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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違)라는 글자를 한번 볼 게요. 모를 때는 글자를 따져보는 게 제일 좋아요. 違는 착(辶)자 안에 위와 아래로 하나씩 있고, 그 사이에 네모(口)로 돼 있죠. 앞에 있는 책받침(辶)은 빼 버리고요.
이것이 위(韋)의 갑골 ‘위’예요. 사이에 있는 네모(口)는 성이에요. 공동체 영역이죠. 물론 성(城)일 수도 있고, 마을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공동체의 영역이에요.
누군가가 이 영역을 지키는 거예요. 공동체를 지키는 걸 ‘위(韋)’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 말의 뜻이 반대로 되죠.
위에 있는 ‘위(韋)’라는 글자에 나중에 사람 인(亻)을 붙이잖아요. 그러면 위대하다 할 때의 위(偉)자가 돼요.
행(行)을 여기 ‘위’에 붙이면 우리가 위생(衛生)할 때 그리고 호위(護衛)할 때의 위(衛)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위(違)’는 이 (가다 쉬다 할) 착(辶)자를 붙이니까 뜻이 반대가 돼요. 성(城)을 이렇게 지켜야 될 때가 있잖아요. 처음에 이 위(韋)는 그런 뜻인데, 이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줘야 돼요. 違의 그 뜻이 원래는 성문 근처에 있으면 안 돼요.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인들이 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비켜줘야 돼요. 그걸 위(違)라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떠날 이, 이별할 때 이(離)하고 뜻이 비슷해져요. 그래서 결국은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를 벗어나 주는 거예요. 그게 違예요. 그러니까 거스르다의 의미가 아니고 떠나준다는 의미인데요.
이 떠나준다는 의미로 역으로 되는데요.
공동체를 떠나지 말라! 결국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을 놓지 말라는 거죠. 그러니까 무위(無違)라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라는 겁니다. 違가 어기다가 됐고 떠나다가 됐지만, 전체로 보면 무위(無違) 자체가 공동체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풍성함을 기준으로
(맹위자와 공자의 이야기를 다시 하면) 높임이란 뭡니까?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다! 뭔 말인지 맹의자가 못 알아들었겠죠. 알아들었든 말든 간에 당신은 말씀하셨으니까 나오신 거예요. 더 안 물어보는데 어떻게 얘기를 해요.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어(御), 즉 말을 끌고 계셨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나오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선생님께서 일러주시며 하는 말씀(자고지왈子告之曰)이, 맹가 집의 손자인 맹손(孟孫) 즉 맹의자가 나에게 효에 대해서 묻더라(문효어아問孝於我). 높임에 대해서 묻더라. 그래서 내가 대답해서 말했지(아대왈我對曰). 무위(無違)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번지도 헷갈리는 거예요.
번지왈, 하위야(何謂也). 무슨 말씀이신데요? 번지는 이렇게 물어보잖아요. 맹의자는 안 물어봐요. 공자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자기의 정치적 백그라운드로 삼으려고 본 거예요.
그때는 공자가 그런 백그라운드가 됐거든요. 나는 공자를 만난 군주야! 중국에도 보면 국(國)이 있죠. 우리는 나라라고 표현하죠. 이런 나라들이 모이면 대국(大國)이라고 그러죠. 작은 나라가 모이면 소국이라고도 하지만 또 역시 국(國)이라고 그래요.
공자가 대답합니다. 자왈(子曰) 생사지이래(生事之以禮), 살아있을 때는 공동체의 풍성함의 원칙(禮)에 따라서 일을 해라! 모시든 무얼 하든 간에 공동체 풍성의 관점이라는 거죠. 하다 보면 아버지하고 싸우죠. 2장까지는 안 나옵니다만 싸우는데 어떻게 싸워야 된다는 싸우는 기법에 대해서도 다 얘기를 해요. 그래야 집안도 공동체니까 안 무너지죠.
싸우고 정 붙게 해야죠. 싸우고 그날 저녁에 같이 이야기 나누고 풀어야 하죠. 그런 싸우는 방법도 논어에 다 나와요. 생(生) 살아있을 때 뭔가 일을 하거나 모실 때, 그 기준은 공동체 풍성이다! “아버지! 이건 제가 너무 하고 싶어요!” “아버지 나 이것 못하면 죽을 것 같아요!” 발 동동 구르고 하는, 이건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 이렇게 하는 것이 공동체 풍성에 맞을 것 같아요.” 이렇게 기준이 섰잖아요. 이게 뻥이라 할지라도, 토론하다 보면 드러나겠죠. 아버지가 “이게 공동체의 풍성이라고 아닌 것 같은데!” “사적인 욕심이지!” (그럴 수 있어요). 어쨌든 기준은 공동체의 풍성을 세우려는 겁니다.
死葬之以禮(사장지이례)! 돌아가시면, 장사를 지내도 그 입장은 오로지 공동체의 풍성, 제사를 지내더라도 공동체 풍성에 따른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게 높임입니다.
높인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의 번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게 높임입니다. 높임이라고 해서 사적인 이익을 위해 높이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건 아첨이라고 지난번에 나왔죠.
6장입니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맹무백이 누군지 따질 것도 없죠.
자왈, 부모유기질지우(父母唯其疾之憂)! 문장은 문법적으로 도치를 시켜 놓아서 그런데요.
부모는 우(憂)한다! 무엇을 우(憂)하느냐? “부모는 오직 기질(其疾)을 근심한다! 그 질병과 그 아픔을!” 이렇게도 해석해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부모는 너의 아픈 것만 걱정한다!” 이렇게 알았어요.
성급하지 마라
그래서 약간은 이상했어요. 뒤져봤어요. 맹무백에 대해서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는 친구예요. 너무너무 건강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왜 아픈 걸 걱정한다고 그랬을까? 아픈 게 아니에요. 빠를 질(疾)자예요. 부모가 걱정하는 것은, 네가 너무 급한 것을! 섣불리 판단하고 섣부르게 막 덤벼드는 것을! 그것을 걱정한다는 것이에요.
결국 너무 섣부르면 자기 속에서 나오는 욕망을 그대로 표현해버릴 가능성이 크잖아요.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 풍성이 높임인데요. 결국은 네 부모가 그러더라. 너 너무 급하다고! 네가 급한 것 걱정하더라. 이게 질풍노도(疾風怒濤)할 때 그런 질(疾)도 되거든요. 어쨌든 부모는 네가 성급한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성급했을 때 공동체부터 떠오르기는 어려워요.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안 됐어요. 우리 인류 자체에게 주어졌던 가장 이상적인 이념이 공산주의였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이 공산주의를 할 만큼 인간 문화 자체가 성숙이 안 됐어요.
어떤 분이 그러잖아요. 중국에 가서 보면, 몇 십 년이라도 사회주의 했던 나라라는 게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그 어떤 천국의 이념을 갖다 놔도 그 시대적 좌표의 덕과 안 맞으면 그래요. 현실 사회에서의 공산주의는 뭐죠? 덕이 아니라, 근본적인 이념을 가지고 시스템을 삼아, 그것도 통제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그 시대적 좌표에 맞아야 되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얘기했던 그 공산주의 이념을 인간이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좌표가 될 수 있는 정도의 문화에 이르지 못했어요. 그러면 결국은 부작용밖에 안 나타나요. 공산주의 이념이 잘못됐던 게 아니라 공산주의를 하려면 공산주의가 이 당시에 할 수 있는 시대적 좌표가 맞아야 해요.
물론 초기에 공산주의자들이 고민했어요. 바로 전면적인 공산주의가 되는 것은 현재 인간의 상황이 어렵고, 사회적 민주주의 즉 사회주의를 통해서 공산주의로 차츰차츰 단계별로 나가자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 마저도 도(道)였어요. 진짜 그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풍성해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어울려 살 것인가? 그런데 서로 감시하게도 만들었어요. 서로 비판하게도 만들었어요.
결국은 시대적 좌표는 없이 무작위로 근본 이념을 내세워버렸던 것이에요. 자기들끼리 근본주의 교조주의 싸웠지만 다 근본주의자들이었어요. 트로츠키까지 다 근본주의자였어요. 사실 안 되는 거였어요. 그 이유는 성급했던 것이에요.
그라더스(grds)라고 하는 신발 회사가 있는데 한국에서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신발 중에 하나예요. 제가 한국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신발이 세 군데가 있는데 그라더스 외에 킨치, 아지오 등이에요. 아지오는 신발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신발을 만드는 분들이 전부 청각 장애인들이에요. 청각장애인들이 정신을 집중해가지고 신발을 만들었는데 신발 자체 라스트 이런 건 좋지 않아요.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아요. 그 시스템 등 나머지는 아주 좋아요.
아무튼 그라더스에서 광고가 왔어요. 제가 관심 있어서 들어가 보고 사보기도 했으니까요. 뭐라고 하냐면 “누구나 다 인생 1회차 아닌가요?” 이렇게요. 하지만 2회 차도 있고 3회 차도 있고 4회 차도 있고 100회차도 있을 걸요. 그런데 100회차가 되어도, 서두르면 안 나와요. 서두르면 안 돼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내가 오늘 생각하고 있는 것, 이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신라시대에 가서 할 수 있느냐? 못하잖아요.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신라시대와 현대의 차이 이상일 수도 있어요. 서둘러 가지고 낼 수 있는 결론이 아니에요. 젊을 때는 서두르죠. 그래서 이상적인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해요.
7장입니다.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문효(子游問孝)! 제자인 자유가 또 높임에 대해서 즉 효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효라고 하는 게 말이지(是謂), 이른바 능양(能養) 즉 봉양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것이냐?
양(養)이라는 것이 기마민족에서 온 문화라고 그랬잖아요. 기마민족 문화에서 왔기 때문에 이 양(羊)자가 많이 나와요. 아름다울 미(美)도 양이 큰 것이고요. 이처럼 양이 많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치면 양이 요즘 닭고기인 거예요. 치킨인 거예요. 치킨은 귀해요. 그렇게 귀한 것이 양고기인 거예요.
가장 귀한 게 돼지고기인데요. 소고기는 안 먹었어요. 소는 먹는 고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여러분 비건주의자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저랑 여행을 한 군데만 가시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일본 어느 곳에 가면, 전국에서 잡은 소의 코뚜레를 깨끗하게 씻어서 다 모아두는 데가 있어요.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어요. 여기서 매일 기도해요. 잡아먹은 소에 대해서요. 장엄 하대요. 근데 갔다 온 분들 중에 한 3분의 1이 비건주의자가 되어 돌이 온대요.
기마민족 문화에서 소는 원래 먹지 않았어요. 소는 기마민족들에게서 잡아먹는 대상도 아니고 있지도 않았어요. 몽고에서 소 기르는 거 봤나요? 말 아니면 양이죠. 돼지는 아주 귀해요. 돼지는 기마민족이 끌고 다니기에 어렵거든요. 기마민족이 흔히 동네를 다 떠나는 것 같지만 한 중심 자리에 계속 일부는 남아서 지키고 있어요. 그들이 돼지를 관리하죠. 돼지는 겨울이 돼서 그 게르마을로 돌아왔을 때만 먹을 수 있어요. 그래서 겨울에 노인들이 돼지를 먹을 수 있다면 하는 거고요. 다른 철에는 못 먹어요. 있질 않아요.
아무튼 봉양하는 것! 양고기를 끊임없이 대드리는 것, 그것을 봉양이라고 하느냐? 그것을 높임이라고 하느냐? 지어견마(至於犬馬) 개유능양(皆能有養)! 여기서 개나 말이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견마일까요? 왜 견마지로(犬馬之勞)라 그랬을까요? 우마지로(牛馬之勞)도 있을 수 있는데요. 그것은 이 문화가 전부 기마민족 문화에서 왔다 보니까 떠오를 수 있는 보편 동물이 개하고 말이었던 것이에요.
농경민족이 이러한 문장을 만들잖아요. 문화를 먼저 만들었다면, 그러면 우마지로가 나왔겠죠. 아니면 우견지로(牛犬之勞)가 이렇게 나왔겠죠. 그런데 몽고족을 생각해 보세요. 말 아니면 개잖아요. 그러니까 견마(犬馬)죠. 그래서 지어견마(至於犬馬)가 나온 것이죠. 가까운 데 있는 친구가 개들이니까요. 지어견마(至於犬馬) 개능유양(皆能有養), 문장은 곧 개나 말에 이르러서도 모두 부모한테 먹을 걸 갖다 준다는 거죠.
불경(不敬) 하이별호(何以別乎). 양치기 문화에서 경(敬)이 나왔었죠. 사람이 서 있고 또한 입으로 부르고 그 다음에 채찍으로 잡고 있는 것 나왔었죠. (그림) 여기 양머리가 있죠. 그리고 이렇게 양을 불러모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내서 부르듯이, 회초리를 갖고 계속 통제하듯이, 안 떠나가게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어떤 간절함으로, 양 돌볼 때에 이렇게 하는 것처럼 해야 하고요. 이처럼 내가 이 공동체의 부모 등 위 세대가 하는 것을 잃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위 세대나 자기에게 은혜를 줬던 자기 부모를 대하는 데 있어서 상실해도 그만인 자세로 대한다면, 그거는 개 돼지와 뭐 다를 게 있겠냐? 개 돼지는 키우다 보면 처지가 부모를 잃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그게 아니라 어떻게 든 지키는 것이다! 먹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상실을 안 느끼는 것! 상실을 맛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효다!
끊임없이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알고 있어요. 나이가 들면 부모가 곧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떠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거예요. 안 잃어보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래도 잃어요. 잃는 건 알아요. 하지만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없다면, 하이별호(何以別乎) 무엇으로도 구별할 것인가?
인간의 공동체는 자기 공동체의 전 세대와 구성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간절해하는 거기서부터 풍성함이 오고, 거기서부터 풍성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것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공동체끼리 같이 밭 일궈야 되는데 다 탱자탱자 놀아요. 그럼 풍성해지지 않죠? 어울려지지도 않죠. 책임 전가하기 바빠지죠.
그런데 이 간절함, 내 공동체를 지켜야겠다! 내 공동체 구성체원을 먼저 지켜야겠다! 이게 있어야만 공동체는 풍성해진다는 거예요. 이것에 따라서 내 공동체를 지키는 이 문화 방식이자 형식이 의(義)이고 예(禮)인 거죠.
8장입니다.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자하도 물었어요. 자하문효(子夏問孝)하니, 공자께서 색난(色難)이라 했어요.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요.
유사(有事), 일이 있으면, 제자(弟子), 다음 순서 즉 젊은이들이 그 노고로움을 복무하고, 노고로움을 입고, 노고를 무릅쓰고.
유주사(有酒食) 술과 식사가 있으면, ‘유주식’이라고 안 읽고 식사이기에 ‘유주사(食)’라고 읽습니다. 그냥 버릇이 그렇습니다. 먹을거리 드실 거리가 있으면 앞서 난 분들이 먼저 젓가락질하고 드시고 하는데, 증시이위(曾是以爲), 이게 과연 효일까? 이걸 과연 효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걸 높임이라 할 수 있을까?
이건 뭐죠? 높임같이 보이지만 역할 분담인 거예요. 뭔가 다른 게 없다면 역할 분담인 거예요. 우리는 역할 분담을 하면서 마치 내가 먼저 드시게 했어. 힘든 일 내가 먼저 다 했어! 그러는데. 그런데 이건 따지고 보면 역할 분담에 불과해요. 역할 분담하면서 내가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조직이 있어요. 그것이 회사가 아니고 그냥 인간만의 어떤 조직이라고 하면, 나이 든 사람도 있을 거고 앞선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누구는 결정하고 누구는 결정되면 따라 해주고 하는데, 그 자체 알고 보면 역할 분담인 거예요.
‘거기에 뭔가 하나 첨가돼야 되지 않을까?’ 그게 색난(色難)이라는 거예요. 대하는 자세가 어렵다는 거죠.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가 제일 어렵죠.
“구성원들을 대하는 자세가 색난이다. 제일 어렵다. 구성원을 대하는 자세나 모드, 무언가에서 해결이 안 된다면 그거는 역할 분담에 불과한 것이지 높임이 아니다.”
높임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높임으로 보이는 것이 진짜 높임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자기 자세에서 오는 거죠. 상대방을 대할 때 ‘예! 예!’ 해놓고 나서 할 일은 다 해요. 그것은 역할 분담이에요. 우리는 가정에서도 “아버지! 사랑해요!” “어머니! 사랑해요!” “아들아! 사랑해!” 하면서 사실상 상당 부분에서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진짜 사랑인가? 진짜 아낌인가? 이것은 공동체 구성원이 상실되지 않는 것이라고 그랬잖아요. 비슷한 거예요. 그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아낌인 거죠. 아낌이 그를 잃고 싶지 않게 하는 거죠. 그 아낌이 없다면 높임이라는 것은 역할 분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얘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높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하신 거예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보론: 발효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해먹는 방법이 이 크게 보면 익힘과 삭힘이 있습니다. 익힘 안에서는 굽기, 찌기, 삶기 등 그 정도 있지 않나요?
익힘이란 말이 그것의 받침도 ‘ㄺ’이에요. 일본가면 발음 ‘이’가 안 되가지고 ‘야’가 되죠. 야기가 되죠. 야키도리는 새 익히는 거죠. 사실은 구우면서요. 크게 보면 반대편은 삭힘이 있는데 삭힘이라는 그 말 뜻이 제일 중요해요.
우리가 삭힘을 번역해서 요즘 발효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발효를 보면서 ‘삭히다’의 원 뜻을 모르면 몸에 좋으면 발효이고 몸에 안 좋으면 썩은 거라고 하죠. 삭힘이냐? 썩힘이냐? 이렇게 되는데요. ‘삭’이라는 게 ‘매칭’이라는 뜻이에요. 짝짓기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발효라는 것은 어떤 사물과 사물을 짝 지어주는 거예요. 애초부터 짝을 지어주는 게 삭힘인 거니까, 짝을 못 지어주면 썩음이 되는 거죠. 어떤 건 어떤 것 하고 맞다! 어떤 건 어떤 것과 안 맞다! 이렇게 경험적으로도 무언가 있는 거죠. 그 경험 테이블을 가지고 적당히 맞게 짝을 지어주면 그게 그 자체로서 삭힘이 되는 거죠. 삭힘은 처음 그날부터 삭힘이 들어가는 거죠.
오래 삭힘도 있고 금방 삭힘도 있죠. 삭힘이라는 말 자체는 사물에 열을 가해서 익히기, 굽기, 찌기, 삶기 등 이렇게 들어가고 있지만, 삭히기는 짝 맞춰 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금과 짝을 맞춰주던가, 물과 짝을 맞춰주던가 하는 거죠. 그 사물을 이해해야 짝을 맞추니까 그 사물에 대한 이해와 서로 짝 맞춰주기, 그게 발효의 원 뜻인 거죠.
그러다 보면 어떤 미생물이 발생하겠죠. 짝이 안 맞으면 미생물이 썩히겠죠. 삭힘이라는 말이 매치시켜주기인데 그게 우리 말에서 현재 용어는 많은 게 없는데요. 우리 말에 ‘사귄다’라는 표현에서 보면 돼요. 그러니까 사귄다는 게 누군가와 누군가가 매칭이 되는 거잖아요.
그 ‘사귀다’의 어근과 ‘삭히다’의 어근이 유사 어근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삭히다’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미생물이 생기고 미생물의 작용이 어떻고 하는 것은 분석적으로 그런 것이고, 원래 ‘삭히다’의 원 뜻은 짝을 맞춰주다! 그 짝이 어울리게 해주고 서로 사귀게 해주는 것! 그러니까 물과 잎이 사귀게 해주고, 물과 불이 사귀게 해주고, 아니면 태양과 사귀게 해주고 이렇게 사귀게 해주는 거죠. 누구랑 누구랑 사귀면 뭐가 나오는 거죠. 그 사귐의 관계에 대한 함수 관계, 그게 결국은 삭힘 즉 발효의 핵심 아닐까 합니다.
우리 말의 삭힘이라는 것은 그냥 퍼먼티드(fermented)의 의미가 아닌 거예요. 퍼먼티드는 그냥 ‘묵히다’예요. 묵히다가 아니라 짝 맞춰주기 그러니까 어떤 주체와 주체의 관점에서 먼저 보는 거죠. 그 현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일어나게 된 사귐을 얘기하는 거죠. 이게 발효에 대해 언어학자가 할 수 있는 답입니다.
(정상균무리의 복원 - 홍승진 박사님 자료 정리 문답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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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하신 가르침
시의 적절한 전달
편의한 편집
아룸다운 나눔
공동체다운 소망과 연대..
더없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