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1. 上古時代의 茶文化
이미 단군조선 때부터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차가 있어 이용되었으나 당나라때 차가 들어옴으로써 대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 이를 두고 김운학은 단군시조가 백두산에 개국한 이래 차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초의선사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장백산에 백산차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2). 하지만 초의선사의『동다송(東茶頌)』이나『다신전(茶神傳)』어디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오히려 그 이야기는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 나와 있는데 그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갖고 온 종자가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이며 한편으로 장백산에 백산차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3). 즉, 문헌상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차문화는 가락국 이전으로 소급되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 과연 백산차(白山茶)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실제 백두산의 희귀생물로서 백산차(Ledum palustre var. dilatatum)와 좀백산차(Ledum palustre var. dilatatum E. Busch)가 있다.
먼저 백산차는 진달래과로서 상록 소관목이며 개화기는 6~7월, 결실기는 7~8월이다. 가지끝에 흰색의 우산모양 꽃차례가 달리고 흔히 백두산의 해발 800~2,000m 되는 침엽수림 속이나 소택지 주변, 습한 산기슭에서 자란다. 잎, 어린 가지, 열매에서 점유를 추출하여 가지와 잎은 만성기관지염 치료에 효능이 있으며 관상수로도 적합하다고 한다. 좀백산차 역시 진달래과로서 백두산의 희귀식물이며 개화기와 결실기는 백산차와 같고 역시 흰색 꽃이 핀다. 해발 700~1,500m 되는 이탄지 또는 낙엽송림 근처의 습한 곳에서 자라며 가지와 잎을 약용으로 쓴다4).
백산차는 아마도 ‘백두산에서 나는 차’라는 의미일 것이며 이 밖에도 왕백산차(Ledum palustre var. maximum)라는 종도 있다. 개화기는 5월, 결실기는 9~10월로 다른 백산차들과 약간 다르지만 역시 흰꽃이 피며 해발고도 1,600m 되는 지역의 낙엽송 숲에서 야생한다5). 이능화가 차라고 말했던 백산차류(類)는 이처럼 동백나무과가 아닌 진달래과의 상록활엽 관목으로서 흔히들 차대용(茶代用)이라고 불리는 작물들이다. 즉, 효당스님이나 응송스님이 말한 것처럼 백산차가 생강나무나 철쭉꽃 종류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백두산에는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물뿐만 아니라 오미자, 수염종덩굴, 애기금매화, 물싸리, 민물싸리, 牛皮茶라고도 불리는 만병초, 월귤나무, 구기자나무, 꽃밥알풀, 아귀꽃나무, 가시오갈피, 각종 까치밥나무 등 차대용으로 쓰이는 식물이 무수히 많다6). 이들은 하나같이 어린 잎 혹은 다 자란 잎을 차로 우려먹거나 열매 혹은 뿌리 등을 달여 차로 마실 수 있는 식물들로서 차로 끓여먹을 수 있는 차대용 식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백산차류의 차를 비롯한 각종 차대용 식물을 중심으로 고대 한국의 독자적인 차문화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려준다 하겠다.
예로부터 백두산은 온전하게 보존된 원시림(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과 침엽림)을 이루고 있으며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수직분포가 뚜렷하여 흔히 ‘입체 식물원’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있고 기후와 지형의 영향으로 기온은 해발고도의 높이에 따라 단계적으로 낮아져 식물은 산의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뚜렷하게 구분되어 5단계의 수직 분포대로 나타난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하고 푸르른 식물의 가지와 잎, 싱싱한 활엽림,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 침엽림의 산림대로 이루어져 이다. 해발 1,800~2,00m 이상은 유라시아 대륙 산지 이끼 들판의 남쪽 지대로서 동북아시아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고산지대인 셈이다7).
그렇기에 대 ․ 소흥안령과 백두산지의 한온대림과 온대림 지대가 오늘날 중국의 주요 삼림 지대로 손꼽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대흥안령 북단의 한온대림은 시베리아의 대삼림이 중국에까지 연속된 것으로서 울창한 삼림 때문에 18~19세기에도 낮에 해를 볼 수 없을 정도라는 문헌이 확인된다. 소흥안령과 백두산 일대의 화분 분석에 의하면 이 곳은 전신세(Holocene)8)의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이 우거져 있었는데 이후 기후가 온난하여 소나무와 활엽수종이 공동으로 우점종이 되었지만 후기부터는 기후가 다시 한랭해지면서 활엽수가 감소하여 소나무만이 우점종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9). 그렇게 봤을 때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백산차류의 식물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 곳에 터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하상연은 차나무의 생장 적지로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배수가 잘 되고 가뭄을 잘 이겨내는 화강암 마사토와 자갈이 섞인 땅을 꼽고 있다. 이는『다경』에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이런 토질은 중생대(中生代: B.C 2억 5,000만~6,500만년) 이전의 부식질 토양에 해당한다. 즉, B.C 6,500만년 이후의 화산회토와 진흙땅에서 차의 생장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쉽게 관찰되는 토양으로는 갈색삼림토, 적색토, 부식질 회색토, 유기질토, 간석지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갈색삼림토는 산록 밑 낙엽이 많이 쌓이는 산지에 분포하며 토양의 모재는 화강편마암에서 유리하며 산도가 약간 강한 편이다. 적색토는 우리나라 서부 및 남부지방의 평야와 구릉지에 널리 분포하는데 산화철, 알미늄이 토양단면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비옥도는 갈색삼림토에 비해 떨어진다. 그 밖에 부식질 회색토는 서해안, 남해안의 하성(河成) 혹은 해성(海成) 충적지(沖積地)에 많이 분포하며 우리나라 논의 토양이 대체로 이에 속한고 약산성이라고 한다. 즉, 우리나라 토양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10).
또 차나무는 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보는 실화상봉의 중생대 식물이고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고생대 이전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 대륙의 경우 고생대 지층은 우랄산맥, 천산산맥, 대 ․ 소흥안령, 그리고 백두대간(白頭大幹) 등과 그 지맥들 뿐인데 우리나라는 백두산 분화구 일대와 제주도, 울릉도 등 화산지대와 일부 해안선의 수성암 지대를 제외하면 국토의 90% 이상이 중생대 이전에서 신생대에 이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 지대라는 것이다11). 이와 관련된 고대 한국의 차나무 자생설은 뒤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암튼 문헌상으로 차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는 것은 물론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물을 약용 혹은 음용했다는 기록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현 학계에서도 이능화의 견해를 좇아 ‘예로부터 백산차가 있었다.’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상고시대 동방문화권에서의 음다 풍속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동방문화권만의 독특한 문화권들과 타 문화권과의 교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접근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신석기시대때부터 동방문화권은 다양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먼저 요서 북부 일대에는 중화문화권의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앞선 홍산문화(紅山文化)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 만주 심양 지역의 신락문화(新樂文化), 요동반도 남부의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압록강 하구의 후와문화(后洼文化), 송화강 유역의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눈강 지역의 앙앙계문화(昻昻溪文化), 상감평원의 소남산(小南山) ․ 신개류문화(新開流文化), 목단강 유역의 앵가령문화(鶯歌嶺文化)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문화권은 이후 청동기시대에도 문화적 단절 없이 지속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이어지고, 뒤이은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와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 길림지역의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 산동반도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뒤이은 악산문화(岳山文化) 등이 모두 다양한 동방문화권을 형성한 것들이다12).
이들 문화권과 문헌상 비교 검토해볼 수 있는 부분이 단군조선에 대한 부분인데 B.C 2,333년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는 단군조선의 영역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지금의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를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구분하는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미송리식토기(美松里式土器) 혹은 팽이형토기라 부르는 것이다.
납작밑항아리 양쪽에 파수부가 하나씩 달려있고 목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가볍게 오므라지는 것이 특징적인데 그 분포범위는 청천강 이북 일대와 길림, 요령 지방 일대가 중심적이다13). 하지만 서울 암사동이나 하남 미사리, 강화도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대체로 한강 중류와 상류, 임진강 유역, 강화도까지를 남방 한계로 분류할 수가 있다14).
신용하는 이런 미송리식토기(팽이형토기)가 산동 대문구문화 말기층에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중국에 실재했던 소호족(少昊族)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15). 그러면서 이 토기가 초기 고조선문명권(古朝鮮文明圈)의 범위를 측정하는 지표의 하나가 되는 토기이기 때문에 산동 대문구문화는 동이 계열의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그는 고조선이 한반도에서 건국된 후 북으로는 요동 ․ 요서 방면으로, 서로는 발해와 서해를 건너 산동, 하북, 하남 방면으로, 남으로는 한강을 건너 한반도 남해안으로 확산되어 단일한 고조선문명권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6).
그렇게 봤을 때 단군조선이 건국했다고 하는 대략 B.C 24세기 전후는『다경』에서 최초로 차를 마셨다는 신농씨의 시기와 비슷한 때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신농씨의 음다 기록 자체에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단군조선에서의 음다 풍속 또한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서 외래에서 전래된 차문화도 있지만 독자적으로 자생한 차문화 역시 있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이미 전신세에 백두산의 원시림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면 인류가 그 지역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이후에는 비단 백산차류 뿐만이 아닌 다른 식물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동방문화권에서 마셨을 차는 동백나무과에 속하는 차나무의 찻잎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겠다. 실제『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선조 31년(1582) 6월 23일, 대신들과 함께 양 경리가 참소당한 사정과 중국에 보낼 자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우리들이 마시는 인삼차는 탕(湯)이지 차(茶)가 아니라면서 탕과 차를 혼동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웃은 일이 있었다17).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차라는 것은 본래가 초목의 이름이지 음료의 이름이 아니건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라를 글자를 탕(湯), 환(丸), 고(膏)처럼 마실거리로 인식하여 강차, 귤피차, 모과차 등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였다18).
하지만 이때가 조선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명나라의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랐던 정약용의 생각은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달리 독특한 차문화가 존재했다고 볼 여지가 높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 시원(始原)은 언제부터일까?
사천성 일대의 차문화가 중화문화권으로 전파되는 데에도 하상주 삼대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진 ․ 한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기까지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남북조시기까지도 여전히 차의 생산과 음차의 풍속은 강남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북방에서의 음다 문화는 많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19) 단순히 중화문화권에서의 차문화 전래만 갖고는 동방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동방문화권의 독자적인 차문화에 대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럼 단군조선 혹은 그 이전에 차 혹은 다른 식물을 약용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까? 관련 문헌이 소략한 가운데에서도『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쑥(艾)과 마늘(蒜)이 있어 참고할만 하다20). 그 당시 아시아 서부 일대가 원산지인 마늘이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보고 이 마늘을 달래21)로 보기도 하는데『동의보감(東醫寶鑑)』을 보면 ‘대산(大蒜)을 마늘, 소산(小蒜)을 족지, 야산(野蒜)을 달랑괴’로 구분하고 있어 단군설화에 나오는 마늘을 대산이 아닌 소산 혹은 야산일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통을 치료하고, 종기와 벌레에 물렸을 때 혹은 협심통에 식초를 넣고 끓여서 달래를 복용하는 등 그 효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 당시 마늘이 아닌 달래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또한 쑥은 복통 · 토사(吐瀉) · 지혈제로 쓰고, 냉(冷)으로 인한 생리불순이나 자궁출혈 등에도 사용하지만 여름에는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는 재료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아마 굴 안에서 불을 피워 해충(害蟲)을 쫓아내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22).
그 밖에 쑥과 마늘은 일종의 제례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적인 매개체로 보여지며23) 미개한 문명에 대한 문화 전파의 흔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늘과 쑥이 동북방 일대에서 나는 식물이며 그 효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채취하고 이용할 줄 아는 집단은 그 사회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제례 집단이나 혹은 특수한 세력을 형성한 집단으로 추정이 가능한데 그렇다고 봤을때 곰으로 대표되는 집단과 환웅으로 대표되는 집단 사이에 계약적인 주종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자고로 의학(醫學) 지식이란 오랜 시간동안 쌓여져 내려온, 축적된 노하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외래 집단과 그 지역의 특수한 토착 집단간의 계약적인 융합은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된다.
이는 이미 쑥과 달래 따위를 오래전부터 복용해 왔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 당시의 식물 활용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분명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동방문화권에는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야생 식물성 줄기섬유를 다루던 찍개나 찌르개 등이 발견된 바 있었고24) 구석기 후기의 동굴벽화에는 그물을 치고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성 재료로 그물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25). 이는 곧 이른 시기부터 여러 종류의 마섬유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들이 재배되었고 이들을 활용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26).
박선희는 그의 저서『한국 고대 복식』에서 고고학적 현황을 살펴봤을 때 마직물, 면직물, 사직물 생산에 있어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동방문화권의 문화적 수준은 동시기 중화문화권 및 남방문화권의 그것보다 우수하다고 적고 있다. 특히 쉽게 썩어버리고 관리하기 힘든 식물성 섬유로 이뤄진 마직물이라든가, 누에에서 고치실을 뽑아 만든 사직물의 경우 이미 중화문화권과 남방문화권에서도 폭넓게 생산되었지만 동방문화권의 그것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고 생산하기 시작한 기간도 우리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봤을 때 각종 식물의 활용도에 있어서 꼭 중화문화권을 기준으로 모든 편년을 수립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차라고 부르던 대상 자체가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문화권들 사이에서 반드시 남방문화권 혹은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를 기준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차라는 문자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당대 육우가『다경』을 저술할 무렵부터이며 이전에는 고로(皐蘆), 가(檟), 도(荼), 설(蔎), 명(茗), 천(荈) 등 10여개의 글자가 있었는데 점차 시간이 흘러 도(荼)가 그것들을 대신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한 획이 빠지면서 현재의 차(茶)가 되었으니 이때가 8세기 무렵이다27).
고로(皐蘆)는 고채(苦菜), ‘쓴 나물’이라는 뜻의 회역음자(回譯音字)로서 중국 대엽동청(大葉冬靑)이라고 불리는 감탕나무과의 다라엽(Ilex latifolia)을 지칭한다. 즉, 엄밀히 말하면 고로는 동백나무과의 차가 아니라는 소리다. 오늘날 고정차(苦丁茶)라고 불리는 상품이 바로 이 고로로 만든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없으며 일본에서는 당차(唐茶), 고차(苦茶), 춘차(椿茶) 등으로 불리고 있다.
고로종 나무의 특징은 잎은 타원형으로 크고 옆장은 엽폭보다 3배가 더 길며 줄기는 곧고 바르게 자란다. 차나무와 매우 유사하지만 가지와 잎이 엉성하고 잎은 두껍고 비대하며 외형은 차나무와 비슷하지만 줄기나 가지가 엉성하며 잎은 상당히 큰 것과 아주 작은 것도 있다28). 실제『다경』에서도 ‘차나무의 모양이 과로(瓜蘆)와 닮았다,’29)고 하여 양자가 서로 다른 종자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가(檟)는 한자 그대로 ‘개오동나무’를 의미하는데『설문해자』에는 이 사실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또한『이아의소(爾雅義疏)』에는 ‘개오동나무 가(榎)와 가(檟)가 같은 글자의 다른 체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어『이아(而雅)』에서 ‘가는 곧 쓴 차다.’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30). 즉, 능소화과의 낙엽교목으로서 차와 엄연히 다른 식물인 개오동나무31)를 차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도(荼)라는 글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씀바귀’를 말하는 것으로서 씀바귀 또한 국화과의 다년초로 동백나무과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중에는 흰꽃이 피는 흰씀바귀 같은 종류도 있고 갯씀바귀, 벋음씀바귀, 좀씀바귀 등 많은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은 모양이나 개화기, 결실기가 모두 차나무와 다른 종임을 알 수 있다32).
즉, 당대(唐代)에 차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차문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즉, 차나무의 찻잎을 마시는 차문화와 함께 열매나 뿌리, 가지 혹은 다른 식물을 차처럼 마시는 차문화가 공존(共存)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화문화권과 남방문화권 내에서도 각각 차문화가 달랐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다경』을 보면『광아』의 예를 들어 당시 형주와 파주 등 남방문화권의 음다 풍속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광아』를 쓴 장즙은 형주와 파주 사이의 사람들은 단순히 찻잎을 채취해서 병차를 만들어 먹을 뿐만 아니라 파(葱), 생강(薑), 귤(橘)을 같이 넣어 끓여 먹었다고 쓰고 있다33). 그가 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기록의 연대는 220~265년 즈음이며 3세기 이전부터 남방문화권에서는 차나무에서 채취한 것만 차로 마신 것이 아니라 파, 생강, 귤과 같은 그 지역 특산품들을 같이 넣어 약차(藥茶)로서 마셨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 역시 오늘날의 음다 풍속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또한 3세기 무렵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차문화가 이때까지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나다를까, 육우는 이런 행태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파, 생강, 대추, 귤껍질, 수유, 박하 등을 넣고 오랫동안 끓인 후 혹은 차탕을 떠내어 매끄럽게 하거나 혹은 끓여서 거품을 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도랑에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인데도 세상에는 이런 습속이 그치지 않고 있다. 아! 하늘이 만물을 낳아기르는 데에는 모두 지극히 오묘한 이치가 들어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만 얄팍하고 하기 쉬운 것만을 취하려 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34).
즉, 육우가 생각하는 진정한 차문화라는 것은 기존의 차라고 끓여먹었던 식음료를 전면 부정하는 일대 식문화의 변혁(變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8세기 무렵, 당대의 차문화는 크게 변화하였고 이전에 비할데 없이 큰 번영을 불러일으켰다. 당대에 이르러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없고 차를 생산하지 않는 지역이 없으며 국가에서 차를 전매하여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걷어들이게 된 것도 다 이와 같은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고로 동방문화권의 차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받드시 중화문화권의 음다 풍속, 특히 현재 관련 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으면서 차문화에 대해 새롭게 재편된 이후인 당대의 음다 풍속과 비교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크다 하겠다. 즉, 고대의 차문화는 각 문화권이 독특하게 갖고 있었던만큼 중화문화권이 결코 차문화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고로 백두산 일대에서 생장(生長)하던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물들이 얼마든지 이른 시기부터 음용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고로 이능화가 장백산의 백산차를 언급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장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미 동방문화권이 신석기시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다른 지역과 접촉 ․ 교류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동방문화권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다른 문화권에 비해 낮지 않았던 점을 상기했을 때 식문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시각이라고도 생각한다.
더불어 차문화는 이 시기의 중화문화권을 비롯한 타문화권과의 문명교류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할 필요가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청동기시대가 되면 요동지역에는 비파형동검문화가 형성되고 종래에는 요령성(遼寧省) 일대의 청동기로만 인식되었던 비파형동검이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출토되고35) 세형동검이 비파형동검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단군조선과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고로 산동성 일대의 대문구문화를 고조선문명권으로 인식하든, 요령성 일대의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한 비파형동검문화를 단군조선의 문화로 인식하든 중화문화권의 동부와 동북부 일대에 중화문화권과 분명히 다른 문화권이 존재했고, 그들이 오히려 동방문화권의 한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36). 윤내현은 부여, 고죽, 고구려, 추, 진번, 낙랑, 숙신, 청구, 발, 옥저, 개마, 구다 등등 열국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모든 집단을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으로 설정하였는데37) 비단 그의 주장이 틀리다 하더라도 고고학적으로 이들 집단이 비록 서로 다른 문화권을 계승해 발전했지만 서로 비슷한 문화적 양상을 공유한채 존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미 하상주 삼대에 걸쳐 중화문화권은 동방문화권에 자신들과 다른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상서(商書)』나『주례(周禮)』,『예기(禮記)』등에서 만(蠻), 맥(貊), 이(夷), 민(閩), 융(戎), 적(狄), 호(胡), 파(巴), 월(越) 등의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쳐 주대에 이르러 중국(中國)과 구분되는 다른 집단들을 중화문화권에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 ․ 서 ․ 남 ․ 북방문화권의 여러 집단들은 정치체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니 동방문화권에서는 단군조선이 그러했다38). 단군조선이 중국측 문헌에 제일 먼저 등장한 때는『관자(菅子)』이다. B.C 7세기 무렵, 제나라의 정치가 관중(菅仲)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온 이 문헌에서 ‘해내의 옥폐(玉幣: 귀한 물건)를 얻는 7가지 방책’을 묻는 제 환공(桓公)의 질문에 관중은 ‘발(發) 조선(朝鮮)의 무늬가죽을 얻는 것’을 그 하나로 대답한 것이다. 이는 B.C 7세기 이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정치체의 무늬가죽이 중화문화권에서도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강회 지역의 제후국 36국을 복종시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주왕이 두려워했다는 서국(徐國)이다39). B.C 10세기 경, 강회지역을 장악하고 초나라와 대립하던 서국의 역사를 본다면 장강 하류 일대에서 중화문화권의 각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박물지(博物志)』40)에는 그의 탄생에 대해서 자세히 적고 있는데 김상기는 그의 탄생설화가 주몽설화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동이계 설화로서 서언왕을 동이계로 파악하고 있다41). 이와 같은 사실을 봤을 때 서국이 장강 상류의 차문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차문화가 동방문화권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당시 중국은 소빙하기가 찾아와 극히 한랭하였고 결국 이 때문에 서주가 멸망을 당하였고 차의 원산지였던 고촉국 역시 쇠퇴를 겪게 된다. 하지만 앞서 누누이 언급했듯이 차나무 자체가 겨울에 생장하는 식물인만큼 그 생산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서국에서 그런 차문화를 인지했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이후 B.C 5~6세기는 불리지(弗離支)라는 자가 산서성, 산동성 등을 정복하여 불리지국을 세우기도 하였다42). 이후 B.C 7세기 말 제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지만 불리지국 역시 서국처럼 중화문화권 각지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봤을 때 제나라의 안자가 차를 마셨다는 기록에서처럼 불리지국에서도 음다의 풍속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산동성 일대는 차가 생장하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안자가 마셨을 차도 촉 지방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불리지국 역시 이와 비슷한 경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낙양 부근에 양거(揚拒), 이낙(伊洛), 육혼(陸渾) 등의 융족(戎族)들이 화하족(華夏族)과 뒤섞여 살고 있었고 그들은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주대까지만 해도 중심지인 낙양 일대에서조차 반농반목의 형태로 토지가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가 되면 각 국가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업을 지원하기 때문에 융족과 적족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새롭게 토지를 개간하고 운하를 파는 등 중국 대륙 전체적으로 농경이 크게 발전하기에 이른다43). 마침 이 시기는 온난다습한 시기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중국 동해안에서 동이족이라 불리던 집단이 거대한 정치체를 형성하지는 못 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중화문화권과 다른 식문화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봤을 때 상고시대 동방문화권의 차문화는 크게 2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겠다. 하나는 동방문화권의 유일한 삼림지대인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백산차류를 비롯한 기타 차대용 식물을 음용했을 가능성이며 또 하나는 사천성 일대에서 각지로 뻗어나간 중국 남부의 차문화가 단군조선의 영역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이다. 그렇게 봤을 때 비록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전형적인 화강암 대지로서 오래전부터 백산차류를 중심으로 한 차문화가 상고시대때 이미 존재했으리라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국 동해안 일대가 오래도록 동이계라 불리던 집단의 활동무대였으며 이들과 교류하던 장강 일대의 집단들 역시 남만(南蠻), 백월(白越) 등으로 불리던 집단들로서 중화문화권과는 엄연히 다른 문화권을 형성했던 존재였다. 고로 신석기시대부터 이들과 교류하던 동방문화권에서 이후 단군조선이 형성된 뒤에도 장강을 따라 촉 지방의 차문화를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 등지는 해양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황해문화권을 따라 도작농경(稻作農耕)이 전래되었으며 이런 해양교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44). 그리고 이처럼 2가지 계통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고대 한국의 차문화는 열국시대에 이르면 보다 체계화된다.
1) 李相明, 전게서, p.39~40. 하지만 그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확실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의아하다.
2) 김운학, 2004,『한국의 차문화』, 이른아침, p.14~15. 그는 白山茶에 대해 효당스님은 생강나무로, 응송스님은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꽃일 것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백산차와 같은 이러한 차들이 변해 소위 우리의 순수한 생강차, 구기자차, 산수유, 당귀, 감초, 마가목, 오미자차, 인삼차 등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3) 이기윤, 전게서, p.48. 그는 인도에서 차나무가 전래했다는 설은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엄연한 실존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허황옥의 출자지에 대해서 인도가 아닌 중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그 설이 일견 타당하기에 B.C 1세기때 인도차의 직접적인 전래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4)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2005,『백두산 식물도감』, 일진사, p.323~324.
5) 고경식 ․ 전의식, 2005,『한국의 야생식물』, 일진사, p.511.
6)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전게서, 백두산에는 차대용 식물뿐만 아니라 약재로 쓰이는 개암나무, 뽕나무, 가는잎쐐기풀, 호대황, 복수초, 삼지구엽초, 백선, 두릅나무, 들메나무 등 수많은 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개중의 대부분은 동북아시아 혹은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종들이다. 즉, 백두산의 이러한 수많은 식용 작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7)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전게서, p.10~11. 해발고도 720m 이하는 온대 활엽림, 720~1,100m 사이는 혼안대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 1,100~1,700m 사이는 아한대 침엽림, 1,700~2,000m는 한대 아고산 왜곡림, 2,000~2,700m는 북극권의 고산 이끼 들판으로서 대부분의 백산차류는 2층과 3층 사이에서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8) 지질시대의 최후인 충적세(沖積世)라고 부르는 시기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략 B.C 1만 3백년 전을 경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백산차류가 백두산에 자생한 시점은 인류가 가늠하기 어려운 오랜 옛날이라 할 수 있겠다.
9) 루제헌, 전게서, p.54.
10) 邢基柱, 2000,『農業地理學』, 法文社, p.52.
11) 김대성, 2006, 전게서, p.318. 하상연은 차나무는 냉해에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 생산되며 본래 小葉灌木이지 大葉喬木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荼에서 茶로 그 명칭이 바뀔 때 禾를 제거하고 나무 木을 집어넣은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덧붙여 차는 항상 지방질이 많은 음식을 먹는 유목민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중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중국 남부가 차나무 원산지로 추정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로 차가 여러 가지 기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오히려 적합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차는 중화문화권이 아닌 남방문화권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정통적으로 황하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마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으며 禪 ․ 佛敎 혹은 古代 醫學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도 후대의 중화문화권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상연의 견해는 또 다른 한국 차문화의 계통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겠다.
12) 김용만 ․ 김준수, 2004,『지도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p.24~27.
13) 金元龍, 1999,『韓國考古學槪說』, 일지사, p.76~77.
14) 金元龍, 1998,「新石器文化: 各地方의 土器 ․ 石器 ․ 骨角器」『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p.100~160.
15) 愼鏞廈, 2001,「古朝鮮文明圈의 三足烏太陽 상징과 朝陽 袁台子壁畵墓의 三足烏太陽」『韓國學報』105, 一志社
16) 愼鏞廈, 2001,「古朝鮮 ‘아사달’ 紋樣이 새겨진 山東 大汶口文化 遺物」『韓國學報』102, 一志社
17)『朝鮮王朝實錄』券101「宣祖實錄」23輯 452面, “前日言於予曰: ‘貴國有茶, 何不採取?’ 使左右, 取茶來示曰: ‘此南原所産也 厥品甚好 貴邦人何不喫了?’ 予曰: ‘小邦習俗, 不喫茶矣’ 此茶採取, 賣諸遼東, 則十斤當銀一錢, 可以資生 西蕃人喜喫膏油, 一日不喫茶則死矣 中國採茶賣之, 一年得戰馬萬餘匹矣’ 予曰: ‘此非六安茶之流, 乃鵲舌茶也’ 對曰: ‘此一般也 貴國啜人參茶, 此湯也 非茶也 啜之中心煩熱, 不如啜之爽快矣 使貴國陪臣喫茶, 則心開氣擧, 而百事能做矣 仍贈予茶二包, 似是爾若喫茶, 則或可做事, 以(驚)〔警〕之之意也 此非爲茶言之, 專爲不做事而發, 設辭言之也 鄭琢曰: “此直戲侮之言也 怠慢之氣, 豈喫茶所能療也?””, 해석하자면 “그리고 지난번 나에게 ‘귀국에는 茶가 있는데 왜 채취하지 않는가?’ 하고는, 좌우를 시켜 차를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며 ‘이것은 南原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 품질이 매우 좋다. 그런데 귀국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마시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우리 나라는 풍습이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이 차를 채취해서 遼東에 내다 판다면 10근에 1錢은 받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西蕃人들은 기름기를 즐겨 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차를 채취하여 팔아서 1년에 戰馬 1만여 필씩을 사고 있다.’ 하기에, 내가 ‘이것은 六安茶의 종류가 아니고 鵲舌茶이다.’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귀국에서는 인삼차를 마시는데 이것은 湯이지 차가 아니다. 그것을 마시면 마음에 번열이 생기므로 마음이 상쾌해지는 차를 마시는 것만 못하다. 귀국의 陪臣들이 차를 마신다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솟아나서 온갖 일들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나에게 차 두 봉지를 주었는데, 이는 당신도 차를 마시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또 차를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꺼낸 말이니, 계획적으로 한 말이다.” 하자, 정탁이 아뢰기를, “이것은 단지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말일 뿐입니다. 태만스런 기운이 어떻게 차를 마신다고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하였다.”라는 의미다. 즉, 명장 양호는 조선의 차문화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난했던 셈이다.
18) 諸岡 存 ․ 家入一雄 著 / 金明培 譯, 1991,『朝鮮의 茶와 禪』, 保林社, p.65~66.
19) 陳宗懋 主編, 1992,『中國茶經』, 上海文化出版社, p.11~15.
20)『三國遺事』券1「紀異」第1〈古朝鮮〉,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21) 달래는 소산(小蒜), 야산(野蒜), 산산(山蒜) 등이라고도 불리며 한국(충남, 강원, 경기, 황해, 함남) · 일본 · 중국 동북부 ·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기 때문에 지역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가진 식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봤을때 그 당시 마늘이 아닌 달래를 복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원문의 글자 역시 달래를 의미하는 蒜자를 쓰고 있다.
22) 이성동 외 3인, 2000,「쑥(艾)의 생리활성 물질과 이용」『한국식품영양학회지』제13집 5호, 한국식품영양학회, p.493~494. 표2) 쑥의 민속적 이용와 효능과 표3) 적용 부위별 쑥의 효능을 참고하면 실로 광범위한 분야에 있어서 쑥의 활용도를 확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달인물(즙)로는 복통이나 출혈, 두통, 토사 등에 효과가 있고 차로 만들어 마시면 감기, 기침, 두통 등에 효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식물로 취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3) 박성규 ․ 박종철, 1994,「쑥의 추출물 및 coumaric acid의 항균 활성」『한국생물공학회지』제9집 5호, 한국생물공학회, p.506~511. 실제 단오날이면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잡귀를 물리치고자 한 것과 민간에서도 쑥을 다발로 묶어 대문 옆이나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쑥의 냄새가 주술적 효과의 주체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때의 쑥은 단오날 채취한 것을 특별하게 쳤는데 지금도 상당수의 약쑥을 단오때 채취한 것이 약효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24) 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1997,『조선기술발전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p.58.
25) 황기덕, 1997,『조선 원시 및 고대 사회의 기술발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166.
26) 박선희, 전게서, p.89~93. 저자는 한반도의 경우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제1기층(B.C 6000년)에서 이미 뼈바늘과 가락바퀴가 출토되었고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유적 1기층(B.C 4,500년)에서는 베실이 꿰어져 있는 뼈바늘이 출토된데 반해 중국은 장강 하류 하모도유적 제4층(B.C 5,010년)에서 繩文이 새겨진 질그릇이 발굴되었고, 섬서성 서안시 반파촌 앙소문화층의 반파유적(B.C 4,210~4,840)에서 포의 흔적이 나타난 질그릇 등이 출토된 것을 봐서 마직물 생산의 역사는 동방문화권이 더 빠르다는 견해를 내보였다.
27) 賈大泉 ․ 陳一石, 1988,『四川茶業史』, 巴蜀書社, p.4.
28) (사)한국차문화협회 수원지회(http://www.suwontea.co.kr/index.html)
29)『茶經』上「一之源」, “其樹如瓜蘆.”
30) 치우치핑 著 / 감봉건 譯, 전게서, p.222.
31) 이창복, 2006,『원색 대한식물도감』2, 향문사, p.195.
32) 이창복, 2006, 전게서, p.395.
33)『茶經』下「七之事」, “廣雅云 荊巴間採葉作餠 葉老者 餠成以米膏出之. 欲煮茗飮 先炙令赤色 搗末置瓷器中 以湯澆覆之 用葱薑橘子芼之. 其飮醒酒 令人不眠”
34)『茶經』下「六之飮」, “或用葱薑棗橘皮茱萸薄荷之等 煮之百沸 或揚令滑 或煮去沫 斯溝渠間棄水耳 而習俗不已. 於戲! 天育萬物 皆有至妙 人之所工 但獵淺易.”
35) 이영문, 1992,「韓半島 出土 琵琶形銅劍 形式分類 試論」『博物館紀要』7, 檀國大學校 中央博物館, p.85.
36) 申采浩 著 / 李萬烈 譯, 1999,『註譯 朝鮮上古史』上, 丹齊 申采浩先生 記念事業會, p.121~123. 신채호는 B.C 10세기경부터 그 후 대략 5~6백년 동안을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徐 偃王의 국가라든가, 弗離之國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국 대륙 동쪽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정치집단들이다.
37) 윤내현, 1992,「고조선의 국가구조」『겨레문화』6, 한국겨레문화연구원, p.67~112.
38) 김한규, 2005,『천하국가天下國家』, 소나무, p.433. 저자는『說文』에서 말하는 貊國을 중국도, 한국도 아닌 제3의 역사공동체로 인식하고 이 맥인이 건립한 국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곧 조선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역사를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요동지역의 역사는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포함되지 않은 독립적인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9)『後漢書』券85「東夷列傳」第75〈前言〉,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 <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按:《校補》引<柳從辰>說, 謂[持]乃[得]之 , 《博物志》及《卿覽》九百四引《徐偃王志》可證, 各本注失正. 今據改.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후한서』에도 서언왕에 대한 언급이 고스란히 나와있으니 육지의 36국이 서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할 정도로 서국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40)『博物志』券7「異聞」第251〈徐偃王〉, “徐偃王志云: 徐君宮人姙而生卵. 而爲不祥 棄之水濱. 獨孤母有犬名鵠蒼 獵於水濱. 得所棄卵 … 生時正偃 故以爲名. 徐君宮中聞之 及更錄取. 長而仁智. 襲君徐國.” 해석하자면, “『서언왕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서군의 궁녀가 임신 끝에 알을 낳았다. 이를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 물가에 버리고 말았다. 한편 자식도 남편도 없는 늙은 노파가 곡창이라는 개를 기르고 있었다. 이 개가 물가에 사냥을 나갔다가 그 버려진 알을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 태어날 때 구부려 누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偃이라 이름지었다. 서나라 임금의 궁중에서 이 소문을 듣고 다시 그 아이를 찾아 데려갔다. 그 아이는 자라나 어질고 지혜로워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서나라 군주가 되었다.” 라는 의미다. 동명, 주몽설화와 상당히 흡사한 내용이며 역시 마찬가지로 활과 화살에 관련된 모티브도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41) 김상기, 1955,「東夷와 淮夷, 徐戎에 대하여(속완)」『東方學志』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p.16~18.
42) 申采浩 著 / 李萬烈 譯, 전게서, p.122. 저자는 불리지가 단군조선 본국과 연관이 깊은 인물로서 그가 단군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 동해안을 정복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두고 단군조선의 초기 건국지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후 불리지국은 제나라 환공 시절, 멸망당하고 단군조선은 중국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모든 고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43) 류제헌, 전게서, p.122~124.
44) 윤명철, 2004,『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p.24~30. 이미 절강성의 하모도유적에서 B.P 7960±100년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노가 발견되었고 산동반도의 대장산도 유적지에서는 B.C 6,600년의 것으로 보이는 선박 유물이 발견되는 등 지금으로부터 6~7,000년 전인 신석기 중기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오가는 沿岸航海가 이뤄졌을 것이며 장립미의 본산인 양자강 일대의 하마도유적을 통해봤을 때 해류의 흐름, 계절풍 등을 감안한다면 역시 양자강 일대와 한반도 서해안 사이의 해양교류 역시 가능했을 것이라 한다.
첫댓글 불리지국은 이상한 나라군요. BC 5-6C에 세워진 나라가 BC 7C에 망하다니.... 신채호님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기록을 하셨을까요? 불리지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나 연맹국으로 확실한 역사적 나라인가요? 이런 불리지국이 과연 중원문화권과의 교류로 동방문화권으로 대변되는 단국조선의 음다문화와 관련을 지을 수 있는근거가 될까요?
저도 그 연대가 이상해서 고민을 가졌지만...내용의 주가 아니어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에 대한 제 생각을 따로 안 적은 것은 지금 보니 조금 잘못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암튼, 이 불리지국에 대해서는 더 찾아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여기서 불리지국과 서국을 제가 근거로 든 이유는 중국 동해안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던 중화문화권과 다른 문화적 요소를 지닌 정치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그들 세력은 분명 중화문화권과 동방문화권의 중개자 역할도 했을테니 양자의 차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꼭 언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암튼 이에 대해서는 더 공부를 해야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