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초등학교 친구들
2023.1.19
오늘 새벽 마늘 출하한 후 4일간 휴식이다.
경매장이 휴장이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여유를 갖고 포스팅한다.
초등학교 4학년 이전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1학년 입학한 후 우는 나를 여선생님이 집까지 업고 온 기억과
아침에 들에 일하러 가시다가 부모님이
학교 울타리 너머로 조회하는 모습을 보고 집에 오셔서
줄서 있는 아이들 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이를 보면
곧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도 난다.
또 운동회 때 달리기를 잘 해서 상품으로 공책과 연필을 받고
릴레이(6년간 백군) 선수로 뛰면서 환호를 받던 기억도 많이 난다.
4학년 때에는 갑자기 젊은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 담임을 하셨다.
가을철에 벼 이삭을 주워 축구공 배구공을 사서 함께 운동한 일,
학교 실습원에서 고구마 등을 재배하여
어려운 아이들에게 문구류들을 사주시던 일,
운동회날 마스게임을 지도하시던 일,
여름철 플라타나스 나무 밑에서 야외수업을 하면서
남궁동자나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시며 함께 하신 열정적인 모습들...
무엇보다도 교실복도에 초를 칠해서 선생님이 넘어진 후
범인 색출에 실패하자 단체로 매를 맞고 집에온 나를 본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에게 항의한 일 등 많은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년 정도 계시다가 홀연 사라지셨는데
그 길로 서강대 진학, 가톨릭 신학대학을 나와서
인천교구 사제가 되었다는 말을 30년 훨씬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스승의 날 메일로 연락을 드리고 주일에 본당에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당시 공교롭게도 꾸르실료 지도신부로 교육중이셨다.
그 후 신부님 답장이 왔는데 나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셨다.
키가 작고 달리기를 잘 한것으로~
60년대 단층 목조건물로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어서 초를 칠하여
여학생들을 넘어뜨리는 장난도 많이쳤고(가끔 선생님이 넘어지기도)
유리창을 닦고, 걸레를 빨아 밀고다니며 청소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아래 교가를 보니 조회시간에 힘차게 불렀던 모습도 그려지며
흥얼거려본다. 물맑고 산새좋은 대자연 속에~
그때는 운동장도 무척 넓어보이고 앞에 있는 동산도 커 보였는데
졸업 후 동창회 때 가보니 너무나 작은 것에 놀라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몇 학년 때인지 기억하지 못하는데
여주 신륵사에서 찍은 사진인 것 같다.
이 때도 키가 제일 작은 것이 눈에 띈다.
나중에 어머니가 모아놓으신 1~6학년 통지표를 보니
1학년 때 키가 정확히 100센티였다.
키가 작아서 인지 공부가 뒤떨어져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학년을 다시 다니라고 해서 국민학교를 7년 만에 졸업했다.
나중에 동창회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당시 나와같이 1학년을 두 번 다닌 동창이4~5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수한 덕택인지 이후에는 공부에도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고등학교 재학 시 처음으로 동창모임에 갔다.
5~6학년 담임이셨던 김광수 선생님과 함께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때 벌써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 동창도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던 동창 몇 명과 연락도하며 지냈다.
재경 용천국민학교 동문회라고 할까~
우리는 6년 동안 남자 1반, 여자 2반으로 나누어 공부했다.
당시에는 졸업앨범도 없었고 사진도 귀했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찍은 사진은 여기에 게재된 것이 전부다.
졸업사진을 보며 이름을 기억해 본다.
김윤재 교장선생님, 김광수 담임선생님, 이병태선생님, 홍선생님, 장선생님
정성재, 박완규, 최태관, 홍성만, 차재권, 이구영, 이병찬, 장문상,
이상구, 최영훈, 정용재, 목진상, 김영일, 이한우, 전태수, 이용훈, 지학남,
박경하, 김기덕, 이양경, 홍성호, 조항준, 정현규, 김중수 ...
이름을 반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과 생활했던 6년 간
있었던 일은 기억이 나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