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농담 같은 진실(이기쁨)
하나님의 사자가 임박한 소돔성의 심판을 엄중히 경고했을 때, 롯의 예비 사위들은 그 준엄한 외침을 한낱 ‘농담’으로 치부하며 비웃었습니다. 눈앞의 화려한 세속적 풍요와 육신의 쾌락에 영안이 가려진 이들은 심판의 전조를 전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영적 무감각의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던 비옥하고 풍요롭던 소돔의 땅은 쏟아지는 유황불 아래 철저히 파멸하였고, 오늘날 그 어떤 생명체도 잉태할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즉 ‘사해’라는 지리적 흉터로 남아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경고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맹목은 비단 소돔성만의 비극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고 조롱해 온 거역의 역사였습니다. 노아가 마른하늘 아래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며 다가올 대홍수를 예고했을 때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라 부르며 조롱했고, 애굽의 강대함을 의지하던 바로는 모세를 통해 선포된 재앙의 경고를 콧방귀 뀌며 무시하다가 나라의 근간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이 미련함은 현대 역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피난 경고 삐라를 손에 쥐고도 비웃으며 집을 지키다 한순간에 화를 당했던 이들의 모습은, 참된 진리와 살길을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영적 착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악과 배도, 그리고 우상숭배로 얼룩진 말세의 대환난 가운데서도 영적 대추수라는 거대한 구원의 섭리를 묵묵히 진행하고 계십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극심한 한계 상황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대면하고 변화되는 탈북민들의 극적인 역사처럼, 세상이 겪는 환난과 고난은 인간의 깊은 교만을 깨뜨리는 도구가 됩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영적으로 가난해지고, 마침내 하늘을 향해 부르짖게 됩니다. 결국 세상의 환난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서곡이지만,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완악한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설적이고 강력한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 때에 한국 교회와 전 세계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통해 영적 추수를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이 시대를 분별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노자의 도덕경 41장에 언급된 "어리석은 이들이 비웃지 않으면 참된 도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세상이 종말론과 심판, 창조 질서를 비웃는 것은 복음이 부조리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미디어와 세속 문화가 성경의 진리를 고리타분한 농담처럼 여기는 이 시대에, 부끄러워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구원의 메시지를 담대히 선포하는 영적 담대함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욥이 고난 끝에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티끌 속에서 회개했던 것처럼,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우리의 교만과 영적 나태함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는 세상 속에서, 나부터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매일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며 깨어 기도하고, 무릎으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영적 사역자가 되는 것만이 마지막 환난 날에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유일한 길임을 가슴 깊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사자
창세기 22장 모리아산의 제단 앞에서 독자 이삭에게 칼을 대려던 아브라함의 손을 급박하게 멈추어 세우고, 그의 온전한 순종을 확증해 준 존재는 다름 아닌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이 ‘여호와의 사자’의 실체는 오랫동안 신학자들의 깊은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로 천사를 뜻하는 ‘말라크(Malakh)’는 왕을 뜻하는 ‘멜레크(Melekh)’와 자음 구조가 동일하여, 그 명칭 자체에 우주적 통치자의 권위가 깃들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 속에서 이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피조물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동일시하며 주권적인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원문의 동일한 영적 존재(angel)를 문맥에 따라 ‘천사’와 ‘사자’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번역한 선진들의 영적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계시를 간접적으로 전달할 때는 ‘천사’로 표현한 반면, 인간의 역사와 삶의 현장에 직접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만나고 역사하실 때는 ‘사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제물을 초자연적인 불로 사르신 분도,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하며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이름을 부여하신 분도 바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대리자를 넘어 하나님 자신으로 고백되는 신비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야곱이 그 격정적인 만남 끝에 그곳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뜻의 ‘브니엘’이라 고백한 것처럼, 구약에 현현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베들레헴 탄생 이전,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Pre-incarnate Christ)’이십니다. 예수님은 크리스마스 날 이 땅에 비로소 처음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여호와의 사자로, 또한 신비의 평강 왕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주님의 백성들을 직접 찾아와 만나 주시고 인류 구원의 긴 역사를 친히 다스려 오셨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와 강단이 마주한 가장 큰 위기는 복음을 전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복음의 본질이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실제’를 선포하기보다 세상의 안목에 보기 좋고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위로의 소리만 늘어놓는 데 있습니다. 사도의 첫째가는 자격이 처음부터 승천의 순간까지 주님과 늘 동행하며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듯이, 참된 전도자는 머릿속 지식이나 교리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살아서 숨 쉬며 동행하시는 ‘임마늘엘’ 예수님을 날마다 인격적으로 깊이 대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수많은 신앙인과 지도자들이 불의한 세상의 압력과 거짓된 협박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타협하는 어두운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의 시대처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깨어 있는 7천 명의 거룩한 선지자들을 여전히 남겨두십니다. 역사 속에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때, 우리는 어떠한 영적 전쟁에서도 결코 패하지 않고 날마다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눈앞의 불의와 비진리에 비겁하게 굴복하지 않고, 날마다 우리의 삶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며 임마누엘 예수님과 뜨겁게 동행하는 자들이야말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간절히 찾으시는 이 시대의 참된 예배자입니다.
거룩한 그루터기
이사야 6장은 경건했던 우시야 왕이 서거하여 국가적 위기와 슬픔에 잠긴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시작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할 때,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창화하며 찬송하는 영광스러운 보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압도적인 거룩함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더러운 죄를 깨닫고 파멸을 직면하며 통곡하지만, 제단 숯불로 입술을 정하게 하시는 속죄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후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 소리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며 사명자로 일어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매우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모순된 경고는, 하나님이 그들의 영적 귀와 눈을 막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완악한 인간들이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고 삶을 고침받기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었음을 드러냅니다. 참된 진리를 선포하면 세상은 이를 비웃고 거절합니다. 오늘날의 목회 현장 역시 복음의 본질인 자아 부인과 십자가를 선포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기복주의적 타협으로 일관하여 위기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래성 같은 신앙은 작은 시련 앞에서도 추풍낙엽처럼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사역의 절망 속에서 이사야는 왜 자신을 보내시는지 원망하지 않고, 오직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며 심판의 기한을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성읍과 가옥이 완전히 황폐해지고 토지가 황무하며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라고 대답하십니다. 인간은 편안하고 안전할 때 결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영혼의 진정한 자각과 각성은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황폐해질 때, 곧 고난 속에서 심령이 가난해질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 세대의 끊임없는 정세적 혼란과 환난은 인간의 교만을 꺾고 창조주를 대면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은혜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을 선포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할지라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그루터기가 남아 새 생명의 싹을 틔우듯,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남겨두신 '거룩한 씨'인 그루터기가 존재한다는 약속입니다. 이는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숨겨두셨던 역사적 신비와 일치하며, 겉으로 화려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은밀한 중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짜 신앙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 없이 이어집니다.
오늘날의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의 재난과 영적 쇠퇴를 보며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해진 영혼들을 품고 영적 대추수를 예비하는 기도의 사명자로 일어서야 합니다. 다수의 군중이 육신적 안일함과 기복적인 가짜 신앙에 휩쓸려 믿음을 저버릴 때, 불의와 비진리에 무릎 꿇지 않는 '거룩한 그루터기'로 굳건히 남아야 합니다. 우리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시간을 쪼개어 무릎으로 나아가는 철저한 기도와 말씀의 훈련을 통해, 황폐해진 이 땅에 새 소망의 싹을 틔우는 거룩한 씨앗이자 전도자로 끝까지 쓰임받아야 합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7월 4주 과제
창세기 22장 7절에 나오는 이삭의 질문인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다. 이삭은 번제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불과 나무는 준비되어 있는데 정작 번제할 어린 양이 보이지 않자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하며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었다.
이 말씀을 통해 설교자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예배에는 찬송과 기도 말씀과 헌금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의 형식이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사람 자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가 신약에 와서는 예배로 이어졌으며,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헌금의 액수나 예배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의 삶 전체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이삭이 찾고 있던 번제할 어린 양이 사실은 이삭 자신이었다는 점이 말씀의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로만 헌신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실제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또한 입다의 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의미를 설명한다. 입다의 딸은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민족의 구원을 생각하며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리고자 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헌신은 단순히 어려운 일을 하거나 직분을 맡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거룩한 제물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를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온전히 드려지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겠다고 느꼈다. 이삭이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처럼 나 역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헌신은 말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순종하고 희생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앞으로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기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