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정말로 남는 장사라니까 / 한비야
몇 사람 간단히 죽여버릴 것같이 작열하는 태양. 그림자조차 지지않는 햇볕 쨍쨍한 오후. 가만히 앉아 있어도 가슴 사이로 양쯔강, 황허강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명색이 학생이니 덥다고 본분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법. 공부에도 요령이 있다. 머리도 식히고 신나게 놀면서 재충전도 하고 동시에 공부하는 법이 있다면? 당연히 귀가 쫑긋해질 것이다. 그 비법은 바로 여행이다.
집에 있는 빠꼼이보다 돌아다니는 멍청이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책에서 배운 것, 신문, 방송,영화에서 수없이 보고 들은 일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겪어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공부는 없기 ?문이다.
어학 연수를 온 사람이라면 방학을 이용해서 왔든, 휴학을 하고 왔든, 또 다른 청운의 꿈을 품고 왔든 공부 기간의 4분의 1은 여행을 하기를 적극 권한다. 그것도 여럿이 몰려다니는 여행 말고 혼자서, 비행기나 고급 기차를 타는 편한 여행 말고 저경비,육로 여행으로말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여행은 더없이 좋은 언어 연습장이자 자기 실력 실험장이며, 그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실력이 진짜 실력이고 영원히 남는 실력이다.
그러니 중국어에 자신이 없다고 자기보다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해 행위다.
중국에 왜 왔는가? 편하려고 왔는가? 말을 재대로 배우려고 왔다면 무조건 말을 많이 듣고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혼자 하는 여행이야말로 최적의 기회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덧 중국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나도 아쉬운 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게 마련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정말 `멍청이`다.
여행 기간도 중요하다. 너무 짧으면 오가는 데 시간 다 보내기 쉽고 너무 길면 놀다가 간다는 자책감이 생길 테니까. 방학을 이용해 온 학생이라면 일주일 기간의 여행을 두 번쯤, 1년간 왔다면 한 계절에 한 번 정도 가는데 여름, 겨울 방학에는 좀 길게, 좀 멀리 가면 좋겠다. 이렇게 시간이 넉넉할 ?는 이름난 관광지를 메뚜기처럼 튀어 다니는 것보다 실크로드, 윈난성, 동북3성(헤이룽장, 지린, 랴오닝), 쓰촨성, 티베트 등 주제가 있는 동네를 충분히, 찬찬히 보았으면 한다.
여행 배낭을 꾸릴 때 고추장, 김과 함께 꼭 챙겨 갔으면 하는 것이 있다. 한국 돈이나 한국 풍물이 들어 있는 그림 엽서등 우리 나라를 소개할 만한 물건들이다. 다니다 보면 우리를 소개하고 싶은 때도, 해야 하는 때도 참 많다. 그럴 때마다 이런 작은 소품들이 얼마나 요긴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그런 `시청각 자료`와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지식이다. 왜 노는 애기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교장 선생님 같은 소리를 하냐고? 지난 주 학원에서 있었던 일 ?문이다.
회화 시간이었는데, 그날의 주제는 중국의 명승고적이었다. 중국인 선생이 자금성, 만리장성, 둔황 석굴에 대한 역사와 전설을 설명하면서 여러 나라 학생들에게 이런 명승고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일일이 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한국 학생을 지목하면서 한국의 명승고적을 한번 소개해보라고 했다. 나와 친한 그 학생은 우리 반 한국 학생 가운데 제일 중국말을 잘하기 ?문에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한동안 아주 곤란하고도 난처한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메이여우(없어요)``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 메이여우라고? 그 수업이 끝난 후 따지듯이 물었다.
``너 아까 왜 그렇게 대답했니?``
``그게 말이에요. 자금성, 만리장성 말하다가 경복궁이나 석굴암 이야기 하려고 어쩐지 초라해 보여서요.``
``초라해?``
``크기로 보나 역사로 보나 그렇잖아요.``
그 학생은 조금 민망했는지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 얼굴을 보며 더 이상 다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크기나 역사로만 따질 수 있겠는가. 문제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지.
왜 아까 이 말을 하지 않았나 속이 끓어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혼자 씩씩거렸다. 특히 그 학생은 국제관계학전공으로 세계를 무대로 일할 거라지 않은가. 영어와 중국어는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이 갖추어야할 세계화의 필수 도구라며 무섭게 공부하는 사람이니 더욱 이 말을 해주어야 했는데.
세계일주 동안 내 배낭에는 태극기와 단소, 그리고 우리나라 그림 엽서가 어김없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가지고 다녔는데 외국인에게 그림엽서를 보여줄 때마다 그 인기에 내가 더 놀랐다.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독대, 메주가 주렁주렁 걸려 있는 대청마루,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는 마을 어귀풍경 등을 보면서 무척 흥미로워한다. 한 장, 한 장 설명해 주면 아주 신기해 하며 다른 것도 자꾸만 물어본다.
태극기는 또 어떻고, 여행자나 현지인과 주소를 주고받을 때 내이름 옆에 색 볼펜으로 태극 무늬를 넣어준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게 마련인데, 그 때 자연스럽게 우리 국기 자랑을 한다. 태극의 빨간 부분은 존귀와 양을, 파란 부분은 희망과 음을 뜻하는데 세상 모든 사물과 이치가 바로 이 음양의 조화라는 뜻이라고 말해준다. 귀퉁이의 네 괘는 각각 하늘, 땅, 해와 달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면 깜깍 놀란다. 그럴 때 배낭 안의 작은 태극기를 꺼내 보이면 존경을 담은 손길로 태극기를 만진다. 한 장의 국기 안에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냐면서,
단소도 그렇다. 현지인 집에 민박을 하거나 배낭 여행자 숙소에 며칠 묵게 되면 꼭 단소 불 일이 생긴다. 외국인들끼리 섞여서 놀때는 노래와 춤이 빠지지 않는데 이럴 때마다 나는 단소로 `군밤타령`이나`아리랑` 등을 분다. 느리게 불면 한없이 슬프고, 빠르게 불면 흥이 저절로 솟는 대나무 소리, 신비한 `한국의 소리`가 좌중에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한글은 더욱 그렇다, 여행 중 친해진 사람들에게 주는 최대의 기념품은 한글로 써준 이름이다. 나라 밖에는 우리가 고유한 말과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휠씬 많다. 한국에서는 한문을 쓰고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사용하는 줄 안다. 그래서 내가 한글을 써주면 무지 놀란다.
``아니, 동그라미와 네모 그리고 작대기가 어떻게 내 이름이 된 거예요?
``
지금이 바로 내가 우쭐해지는 순간이고 상대방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후에는 화제가 흘러가는 대로, 내가 아는 대로 `한국`얘기를 해주곤 했다.
다녀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중국만 해도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옆 나라인 우리 나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일부러 기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여행 중에 자연스런 기회가 있다면 이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 정치, 경제 상황을 제대로 말해주어야 한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한일 관계, 한중 관계는 어떻게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등, 이런 주제가 나오면 제발 모른다고 슬쩍 넘어가지말자, 아는 대로라도 충분히, 적어도 성의 있게 얘기해 보자.
대부분의 서양 여행자들은 우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당면 문제에 대해 정말 잘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만 설명을 해주어도 당장에 표정이 달라지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자주 만나는 일본 여행자들도 보통은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러나 과거사를 가지고 이들과 애기할 때가 되면 우리 나라 학생들은 설명이나 토론 이전에 감정이 앞서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쉽지는 않지만 이럴 때 상황에 맞게 쉽고도 차분하게 설명해주도록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 그것이 이유인가?
생각해보라. 아주 옛날 고릿적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에 알리고 그 문화를 서로 옮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여생자, 유학생, 구도자 그리고 상인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 유학 중에 여행하는 한국 학생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인이역을 맡은 것이다.
혹은 해외 여행이라는 사회적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서, 문화 수용자와 전달자로서, 더구나 세계를 무대로 일하려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우리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국제화, 혹은 세계화란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섞여서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술 칵테일이 아니라, 섞어 놓아도 각각 제 맛을 내야 더 맛있어지는 과일 칵테일 같은 것이란 사실이다. 기술의 발달로 세상이 점점 획일화, 정형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수록 각 문화의 제 맛을 제대로 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는 절대로 거창하고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 것에 대해 호기심을 보일 때 자신 있게 설명해주는 것부터 시작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나온다. 나 역시 지난 수 년 간 훈련을 해왔고 지금도 열심히 훈련 중이다.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명심할지어다. 여행 중에는 보는 것만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뭐라고? 놀러가는데 이런 얘기는 너무 골치 아프지 않냐고? 그러게 잘 노는 것도 힘들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