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문소리
문소리는, 객관적으로, 예쁜 여배우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나는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화려한 외모에만 있는 것은 아니. 문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 여배우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퀴즈, 문소리는 본명일까? 본명이다. 그렇다면 문소리는, 창문소리 방문소리의 그 문소리라는 뜻일까? 아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너무 못생겨서 그녀의 아버지는 산부인과에 아이가 바뀐 것 아니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3살 이후 쌍꺼풀이 생기고 살이 빠지면서 요즘과 같은 모습이 생겼다. 어릴 때 몸이 너무 작아서, 아버지 성씨인 문씨 집안과 어머니 성씨인 이씨 집안 사이에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버지는 문과 이 사이에 작을 소자를 넣어서 문소리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문소리는 지금 한국 여배우 중 가장 커다란 거목으로 성장했다. 문소리가 한국 영화에 등장한 것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년)이 처음이었다. 주인공 김영호 (설경구 분)의 첫사랑 윤순임 역으로 등장해서, 5.18 광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차출되는 김영호를 면회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선 후,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건 때문에 차갑게 변해버린 남자 친구의 변화에 상처 입은 순임은, 결혼한 후 지병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첫사랑을 보고 싶어 한다. 순임의 남편 손에 이끌려 병실을 찾은 김영호를 순임은 바라볼 수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는 김영호가 사라진 후 한 방울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문소리는 미지의 배우였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몇 편의 연극무대에 선 것이 전부였던 그녀는 [박하사탕] 오디션을 통과하고 갑자기 한국 영화에 나타나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오아시스](2002년)에서 뇌성마비 지체장애인 1급의 한공주 역을 맡아서 온몸이 꽈리처럼 뒤틀린 신들린 연기로 깊은 감동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로 문소리는 베니스 영화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문소리가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4년)에 캐스팅 되었을 때 충무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창동 감독 없는 문소리의 홀로서기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문소리는 옆집 고등학생(봉태규 분)을 유혹하는 변호사 영작(황정민 분)의 부인 은호정 역을 맡아 올 누드의 연기까지 과감하게 펼쳤고, 결국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문소리는 [효자동 이발사]에서 이발사(송강호 분)의 부인 역으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는 중소 도시의 뭇 남자들을 유혹하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여교수 역으로, [사랑해 말순씨]에서는 중동으로 돈 벌러 간 남편을 대신해서 다섯 살 된 딸과 중학교 1학년 생 아들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말순씨 역으로, [가족의 탄생]에서는 미라 역으로 데뷔한지 10년이 안되어서 한국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연기파 여배우로 자리매김하였다.
[문소리는 천의 얼굴을 가진 동시에 얼굴이 없는 배우다]
[가족의 탄생]에서 문소리와 공연한 배우 고두심이 문소리에 대해 말한 이 문장은 문소리 연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집약하고 있다. 그녀는 특정한 캐릭터로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천변만화하는 변신술의 귀재다. 어떤 역이든지 자신을 벗어던지고 들어가 완벽하게 주어진 캐릭터를 육화해낸다.
[입금되면 다 해요] 한때 인구에 회자되었던 문소리의 이 발언은, 어떻게 들쑥날쑥한 체중변화가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지, 극단적인 연기 변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한 질문에, 문소리의 솔직한 답변이었지만, 입금된다고 아무나 쉽게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발언에서 우리는 그녀의 철저한 프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살아오면서 험난하고 큰 산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산을 넘고 나면 다음에 어떤 산을 만나든지 넘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찍으면서 그런 생각이 자만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함께 넘을 수 있는, 나를 밀어주고 끌어 주고 함께 울면서 같이 갈 수 있는 친구와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넘은 산은 어느 산보다 험난했지만, 산행은 세상에서 최고로 즐거웠던 순간들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자대표 핸드볼팀을 소재로 한 임순례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이다. 한국 여자 핸드볼 팀은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 두 차례의 연장전까지 동점을 기록하다가 마지막 승부던지기에 져서 은메달을 땄다. 심판의 오심과 편파적인 판정에도 굴하지 않고 세계 최강의 장신 군단 덴마크를 상대로 투혼을 불사른 한국 여자 핸드볼팀은 전국민을 감동시켰다. 금메달보다 더 값진 은메달이라는 수식어도 따랐다. 하지만 그런 환호와 격려만으로 영화적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영화다.
임순례 감독은 핸드볼 팀의 주역이었던 선수들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스포츠가 아니라 땀 냄새 나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흔한 스포츠 경기 소재의 영화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동선은 국가 대표 핸드볼 팀의 아테네 결승전을 향해 선형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첫 부분은 소속팀이 해체된 후 마트에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국가대표 12년 경력의 미숙(문소리 분)의 삶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된다.
미숙은 운동하다 만나 결혼한 남편(박원상 분)이 사업하다 빚을 지고 도망자 신세가 된 후, 여섯 살 된 아들과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선수 시절 미숙의 라이벌이었던 혜경(김정은 분)은 일본 프로팀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대표팀 감독 대행을 맡아 귀국한다. 노장 선수들이 은퇴한 후 최약체가 된 팀의 전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예전의 핵심 멤버를 불러들여야겠고 판단한 혜경은, 미숙을 비롯해서 한 번도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응어리를 안고 은퇴한 정란(김지영 분) 등을 국가대표로 발탁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을 향해 달려가는 수직적 구조 아래서, 감독 대행인 혜경과 한때 그의 동료였던 노장 선수들, 그리고 거기에 반발하는 후배 선수들간의 갈등과 불화가 전반부에 펼쳐진다. 팀 내의 불화에 책임을 물어 감독 대행직에서 해고된 혜경, 그리고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선수 출신의 안승필(엄태웅 분)과 노장 선수들 사이의 갈등은 후반부 갈등의 핵심이다. 또 수평적으로는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던 미숙이 우승 사례금을 미리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가 그 돈이 감독 대행인 혜경이 사비로 마련했다는 것을 알고 팀을 이탈하는 것이나, 혜경과 한때 연인 사이였던 신임 감독 안승필과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서 기 싸움을 펼치는 내용이 수직적 구조 사이로 전개되면서 수평적 균형을 이룬다.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의 결승전이 궁금하다면 당시의 TV 방송을 다시 시청하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결승전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데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임순례 감독은 잘 알고 있다. 긴박감 넘치는 경기 장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승부처다. 그러기 위해서 임순례 감독은 도입부에서부터 선수들 개개인의 문제를 시시콜콜 끄집어낸다. 남편의 빚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미숙, 성숙한 기량을 갖추었지만 한 번도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고 은퇴한 후 남편과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정란, 감독 대행에서 해고된 후 옛 연인이 감독으로 부임한 팀에서 자존심을 접고 다시 선수로 뛰는 혜경, 골키퍼 수희(조은지 분) 등의 캐릭터가 손에 잡힐 듯 살아나기 때문에, 후반부의 땀 냄새나는 인간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혼 당하기 싫어서 펑펑 울며 술주정 했다.]
장준환 감독과 결혼 1년차를 갓 넘긴 문소리는 핸드볼 선수가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합숙훈련을 해야만 했는데, 같이 출연한 배우 김지영이 그렇게 가정에 소홀하다간 이혼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쌓여 있던 문소리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 뒤 집에 들어가서 장준환 감독에게 매달리며 이혼당하기 싫다고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코치님이 나를 보더니, 나 이혼 안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라고 했다]
문소리보다 4년 연상인 장준환 감독을 결혼 후에도 감독님이라고 부르다가 호칭을 바꿔달라는 장 감독의 주문에, 코치님으로 바꿨다. 데뷔 초의 정형화 된 연기를 벗어난 신선함에서, 이제는 캐릭터의 내면에 다다른 깊은 연기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문소리. 소리 없이 그녀는 한국 여배우의 대들보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