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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씁니다.. 영국과 프랑스편의 후유증?이 커서 이제서야 3편을 쓰게되는군요 --;
스페인의 국가國歌인 'Marcha Real(국왕의 행진)'입니다. 스페인의 독특한 정열적 기상을 보여주는 국가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열이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특이하게도 이 곡은 '가사'가 없으며 때문에 수십년동안 가사를 붙여야한다,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있습니다. 또한 작곡가도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비공식 가사는 불려지고 있습니다.)
※ 이 영상 말고도 좀더 좋은 음질과 더 웅장한 느낌이 나는 Marcha Real 도 맨 마지막에 첨부했습니다. 다운받아서 들어보세요.
스페인왕국의 국기와 국가문장.
강렬한 빨강과 노랑색의 완벽한 조화와 화려한 국가문장이 달린 스페인의 국기. 이베리아 반도의 기후와 강렬한 태양에서 비롯한 그들의 정열을 보여준다.
이 스페인국기에 쓰인 국가문장엔 통일될 당시 스페인 각지의 유력한 왕국들의 문장이 담겨있는데, 가운데 푸른바탕에 백합이 그려져있는 문장은 과거 프랑스의 왕실이었던 '부르봉왕가'를 뜻하며 (현 스페인의 왕가)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그리고 맨 밑 조그만 꽃잎형상은 '그라나다 왕국'을 형상화한 것이다.
스페인 국토의 모습
대항해시대를 통하여 유럽최초로 거대한 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스페인. 또한 멈출줄 모르는 개척정신과 그들만의 특유한 모험정신을 바탕으로 찬란한 해양대국을 건설한 나라. 근대의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에스파냐라는 자부심으로 오늘날에도 문화대국으로 약진하고있는 스페인을 살펴본다.
초기初期 (이슬람 지배이후 대항해시대부터, 16~17세기)
에스파니아, 즉 스페인은 1492년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최후의 세력인 '그라나다'왕국을 멸망시킬때까지 이슬람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때문에 수백년간 이어져온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종결이 스페인역사의 궁극적인 출발점이 된다 할 수 있으며 이 국토회복운동이 끝나는 1492년이 본격적인 스페인역사라고 부를수 있을것이다. 그 뒤 국토를 회복한 스페인인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각지의 수많은 식민지를 세우고 황금시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이제 막 신생국가로 출발한 스페인이 어떻게해서 세계최강국의 자리에 올랐는지, 또 어떤 과정을 겪고 현대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볼것이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신대륙개척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잔존세력을 물리치고 이베리아반도내의 기독교국가에 의한 안정화를 이룩한뒤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른바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로 불리는 정예 개척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왕실과 국민적인 후원에 힘입어 기존에 진출해있던 포르투갈세력과 충돌, 때로는 협력과 회유를 통해 세력을 넓히거나 다른 유럽인들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나갔다.
이 시기 세계는 혼란스럽고 암울했던 중세를 벗어나 비롯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탐욕에 의한 해외개척정신이 막 타오르던 시기였다. 당시 스페인은 분열되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스페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있는 카스티야,카탈루냐(아라곤)간의 갈등과 수많은 지방도시들의 난립, 남부의 이슬람세력의 잔존으로 인해 사회전체가 전란에 휘말려있는 시끄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1469년 아라곤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가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왕국'을 성립한 후 스페인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열되어 있던 소국,도시국가들이 신생 스페인왕국으로 속속 흡수통일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국내안정이 어느정도 궤도위에 오르자 본격적인 탐험활동 지원등을 통해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 포르투갈과의 토르데시야스조약체결(세계분할)을 통한 유럽내에서 강력한 제국으로의 위세를 떨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강대국으로서의 위세는 몇백년이나 더지난 16세기~17세기에야 비로소 그 영광을 떨치게 되는것이고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당시의 스페인은 유럽에 지방국가에 불과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으론 통일을 이룩했으나 '에스파냐인'으로서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채 분열되어 있었으며 중세시대때의 관습과 폐단(마녀사냥,유능한 상인이자 기술자였던 무어인,유대인 추방등)등이 남아있던 낙후된 신생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 스페인은 무엇보다 내부적인 사회통합이 시급했으며 통일된 나라로서 지방의 국민들에게 스페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입시키는것이 급선무였다.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땅을 회복하였지만, 국토회복운동이 끝난 뒤에도 지방에는 각자의 세력을 확보한채 통일 스페인으로 귀속을 거부한 나라들이 종종 있었고 때문에 무력으로서라도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나바라,아스투리아스(Asturias),레온같은 소국들은 카스티야-아라곤연합에 의한 강력한 질서아래 스페인 왕국에 편입되었고 초기 스페인의 역사는 이처럼 강제적으로 통일을 이룩한 사례들이 많기때문에 오늘날 심각한 지방분리주의와 사회분열의 뿌리가 되고있다.
<통일왕국 스페인왕국을 건설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까스티야의 이사벨 1세>
중기中期 『본격적인 대외팽창과 세계 최초의 해양대제국 성립』
스페인 왕국은 기독교세력인 카스티야지방과 까탈루냐(아라곤왕국)지방이 합병되어 설립한 신생 왕국이었다. 그들은 나바라왕국,레온왕국등 국가발전에 걸림돌이 되던 중소왕국들을 차례로 합병한 후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통일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크게 달랐던 이베리아의 각 주민들을 임시로 꿰메논 상징적 통일에 불과했으며 완벽한 정신적,사회적 통합은 아니었다.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 각 지역 고유의 특색이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있다.
그리고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차지하는데, 1492년에 스페인의 국가적 영웅이 된 '콜럼버스'가 신대륙(아메리카)발견에 성공하여 훗날 스페인이 대제국으로 성장하는데 믿거름이 되었고, 또한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여 명실상부한 스페인 통일을 이룩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의 안정을 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스페인왕국은 아직 갈길이 멀었다. 호시탐탐 스페인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프랑스가 스페인의 안정에 해가되고 있었고 바로옆 조그만 소국에 불과한 '포르투갈왕국'이 유럽 최초로 먼 대양으로가는 길을 개척해 식민지를 개척해 전 유럽에 부러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비해 소국에 불과했던 포르투갈이 눈부신 성장과 새로운 세계의 막대한 부(향료,후추)를 실고오자 이 조그만 왕국의 성공이 부러웠던 스페인 왕국도 당시 실질적 통치자였던 '이사벨 1세'가 직접 나서서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을 (당시엔 인도라고 생각했다.) 축하하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 그들도 이제 해양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힘과 동시에 스페인왕국도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는 당시 유럽대륙의 다른 지역보다 해양기술이 무척 발전되어 있었는데, 그 기술의 결정체가 바로 '카락'과 '캐러벨'로 대표되는 우월한 성능의 선박개발이다. 중세 유럽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의 항해술은 지중해와 대륙과 접한 대서양 인근밖에 항해할수없는 다소 낙후된 선박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포르투갈에서 발전된 선박기술로 인한 카락과 캐러벨의 발명으로 포르투갈이 해외 개척에 성공하자 그 기술을 탐낸 스페인이 몰래 빼돌려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자극을 받은 스페인인들이 이 선박들을 개량해 더 좋은 성능의 배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베리안 갤리온'과 '스패니쉬 갤리온'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고도의 해양기술 발전은 스페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동력 중 하나이다.
스페인은 통일 이후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 뛰어들게 된다. 이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성공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후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을 꿈꾸는 자들과 탐욕스런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차원에서 대규모 이주와 개척등을 통한 식민지 확보에 주력을 기울였으며 동시에 유럽대륙 곳곳에 자신들의 입지를 확대하게 되는데 이는 스페인의 왕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 '카를1세'는 통일 스페인 왕국의 최초의 군주라 할수있는 인물인데, 이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의 모든 영지와 권한을 물려받아 스페인이 별로 힘든 싸움 한번 치르지 않고 유럽대륙에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결정적인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이 카를 1세는 스페인에서만 지칭하는 호칭이며 역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왕을 언급할때는 '카를 5세'로 불린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다.)
<당시 스페인이 다스리게 된 유럽내 영지를 표시한 지도, 스페인의 이 유럽내 영지들은 카를 1세가 거의 80% 기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부터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물려받은 것이다.
네덜란드,나폴리,사르데냐,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이 속해있다.>
또한 스페인은 유럽안으로는 합스부르크왕가로부터 물려받게 된 광대한 영토와 더불어, 앞선 선박기술을 앞세운 덕에 수많은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는데, 유명한 정복자 '코르테스(Hernán Cortés)'와 '피사로(Francisco Pizarro y González)'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잉카제국와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켜 남아메리카 일대의 강력한 적수를 섬멸시킨뒤 스페인인의 영지로 만들어버렸으며 원주민에 대한 잔혹한 탄압,학살과 카톨릭포교등을 통해 중남미 일대를 완전 식민지와 하게되어 스페인을 대제국으로 이끄는데 뒷바침을 하게 된다.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부터 막대한 금과 은을 비롯한 각종 자원을 마구잡이로 수탈해오는데 그 과정에서 혹독한 노역을 짊어진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흑인노예들의 희생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이후 '백인'들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전염병(천연두)전파로 인해 남아메리카와 중미 일대의 수천만의 원주민들이 죽었으며
카리브 일대의 원주민들은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스페인인들은 국내에서 수십년동안 전쟁으로 겪은 호전성과 이슬람인들로부터 확보한 앞선 무기(화약,대포,총)등을 중남미 일대에서 마구잡이로 풀어내 원주민들을 쓸어버렸으며 이들로 인해 현재 중남미의 인디오들은 아주 험난하고 외딴 곳이 아니면 거의 찾아볼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재화와 보물을 정신없이 본국으로 수탈해오던 스페인인들은 그 과정에서 스페인의 막대한 부를 탐내던 영국과 프랑스와의 무력충돌이 빈번해지자, 결국 골칫거리였던 이들 국적소속의 해적(또는 사략)들을 소탕하기위해, 또 막대한 스페인제국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자 신대륙수송단의 호송함대로 유명한 '무적함대(Armada)'를 탄생시키게 된다.
<16~17세기 스페인 제국의 통치 지역. 빨간색이 스페인의 식민지고 분홍색이 유럽내 스페인영지다. 멀리 아시아의 필리핀도 보인다. 파란색은 후에 스페인에 병합되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와 영토.>
이처럼 원조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당시 스페인과 아메리카와의 무역액수는 전세계의 무역액수를 합친것과 맞먹었으며 한때 '스페인이 움직이면 세계(유럽)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구체제와 기존 강대국에 도전하는 신흥 세력이 있기마련, 연이은 식민지 독립운동진압에 의한 국력소모와 네덜란드의 독립, 영국의 성장과 도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내산업의 대 퇴보(외국무역상인 추방과 금,은의 국외유출)로 인해 점차 원조 '해가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은 그 수명이 다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기나긴 정체기를 맞게되며 유럽대륙에서 낙후된 3류 국가로 주저앉게 되기까지하는 수모를 겪게된다.
'여기서부터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합니다.'
통일스페인을 건국한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1세가 퇴위하자 독일(오스트리아 포함)을 제외한 스페인의 전영토를 펠리페 2세(1556~98 재위)가 계승함으로써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즉위와 동시에 관료조직을 완비하고 해이한 국가질서의 수립에 정진하는 한편,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를 국가의 행정기관으로 개편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스페인 침투 방지에 주력했다.
1580년 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성취했다. 그결과 브라질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소유해 스페인의 주도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무역의 기초가 되는 모직물이 네덜란드산·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되어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와 징세를 강화했으나 이는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했으며,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한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했다. 1588년 펠리페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파견한 ' 무적함대'의 참패는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상승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아들 펠리페 3세(1598~1621 재위) 때는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국내적으로는 30만 명의 이슬람교도 추방으로 중산층의 재정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결국 스페인 경제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다.
펠리페 3세의 맏아들 펠리페 4세(1621~65 재위) 치하에서 스페인의 쇠퇴는 더 한층 두드러졌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1665~1700 재위) 때는 파멸적이었던 물가앙등도 다소 진정되었고, 중상주의 정책의 채택으로 경제도 느리게나마 회복되어갔다.
1479년~ 1588년 무적함대 패배 까지의 스페인사史 연표.
15세기
1479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여 에스파냐 왕국이 성립.
1492년 에스파냐 왕국이 그라나다를 함락하여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 멸망. (스페인 통일)
16세기
1503년 나폴리 왕국을 획득.
1516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이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
1519년 카를로스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카를 5세)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아즈텍 문명이 멸망.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잉카 문명이 멸망.
1538년 오스만 제국과 벌인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
1556년 펠리페 2세 즉위(~1598년) (스페인 쇠퇴의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 군주. 식민지에 대한 무차별 탄압이 대표적)
1561년 톨네도에서 마드리드로 천도
1568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 발발(~1648년) 이후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
1571년 기독교 연합 함대에 참여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격파.
1580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가 단절되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함. (포르투갈 합병)
1585년 영국-스페인 전쟁 발발.(~1604년)
1588년 무적함대(아르마다)가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에 대패. (무적함대의 패배로 스페인이 곧바로 쇠퇴하지는 않았으나 유럽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결정적 출발점이 됨)
근대와 현대, 찬란한 영화뒤 수백년의 정체와 스페인역사 최대의 수난, 스페인 내전과 현대의 부흥
이제 스페인은 수세기 동안 역사의 찬란한 주인공에서 서서히 몰락해 내려오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왕위계승전쟁과 땅에떨어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얻을것 없는 수많은 전쟁, 식민지 대륙에서 기껏 수송해온 자원들이 국외 유출로 국내 경제가 크게 위축되고 있었고 왕실의 사치와 실정으로 인해 스페인 내부의 모든 분야가 황폐화되고 몰락해가고 있던 시기였다. 더욱이 스페인에서만 자라 국외 사정에 극히 어두웠던 펠리페 2세를 비롯한 수많은 군주들이 급변해가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아둔한 결정으로 인한 국정문란으로 인해 스페인왕국 자체도 유럽내에서 그 지위를 서서히 잃어가던 시기였다.
전세계에 흩어진 식민지로부터 수많은 황금과 보화를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선 굶어죽는 사람이 천지였으며 그에 비해 극도로 화려한 왕궁의 건축비용과 왕족,귀족들의 사치로 인한 재정문란은 결국 스페인 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결정적 역활을 하였다. 또한 외국과의 수많은 전쟁에 휘말리면서 막대한 국가예산이 낭비되었으며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전쟁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국가위신만 크게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으로서 외부적으로도 스페인은 수많은 내우외환에 시달려야했다.
한편 스페인이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리게 된 원인을 초래한 부르봉왕가의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전대 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에 의해 스페인의 왕위계승자로 지목된 상태였다. 결국 이같은 이유로 인해 스페인의 왕은 합스부르크가문에서 부르봉왕가로 그 계승권이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런 이유가 위에도 언급했듯 이런 아무런 소득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된 까닭이었다.
한때 유럽전역에 영지를 갖고 있어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스페인은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이탈리아에 보유하고 있던 영지 전부를 상실하고 영국에 '지브롤터' 마저 할양해주고 마는등 '네덜란드'상실 이후 끈임없는 영토축소와 쇠퇴를 반복하게 된다. 그나마 중남미에 있던 식민지들이 아직 스페인 본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600~1750년대 까지의 스페인史 연표. 아래에서 보이듯이 왕위를 둘러싼 끈임없는 전란이 스페인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원인이었다.
17세기
1618년 30년 전쟁 발발(~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알짜배기땅도 잃어버렸다.)
164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독립. (포르투갈이 보유하고 있던 인도식민지와 아프리카식민지도 전부상실.)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 ('스페인의 금고'라 불리던 네덜란드지방이 독립하면서 스페인 재정에 큰 타격을 입힘.)
1659년 30년 전쟁의 여파로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하는 피레네 조약을 체결. 스페인 황금 시대가 종결 됨.
1700년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즉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영국이 크게 반발.
18세기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발발(~1714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체결. 앙주 공작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공식 승인됨. 스페인 부르봉 왕조 성립. (스페인의 지배왕가가 '합스부르크'에서 '부르봉'왕가로 넘어가게 된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1748년)
1756년 7년 전쟁 발발(~1763년)
내란의 연속과 스페인제국을 뒷받침하던 식민지들의 이탈
18세기 스페인을 크게 쇠퇴시켰던 왕위계승과 관련된 전쟁이 이제 막 끝난 무렵, 스페인은 국가적인 재정비를 꾀한다.
수십,수백년의 걸친 전쟁으로 스페인본국은 큰 피해를 입었을지 몰라도 스페인은 여전히 중남미에 엄청난 식민지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이들은 본국의 전쟁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막대한 영향력과 부를 점차 회복시켜나가는데 그 기간은 상당기간 이어져 오히려 스페인이 전보다 더 강력한 무적함대를 창설하는등 어느정도 효과를 보게된다.
그러나 이같은 부흥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 다시한번 쇠퇴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의 간섭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한뒤 평소 막대한 식민지에 군침을 흘렸던 스페인에 가톨릭교 보호라는 명목으로 침략했다.
<프랑스군에 처형당하는
프랑스가 나폴레옹을 앞세워 스페인에 간섭하자 전 스페인 주민들이 대항하여 강력한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그들은 무능한 정부군을 대신하여 스페인 각지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퇴위시킨 후 망명해있던 페르난도7세가 귀국하여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귀국후 돌아온 '페르난도7세'는 무능했을 뿐 아니라 당시 시대 흐름이었던 '입헌군주제'요구를 무시하고 전제왕권을 휘두르다가 군부의 강한 압박으로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브리태니커 인용'
그러나 이같은 변화도 잠시, 3년만에 입헌군주제를 철폐하겠다고 발표한 페르난도7세가 국내를 비롯한 스페인의 각 식민지에 대해 강력한 억압정책을 실시하자 분노한 식민지인들이 각지에서 스페인 본국군과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시기가 바로 중남미 국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독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도 중남미국가들 대부분의 국가國歌엔 '폭군','억압자를 몰아내자','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같은 거친 가사들이 많다. 이것은 이 시기 혼란한 스페인 국내사정 때문에 식민지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페르난도7세가 국외 식민지들이 조금만 독립 움직임을 보여도 무자비한 탄압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페르난도 7세가 죽은 뒤 온건자유파는 그의 딸 이사벨의 계승을, 보수파는 그의 동생 카를로스의 계승을 주장했으나 결국 이사벨 2세가 집권했다. 카를로스파는 1833~40, 1872~76년에 걸쳐 내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사벨 2세는 35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6개의 헌법을 공포하고, 41번이나 내각을 개편했으며, 15번의 군사반란을 겪었다. 1848년의 유럽 혁명 후 스페인에 많은 자유주의 사조가 들어왔다. 그결과 1868년 프림 장군이 주도한 혁명으로 이사벨 2세는 축출되고, 1870년 11월 이탈리아 왕의 차남 아마데오 1세가 입헌군주로 영입되어 2년간 통치했다. 1873년 2월에는 아마데오가 퇴위하고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각지방의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11개월 동안 공화국체제는 4명의 대통령을 맞이했으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874년 1월에 세라노 장군이 통치권을 장악하여 북부의 무정부주의적인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부의 끈임없는 정치개입과 있다른 중남미 식민지들의 독립선포로 스페인은 점차 쇠퇴했으며 과거의 대제국으로써의 면모도 이미 오래전 빛이 바랜상태였다. 이후 18~19세기는 연속적인 군부의 쿠테타와 잦은 국왕, 총리와 같은 실권자들의 실각으로 스페인은 유럽의 변두리, 후진국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1874년 캄포스 장군의 쿠테타로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를 새 국왕으로 추대해 자신이 옹립한 국왕에 압력을 가한후 입헌군주제를 통과시킨뒤 자신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 뒤 에스파냐-미국전쟁으로 쿠바와 필리핀등의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은 전전긍긍하다 모로코,적도기니,서사하라등 새로운 식민지를 차지해 과거 대제국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 집권층의 지지도가 급락하여 정부의 존속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대대적인 모로코,서사하라 식민지화, 적도기니의 식민지화로 잠시 부흥과 안정기를 맞이하였으나 모로코에서의 원주민들과의 마찰이 잇따르면서 점차 반反식민지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때 모로코의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리베라 장군(José Antonio Primo de Rivera)이 국내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스페인에 입성, 인기를 바탕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한뒤 스페인 제 1공화국을 전복시키고 자신이 제 2공화국 제 1대 총리로 취임하여 사실상 독재를 펼치게 된다.
이후 1920년대 전세계적인 대공황에 스페인이 휘말리게 되면서 국내 여론의 급격한 반 독재주의여론이 형성되자 이를 탄압하고자 무자비한 진압을 펼치던 제 2공화국은 결국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스페인 내전의 혼란기
이처럼 20세기들어 과거 제국으로서의 번영했던 스페인은 몰락해버리고 수많은 전쟁과 내전,쿠테타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 민주적인 정권의 독재가 계속되자 스페인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한다.
특히 1936년 극도의 혼란기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하면서 그 혼란은 극을 달리게 되는데 이때의 사회부패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국가의 토지와 부가 일부 고위층 (로마 카톨릭)에 거의 종속되다 시피한 상황이었다.
이같은 혼란에 결국 사회평등을 제창하는 '인민전선'이라는 급진 무장세력이 등장, 스페인 정부를 장악하여 훗날 스페인 내전을 야기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고 이에 당시 기득권층이자 군부의 요직에 있었던 '프랑코 장군(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이라는 인물이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스페인내전(1936~1939)이다. 결국 인민전선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한 프랑코는 곧장 총통에 취임, 유럽의 마지막 독재를 시작한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그러나 프랑코가 일으킨 '스페인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은 또다시 수십여년정도 후퇴했으며 프랑코가 독재를 할때 펼친 지방차별,억압정책으로 인해 바르셀로나시민들을 비롯한 '까탈루냐인','바스크인'등 지방 민족들의 중앙정부(까스티야)에 대한 적대감정이 극대화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만다.
또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국토전역은 사실상 잿더미가 되었고 스페인 인들에게 씻을수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독재로 인한 국제적 고립으로 인한 손해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스페인의 경제는 1960년대에서야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프랑코 사후死後 민주화와 경제성장
프랑코가 죽고난뒤 그의 예언에 따라 현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Alfonso Víctor María de Borbón)가 프랑코의 유언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귀국, 왕정을 복고시켰다. 그러나 그는 프랑코가 자신이 죽은후 스페인을 전제군주국으로 통치하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1975년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 스페인을 입헌 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프랑코를 지지하던 휘하 장군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국회를 점거하고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잡은뒤 국왕 후안 카를로스1세에게 프랑코의 유언대로 따르던지, 아니면 프랑코시대처럼 군부의 정계장악을 눈감아 줄것인지를 요구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국왕 카를로스1세는 쿠데타세력의 요구를 단호히 묵살, 끝까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서 쿠데타 세력의 와해를 이끌어냈다. 또한 쿠데타세력에게 대국민담화문 발표 형식으로 당장 쿠테타를 중지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뜻밖의 국왕의 결단력과 끈질긴 배짱에 놀란 군부는 국민들의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고 더군다나 왕에 대한 권위를 거스를수 없어 결국 쿠테타를 철회,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에 스페인 국민들은 국왕의 용기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국왕은 국왕대로 스페인의 민주화를 계속 추진함과 동시에 의회에 권력을 양도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현재의 안정되고 번영한 스페인이 탄생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국왕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날로 높아져 현재 스페인 국민들은 지역,이념에 관계없이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세계 많은 입헌군주국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현재 스페인은 또한 세계에서 프랑스와 더불어 가장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문화*관광 대국이 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10위권 안에드는 경제규모와 2만5천불이 넘는 높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1800년~현재까지의 스페인史 연표.
19세기
1803년 나폴레옹 전쟁 발발
1807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참가
1808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호세 1세로 즉위. 카탈루냐가 프랑스 제국의 직할지가 됨.
1810년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반란이 발생.
1814년 호세 1세가 퇴위하고 부르봉 왕조의 페르난도 7세가 즉위.
1868년 스페인 9월 혁명 발생.
1873년 스페인 제 1 공화국 성립
1874년 왕정복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빼앗김.
20세기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1930년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리베라 독재 정권 붕괴.
1931년 무혈 혁명이 성공하여 국왕 알폰소 13세가 퇴위하게 되었으며 제 2 공화정이 성립.
1936년 선거에서 좌파가 압승하여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던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각지에서 우파에 의한 반란이 발발. 스페인 내전 시작.
1937년 게르니카 폭격 사건 발생.
1939년 프랑코 측이 마드리드를 함락하여 인민전선 정부 붕괴. 이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나 스페인은 참전하지 않음.
1946년 유엔 총회에서 스페인을 배제하는 결의가 채택되어 국제 사회에서 고립.
1953년 미국과 스페인이 방위 협정을 체결.
1955년 유엔에 가입.
1958년 국제 통화 기금에 가입.
1975년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
1978년 신헌법에 따라 입헌군주제로 이행.
1982년 FIFA 월드컵 개최. NATO 가입.
1986년 EC 가입.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
21세기
2004년 마드리드에서 철도 테러 발생.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에서 우승
<보너스> 통일 스페인 왕국 건국이후 역대 국왕들의 초상화와 업적들.
1479년 까스티야의 이사벨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이라는 국가가 탄생되었으나 국왕이 2명인데다가 아직 통일 과정의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일 스페인을 지배한 왕으로 보는 카를로스 1세부터 시작합니다.
카를로스 1세 Carlos I de España (재위기간 1516년 1월 23일~1556년 1월 16일)
통일된 스페인 전지역을 다스린 최초의 왕이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임했는데, 때문에 스페인을 제외한 다른 유럽지역에서는 '카를로스 5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신성 로마제국의 역대 왕 호칭 중 카를로스 1~4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이사벨1세와 아버지 페르난도2세의 아들인 그는 부모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뒤 그에게 거대한 식민지들과 기존 스페인 전국토, 유럽대륙 곳곳의 합스부르크영지들의 통치권을 통째로 상속시켜 주었기 때문에, 흔히 '행운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다스리던 당시 스페인은 그야말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릴만큼 영토가 광대했으며 이로 인해 스페인은 날로 번영해가던 시기였다. 또 자체적인 국왕의 통치수단 또한 뛰어나 다양한 수법(정략결혼,침공,소유권 양도)을 통해 기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림과 더불어 끈임없는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랜 통치와 말년의 끈임없는 왕권다툼, 전쟁에 지친 나머지 스스로 은퇴를 결심하고 아들과 남동생에 물려주기로 결심한뒤 스페인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 양도하고 물러났다.
그는 스페인 역사에 있어 뛰어난 업적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으며 스페인ㅇ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황금시대를 다스렸던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생전 그가 지니고 있었던 각종 작위, 호칭들은 다음과 같다.
Charles, by the grace of God, Holy Roman Emperor, forever August, King of Germany, King of Italy, King of all Spains, of Castile, Aragon, León, Navarra, Grenada, Toledo, Valencia, Galicia, Majorca, Sevilla, Cordova, Murcia, Jaen, Algarves, Algeciras, Gibraltar, the Canary Islands, King of Two Sicilies, of Sardinia, Corsica, King of Jerusalem, King of the Western and Eastern Indies, Lord of the Islands and Main Ocean Sea, Archduke of Austria, Duke of Burgundy, Brabant, Lorraine, Styria, Carinthia, Carniola, Limburg, Luxembourg, Gelderland, Athens, Neopatria, Württemberg, Landgrave of Alsace, Prince of Swabia, Asturia and Catalonia, Count of Flanders, Habsburg, Tyrol, Gorizia, Barcelona, Artois, Burgundy Palatine, Hainaut, Holland, Seeland, Ferrette, Kyburg, Namur, Roussillon, Cerdagne, Zutphen, Margrave of the Holy Roman Empire, Burgau, Oristano and Gociano, Lord of Frisia, the Wendish March, Pordenone, Biscay, Molin, Salins, Tripoli and Mechelen 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영토를 다스렸다는것을 알 수가 있다.
펠리페 2세 (재위기간 1554년 7월 25일~1598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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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56년에 펠리페 2세는 부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와 더불어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으며, 다음해인 1557년에 최초의 파산 선고(국고 지불정지 선언)를 하기에 이른다.
그의 치세 동안 총 네 차례의 파산 선고를 실시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펠리페 2세 시대의 어려운 국고 사정을 알 수 있다.
펠리페 2세는 아라곤 왕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총독을 파견해 제국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하였다. 1561년,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유로 왕국의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부왕과는 달리 그는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열심히 정무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서류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만들어낸 서류 결제 체제는 당시 유럽에서는 선진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왕국에서 이 체제를 도입한 위정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가 개신교 세력과의 영합을 추구하여 그들의 신앙을 허가해준 일(아우구스부르크 화의)에 불만을 품은 펠리페 2세는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하며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또한 본인도 신심 깊은 가톨릭교도였다고 전해진다. 1559년에는 금서 목록을 공포하였으며, 지정된 대학 이외의 장소에서 공부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도 개입하여 가톨릭측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단 불가 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아지면서, 1568년에는 네덜란드와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79년에 네덜란드 남부를 독립전쟁에서 이탈시켜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유지시켰다.
1571년 펠리페 2세는 레판토 해전에의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복동생 돈 후안 바우티스타 바스케스를 유럽 연합 함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돈 후안은 유럽 함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과의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1580년에는 조카인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포르투갈 왕국을 병합하였다. 이로써 남아메리카, 필리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부르고뉴 공국(이상 카스티야 왕국령),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이상 아라곤 왕국령),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 보르네오 섬(이상 포르투갈 왕국령) 등 광대한 영토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해가 지지않는 제국이라 불리는 스페인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았다. (동시에 쇠퇴가 시작한 아이러니의 시대기도 하다.)
그러나 1581년 여전히 개신교 지역으로 남아있던 네덜란드 북부는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인하였다(이 일을 네덜란드 공화국의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에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파병하였으나, 칼레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때부터 스페인에 점차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 작위나 영주권이 매매되었으며,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증대로 인한 국고의 파탄은 막지 못했다. 결국 1596년에 대규모 파산 선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약 3년에 걸쳐 페스트까지 유행하게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를 가져온 펠리페 2세가 1598년 암으로 서거할 무렵에, 이미 스페인의 시대는 끝나려 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와 선왕이자 부왕인 카를로스 1세때부터 다스리던 스페인의 영토. 이때 스페인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다.
펠리에 2세 재위당시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와 잉글랜드와의 칼레 해전을 묘사한 그림
재위당시 벌어진 레판토 해전. 스페인과 오스만제국간의 벌어진 대규모 해전으로 전 유럽과 오스만제국함대가 맞붙은 사건이다. 이후 스페인은 오스만제국을 누르고 지중해지역의 최강국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오스만은 여전히 강대했다.)
펠리페 3세 Felipe III de España (재위기간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정치에 관심이 적어 총신이던 레르마의 아들 우세다에게 독재권을 맡겼다.
네덜란드 북부 7개 주와 12년 간의 휴전협정을 체결, 사실상 독립을 인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0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국고의 낭비가 심하여 에스파냐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또한 펠리페 3세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린채 막대한 비용이 드는 호화스러운 파티를 연일 개최하며 스페인이 몰락하는데 밑거름을 보탰고 경제에 대한 미흡한 지식으로 인해 이미 스페인 경제에 큰 기둥이 되고있던 무어인,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아둔한 결정을 내려 점점 추락하는 스페인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 제국이 몰락하는데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펠리페 4세 Felipe IV de España (재위기간 1621년 3월 31일~1665년 9월 17일)
선왕 펠리페 3세이후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점차 가시화되는 시기의 왕이었다.
또한 선대왕들에 의해 땅에 떨어진 제국의 위신과 합스부르크왕가의 위신을 높이기위해 부왕때부터 시작한 유럽의 국제전쟁에 연일 참가하여 오히려 스페인의 재정악화와 위신저하라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연일 국력이 상승하던 영국과 프랑스에게 유럽에서의 절대적인 권위가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하는 루이 14세에게 국내 정치간섭을 당하는등 치욕을 겪었다.
이후 스페인은 점차 몰락해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의 아들 카를로스 2세대에 이르러 왕조가 교체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는 그가 재위하던 당시 왕권의 강화와 유럽 대내외의 영향력강화를 위하여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내의 친척들과 서슴없는
근친혼을 일삼앗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의 아들 카를로스2세가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서도 볼수있다.
카를로스 2세 Carlos II de España (재위기간1665년 ~ 1700년, 이후 합스부르크왕가단절-부르봉왕가로 교체)
위키백과 인용
그는 펠리페 4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 내에서는 근친혼이 자주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서 이들 사이에서는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잦았다.
펠리페 4세가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하여 왕가가 끊어질까봐 걱정하였던 사람들에게 카를로스 2세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몸이 허약하여 5~6세가 되어서야 젖을 떼었고 걸음마를 하는 데에도 그 후 몇 년이 걸렸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1665년에 매우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그의 모비인 마리아나가 10년간 섭정을 하였다.
카를로스 2세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은 단절되고 '부르봉 왕가'출신의 왕이 통치를 하게된다.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기형으로 태어나 심각한 콤플렉스를 겪으며 성장했는데, 청년과 말년기의 스페인의 몰락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등의 간섭이 노골적으로 심화되자 스트레스로 인한 극도의 정신불안을 경험. 광인왕(狂人王)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달게 되었다.
그가 죽자 스페인은 프랑스,오스트리아등 강대국들이 왕위를 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왕위계승전쟁'을 벌였으며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유럽의 각 영지들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국토전역에서 각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암흑의 시기를 겪게된다.
펠리페 5세 Felipe V de España (재위기간 1700년 11월 16일 ~ 1724년 1월 14일)
스페인을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해 강대국 프랑스왕가 출신의 왕이 스페인을 통치하게 된다.
그가 바로 스페인 부르봉왕가의 초대군주인 '펠리페 5세'이며 이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위키인용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 앙주 공작에 책봉되고 조부와 아버지에게서 최고의 궁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00년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죽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 뒤로 필립의 동생인 베리 공 샤를,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드 1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스페인 왕실과 인척 관계였으나 혈통상 필립이 장자에 가깝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는 필립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올랐으나 프랑스 혈통으로 왕위에 오른 펠리페 5세를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각국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영국·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들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일으켰고,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위협하였다.
이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임을 인정받았으나,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병할 수 없으며, 지브롤터를 영국에게 넘겨주고 나폴리, 사르데냐, 플란데런, 밀라노 등을 할양하여 스페인은 해외 영토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서서히 유럽 강대국의 위치에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서인지, 1724년 1월 15일에 왕세자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스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교서를 발표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루이스 1세는 7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하여 다시 펠리페 5세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펠리페 5세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잃어버린 해외 영토를 다시 얻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펠리페 5세는 젠킨스의 귀 전쟁에서 영국과 싸워 승리하였고 아메리카에서 영국의 입김이 거세지는데도 불구하고 스페인령의 영토들을 지켜냈다.
루이스 1세 Luis I de España (재위기간 1724년 1월 15일 ~ 1724년 8월 31일)
(용량 관계로 사진은 첨부하지 않습니다.)
1724년 1월 15일 부왕의 퇴위로 루이스 1세가 되었으나, 7개월 만인 그해 8월 31일에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왕위는 아버지인 펠리페 5세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뒤 아버지인 펠리페 5세가 복위하여 통치, 펠리페 5세 사후 페르난도 6세가 통치
페르난도 6세 Fernando VI de España (재위기간 1746년 7월 9일 ~ 1759년 8월 10일)
중립정책과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추구했다. 그가 재위할 동안 스페인은 혼란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1746년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자신의 통치기간에 줄곧 분쟁을 피해 갔다. 페르난도 6세는 아버지가 임명한 각료인 유능한 마르케스 드 라 엔세나다에게 의존했으며 엔세나다는 행정 및 재정 개혁을 실현했다.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de España (재위기간 1759년 8월 10일 ~ 1788년 12월 14일)
위키인용
1759년 카를로스의 배다른 형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를로스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위를 그의 셋째 아들인 페르난도(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서 페르디난도 1세가 된다.)에게 물려주었다. 스페인 왕으로서의 외교 정책은 결코 좋지 못했다.
영국에 대한 적개심과 부르봉 왕가의 일원이라는 의식은 1760년 작센의 왕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투스 2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 아말리아의 사망 이후 더 커졌는데, 이는 스페인이 프랑스와 함께 부르봉 왕가 협정을 체결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페인은 7년 전쟁에 얽매였고 이는 스페인에 큰 손해를 끼쳤다.
1770년에는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영국과의 전쟁 위기가 있었다. 1779년에는 미국의 독립이 스페인 식민 제국을 뒤흔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였다. 카를로스는 스페인 육군에 대해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해군 역시 약간의 배 건조를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부 개혁
이러한 대외 관계에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의 정치는 스페인 국내에 크게 이익이 되었다. 우선 카를로스는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오폐수를 창문 밖에 버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1766년에는 마드리드에 프랑스식 복장을 도입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결국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카를로스는 오랜 기간 동안 아란후에스에서 머물렀으며, 정치는 아란다 백작에게 맡겨졌다.
카를로스는 1766년의 폭동에 예수회가 관련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나폴리의 왕이었던 시절 교회의 권한 억제로 인해 마찰이 있었던 교황과의 사이가 다시 틀어지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교회를 억압하여 성직자, 특히 수도사의 수를 줄이고 종교재판소를 철폐하지는 않았지만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와 함께 카를로스는 무역과 산업의 성장을 억제하던 오래된 법을 폐지하였고, 도로, 수로 등 기반시설을 지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스페인이 예전보다 좀 더 번영하도록 하였다. 말년에 카를로스는 그의 장남(후에 카를로스 4세가 된다.)과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
카를로스 4세 Carlos IV de España (재위기간1808년 5월 6일 ~1808년 6월 6일) (사진 미첨부)
1748년 나폴리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3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88년 부왕 카를로스3세를 계승하여 왕으로 등극하여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한 시기의 스페인을 통치했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여 자신의 충신이자 왕비의 애인인 고도이(Manuel de Godoy)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왕비와 고도이는 스페인을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시켰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대륙 봉쇄정책을 지원하였으나 트라팔거해전에서 영국에 패하고 만다. 1807년 나폴레옹에게 프랑스지역을 되돌려 줌으로서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 일로 1808년 3월 아들 페르난도가 일으킨 아란페즈폭동으로 권좌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서 복권되었다가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빼았기고 그 후 프랑스에서 왕비, 고도이와 함께 지내다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뒤 나폴레옹 가문의 호세 1세(나폴레옹의 형)가 즉위하여 1808년 6월 6일부터 1813년 12월 11일까지 스페인을 통치하게된다.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
그뒤 스페인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지내다가 부르봉왕가의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하여 (부르봉왕가 1차 복위) 다시 스페인의
정통군주로서 스페인을 통치하였으나 여왕인 이사벨 2세 이후 잠시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오1세가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고 스페인 제 1공화국(1873~1874년)이 들어섰다가, 부르봉왕가의 알폰소12세가 다시금 복위되면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다. (부르봉왕가 2차 복위) 그 뒤 아들인 알폰소 1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가 급속한 경제악화로 인한 궁핍해진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인민전선'이라는 무장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장악. 다시 부르봉왕가의 알폰소 13세를 국외로 추방함으로서 스페인 제 2공화국 (1931~1939)이 탄생되었다.
이후 프랑코의 반란으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해 공화국 정부(제2공화국)이 패하자 프랑코는 내전이 끝난 1936년부터 총통의 자격으로 197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통치하게 된다. (프랑코 독재하의 스페인) 프랑코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카를로스'가 후계자로 지명돼 스페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으나 (부르봉 왕가 3차 복위) 프랑코의 유언대로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펴지 않고 입헌군주제하 민주주의를 추진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여기까지(카를로스4세~알폰소13세까지) 용량관계로 스페인을 통치한 왕의 사진들을 첨부하지 않고 설명으로 대신합니다. 양해바랍니다.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I de España (재위기간 1975년 11월 27일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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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생활
1931년 스페인에 공화제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부 알폰소 13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 일족이 로마에 망명해 있었던 때에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메르세데스 공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당시 스페인 총통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설득으로 아버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1955년 육군에 입대, 1961년, 콤플루텐세 대학교를 졸업하는 등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프랑코 사후 민주화정책실시
1975년 11월 22일, 프랑코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기존 프랑코 군사정부의 기조를 계승하여 독재 체제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1976년 후안 곤살레스 수상의 지도하에 양원제를 수립했으며, 1977년 41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들이 스스로 상·하원위원들을 선출하도록 했다. 1978년에는 신(新)헌법을 승인시켜 입헌군주제를 확립시켰으며, 프랑코 독재정권당시 구속되었던 민주인사를 석방하였다. 물론 프랑코가 금지했던 정당 활동도 허용하였다.
이러한 민주화정책들은 프랑코의 군사독재로 얼룩졌던 에스파냐에 민주주의를 심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1년, 군의 일부 보수우파세력이 의회를 점거, 내각 각료와 의원 350여명을 인질로 하여 프랑코 시대 체제로의 복고(復古)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신속히 반항 세력을 회유하여 투항시켰던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신실하고 모범적인 공무 수행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20세기 군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현재의 스페인 (스페인편을 쓰면서)
지난 수세기 동안 스페인은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짧은 전성기와 더불어 기나긴 후퇴와
암흑의 시간이 되면서 쿠테타,내전,프랑스의 속국화,또다시 내전등을 겪으며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프랑코의 독재에 의한 강력한 산업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어느정도 경제부흥을 꾀했으며 프랑코 사후 훌륭한 지도자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 의해 스페인은 존경받는 왕실이 있는 낭만적인 나라의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또한 정열적인 국민과 하늘이 내린 자연등을 이용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고 매력있는 문화를 꽃피웠으며 매년 수천만명이 찾는 국제적 휴양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관광사업과 경제부흥말고도 스페인은 저력있는 문화와 수많은 천재예술가들이 남긴 예술작품들이 살아 숨쉬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피카소와 가우디,엘 그레코와 같은 수준높은 고급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대국이며 유럽의 강국들과 함께 우주개발에도 적극 참여하는등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총리는 2004년 스페인 총선에서 승리한 자파테로(José Luis Rodríguez Zapatero) 총리이며 무난한 국정운영을 하고있다는 평과 함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들과의 연대도 강화하여 스페인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고자 열을 올리고 있다.
(참고자료: 옛 스페인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국가는 필리핀,적도기니,모로코,멕시코,과테말라,쿠바,도미니카공화국,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코스타리카,파나마,콜롬비아,베네주엘라,에콰도르,페루,칠레,볼리비아,파라과이,우루과이,아르헨티나등 총 21개국에 달한다. 또한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4억 5천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은 전세계 인들이 열광하는 축구의 메카이기도 하다. 이미 스페인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처녀우승하며 수십년간의 설움을 풀어냄과 동시에 까스티야와 까탈루냐 두 사회간 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바 있다.
또한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라는 두 팀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클럽은 단순한 클럽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특히 이 두팀의 경기는 단순한 '경기 그 이상의 경기'로 스페인의 역사를 담고있다고 알려져있으며 말로 하기 힘든 스페인의 정신을 느낄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중심을 담당해왔던 '까스티야'지방과 '까탈루냐'지방간의 감정은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일부 바스크극우주의를 비롯한 지방분리주의자들의 테러로 몸살을 앓고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수백년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최저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스페인,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과연 옛 대제국 스페인의 비상은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후기: 와.. 새벽 2시에 작성을 시작해 현재 시각 17시 20분에 작성이 완료되었네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힘들었으니
수고스러움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다음편에 뵙지요.
첫댓글 이거 하나면 스페인덕후 소리 들을 수 있겠군요. :D
그나저나 스페인 국기도 나름 복잡미묘한 구성이로군요 ㄷㄷ
옹 정리가 잘됬네요
에스파냐가 15위권이라니... 2009년 기준으로 9위인데 말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GDP_%28nominal%29
카를 1세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 둘의 딸인 후안나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1세의 아들이지요.
1. 스페인 근대사를 보면 드는 생각이....
돈이 거의 무한정으로 공급되고, 기술력도 높고, 전투력도 높은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망하는지-_-;;;;;;;
2. 현 국왕은 무려 민주주의의 수호자. ㄷㄷㄷ
돈이 무한정으로 공급된다는거 자체에서 찾으실수 있습니다.
돈이 무한정으로 들어왔지만, 무한정+1 만큼 나갔어요. 주 원인이 투르크랑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게다가 병맛의 군주가 줄줄이 생기면서 부채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해체가 시작되었지요. 결정적 타격은 신대륙의 토착세력인 혼혈들의 반란선동으로 식민지 상실이죠.
댓글수정
타메를란,샤르멍님/ 감사합니다.
어처구니,피아스/ 수정완료했습니다.
太人輩 / 그거슨 역설신의 가호?!
그런데 역설사의 게임에서 스페인이 그리 강력하지는 않은듯(..)
안테나 3TV에서 실시한 역대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에서 현 국왕 후안 카를로스가 1위를 하기도 했지요.
2위 돈키호테의 세르반데스, 3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4위 소피아 현왕비, 7위 펠리페 현왕자, 8위 파블로 피카소라는 군요. 프랑코는 23위네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645767
첨부해보자면
1. 카이저라이히에서 스페인 내전 중 카를로스파가 등장하는데 이 카를로스 파가 이사벨 여왕의 왕의 계승을 반대하는 국내 보수파 집단이 반란을 일으킨겁니다. 지금도 카를로스파가 살아남아 있어서 왕위에 대한 클레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2.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망각협정'이라 해서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모두 묵인하고 지워버리는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근래에 와서 60년이나 넘은 내전당시의 피해 문제를 다시 끌어내어서 보상하려는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피해상황도,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피해도 과거
음, 그러면 카를로스파는 아라곤 계통의 왕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인가요? 이사벨 여왕이 카스티아왕비였으니까요 ;ㅂ;....
아뇨. 그 시기가 아니라 조금 뒤에 보시면 페르난도 7세 사후 이사벨 여왕의 즉위. 라는 부분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통계승법에 따라 아들이 계승할 것을 주장한 파가 카를로스고,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사벨 여왕의 즉위를 인정하는것이 왕당파였습니다. 지금도 계속 이사벨 여왕의 후계가 즉위하고 있으며 카를로스 파의 후계자도 생존해있습니다.
애당초 살라커법에 의하면 여자는 뒤를 이을수가 없는데. 이사벨 여왕이 뒤를 잇게되엇으니. 살리카법의 어긋난다며 반발한것이지요. 더욱이 계승문제 다음으로 둘의 정치성향또한 달랏습니다 .
과거사라 하여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보수파인걸 감안해보자면, 망각협정을 깨트리려는 스페인의 시도는 한번쯤 되새겨볼만한 듯 합니다.
인간백정 프랑코 참.......ㅇㅅㅇ
프랑스도 그렇고 스페인도 그렇고 글들을 읽다 보니 유럽애들은 짧은시간 잘나가다 긴 시간의 혼란기를 겪고 난 뒤 지금은 선진국대열인데 혼란기가 짧은 유럽 국가는 뭐가 있을까요??
그나마 영국이....
요 후안 카를로스씨도 참 인물이긴 인물인것 같아요 ㄷㄷㄷ
왕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니
여긴 유러파의 입헌군주제 옹호자의 성지입니다. ㅋ
여기는 그야말로 저놈들의 소굴입니다! 어서 가서 전화를 하세요!
역시 옛 말이 맞군요 아무리 부자라도 삼대이상 부귀를 누리기 힘들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