신이 묶었던 홍제원 앞.
홍제천에서 자살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환향녀들이 억울함을 자살로 호소한 곳.
.........................홍제원....................
홍제원은 중국으로 향하는 의주로에 위치
공관이 별도로 마련되었고, 누각도 있었다.
서대문 밖에서 무악재를 넘으면 동편에 위치.
도성과는 가장 가까운 의주로 상에서 첫번째 원.
중국사신을 위한 공관을 따로 지어 유숙하게 했다.
중국사신들이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고 한성안으로 들기 위한 곳.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언제 건물이 없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
1896년(건양 1) 서재필 등이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한 한편
영은문 자리에는 독립문을 세웠다.
영흥문 & 모화관은
청일전쟁 이후 폐지.
조선 중기 모화관 인근 마을이.,모화현.
'모화현 아래 마을'이라고 하여.,현저동.
'모화현 안쪽에 깊숙한 윗마을.,안현(鞍峴)
........................
........................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340m)과 마주한., 안산 정상의 봉수대.
평안도 봉화가 안산에 연결되어 최종 남산으로 연결.
안산 정상 부근에는 큰 바위들이 많고
서울 중구를 관망하는 전망이 뛰어나다.
"관음보살을 닮았다."는 '관음바위'가 유명.
그 아래 환향녀 회절강
모래내가 있던 탓일까?
그 아래 일제강점기에 경성감옥이 있던 탓일까?
아니면, 근래에 서대문형무소가 있었기 때문일까?
조선시대 그 아래 '고태골' 사형장이었기 때문일까?
관음바위는 조선 영조 24년 찬즙대사가
어명을 받들어, 봉원사를 옮기기 위해서
가람 터를 찾던 중 신묘한 샘물을 마신 후
'관음바위'를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는 곳.
그후 봉원사는 ‘새절’로 불리웠으며,
많은 신도들이 봉원사를 찾을 때마다
관음바위를 향해 기도 드렸다고 전한다.
그후, 조선의 폐불정책에 의해
관음바위 인근 '새절'은 사라진듯.
'고려 말 ~조선시대'
공동묘지 터.,"고태골"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남편 잃고 홀로 된 여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서대문구.
조선시대 한양 서쪽에는 감옥과 처형장 등
형벌 및 죽음과 관련된 행정 관청들이 있었고
한양 서쪽에 "고태골"이라는 곳은 처형장이었다.
서대문구 지도가 그 사실을 대변해준다.
'남편의 시신을 등에 업은., 여인의 형상.'
한맺힌 여인들이 '관음바위'를 찾았으리라.
남편은 죽은 후에도.,하늘
과부는 홀로 남았어도.,땅.
서대문구 지도가 흥미롭다.
'조선시대 유교관 때문일까?'
안산에는 27개 약수터가 있어., 등산로가 발달.
옥천약수, 백암약수, 맥천약수, 봉화약수 등 유명.
현재, 서대문 안산은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찾는 곳.
연세대학교 기숙사, 봉원사 등에서도 등반할 수 있고,
주변에 백련산과 인왕산이 있어 함께 등반할 수도 있다.
지하철 무악재역, 독립문역 방향에서도 등반이 가능하다.
안산(鞍山)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산이다.
무악산, 길마재로도 불리며 정상의 이름은 동봉수대.
산 정상에서의 경치는 서울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다.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 고개.,무악재.
안산(鞍山, 296m)과 인왕산(仁王山, 338m) 사이.
의주가도(義州街道)인 국도 1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모아재· 안현·길마재· 무학재·
모래재· 추모현· 사현, 무악산.
등 별칭으로도 불렸던.,무악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말 한마리 겨우 통과할 만큼
비좁은 고개라고 하여.,길마재.
모악제는 말 한필 겨우 통과한 협소한 길목이었다.
도적떼가 '의주 ~ 한양' 상인들을 약탈하던.,모악제.
열 명 이상이 모여야 군인들이 호송해 넘었던.,모아재.
고개길이 험하여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여
수십명이 모여서 넘던 고개라 하여.,모아재.
일제강점기 전철을 놓으며 대로가 된.,무악재.
........조선시대 모아재.,인왕산 호랑이..........
조선시대 개국 초 한양천도를 단행한., 태종 때
'경복궁 담을 뛰어넘어 궐내에 들어온 호랑이가
근정전 근처에서까지 어슬렁거렸다.' - 조선실록 -
.
세조 때 경복궁 뒤 북악산에도 나타난 호랑이.
중종 때는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를 퇴치하려고
왕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호환 몸살을 앓았다.
"호랑이 치고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는 없다" - 속담.
선조 4년 8월에 경기 지방에 호랑이 피해가 극심하자
왕이 군사를 일으켜서 잡으라는 어명을 내릴 정도였다.
영조 때에도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한양 백성들이 매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정조도 한성 주변에 호랑이들이 자주 출몰하자
특별히 그 주변 나무들을 벌목하여 호환을 막았다.
.................................................................
조선시대 '말안장'을 닮았다고 하여.,'길마'재.
말안장 안(鞍) 또는 '속이 깊은 고개' 라.,안산.
'안고개' '속고개' '안재' '안현'으로도 불리었다.
오늘날, 안산과 인왕산 사이 고개길.,무악재.
조선시대 '이괄의 난' 안현전투 격전지.,길마재.
영조 재위 당시에는 '추모현' 이라고 불리운.,고개길.
영조 때 생모 숙빈최씨묘 파주삼릉 나들이 길목이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 생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이곳을 넘나들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여.,'추모현
그후, 여러 차례 고개마루 바위산을 깎아내려
바위가 없고 가파르지 않은 고개길이 된.,무악재.
말 한필 겨우 통과할 바위를 모두 깎아내어.,무악재.
1903년 & 1960년.,무악재.
오늘날, 무악재를 넘다보면,
깍아낸 흔적들 만큼이나 높았던
고개길이자 역사의 굴곡이 많은 곳.
'무악재'의 다양한 옛 지명들은
조선왕조 519년 역사가 남긴 흔적들.
'조선왕조 실록' 그 장구한 역사의 현장.
조선왕조의 명암 가득한 역사의 현장이자
일제강점기 현대사 애환 가득한 역사의 현장.
봉원사,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서대문구청과 산길이 이어져 있고
안산 주변에는 백련산(白蓮山)과 인왕산, 홍제천 등이 있다.
봉원사(奉元寺)는 통일신라 말에 지어진 사찰.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의 총본산으로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신라 말, 승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국사는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것이라 예언.
봉원사 내 독서당은 조선 선비들의 과거공부 장소.
백련산은 은평구와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다.
백련사라는 절이 있고, 정상에 팔각정이 있다.
주변에 명지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명지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서대문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일명 응봉.
응봉 지명은
"조선 왕이 사냥할 때
매를 놓아 꿩을 잡았다."
의미가 담겨있는 지명이다.
즉, 응봉은
왕의 사냥터.
안산은 한양천도 당시 궁궐 후보지 중 하나였다.
하륜이 주창한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 도읍지.
그 궁궐의 후보지 자리에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다.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 풍수지리 상,
남산과 인왕산을 거느린 산세.,모악(母岳).
'좌청룡 남산(용산) & 우백호 인왕산.,산세.
조선왕조의 궁궐은 모두 다
하륜의 모악천도론에 의거하여
'모악~낙산'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서궐.,경복궁,
정궁.,창덕궁
동궐.,창경궁.
하륜이 처음 주창한.,모악천도론.
고려왕조 수도였던 개경(開京)과
가장 유사한 입지 여건.,신촌(新村).
만약, 모악으로 한양 천도를 했다면
안산이 지금의 북악산 역할을 하게 되고
세종대로는 신촌(新村)에 비교 할 수 있다.
이괄의 난 때, 안산(길마재)에서
장만과 임경업이 이끄는 관군이
반란군에게 대승을 거두어 진압.
6.25 당시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직전
노고산, 와우산과 함께 마지막 격전지.,안산.
안산은 조선시대 군사요충지였다.
'동봉수대와 서봉수대'가 있었으며
현재, 안산 정상부는 군부대 주둔지.
군부대 주둔지 내에 위치한
조선시대 안산.,서봉수대 터.
조선시대 안산 동봉수대와 서봉수대 터.
봉수체제가 확립되었던 세종 24년(1438)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1994년 복원.
일출 명소.,안산 동봉수대.
안산 동봉수대는 평안북도 강계에서 시작해
황해도, 경기도 내륙, 고양 해포나루, 무악동봉,
남산 훈도방을 잇는 봉수를 남산에 최종 연락하는 곳.
안산 서봉수대는 서쪽의 고양시 고봉산 봉화에서
남산에 최종 연락하는 제 4거 직봉 노선의 봉수이다
즉, 경기만 옹진군 도서지역 봉수가 집결되는.,서봉수대.
경기만 옹진군 인천앞바다 도서지역은
옛부터 수도권으로 들어오는.,바다 관문.
서봉수대는 서해 항로를 관장하는 요충지.
안산 동봉수대와 서봉수대는
전란 때 국운을 좌우 할 만큼
조선시대 중요한 군사요충지.
조선시대 안산에 설치된 동봉수대와 서봉수대는
항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관련 깊다.
'이괄의 난 격전지'는 길마제 아래 위치한.,안현고개.
조선시대 안현은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길마재 아래 고개.
종로구 안국동 150번지 부근에 있던.,고개.
이괄의 난.
인조 2년(1624) 정월,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일으킨 반란.
이 난을 평정한 계기가 된 그해 2월 11일에 서대문 밖.,안현 전투.
안현전투에서 관군에게 패배 후, 이괄의 난은 사실 상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조선의 허술한 국방력이 드러났기에
조선은 곧 이어 정묘호란을 겪게 되고
그후, 병자호란의 참상까지 겪게 되었다.
하여, '이괄의 난'은
역사적으로 재조명하여
돌이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붕당정치는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
이들은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광해군을 지지파 정인홍,·이이첨 등 중심.,대북정권.
왕권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타붕당을 무시.
소북계의 지지를 받았던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던 것.
이에 서인 사림세력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 이귀·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 행동.
이괄은 이를 비난해
인조반정 성공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 공서파(功西派)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인조반정 공신들은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 적발.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
이어 후금의 성장으로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 장만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하여 사실 상 축출된 것.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여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도 공서파들은 문초하려 한 것.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하자 이괄은 위기를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하여 1월 22일 항왜병 13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상원-평산-개성'으로 진격.
이괄군은 황주신교에서
정충신과 남이흥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
마탄(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 후 개성으로 진격.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
경복궁 터에 주둔하여 선조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
관원을 배치하여 새 행정체제를 세웠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안현에서 진을 치고 고지에서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
2월 11일 이괄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광희문)을 나와
광주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와해.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인조의 몽진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로 국가 위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의 야욕을 자극하여
후금이 조선을 침공한 정묘호란 명분을 제공.
안현(鞍峴)은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길마재(무악재) 아래 있었다.
안산과 인왕산 사이 고개마루.,무악재.
조선시대 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
안산 봉수대는 각각 동서 두 봉우리에 설치.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조정에 알려주는
마지막 전령 역할을 했던 안산봉수대는 전략적 요충지.
국가 위기상황을 조기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봉수대.
이괄의 난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봉수를 지키는 봉수군만 포획하면 얼마든지
거짓, 허위 정보를 후방에 보낼 수 있었기 때문.
이런 단점은 병자호란 때도 드러났다.
이괄의 난 이후 조선의 민심은 흉흉했다.
인조가 피난 갈 때 한강에서
배 한 척 구할 수 없었을 만큼
민심은 인조 정권에 상당히 부정적.
인조가 환도한 후에도
반군에게 붙은 도당들을
신고하라고 하자, 백성 가운데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여 '반란군 머리'라고
보고하고는 상을 받는 자들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이괄의 군대가 조선 군대 중에서
가장 최정예 평안도 북방군이었으나,
관군 측, 정충신의 안현진지가 견고했고
높은 곳에 위치해 이괄은 안현전투에서 패배.
이괄 반란군은 질풍처럼 쳐 내려와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인조는 이때부터 도성을
세 번이나 버리고 도망 간 왕.( 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MBC 드라마 '화정'에
등장하는 인물이.,이괄.
............................
............................
이괄은 선조 때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역임한 인물로서
광해군 14년(1622)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 직전
광해군을 폐위시키기 위한 ‘인조반정(仁祖反正)’ 밀모에 가담.
이듬해 거사 당일에는 홍제원에서 회군하였을 때
대장으로 뽑히기도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인조반정 성공 정사공신(靖社功臣) 등급을 정할 때
함께 행동했던 김자점, 심기원(沈器遠) 등은 1등공신.
이괄은 처음부터 가담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야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2등공신.
훈련대장 이수일은 내응의 공으로 공조판서.
이괄은 그보다 못한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임명.
인조반정 공신 논공행상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의 아들 '전'도 반정에 참가하였으나 논공에서 제외.
이괄의 아우 수(邃)도
조정에 등용하지 못한 점은
이괄의 불만을 더 크게 하였다.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
외지 부임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통설.
이러한 해석은
당시 북방정세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당시,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받을지 모를.,정세.
북방 경비는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던 시기.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이괄의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
이괄은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
군사조련, 성책보수, 진(鎭) 강화 등 직책에 충실했다.
인조반정 공신들은 반대세력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인조반정 공신 간에 세력다툼 피해자.
1624년 1월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
기자헌· 현집·이시언(李時言)이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 임이 밝혀진 이후
조사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했으나,
영변 군중(軍中)에 머물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려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내자 일어난 이괄의 난.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으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 베고 반란.
이괄의 난은 사전계획에 의한 반란이 아니라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이괄의 난은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반란.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 반란에 가담시켰다.
군사작전에 능한 한명련은 이괄과 함께 반란군을 지휘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한 곳은 황주 신교(薪橋).
관군을 대파 후, 선봉장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遯)을 능지처참.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 측은
그 소재조차 확인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 건너 샛길로 진군.
마탄(예성강 상류)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던 관군을
기습 공격 붕괴시킬만큼 파죽지세.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공주로 피난하였다.
한강을 건너, 광주, 수원을 거쳐 공주로.,피난.
2월 11일 이괄군은 한성 입성, 경복궁 터에 주둔.
.
지방 반란군의 한성 점령은
조선 역사 상 처음 있었던 일.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은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무렵 도원수 장만 군사와 관군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안산 길마재에 포진.
이괄은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 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광희문)으로 나가 삼전도 거쳐 광주(廣州)로 도주.
광희문은 중구 신당동 을지로 7가.,신당동 떡복기 골목 인근.
.......................광희문(수구문)...................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일명 수구문.
청계천 수구가 거리상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한남동' 언덕에 따로 있어 수구문.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도성 내 장례행렬이 통과하는 동쪽 문.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
숙종 때도 성문터와 군영위치 확인이 어려울 정도였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 중건 착수.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 병자호란(1636)때에는
인조가 이 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해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했다.
...................................................................................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은 목이 잘렸다.
이괄 수급이 공주 행재(行在)에 이른뒤 인조는 22일 환도.
인조는 환도한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 정충신· 남이흥 등 32인을 진무공신으로 포상.
난의 수습했으나 집권층· 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
이때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이괄의 난은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했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 아들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후금에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된 것.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났던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
안현전투.
..............
"안산전투" 또는 "길마재전투"라고도.,한다.
이괄의 군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한양에 남아있던
하급 관리들은 관복을 차려 입고 밖에 나와 영접했다.
한양 일부 주민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뿌려.,이괄의 군을 환영.
이괄은 인조와 함께 피난갔다가
먼저 한양으로 돌아왔던 흥안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니, 두 조선왕이 양립.
인조 & '선조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괄은 자신이 옹립한 새 왕인 흥안군의
이름으로 한양 인근 고을에 선전관을 파견했다.
한양 인근의 고을들은 크게 혼란에 빠졌으며,
때마침 인조가 보낸 선전관도 한양 고을에 도착.
인조는 공주로 피난 중에도
어명을 내린 인사 결과였다.
"한양은 역적에게 넘어갔다.
한양에서 오는 선전관은 모두 목을 베어라!'
인조는 있는 힘을 다해 충청도 경계로 들어갔으며,
이때 충청병사 이완(이순신 장군 조카)이 인조를 맞이.
'전하께오서 역적 무리의 화를 당하셔 이리 고초를 겪으시니
... 신들은 죽기 살기로 전하를 지킬 것이옵니다.'
인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근왕병을 소집하게 하였으며,
한양 '장만' 진영에서는 이괄을 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만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 군사' 1만 군사들을 소집했다.
작전계획 수립을 위해
군사회의를 주도한.,장만
"지금 당장 계책으로는 2가지 방안이 있다.
한양 백성들이 모두 역적을 따르지 않았을 것인데,
하루 이틀 더 지체하면 한양 백성들이 역적 무리에 붙을 것.
그렇게 되면 한양을 공격하는게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하여, 바로 한양으로 진군해 대적하는 것이 첫째 계책."
"그 다음 계책은 한양을 포위.
반란군의 보급로를 끊어 놓고
전라도 경상도 군사가 도착 후
함께 협공하는 것이.,둘째 계책."
대장 장만 앞에 나아가
소신을 피력하는.,정충신.
"우리들이 힘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지금 역적이 한양을 침범하고, 전하는 파천했으니
우리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지만, 지금 형세가 급하니,
지켜볼 것이 아니라 한양에서 한번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신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신이 먼저 나아가 안산에 진을 치겠습니다."
관군이 안산을 먼저 점령하여 진을 세우면,
이괄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안산은
정상에 오르면 한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요충지.
관군에게는 한양 견제를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위치는 없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남이홍은 즉각 정충신의 의견에 동조
여러 장수들 역시 정충신의 의견에 일치 단결했다.
정충신은 무사 20명을 선발, 한양 인근 봉화대를 기습.
이로써 봉화대가 무력화되었고,
이괄의 통신망은 사실 상 꺼진 것.
정충신은 안산 고개길에 진지를 구축
이희건의 정예 조총 부대를 배치하였다.
........................정충신......................
북방 여진족을 경계하고 방비할 것을 주장,
지략과 덕을 갖춘 명장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했고,
몸집이 작았으나 기상이 늠름했으며 청렴한 덕장.
이항복과의 인연, 임진왜란 때 활약과
여진족을 다루는 영웅담 등이 전해온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권율 밑에서 종군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에 갔다가
이항복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닦아 그해
겨울 무과에 합격후,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
................................................................
정충신은 안산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
한양을 압박해가고 있었으며, 관군의 병력도
계속 증강되었기에 그 위용이 예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괄군 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괄의 휘하에 한명련이 있었다.
.................한명련.........................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남에서 왜적과 싸운 명장.
1594년에 경상 우도의 별장에 제수되어
각지의 진지를 보수, 군대를 훈련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 지휘 아래 충청도 방어사와 힘을 합쳐
공주에서 적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을때 왕이 보낸
내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으며, 양 가죽을 상으로 받았다.
이후 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왜적과 싸울 때 선봉장으로 출정.
정유재란이 모두 종결된 후 관직에 나갔다.
1624년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고 잡혀가던 중
이괄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한때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
이괄군에는 여러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북방군, 항왜 & 정예군사 조총병들이 있었으며,
편곤을 휘두르며, 돌격하는 정예기병 700명이 있었다.
'쇠도리께' 편곤 & 정예 기병 700명.
이괄군이 자랑하는 천하무적 정예기병.
2월 11일, 드디어 해가 뜨고 새 아침이 밝았다.
관군과 이괄의 일대 격전의 날이 온 것.
한편, 인조도 이괄의 항왜병이 위력적이라
이괄의 항왜병에 대항하기 위해 부산포 왜관에
밀집하여 살고 있던 일본인 1,000여 명을 동원했다.
2월 11일 아침, 장만의 군대가 기습적으로
요충지 안현을 점령한 것을 보고.,이괄은 당황.
안산 봉수대가 이미 관군 점령당했음을 뒤늦게 간파.
이괄이 한양 도성을 중요하게 여겨
경복궁 터에 진을 치고있는 이틀 동안에
그사이 관군은 안산봉수대 통신시설을 점령.
동봉수대로부터는., 이괄의 북방군과 통신두절.
서봉수대로부터는.,관군의 동태 및 정보파악 단절.
뒤늦게 이괄군이 한성에 고립된 사실을 간파했던 것.
이괄은 분명 큰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양에 오래 머물수록 이괄에게 전적으로 불리.
관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포위하면 어떻게될까?
이괄은 안산의 관군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전투를 시급히 속행하기로 결단.
"정충신이 선봉에 있고, 장만은 후방에 있다!
우리가 일부 병력과 항왜병을 이끌고 창의문에서
연서로 우회하여 나가면 관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원수가 잡히면
관군이 전의를 상실
단번에 승리할 수 있다."
이때 한명련이 나서서
이괄에게 계책을 말한다.
.
"안현 고개 위 관군은 이미 파악했습니다.
백성들을 몰아내어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온 힘을 다해 우리가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니,
백성의 민심을 가라앉혀 우리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괄 이 전군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을 무찌른 후에 아침밥을 먹자."
연이은 승전과 한양 점령으로
이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듯,
자신만만하게 전투 준비를 했다.
한양 백성들은 아침밥을 먹다가 성벽 위로 줄줄이 올라갔다.
곧 돈의문에서 남산까지 성벽 위로 한양 백성들로 가득찼으며,
이러한 싸움 구경은 한양 백성들에게 즐거운 볼거리였던 것이다.
한양 백성들은 전투를 구경하면서 아예
놋그릇과 꽹과리를 치며 흥을 돋우었다.
"이거 싸움구경 매우 재밌겠구나!
나는 이괄이 이긴다에 돈을 걸겠소!"
"나는 관군이 이긴다에 돈을 걸겠소! 껄껄..."
.
한명련은 즉각 선봉군을 이끌고 출진했고
이괄 역시 뒤이어 출정해 안현 주위를 포위.
그러나, 관군 정충신은 험한 요지 및
높은 곳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했기에,
이괄은 돌격보다는 사격전을 명령했다.
곧, 쌍방이 조총과 활로 사격전.
뒤이어 항왜병과 조총병을 앞세워
정충신 진영으로 일제히 발포하였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화약의 연기 때문에
구름이 생길 정도였다.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들은 계속해서
높은 고갯길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사격.
산 아래서 위로 진군하는 이괄군 형세가 불리.
더군다나 새벽이 지나, 아침 해가 뜨자
바람의 방향이 동풍에서 서풍으로 바뀌어
이괄군에게는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관군이 진을 친 안현 고지 위에서
고지 아래 이괄군을 향해 부는 바람.
해가 뜨면, 무악재 바람 방향이 바뀐다는 사실을
진을 치면서,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명장 정충신.
이미 '고추가루 전투 작전'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관군이 바람에 실어 마구 뿌려댄.,꼬추가루.
이괄군의 고지 탈환공격 시도에 불리하게 작용.
꼬추가루 때문에 활을 쏘기도 조총사격에도 불리.
말 한필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비좁은.,무악재
'쇠도리께' 편곤으로 무장한 이괄군 기병 700명.
이괄군의 천하무적 정예기병들도 무용지물이었다.
이괄은 전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군을 안현 산길로 올려보내 총공격.
위험을 무릎쓰고 무리한 속전속결을 감행.
한명련은 직접 앞장서서 돌진했으며,
위에서 정충신 군대는 조총과 활로 필사 방어.
마침내 이괄군은 탄환을 뚫고 정충신 진영에 도착.
이괄은 항왜병을 일선에 앞세워 관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에서는 이괄 군사들이 유리했고,
관군 장수 김경운이 항왜병 총탄에 맞아 전사.
관군이 2선까지 후퇴하자 이괄은 계속 몰아쳤다.
이괄군은 관군 장수 이희건 진지까지 접근하였다.
그때였다.
이희건은 좁은 길목에
포수들을 5열로 정렬하고
그 뒤에 궁수들을 배치했다.
"역적 무리가 멀리 있거든 활을 쏘고,
10보 가까이 오거든 그때 조총을 쏴라!"
이괄군이 이희건의 본대로 공격해 올라가자,
이희건 진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고추가루 바람 공격과 함께 화살과 조총 공격.
진퇴양란 이괄군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속출,
그럼에도 이괄군 장수 이양은 말을 타고 돌진했다.
한명련도 화살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지휘 돌격했다.
하여, 관군 이희건 진영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한 포수가 적이 10보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도 발포.
이희건은 즉각 칼을 뽑아 군기를 어긴 포수 목을 베었다.
하여, 군기가 다시 세워졌으며,
이괄군이 10보 앞으로 다가오면
이희건 조총 부대가 쉴새 없이 발포.
이희건 조총부대는 1열이 총을 쏘고 뒤로 빠지며,
2열이 그때 앞으로 나와 번갈아 계속하여 사격했다.
이괄군 장수 이양은
조총에 맞아 전사했으며,
한명련은 화살에 맞아 큰 부상.
한명련은 긴급히 후송되었고,
이를 보고있던, 남이홍이 외쳤다.
"이괄이 패했다! 한명련이 죽었다!!!"
이괄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정충신은 이괄군을 향해 전군을 돌진.
이괄은 많은 지휘관이 전사해.,후퇴 명령.
그때 정충신의 부하 장수였던
유효걸 기병대는 이괄군을 추격.
이괄군 후미를 급습해 타격을 주었다.
이때, 정충신 본대도 이괄군을 추격하기 시작.
한편 성벽 위에서 전투를 구경하던 한양 백성들은
이괄이 패하고 쫓기는 것을 보고 이괄의 패배를 확신.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안현전투를 끝을 내겠다."
"도성 백성들은 모두 구경하라."
이괄의 호언장담과 전세가 달라지자 .
싸움 구경하던 한양 백성들의 민심은
이괄군 편에서.,관군 편으로 돌아섰다.
곧, 관군이 입성하리라 판단하였고
한양 백성들은 즉각 성문을 지키고있던
이괄군을 살해하고 돈의문과 서소문을 잠궜다.
앞에는 성문이 잠겨져 있고,
뒤에는 관군이 추격하니 이괄군은
앞뒤로 도망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이괄과 한명련은 간신히 잔여 부대를 수습
문이 활짝 열려있던 남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괄의 주력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살아남은 이괄의 병사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이괄 휘하에는 고작 천여명의 병사가 남았다.
그런데, 아침밥도 먹지 못한
이괄군에게 허기를 채울 만한.,
군량미조차 이미 모두 사라진 것
한양 백성들이 소란 중 쌀을 털어가자,
이괄군 병사들이 한끼니 식량조차 없었다.
이에 분노한 이괄군은 한양 백성들 목을 참수.
한양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괄은 도저히 한양에 주둔할 수 없다고 판단
밤 11시 경에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왔다.
이괄을 추격했던 장만은
드디어, 한양에 입성하였고,
한양 이괄 잔당 색출에 나섰다.
이괄에게 협력했던 한양 백성들이나,
민가에 숨은 이괄 패잔병들은 모두 참수.
이괄은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으며,
광주목사 임회는 이괄군 출몰을 즉각 보고.
이괄은 임회의 목을 베고 계속 북쪽으로 도망쳤다.
유효걸은 27 기병으로 이괄 뒤를 추격
이괄은 묵방리 부근에서 휴식을 취했다.
피곤에 곯아 떨어져 깊은 잠에 빠진.,이괄
이괄이 잠든 틈을 타서
부하 이수백과 기익헌은
딴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
이수백 "지금 우리의 처지가 좋지 않소.
차라리 이괄을 죽여 목숨이라도 보장합시다."
기익헌 "그리 합시다."
이수백과 기익헌은
진영에 불을 질러 혼란한 틈에
부하 40명을 이끌고 이괄의 거처를 포위.
이어 이수백과 기익헌은
칼 한 자루를 들고 들어가
이괄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이것이 이괄의 난.,최후였다.
이어 이괄의 동생이었던 이수, 아들 이전, 한명련,
조카 한섬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인조에 달려갔다.
이괄이 옹립한 왕 흥안군은 경기도 광주로 숨었다.
그러나 광주부사가 이를 고발하였고,
흥안군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고갔다.
남도도원수 심기원 "이제(흥안군)가 이미 임금을 사칭했으니,
그가 왕족이라도 누구든지 잡아 죽일 수 있다.선조의 10번째 아들.
잠시나마 왕의 자리에 있었던 흥안군은 교수형에 처해 죽게 되었다.
이수백과 기익헌이 이괄의 목을 가지고 투항.
인조는 난의 평정을 알리며 안도감을 내쉬었다.
"역적이 감히
천하를 어지럽혀
일이 이렇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 백성이 고통을 받았도다.
이제 지혜로운 장수와 용맹한 병사의 분투로
난이 평정되었으니, 이를 종묘와 신주에 고한다."
이괄의 난은 끝났지만, 한동안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괄의 잔당 색출 작업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으며,
죄없는 사람이 죽는 비극적 일도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괄의 난 때 항왜병의 선전으로 인해,
인조는 조선 내 항왜 공동체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10년이 흘른 1634년 3월 13일.
한양에 살인 사건이 벌어져 떠들썩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죽이고 머리를 벤 것.
가해자들은 이중로 아들 2명과 박영신 아들 3명.
피해자는 이괄을 죽이고 투항했던.,이수백.
"전하! 저희 아비는
지난날 역적 이괄과 싸우다
죽은 충신이옵니다."
국가에서는 특별히 이수백을 용서하였으나,
흉악한 자의 목숨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신들은 뼈가 저리고 가슴이 아파했습니다.
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씻고자
함부로 살인하였으니,
그 죄는 면치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들의 죄를 엄히 다스려
지하에 가서 부친을 만나게 해주소서!"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에
아비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죄를 가볍게 해주었다.
인조는 이들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기익헌은 유배지에서 병으로.,사망.
한양 백성들이 성벽에서 싸움 구경 후
'장만 장군은 볼만이요, 이괄은 꽹괄이로세.'
노래 가사를 지어 한동안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이괄의 난' 진압에 활약했던., 관군
그 무장 대부분 정묘, 병자호란 때 전사.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
정묘효약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기하고
군신관계를 강요하며 군사3만과 곡물을 요구.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군사 12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한.,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철기군 14명이
조선군 480명을 사살할 만큼
세계 최강 전투력을 보유했다.
인조는 1만3천 군사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진을 친지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항복하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불모로 보냈다.
척화론자 홍익한 오달재 윤집 등도 불모.
이때 청군이 철수하며 끌고 간.,조선 여인들.
전쟁배상금 환불조건의 인질로 잡혀간 6만5천명.
천민 상민 기생은 단 한명도 데려가지 않고
조선의.,왕족 귀족 사대부 신분 만 데려갔다.
환전가격은 양반집 여인 60냥, 왕족 여인 100냥
조선에서 환전가격을 내고
다시 데려간 여인은.,고작 27명.
이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버린 것.
그당시 청나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여인방' 집단수용소에서 관리.
조선에서 1년이 넘도록 찾아가지 않자
수용소 관리비만 들자 조선여인방을 폐쇄.
조선여인방 4만5천명 중에서
3만5천명은 귀국을 원해 보냈고
1만명은 귀국을 포기해 청에 남았다.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3만5천명 환향녀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대부분 이혼을 당했다.
강화도에서 청군에게 끌려간 영의정 '장유' 며느리.
당시 환향녀라는 이유로 이혼청구 소송은
인조의 명에 의해 국법으로 허용되지 않았지만
시부모님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가문에서.,축출.
인조는 가문에서 축출된 환향녀들을
첩실로라도 구제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구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양반 신분의 환향녀들을
천민 신분과 혼인시킬 수는 없는 일.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때 3만5천 환향녀 대부분
조선사회에서 배격 후 천시로
자살하거나 굶어죽거나 병사했다.
이로 인해, 인조는
사대부 양반 가문은 물론
만백성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그리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도서지역에 거주.
후학을 양성한 선비들도 많았지만
왕족 권세가 사대부 가문들도 많았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임진왜란 & 정유재란.
이때 서해와 남해 도서지역에 피난민도 많았지만
인조 재위때 정묘호란, 병자호란 피난민도 많았다.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폐허화된.,도서지역.
선조 재위 때 임진왜란 7년전쟁과 인조 재위 때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에 입도인 흔적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인천앞바다.,승봉도(일명 신황도)
370년 전에 병자호란 때 '신씨와 황씨' 가문이
피난 도중에 풍랑 속에서 입도해 정착한 섬이다.
신황도 그 후손들이 소유했던 덕적군도.,선갑도.
덕을 쌓은 사람들 만 입도할 수 있었다는.,덕적도.
경기만 옹진군 도서지역에 피난 입도인 흔적이 많다.
대부도 영흥도
영종도 강화도
교동도 장봉도 등.
그후, 조선후기 월미도 행궁은 '영종진' 관할.
1653년(효종 4년)부터 18세기 전반까지.,유지.
구한 말, 개화기였던 고종 재위 때 폐쇄되었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8도 봉수대' 정보통신의 중심은
남산봉수대가 아닌 안산봉수대였을듯.
조선왕조가 외세에 눌려
자주국방력을 잃은 시기에
남산봉수대가 정보통신 중심.
구파발, 북한산성 행궁,
조선왕조 궁궐 인근.,안산.
안산봉수대가 사실 상으로
조선시대 정보통신 중심 아닐까?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사실 상, 좌우하였던.,안산.
역사는 현장 교육이 중요하다.
안산봉수대는
역사 상, 재조명 할
필요가 있는 곳 아닐까?
현재, 남산봉수대는
전통문화 공연장으로서
'관광 자원화' 하고 있지만
안산봉수대는 소외되어 아쉽다.
.......
항왜.
.......
...........................항왜.........................................
임진왜란 때 조선 및 명나라에 투항한 일본군.,항왜(降倭).
조선인이면서 일본에 투항하거나 협력한 친일파.,순왜(順倭)
항왜는 임진왜란때 조선군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괄의 난에 가담하고,
거꾸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는 청군을 막는데 활약하기도 했다.
1593년 이후부터 투항 일본군이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 조정은 항왜들을 살해.
1594년부터 항왜 중요성을 깨닫고 받아들였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진왜란때 약 1만 일본군이 탈영해 항왜가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영에 목책을 설치하라 지시.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수까지 합친다면
항왜의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원은 임진왜란 직후, 항왜들의 정착지.
임진왜란 때 공로가 많았던 항왜를 광해군이
전쟁 과부들과 결혼시켜 조선에 거주하게 한 것.
항왜는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고향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
전투력이 막강했던 항왜들을 조선에 정착시켜
조선의 전투력과 국방력을 강화하는 역활을 맡겼다.
임진왜란 전쟁 발발 1년 만에
조선에 귀순한 항왜들의 도움으로
조선군이 조총과 화포를 만들어 무장.
조선군에게 조총과 화포 사용법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교관들도.,항왜.
...............................................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북방을 지키던 항왜 130여명이 반란군에 합세.
항왜 서아지는 이괄의 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당시, 항왜들은 나이가 대부분 40/50대
조선 군인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항왜 서아지는 평양에서 조선군 조교로 근무.
이괄은 서아지에게 향도로소 책무를 맡겼다.
최정예 평안도 병력 반란군은 한양을 점령 후,
안산전투에서 '이괄의 난' 반란군은 와해되었다.
안산 고지에 진지를 구축한.,정부군.
4시간 전투 끝에 평안도 반란군 와해.
이괄의 명에 의해 선봉에 섰던 항왜들은
격렬한 안산 전투에서 대부분이 전사했고
이괄은 경기도 광주에서 부하들에게 죽었다.
생존한 60여 항왜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살던 사야가 김충선이
경상도 거주 항왜들 중 100명을 끌어모아
왜관으로 가는 탈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서아지 항왜 부대는
사야가 김충선 부대와 조우.
서아지 : 우리는 고향 일본으로 가려 한다.
더 이상 피를 보고싶지 않다. 길을 열어 달라.
김충선 : 죽는 것은 쉬우나 길 터주는 것은 어렵다.
서아지 :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탁한다.
김충선 : 난 조선인이다.
서아지가 거느린 항왜 60여명은
조총을 쏘며, 칼을 휘두르며 돌격.
그러나, 김충선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서아지 항왜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서아지가 배에 총탄을 맞고 앉아 있다가
"가야 해"하며 웃옷을 벗어 배에 동여맸다.
그리고, 칼 두자루를 잡아,
땅에 박으며 일어선.,서아지.
김충선이 이끄는 항왜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 후, 칼로 목을 베었다.
서아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서아지와 다른 항왜들의 토지
항왜 식솔들을 김충선에게 재산과 노비로 주었지만,
김충선은 노비를 받지 않고 재물은 군사력 증강에 보탰다.
항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순한.,일본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숨은 주역.,항왜.
그 이후에도 조선의 군사력 증강에 공로가 컸다.
조선시대 본격 항왜가 등장한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경 부터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북 전국시대 평정.
심정적으로는 굴복하지 않은 다이묘들이 많았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결정한 이유에는
잔존 반대세력 해체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품은 반대세력.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오자마자 조선에 항복한 것.
도요도비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전역이 합병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 일본의 각 번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독립된 통치체제를 갖추고 서로 피흘리며 싸웠던 것.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에 뛰어난 무예 실력과
화포기술을 전수해 조선군 역량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질이 드센 항왜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중국으로 보내거나 변방 수비에 동원.
항왜 김충선은 그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조선인으로 귀화했다.
그는 1592년 귀화한 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큰공을 세워
‘삼난공신(三亂功臣)’으로까지 불리웠다.
...........................
...........................
한때 한양까지 점령했던 이괄의 난 반란군.
안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괄이 죽음을 당하자
항왜 서아지는 밀양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때 항왜 김충선은 수하를 이끌고 밀양까지 추격해 사살.
그런데, 인조가 서아지로부터 빼앗은 집과 토지를 하사하자
김충선은 그 토지를 반납하여 군대에서 둔전으로 사용하게 했다.
1627년 4월 23일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자
김충선은 산행포수 17명, 항왜 자식 25명을
어영청으로 데려와 함께 정묘호란에 참전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왕명을 기다리지 않고 서울로 달려갔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경상좌우병사를 도와 청군과 교전.
김충선은 항왜 150여명과 함께 선봉에 서서 청군을 크게 격파.
이어진 전투에서 그의 부장이었던
항왜 김계충, 김계수, 김성인, 김귀성 등이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었지만 김성인은 전사했다.
그런데,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가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간.,김충선.
그뒤에도 김충선은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다
은퇴 후, 우록동에 안주한 뒤
1642년(인조 20년) 9월 30일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여여문(呂汝文), 김충선, 김성인,
요질기(要叱其), 염지(念之), 사고여무(沙古汝武),
첨지(僉知), 평구로(平仇老), 산여문(山如文), 노고여문,
기오질기, 오카모도 에치고, 마고토키로, 노부토키로 등.,항왜.
여여문(呂汝文)은 본래 여가 아닌.,요요문(要汝文).
조선왕조실록에 시마즈 요시히로을 심안돈오(沈安頓吾).
일본 성명을 한국 음역으로 풀어 한자로 적은 한국식 표기법.
시마즈 요시히로 한자 성명은 도진의홍(島津義弘).
심씨가 아니지만, 한국식 표기법에 의하여 심(沈)씨.
마고토키로(孫時老)는 손씨로 표기,
노부토키로(延時老)는 연씨로 표기.
일본인들은 관직이 바뀔 때
조상 관직이나 이름에서 성을 따서
마고, 노부 같은 성을 취하기도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가등청정(加藤淸正).
우리나라 가씨와는 한자가 다른 성씨이다.
가토(加藤) 성은 고구려 유민들이 산다는
코마 지역에서 나온 성으로, 코마 같은 성.
오카모도 에치고(岡本越後)는 강본월후
우리나라에서 전혀 쓰이지 않는 강씨이다.
일본인은 단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야가, 사여모 또한 복성.
유사한 성씨가 백제 토착 세력이었던
사택(砂宅), 사택(沙宅), 사타(沙吒), 사문(沙門)
전(田)은 순왜의 성씨이다.
일본 전(田)씨는 항왜 성씨.
국(鞠)씨는 경우 일본 복성 기쿠치(鞠智)와 같다.
순왜 국(鞠)씨는 일본인 출신 가능성도 높은 순왜.
또한 국씨는 백제유민 토착 백제계 성씨에 존재한다.
백제토착 상(象)씨는 상(尙)씨로 고치면서 사라졌다.
일본의 복성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전(田), 국(鞠)씨.
이문욱, 손문욱은 성이 두가지.
본래 한국인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본인 출신이라면 항왜에 속한다.
조선 건국 초부터 투항 왜인, ‘항왜(降倭)’는 존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때 항왜에게 벼슬을 내렸고,
세종 재위 때에는 항왜를 동원해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시니 유키나가를
선봉장으로 하는 20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공.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함락하고 북상 개시.
이때 가토의 휘하로 참전한 무장 사야가(沙也可)는
종군 7일 만에 3천 조총부대를 이끌고 경상좌영에 항복.
투항 직후부터 조선군의 일원이 되어
어제의 전우 왜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왜군은 상주전투와 충주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5월 초순 한양을 점령하고 6월에는 평양성에 입성.
7월부터 조선 의병들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흔들리고
때맞춰 명 원군이 참전하며 행보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때 사야가는 후방에 남아있던 왜군들을 공격
이후 조명연합군의 평양 탈환에 이은 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왜군이 쫓겨 남하해 명과 강화협상.
사야가는 조선군의 전력 향상을 목적으로 항왜
김계수와 김계충 등을 조선 각도와 진에 파견하여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보급하여, 조선 전력을 강화.
선조는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에 따라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 하여 김해김씨 '충선(忠善)’ 이름을 하사.
김충선에게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까지 내렸다.
이는 당시 귀순한 항왜 중에서 매우 파격적인 대접.
1600년(선조 33년) 7년전란이 종식되자 왜군과 명군이 철수.
조선 병사들도 귀향길에 올랐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던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한 다음 달성군 우록동에 정착한다
.
조선에 평화가 도래하자 위정자들은 항왜 처리 문제로 고심
무예가 뛰어나고 기질이 남다른 항왜를 통제하기 힘들기 때문.
결국 조정은 김응서 휘하 항왜를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
귀화 항왜들은 북방은 기존 생활 근거지가 다른 데다
혹한과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을 것이라며 선처를 호소.
이에 따라 울산의 항왜는 경상 병사가,
밀양의 항왜는 경상 방어사가 관리하면서
순차적으로 북방에 이주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
조정의 항왜 분리정책을 직시한 김충선은
1603년(선조 36년) 북방 근무를 자원하였다.
조정에 반발하여 화를 입느니 자진하여
변방에 복무해 충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
그때부터 김충선은 삭풍이 몰아치는 변방에서
동료 항왜들과 고락을 함께 하다가 10년이 지난
1613년(광해군 5년)에야 갑옷을 벗을 수 있었다.
선조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정2품 정헌대부 교지 & 어필 하사.
‘자원잉방기심가희(自願仍防其心可喜)’
‘자청하여 국방에 나섰으니
그 마음이 실로 가상하다.’ -선조 -
항왜 사야가(沙也可).,김충선.
1597년(선조 30년) 11월 27일,
선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권율 장군이 경상남도 운봉전투에서
김응서와 양연 등의 전공을 아뢰는 글.
이때 사야가는 김응서 휘하 부대의
정3품 상위 당상관인 첨지(僉知)였다.
여기에 검첨지 사고여무와 동지 요질기,
병사 손시로·연시로· 염지 등 항왜장 이름들.
사야가보다 사고여무와 요질기의 품계가 높다.
그들이 사야가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데리고 투항.
또는 그들의 무공이 사야가를 능가한 때문으로 추측된다.
첨지는 자헌대부보다 한 단계 낮은 품계이기 때문에
1593년에 자헌대부를 제수 받았다는 사실도 윤색된듯.
전란이 장기화되며 조선조정은 항왜를 주특기 별로 활용.
이순신 난중일기에도 화약제조, 사격이 뛰어난
왜병을 생포하여 군대에 편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충선 '모하당문집'에는 조선 장수들로부터
조총 기술자를 보내달라는 편지 글이 실려 있다.
이순신도 그를 통해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을 입수했고,
김충선이 보낸 항왜 김계수를 통해 조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제조.
김충선의 이런 활동으로 조선군은 전투력이 대폭 향상되었을 것이다.
김충선 위패를 보관하고 있는
대구 달성군 우록리.,녹동서원
본래 우록이라는 지명은 ‘우미산(牛尾山) 아래
소 굴레 모양 마을’이라 하여 ‘우륵(牛勒)’으로 표기.
김충선이 정착하면서 ‘사슴과 벗하는 마을’.,‘우록(友鹿)’
김충선은 1615년부터 4남1녀를 얻었다.
경원, 경신, 우상, 계인, 경인 등.,4남 1녀.
맏아들 경원이 7남 4녀,
둘째 아들 경신이 5남 2녀
등 30여 명의 자손을 얻었다.
그렇듯 가문이 번성하고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항왜 멍에를 진 그는 충절과 효도를 권장하는 가훈을 통해
후손들이 행여 엇나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고 향약을 제정.
마을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배려했다.
실로 그는 격동하던 역사의 현장 속에서 빚어지는
민족과 국가, 개인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숱한 난관을 포용과 인내로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
김충선과 사성 김해 김씨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1만 명 이상을 헤아렸던
항왜 가운데 오늘날까지 일본이라는 근원을 간직.
현재 일본 와카야마 현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 경내에
일본인들이 세운 김충선 장군의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그의 존재는 시시때때로 불화를 빚는 한일 양국 간
'우호와 화합'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남부 지역은
패망 백제유민의 후손들 거주지역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 우호적이다.
그러므로, 대일 외교관계에서
우호적인 남부지역 일본인까지
항일감정으로 대할 필요는 없을듯.
항왜는 사실 상으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흑백논리' 항일감정은
국익에 도움되지 않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