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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합포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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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덥다. 조금만 움직여도 이내 열기가 훅훅 다가온다. 따가운 초여름의 햇살이 바늘처럼 쏟아져 도심 전체가 마치 엄청나게 큰 난로처럼 여겨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합포성지를 향해 걸어가는 나 또한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난로 속에서 불타고 있는 장작개비 같다.
아무리 느릿느릿 걸어도 이마에서는 쉬지 않고 땀방울이 흘러 내린다. 근데 합포성지가 대체 어디 있지? 마산시 관광안내자료에 따르면 합포성지는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 맞은 편 주택가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택가 근처를 이 잡듯이 뒤져도 성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언뜻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 캔 하나를 꺼내며 합포성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은 때 이른 무더위에 말하기조차 귀찮다는 듯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갑자기 성이 나려고 한다. 지금껏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숨바꼭질을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작은 입간판이라도 하나 세워두었더라면 이런 헛수고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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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에 쓴 돌은 점판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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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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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성벽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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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합포성지는 마산시외버스터미널 맞은 편 주택가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합포성지는 터미널에서 창원 쪽으로 한 블록 더 가서 경남은행 합성동 지점 맞은 편에 난 북쪽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잠시 걸어가다가 철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한 블록 더 가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 걸어가면 된다.
개망초가 여기저기 하얗게 흔들리고 있는 합포성지는 합성동 주택단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북쪽 성벽 안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이 성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우뚝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합포성지 옆에는 자그마한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그래. 지금은 이곳이 주택단지로 변하고 말았지만 예전에는 이 성 주변이 온통 갈대가 무성했던 해안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안가를 따라 도둑고양이처럼 슬슬 기어드는 왜구들을 이 성이 막아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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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바라본 북쪽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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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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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성주처럼 우뚝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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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왜구는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많이 침입했다고 한다. 당시 왜구들이 경남 지역의 해안가에 침입했던 횟수만 해도 450여회가 넘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보고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특히 대마도와 가까운 이 지역에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왜구들이 침입했다고 볼 수가 있다.
경남 마산시 합성동 73-4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합포성(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은 경상우도 병영성으로 당시 부원수 배극렴 장군이 경상도 마산만에 자주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고려 우왕 4년인 서기 1378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돌로 쌓은 성이다.
이 성은 세종 2년, 서기 1439년에 고쳐 지었다가 세종 8년, 서기 1426년에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 병영성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세종 19년에 다시 경상우도 병영성으로 분리되었다가 선조 16년, 1583년에 경상병사 이수일(李守一)이 경상우도 병영을 진주로 옮긴 뒤부터 합포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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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은 바깥 벽 아래 기초석을 밖으로 내고 내벽을 계단 모양으로 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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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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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성벽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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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을 처음 쌓을 때에는 성 위에 2자(尺) 간격으로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만들어, 여장마다 방패와 창을 하나씩 설치한 뒤 병사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때 이 성의 동쪽에는 원인문(元仁門)이, 서쪽에는 회의문(會義門)이, 남쪽에는 회례문(會禮門)이, 북쪽에는 용지문(勇智門)이 있었다.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 등의 건물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성은 조선 전기 성을 쌓았던 전형적인 축조 양식과 중국계 성 양식인 평지(平地) 방형성곽(方形城郭·성곽의 성벽이 네모 반듯하게 쌓는 형식) 형태를 띄고 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북문지 주변에 80m 정도의 성벽과 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등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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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벽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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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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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돌 하나의 크기는 200×150×80㎝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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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이 성의 성벽은 바깥 벽 아래 기초석을 밖으로 내고 내벽을 계단 모양으로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은 것이 특징이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마산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판암(점토가 굳어져 만들어진 돌로서 검은 빛깔이며 얇게 잘 갈라져 비석이나 벼룻돌로 사용)이며 돌의 크기는200×150×80㎝정도다.
지금 남아 있는 북쪽 성벽의 내벽 바깥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일부 남아 있으며, 이 건물터의 좌우 측면과 뒷면에는 토담벽을 쌓았던 흔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면적 1,881㎡, 둘레 1,416㎞, 폭 3.53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