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탈렌트 최진실 자살
아버지 최국현과 어머니 정옥숙 사이에서 1남 1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가수 겸 배우인 최진영이 동생이다. 선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등장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다. 1988년 문화방송(MBC) 특채 탤런트로 발탁되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서 1988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질투〉, 〈별은 내 가슴에〉 등의 여주인공을 맡으면서 국민적인 탤런트 대열에 올라섰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미스터 맘마〉(1992),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편지〉(1997), 〈은행나무침대1-단적비연수〉(2000) 등 다수의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20여 년간 텔레비전과 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2000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조성민 선수와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94년 전 매니저 배병수가 로드매니저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증인으로 법정에 서면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조성민과의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으면서 가정 내의 문제가 매스컴을 통해 상세히 알려져 여배우로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9월 마침내 조성민과 합의이혼하고 배우 생활도 중단하였다.
최진실은 2005년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주부 맹순이 역으로 열연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2007년에는 MBC 일일드라마 〈나쁜여자 착한 여자〉에 출연해 인기를 이어갔고, 2008년 MBC 주말 드라마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정준호와 호흡을 맞추면서 국민 배우로서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008년에는 지역방송인 OBS경인방송에서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라는 토크쇼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2008년 9월 말 친구 정선희의 남편이자 탤런트였던 안재환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고, 더욱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안재환을 상대로 한 사채업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소문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2008년 10월 2일 오전 6시 15분경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지인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와 유서 등의 증거물과 사체 부검 결과 자살로 판정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최진실은 이혼 후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었으며, 두 자녀의 양육 문제, 연예인의 위상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탤런트 안재환 사망 이후 사채 연루설 등의 소문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최진실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갑산공원 가족묘에 안치되었다.
최진실 사망 사건 이후 국회에서는 인터넷 악성 댓글 유포에 대한 제재 조치로 가칭 ‘최진실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최진실 법’은 사이버 모욕죄 도입, 인터넷 실명제 확대 등을 포함하는 정보통신망이용촉진법 개정 법안들의 가칭이었으나, 2008년 10월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감안해 법안명에 실명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상 경력으로는 1991년 대종상영화제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1997년 청룡영화제 인기스타상,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1998년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2006년 백상예술대상 방송 부문 최우수 여자연기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자전적 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1998)가 있다. /브리태니커
[1994년]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막
30억 아시아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12회 아시안게임이 1994년 10월 2일 히로시마 빅아치 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히로시마에서는 10월 16일까지 총34개 종목 3백37개의 금메달을 놓고 15일간의 열전을 펼쳤다.
이번 대회는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5개 공화국이 처음 출전, 북한을 제외한 42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졌다. 9일에는 일본 히로시마 광역공원 주경기장을 출발, 평화공원에 이르는 42.195㎞ 코스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서 황영조 선수가 2시간11분13초로 1위로 골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최종일 한국은 육상 남자 1천6백m 계주서 금메달을 추가, 금63 은53 동 63개로 중국(금1백37 은92 동60)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홈팀 일본은 한국과 금 4개차로 3위를 차지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폐막
1988년 9월 17일부터 16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1988년 10월 2일 폐막식과 함께 막을 내렸다. 160개 IOC회원국에서 1만 3,303명의 선수단이 참가, 237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로 메달순위 1위를 차지했고, 동독이 37개로 2위, 미국이 36개로 3위를 차지했으며 개최국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기록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던만큼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5개가 쏟아져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1985년] 록 허드슨(Rock Hudson ) AIDS로 사망
← 자신의 AIDS 감염 사실을 공개하면서까지 AIDS 퇴치운동에 힘쓴 미국 영화배우 록 허드슨.
본명 : Roy Harold Scherer Jr. 1925년 11월 17일 출생
1985년 10월2일,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AIDS로 숨을 거뒀다. AIDS로 인한 첫 헐리우드 스타의 죽음에 미 영화계는 물론 레이건 대통령까지 나서 애도를 표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몸에 드러난 반점을 공개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 그의 용기에 대한 경의이기도 했다. 사후에 미 의회가 AIDS 연구를 위한 긴급지출을 가결할 정도로 그의 죽음이 사회에 미친 파문은 컸다.
188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그는 50∼60년대의 전형적인 미국 배우였다. ‘무기여 잘있거라’ 등 65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특히 제임스 딘과 공연한 ‘자이언트’로 세계적인 스타 대열에 올랐다.
1960년대 중반, 그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자 허드슨이 언젠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지레 짐작한 FBI 국장 에드거 후버가 그의 약점을 캔 적이 있었다. 이때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이 동성애 편력이었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미 헐리우드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년간의 결혼생활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간을 동성애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한 동성애인이 “허드슨이 에이즈 감염사실을 숨겼다”며 죽은 자를 상대로 보상소송을 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3년]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Nurmi, Paavo Johannes) 사망
1897. 6. 13 핀란드 투르쿠~1973. 10. 2 헬싱키.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대회의 1만m, 1만m 크로스컨트리 경주, 1924년 파리 올림픽대회의 1500m, 5000m, 1만m 크로스컨트리 경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대회의 1만m 경주 등에서 우승하였다. 개인경기 부문에서 6개, 단체경기 부문에서 3개, 모두 9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21~1931년에 14번의 세계기록을 수립하여 달리는 인간기계라 하였다. 최고기록은 5000m에 14분 28초 2, 1만m에 30분 6초 등이다. 1932년 올림픽대회 직전에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에서는 성화릴레이의 최종 주자였다.
[1968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사망
1887년 7월 28 프랑스 블랭빌에서 출생하였다.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911년 파리에서, 1912년 뉴욕의 아모리쇼에서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3년부터 다다이즘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1950년] '피너츠(Peanuts)' 연재 시작
찰스 슐츠의 만화 ‘피너츠(Peanuts)’가 1950년 10월 2일부터 미국 7개 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스누피’ ‘찰리 브라운’ 등 피너츠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은 2000년 2월 12일 슐츠가 암투병 끝에 타계할 때까지 50여년에 걸쳐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피너츠’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은 전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75개국 2600개 이상의 신문에 연재됐고 50편의 TV 만화 영화로도 제작됐다. 1천4백여 종에 이르는 피너츠 만화도 매년 3억부 가량 판매됐다.
1965년에는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라는 CBS 특집으로 에미상을 수상했고 ‘좋은 사람 찰리 브라운’이라는 뮤지컬이 히트하기도 했다. 99년 결장암에 걸린 슐츠의 은퇴 선언으로 ‘피너츠’는 종료됐지만,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판매되면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연재 40주년인 1990년 그에게 예술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 그의 사후 미국도 미 의회 최고의 영예인 황금메달을 수여했다./조선
[1946년] 미군정, 대구 지역 계엄령 선포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 시위에 대해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유혈 시위는 남조선노동당의 지시로 시작된 총파업 투쟁 중 발생했다. 처음에는 노동자와 시민이 참가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급격히 과열되어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을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 폭력이 잇달았고, 마침내 10월 2일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계엄령으로 대구 시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946년말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10월대구폭동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좌익세력과 시민이었다. 주요 좌익간부들은 검거되었고, 폭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수감되거나 산으로 또는 지하로 잠적했다. 미군정과 우익은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좌익의 가장 커다란 대중투쟁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브리태니커
[1927년] 스웨덴 물리학자 아레니우스 사망
Svante August Arrhenius, 1859~1927
웁살라 근처의 비크 출생. 187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 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화학과 수학을 배워 1881년에 졸업하였다.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관하여 연구,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논문으로 발표하여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논문으로 1884년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W.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 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다. 1891년 독일의 기센대학에 물리화학강좌가 신설되어 아레니우스를 조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러서야 스톡홀름대학에서 물리학강사의 지위를 얻어 스웨덴에 머물기로 하였다.
1896년 이온화설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 스톡홀름대학 학장에 임명,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설립,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다. 1927년까지 그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 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우주물리학에서는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지학에서는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저서가 있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하다.
[1921년] 장지연 사망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1894년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썼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총무위원이 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 時事叢報〉 주필을 맡아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1901년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었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으나 이듬해 강제해산되었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주필을 맡았다가 신문이 폐간되자 각지를 방랑하다 귀국하여 1909년 진주의 경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했다. 이듬해 8월 29일 〈해조신문〉에 황현(簧炫)의 〈절명시 絶命詩〉를 게재함으로써 〈경남일보〉가 폐간당했고 그뒤 고향에서 칩거했다. 〈유교연원 儒敎淵源〉·〈대한신지지 大韓新地誌〉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1920년] 훈춘 사건 발생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본군에게 매수된 장강호를 두목으로 하는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했다. 이 사건은 일제가 간도지역의 조선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간도 출병의 구실이 되었다. 당시 간도는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지사들의 활동 무대였다.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은 마적단 두목을 매수해 상가를 약탈하고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에 방화하는 등 난동을 사주했다. 이로 인한 일본측의 피해는 사망 13명, 중상 11명, 경상 20여 명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난동으로 덮어 씌우고 재만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와 경찰을 출동시켰다. 그해 10월부터 이듬해인 1921년 5월까지 토벌을 계속해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고, 건물과 곡물이 불타는 등 커다란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일제가 의도했던 대로 이 사건 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상실되고 간도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브리태니커
[1900년] 김동인(金東仁) 출생
← 김동인(왼쪽)
1900년 10월 2일 태어남 / 1951년 1월 5일 죽음
초기 근대문학의 확립과정에서 문단을 주도했던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평양교회 장로였던 아버지 대윤(大潤)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옥씨(玉氏)는 후실로 전실에게서 장남 동원이 있었고, 동인·동평·동선은 옥씨 소생이다.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학원 중학부에 입학, 학원이 문을 닫자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해 1916년에 졸업했다. 이때부터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했다.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잠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4월 김혜인(金惠仁)과 결혼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주요한․전영택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1919. 2)을 비롯해 <배따라기>(1921. 5) 등을 발표했다.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이라 할 수 있는 <영대 靈臺>를 창간했다.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예사조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자연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김연실전>․<발가락이 닮았다> 등과, 유미주의 계열에 속하는 <광염 소나타>․<광화사>,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붉은 산>, <젊은 그들>․<운현궁의 봄>과 같은 역사소설 등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의 소설은 한국 문단이 이광수의 계몽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제시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빈곤과 불면증,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다가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1955년 사상계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시행했으나, 사상계사의 재정난으로 1967년 제12회 수상을 끝으로 중단되었다가 12년 만인 1979년 동서문화사에서 인수해서 시상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크게 단편·장편·평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단편소설로는 자연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배따라기〉·〈김연실전〉·〈발가락이 닮았다〉 등과, 탐미주의 계열에 속하는 〈광염 소나타〉·〈광화사〉,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붉은 산〉 등이 있다. 〈감자〉는 우리나라 초기의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단편소설은 특유의 직선적이고 간결한 문체로 썼으나, 후기에 쓴 역사소설이나 사담 등을 포함한 장편소설은 상업적·통속적 경향이 짙다. 역사소설로는 흥선대원군을 주제로 한 〈젊은 그들〉·〈운현궁의 봄〉과 수양대군을 주제로 한 〈대수양〉이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유행하던 역사소설과는 달리 역사로부터의 교훈보다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평론으로 〈제월(霽月) 씨의 평자적(評者的) 가치〉(창조, 1920. 5)·〈조선근대소설고〉(조선일보, 1929. 7. 28~8. 16)·〈춘원연구〉(1956) 등이 주목할 만하다.
[1869년]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출생
인도건국의 아버지로 1922년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후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고 불리게 되었다.
1869년 10월 2일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남아공으로 건너가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계속된 투쟁으로 간디는 일약 세계의 간디로 유명해졌다. 1915년 귀국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파를 지도하며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을 실시했다.
1924년부터는 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소금세 신설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수차례의 투옥생활을 하기도 한 간디는 1948년 1월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중 반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847년] 독일의 군인 겸 정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출생
Paul von Hindenburg, 1847~1934
폴란드 포즈난 출생. 융커(Junker)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다. 제4군단장에 취임하였다가 1911년에 퇴관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8군사령관(참모장은 E.루덴도르프)으로 임명되어 8월 말의 타넨베르크전투에서 크게 이겼고, 이어서 대(對)러시아 전선에서 공을 세워 군신(軍神)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6년 여름에는 참모총장이 되어, 참모차장 루덴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동․서양 전선에서의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정치에서는 보수파의 지지로 가혹한 군부독재 체제를 수립하여 사회주의운동이나 민주적 개혁파와 대립하였는데, 전시 통제경제의 면에서는 성공하였다. 패전 후에 일단 은퇴하였으나, 1925년 4월 보수파의 지지로 바이마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2년의 대통령선거에 재출마하여 재선되었으나, 융커와 대자본가에게 설득되어 1933년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함으로써 제3제국 출현의 길을 열어 주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실패
鄭汝立 1546~1589(명종 1~선조 22)
조선 중기 사상가․혁명가.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동래(東萊). 전주(全州) 출생. 어릴 적에 늠름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선조 3) 과거급제하여 예조좌랑․수찬(修撰)을 지냈다. 이이(李珥) 문하에 출입하면서 스승의 후원을 받은 데다 학식과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얻었다. 처음에는 서인(西人)이었으나, 이이가 죽고 난 뒤부터는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어울려 서인에게 미움을 받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면서 진안(鎭安)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지어놓고 강론하였는데, 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전주(全州)․태안(泰安)․금주(金州;지금의 金海) 등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대동계는 반(班)․상(常)․노(奴)의 제한 없이 모두가 계원이 될 수 있었고 조직의 범위도 광역적이었으며,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87년 왜선들이 전라도에 침범하였을 때 전주부윤(全州府尹)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황해도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모사(謨士)의 세력들을 규합하였고, 장차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89년 소문이 퍼져 기밀이 누설됨에 따라 서둘러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안악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이 이를 탐지하여 박충간(朴忠侃) 등과 함께 고변(告變)하여 관련자들의 토벌이 시작되었다. 이 모반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곧 기축옥사(己丑獄事)이다.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의 죽도로 도망하였으나 관군의 포위 속에서 결국 자살하였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어,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은 평소에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고 역설하였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에 대해서도 그것이 성현의 통론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왕통에 따르는 동성계승(同姓繼承)이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라 누구든 자격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며, 요(堯)․순(舜)․우(禹)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 기존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며, 가히 반왕조적 혁명사상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反逆鄕)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그 뒤 호남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1434년] 앙부일구(仰釜日晷) 제작
1434년에 만든 해시계 가운데 하나.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한다. 네 발 달린 반구형(半球形)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앙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동제로 검은 칠을 한 위에 은상감으로 글씨 등을 새겨넣어 훌륭한 예술품으로 꼽힌다. 세종은 오목해시계인 앙부일구 이외에 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는데, 특히 앙부일구는 일반 서민들이 보기 쉽도록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크게 만들어 세워 한국 최초의 공중(公衆) 시계로서도 의의를 가진다. 세종 때의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8세기 전후 작품들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경기도 여주군(驪州郡)의 영릉전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2기의 앙부일구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845호. 국립중앙박물관․영릉전시관 소장.
[1187년] 살라딘,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함락
← 다마스쿠스의 살라딘 입상
살라딘은 쿠르드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누레딘왕조를 섬겼고, 1169년경 파티마왕조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1171년 파티마왕조를 넘어뜨린 뒤 시리아 정복에 나서고,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Yousuf)였다. 이집트에 군사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국가가 공인한 종교를 시아파(派)로부터 수니파[正統派]로 바꾸어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을 수행하여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322년] 아리스토텔레스 사망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그밖에
1999년 80년대 농구 스타 김현준 코치 교통사고 사망
1998년 ‘제2의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식출범
1997년 한국-칠레, 무역산업협력협정 체결
1997년 유럽연합 15개국 외무장관들, 통화통합 국경철폐를 골자로 한 암스테르담조약 체결
1995년 미국 미식축구선수 O.J.심슨 무죄평결
1994년 일본 자위대 병사47명 르완다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이르 고마시에 도착
1982년 이란방송, 테헤란서 폭발사고로 사망 60명, 부상 700명 발표보도
1981년 이란 대통령에 호자톨레슬람 알리 하메네이 선출
1977년 인도 前 수상, 간디여사 독직혐의로 체포
1976년 망향의 동산 준공
1976년 반월에 새 공업도시 건설 발표
1972년 코펜하겐서 사상초유의 성(性)박람회 개최
1971년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 국회통과, 공화당 항명파동 유발
1970년 한국-엘살바도르, 무역협정 체결
1963년 대통령 입후보자 허정, 야당단일후보 위해 사퇴선언
1961년 새 정부조직표 공포(1원 12부 2처 4청)
1960년 효창운동장 준공
1958년 프랑스, 대(對)알제리아 5개년계획 발표
1958년 문교부, 외래어표기 5원칙 수립을 발표
1958년 기니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5년 세계최초의 컴퓨터 '에니악' 가동 중단
1950년 유엔의 소련블럭, 한국전 임시휴전협상안 제의
1948년 제주도 폭동진압군경비대 반란
1942년 미국, 드골 망명정권 승인
1941년 독일군 모스크바 총공격
1931년 차(茶) 회사인 립턴사를 설립한 영국의 상인 립턴 사망
1920년 독일의 작곡가 막스 브루흐 사망
1904년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 출생
1901년 영국, 처음으로 잠수함 진수
1899년 한성의학교 개교
1898년 배화학당 설립
1896년 한성~인천간 전화 개통
1852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출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1852년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3세로 즉위(제2제정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