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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이다.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1394년(태조 4년)에 처음 지어졌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의 현판들은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知: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2]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의 중앙통로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께 원인 모를 불이 나,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2층 지붕이 붕괴되었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완전 붕괴가 되었다.
화재 진압중이던 오후 11시 5분쯤 숭례문에 걸려있던 현판은 소방관들이 톱으로 현판을 잘라낸 뒤, 바닥으로 떨어뜨린 다음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다
[편집] 역사
- 1395년(조선 태조 4년) - 숭례문 시공
- 1398년(조선 태조 7년) - 숭례문 준공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5]
-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6]
- 1592년 5월 3일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으로 진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함정일까봐 여러 번 정탐병을 보낸 후 조심스레 흥인지문으로 서울 진입.[6]
-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7]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8]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9]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10]
- 1996년 11월 -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문화재위원 49명,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2]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13]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 2005년 11월 -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 2005년 11월 -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금지된 숭례문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14]
- 2008년 2월 11일 -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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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
[편집] 사건
- 1991년 8월에는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고, 1997년 2월에도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15]
-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쯤, 원인 모를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현판을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고 화재 진압에 총력을 다했으나 2월 11일, 오전 0시 25분 쯤,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에 오전 0시 58분 쯤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곧 2층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쯤에는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되었고 5시간 만에 전소되었다.[16]
[편집] 원인
처음엔 전기시설의 누전등으로 인한 화재라고 보도되었으나 화재 발화점인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었고 1층에 있었던 전기시설은 정상이였다고 나중에 수정보도되었다. 이에 이어 숭례문에 흰색 상의를 입은 남성이 가방을 메고 휴대용 스틸 사다리를 타고 철장을 넘어 들어갔다는 제보자가 나타나 이번 사건의 원인은 방화로 추정된다.[17]
[편집] 피해 규모
2008년 2월 11일, 새벽 1시 55분 쯤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을 제외하고 1, 2층이 모두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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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논란
숭례문 화재 진압하는데 5시간 소요 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 경비 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에 의존하고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위험에 노출되온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 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을 감안해서 신중한 진압작업을 펼쳤으나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하고 소화 약재를 뿌리기도 했으나 진압에 실패했다.
[편집] 국보 1호 변경 논란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함락한 문으로서, 일본군의 조선 정벌의 역사적 상징물이라는 이유로 일제시대 때 보존되었으며,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 아울러 조선총독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열지 못했던 문을 모두 철거하였다.[출처 필요] 해방 이후에도 국보 1호로 남대문을, 보물 1호로 동대문을 지정하였다.
[편집] 변경 반대론
-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다.
- 문화재의 가치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 교체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
[편집] 변경 찬성론
- 남대문은 국보로서 대표성이 없다
- 역사적 예술적 가치부족
- 일제가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
[편집] 논란
숭례문 화재 진압하는데 5시간 소요 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 경비 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에 의존하고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위험에 노출되온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 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을 감안해서 신중한 진압작업을 펼쳤으나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하고 소화 약재를 뿌리기도 했으나 진압에 실패했다.
옛사랑 / 이문세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밑 불빛들 커져가면 옛사랑 그이름 아껴 불러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나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것같지 않던 지나온 내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제 그리운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흰눈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거리 흰눈에 덮혀가고 하얀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사랑이란게 지겨울때가 있지 내맘에 고독이 너무흘러넘쳐 눈녹은 봄날 프르른 잎새위에 옛사랑 그대모습 영원속에 있네
흰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혀가고 하얀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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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