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의 작가들을 주축으로 한 퍼포먼스가 화랑 밀집 지역인 종로구 인사동 거리에서 펼쳐졌다. 그 주인공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크리스천 아트 피스트’, ‘아트미션’ 등 기독교미술 단체에 속한 작가들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면서 이전보다 작품 경향이 다양해지고 주제도 풍부해졌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풍경과 도시풍경, 정물을 기용하거나 일상 속에서 누리는 은혜를 모티브로 한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긴 것은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절한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그 용어가 기독교인에게는 익숙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뜻 모를 종교 언어’로 들린다면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어떤 사람에게 말하고 싶으면 ‘먼저 그 사람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 작가들의 작품이 풍경과 정물, 일상의 이미지 등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표시로 읽힌다. 특히 이점은 교회 바깥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준수하고 있는 대화법이기도 하다.
나는 각기 다른 전시장에 진열된 수백 점의 작품을 접하면서 참여 작가들의 열정을 느껴볼 수 있었으며 신앙과 예술의 간극을 좁혀가는 모습에 고무되었다. 오늘과 같은 탈종교화된 문화 환경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표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가.
그러나 작품을 보는 동안 고개를 꺄우뚱거리게 한 부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전시 출품작들은 세상의 어두운 측면보다는 밝은 측면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도 있겠지만, 우리가 심리치료의 문화 안에서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도 이해된다. 언제든 세상에 대한 탄식을 지울 채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의 세상이 꼭 밝고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죄의 파괴성이 삶의 전 영역에 퍼져 있다고 가르친다.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계가 타락의 결과로 왜곡되었다며 손상된 측면을 지적한다. “왜곡의 실상은 아마도 우리들 개인의 삶에서 가장 명백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서 타락의 영향력을 가장 쉽게 인식한다. 살인, 간음, 도둑질, 불경, 그 외의 다른 많은 부도덕한 일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대한 분명하고도 광범위한 위반이다. (이것들은) 창조된 인간 기능들의 변질이며 피조물 탄식의 일부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안다”(롬 8:22)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과 가난, 환경파괴와 차별, 갈등과 인권유린, 탐욕과 착취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의 문화 참여는 그동안 침묵하였거나 소극적이었던 입장에서 벗어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작품의 내용이 적절하게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죄, 타락, 왜곡으로 신음하며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증이 남는다. 쉐퍼가 말했듯이 낙관적인 주제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독교 정신에 충실한 예술’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 일련의 전시를 통해 보여준 작품세계는 기독교 예술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빠뜨리고 있다는 점을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힐러리 브랜드(Hilary Brand)와 아드리엔느 채플린(Adrienne Chaplin)은 사도바울이 말한 “무엇에든지 참되며”(빌 4:8)를 회화적으로 정확히 옮긴다면 “그것은 죄 되고 타락한 세상에 대한 가차 없는 묘사가 될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죄 되고 타락한 세상’의 조명이 오히려 비그리스도인의 예술작품에서 더 두드러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이렇게 조명하는 것은 그 원인을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졌다는 절망감을 표시하거나 특정 경제·정치적 시스템으로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이지 근원적인 타락의 심각성을 응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의식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 궤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 반해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현시대적 사실을 응시하는 통찰이 부족하다. 교인의 예술계 진출은 칭찬할만하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기 충족’과 ‘더 많은 충족’을 위해서 달려온 세상이 들려주는 ‘경고음’에도 귀를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사실에 대해 먼저 탄식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할 때, 세상의 끝자락에 선 사람들에게 소망의 불씨를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 선한 창조세계를 타락시킨 세상을 구속하셨음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원대한 계획을 이미 성취하셨지만, 아직 최종적으로 성취하시지는 않았다. 최종적인 완성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세상은 구속 사역이 진행 중이며 여전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다. 문제는 어떤 희망도 없이 두려움과 절망 자체로 그치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면서 미지의 미래를 다함없이 소망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음하는 세상을 주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들에 대한 섬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타락한 창조세계를 구속하였듯이 우리 역시 현재의 세상을 살아가는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그분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책임 있는 예술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밝고 즐거운 면’만 추구하라는 낭만주의적 유혹도 거뜬히 떨쳐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