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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법전,풍정리.전주이씨.구애정!!
이장희 추천 0 조회 38 15.01.08 19: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구애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갈방마을에 소재하며, 전주이씨들이 구애(龜崖) 이완(李琓, 1650~1732)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정자이다.

원경

담장 밖 정면 전경

정면 전경

담장 밖에서 본 정면 오른쪽 사경

뒤에서 본 오른쪽 측면

정면 아래

정면 오른쪽 사경

정면 가운데 현판 걸린 모습

구애정

구애정

칡꽃 향기 가득한 갈방 마을의 정자

봉화읍에서 울진 현동 태백 방면으로 가는 36번 도로를 타고 한참을 가다보면 다덕 약수탕에 이른다.

약수탕을 지나 제법 구불구불한 고갯마루를 힘겹게 올라서서 법전면 소재지 쪽으로 좀 가다보면 왼쪽으로 고개를 만든 갈방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 중간쯤에 작은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동네가 바로 법전면 풍정리 갈방 마을로, 갈뱅이라고도 부른다.
갈방(葛芳)이란 마을 이름은 갈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갈방산 중턱 해발 600m 지점에 있어 풍정리 여러 마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갈방이란 이름은 칡꽃이 많이 핀다는 의미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창할 때 외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갈방산의 산세는 나름대로 위엄을 갖추었는데 마을과 산 사이에 28번 도로가 지나가고 마을 자체가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아주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갈방산 줄기의 흐름을 도로가 끊고 있기는 하지만 그 흐름이 마을 입구 쪽에 자그마한 동산 하나를 만들었다.

그 동산 언덕 위에는 제법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벤치 같은 것을 갖추어 놓아 마을사람들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그 언덕의 아래 마을 한 가운데 집들 사이에 정자가 있다.
구애정은 수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지붕 위의 이끼 낀 기와 사이에 수리의 흔적인 붉은 황토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정자의 재목이나 만든 수법으로 보아 아주 공들여 만들고 가꾸어 온 정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어 있다.

옛 집은 비워두면 습기와 먼지에 금방 상하고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어디 이 정자 뿐이랴.

모든 정자가 다 그런 것을.
사방을 두른 담장도 돌과 황토로 쌓았는데 수리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지 채 마르지 않은 황토 빛깔이 왠지 정자의 바랜 빛깔과 서로 낯설어 하는 것 같았다.

정자로 들어가는 사주문은 정자의 앞면에 있다.

구애정은 정자에 너무 바싹 담을 둘러 마치 정자를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주변에 정자를 감싸 정자를 정자답게 보이게 하는 연못도, 큰 나무들도, 꽃들도, 그 무엇도 없다.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려니 담장의 붉은 황토 빛에 대비되는 현판의 푸른 글씨만이 그날따라 유난히 맑았던 갈방산 위의 하늘빛보다 좀 더 진하게 다가온다.

천성사로의 고결한 학덕


구애 이완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과 함께 천성사로(川城四老)라 불렸다.
권두인과 권두경은 충재 권벌의 5대손이다.

충재 5대손에 이르러 28두(斗)라 하여 두자 항렬 28인의 도학과 문필이 크게 알려졌는데 권두인과 권두경이 그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닭실에는 6기(奇)라 하여 충재 자손 중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 6명을 들고 있는데 하당 권두인의 문장, 창설재 권두경의 시가 6기에 포함된다.
권두인의 자는 춘경(春卿)이며, 호는 하당(荷塘)·설창(雪窓)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충재 권벌의 5대손으로 당시 유곡 종손이었다.

홍준형(洪浚亨)의 문인이다.

정시한·이현일·권두기·오도일 등과 교유하였다.

35세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기 수양에 힘쓰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후 학문과 행실이 영남 선비 중 으뜸이라고 추천을 받아 참봉 주부(主簿)·좌랑 등을 지냈다.

1690년(숙종 16)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92년(숙종 18) 영춘(永春) 현감이 되어 너그러운 정사를 베풀어 백성의 힘을 기르기에 힘썼다고 한다.

다시 만년에는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나 내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 『하당집』이 있다.
권두경의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94년(숙종 20)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 참봉ㆍ사옹원 봉사ㆍ직장ㆍ종부시 주부를 거쳐 형조 좌랑에 올랐다.
1710년(숙종 36)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전라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상주문에 뛰어나 1717년(숙종 43) 영남에서 1만여 명의 유생들이 상소할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그는 문장이 훌륭할 뿐 아니라 시도 잘했는데, 특히 오언고체(五言古體)에 뛰어났다고 한다.
권두경은 도산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을 편찬하는 등 퇴계학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창설재집』이 있다.
이동완(李棟完, 1651∼1726)의 자는 국재(國材), 호는 모산(茅山),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

그는 1677년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산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미수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이동완이 일찍이 허목(許穆)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허목이 손수

“마음을 지켜 망령된 생각을 없게 하고,

입을 지켜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몸을 지켜 망령된 움직임을 없게 하라.

”는 열다섯 글자를 써서 주었다.

그는 이를 항상 마음에 새겨 실천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일찍이 권두경과 고금문장을 논하는데 막힘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리를 통달하여 옆에 있던 눌은 이광정(李光庭)이 오직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한다.

후일 이광정은 그를 칭하여 “그 말을 생각함에 마치 그림을 펴놓고 산수를 구경하는 듯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칭송하였다.

『모산선생문집』이 있다.




- 벼슬을 버리고 청풍처럼 살았던 선비.


이완(李琓, 1650~1732)의 자는 수언(粹彦)이고, 호는 구애(龜崖)이다.

관향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이시항(李時恒)이고, 안동 출생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큰형 이선(李瑄)에게 학문을 닦아 16, 17세에 이미 한시에 능했다.

이선은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과 좌랑(佐郞)을 지낸 인물이다.

이완은 그 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향시에 2∼3차례 장원하였으나 점점 심해지는 당쟁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학문에 힘을 썼다고 한다.

그는 학문과 행실, 그리고 문장이 사림 중에서 뛰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80년 동안을 산야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이완은 당대 이 지역의 대표적 명사들인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과 함께 교유하며 지조와 그 명성을 떨쳐,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천성의 사로(川城四老)’라 일컬으며 기리었다.
글이나 역사서를 보다가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 중에 본받고 마음에 새길 만 한 것을 보면 반드시 기록해두고 모범으로 삼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어렵거나 기이하고 교묘한 말을 쓰지 않았다.

뜻을 쉽게 이해하고 이치가 잘 드러나도록 글을 지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참된 문장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자신을 문인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3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많은 시는 대부분 자연을 노래하거나 자신과 교유했던 사람들과의 우정과 세월을 읊은 시, 그리고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가 많다.
그는 『스스로 경계하는 글』(自警)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니,

성인의 가르침 거듭해서 책 속에 있네.

대그릇의 밥으로 굶주림 달래니

나머지는 무엇을 구하랴.

작은 집은 무릎을 펼만하면 되지 무엇을 더 바라랴.

배움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위해서 해야 하고

사사로움은 마땅히 버려야 하느니.

선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인은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

이 같은 일에 종사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덕은 닦아지고 사업은 널리 이루어지리.

[食無求飽居無安, 聖訓丁寧黃卷上,

簞食療飢餘豈願, 小窩容膝外何望,

學須爲己私宜去, 善必與人仁不讓,

從事於斯能匪懈, 庶幾德修而業廣]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은 만사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태백산 머리 밤에 눈이 내렸네.

선관이 구름마차를 타고 내려온 것 같구나.

선생의 춘추 82세,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네.

입엔 속진의 진흙탕을 머금지 않고,

몸은 비단의 화려함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네.

오직 시서를 곡식으로 삼고, 기름진 음식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아침에는 맹광이 달인 약을 마시고, 저녁에는 검루 선생의 이불을 덮었네.

가난한 거리 거친 음식은 고금이 없으니 흰 눈이 옛과 어울림 높고 또 높도다.

세상 사람들 듣고서 크게 웃으나 이 곡조 알 사람 아주 적으리.

펄럭이는 더러운 세상 찌꺼기를 싫어하여

하루아침에 버리고 심오한 도로 들어갔네.

지난날 청암에 네 신선이 모였었지.

자리 사이로 담담하게 맑은 바람이 일었었네.

청풍이 다 가버리니 어찌 하리오.

슬피 산모퉁이에 홀로 서있네.

[太白山頭夜有雪, 仙官下將騰雲車,

先生八十二春秋, 不讀人間非聖書,

有口不嚼塵與泥, 有體不近綺與紈,

但將詩書爲菽粟, 芻?之味尋常餐,

朝呼孟光煮藥苗, 夜?黔婁先生衾,

陋巷簞瓢無古今, 白雪調古高更高,

世人聽之發大笑, 人間此曲知者少,

翩然濁世厭秕糠, 一朝去入希夷宮,

昨日靑巖四仙會, 席間澹澹生淸風,

淸風逝盡無奈何, 悲來獨立山之阿,]


좁은 골짜기가 모여 이루어진 풍정리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는 36번 도로의 아래쪽,

서쪽으로 창평,

동쪽으로 척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봉성·양곡·도천 등이 있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갈방산의 남동쪽 산록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36번 도로를 타고 봉성 쪽에서 동행하면 다덕 고개를 지나면서 풍정리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 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은 갈방고을이다.

갈뱅이라고도 한다.

갈방산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갈방인데,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성할 때 이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갈방마을에서는 남쪽으로 좁은 골짜기가 남행한다.

길도 그 사이를 가르며 봉성 쪽으로 남행한다.
갈방마을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불미골이다.

전주이씨 마을로, 야동이라고도 불린다.

불미골의 아래쪽으로는 명창골이 있다.

명동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명청동이라고 하였다.

명월청풍에서 온 이름이다.

숙종 때 선비인 이시선이 여기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

맑은 연못과 소나무가 있어서 정자이름을 송월재라고 하였다.
명창골에서 길은 3갈래로 갈라진다.

동쪽으로 샛길이 만들어져 척곡 쪽으로 나간다.

그대로 남행하는 길은 삼거리를 지나서 시드물에 이른다.

풍정이라고도 하며, 풍정리의 본동이다.

마을 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 근방에 큰 신나무가 있어서 시드물이라 한다.

우물가 바위에는 풍정이라는 글자가 명각되어 있다.

시드물의 서쪽에 있는 것은 엉고개이다.

아현이라고도 한다.

그 서쪽으로는 좀 떨어진 지점에 봉성역이 있다.

아현은 500년 전에 봉화금씨가 개척하였다.
시드물의 남쪽으로는 가마고개가 있다. 부현(釜峴)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부고개촌이었다.

이수라는 선비가 여기 와서 살면서 앞산 봉우리가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현으로 고쳐 불렀다.

전주이씨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는 1940년대에 번창하였던 다덕광산의 광구가 여럿 남아 있다.
시드물의 남동쪽으로는 심수가 있다.

심새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우물이 없어서 냇물을 식용하였는데, 질병이 많이 생겼으므로 여기 저기 샘을 찾다가 마을 한구석의 큰 향나무 밑을 파서 샘을 얻었다고 하여 심수라고 한다.
심수의 동남쪽으로는 돌다리·석교가 있다.

옛날 비가 와서 냇물이 불었을 때 홍장군이라는 장사가 큰 돌을 놓아 딛고 건널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서 돌다리로 불렸다.

시드물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노림이다.

노리미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영모당과 사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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