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의 삶, 군자의 삶-2023/12/06 박인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나도 모르게 걷고 있다 보니 내가 무엇으로 걷고 있는지, 잘 걷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곧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이미 몸에 벤 나태를 이길 근육은 내 몸에 발달이 되지 않았나 보다.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이며, 나의 길을 막는 것에 있어서 파괴적이다. 이것은 욕망, 욕구라 하기 보다는 당연한 이치이다. 동시에 나는 직접 얼굴을 맞대거나, 글을 보는 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마치 나의 생각의 작동은 AI와 같아서 수많은 데이터를 모아 있어 보이는 글귀를 적지만 그 내용은 전부 참고와 대필, 표절로 이루어져 나의 창의적이거나 개인적인 생각은 들어있지 않다. 그런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이 길이 도대체가 무슨 길인지 평생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길을 걷고 있던 와중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미련하고, 미천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너무 이상적으로 느껴지고,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치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날 대단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요구하는 것 같이 나에게 있어서는 바보같이 높은 것이다.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사람은 잘 해 나가는 이들을 보다 보면 어찌 나를 미련하고, 미천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던 와중 여러 선생이 나에게 말을 건다. 예수라는 선생은 나에게 성경을 들고 접근한다. 오래전부터 봐왔던 선생이기에 동의가 되면서도 감동이 없다. 다윈이라는 선생은 핀치 새를 들고 접근한다. 그는 너무 나를 추락시키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어떤 면으로 매력을 느끼지만 그의 사상에는 동의 할 수는 없다. 아마 나는 미련하고 미천하지만, 동시에 자존심이 있고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무언가 가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그런 나에게 프로이트는 그 무언가는 욕망의 무의식이라 설명하며 접근한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즉시 욕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저절로 저어진다. 개인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이 인간의 행동의 원천이라는 소개를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정이 없거나 감정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분명 이타적이고 평화적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에 깊고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난 가정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박하지 못하는 사실은 내 안에 개인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에 혼돈이 찾아온다. 문득 나의 마음에 문을 열고 찾아온 것은 나의 역겨움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이타적이게 행동하고 있나? 개인적인 소망을 위해 이타성을 연기하는 것 아닌가? 나는 오로지 나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가? 평화를 위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편하기 위해서이고 만약 폭력으로 나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평화를 외칠 수 있겠는가? 죽음이 내눈 앞으로 다가온다면 나보다 먼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밀치지 않겠는가? 만약 이타적이고 평화적인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개인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에게 뒤쳐지지 않나? 나는 애초에 미련하고 미천한 자이니 이런 질문을 ‘옳도다’로 받지 않는 다면 이것이야 말로 역겨운 나를 인정하기 싫은 발버둥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개인적인 이익이 내 삶의 원동력이다. 나는 내가 설 자리를 찾는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경 받는 위치에 서고자 한다. 나의 능력이 부족하면 신에게 부탁하여 그 능력을 주라 말한다. 이것을 부탁이라 해야 할지 명령이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다. 모두가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대단한 나를,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나를, 인정할 줄도 알지만,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 나를. 하지만 모두 가면이다. 나는 내 기준을 두고 사람을 평가하는 미련하고 미천한 자이다. 지배욕과 탐욕과 거짓말의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한마디로 ‘나쁜 나’는 니체에 글에서 나의 분신을 만난다.
저 멀리 늙은 노인내가 나에게 악수를 건네니 그는 공자다. 익숙한 이름이다. 최고의 선생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니 그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 놓는다.
“나쁜 나는 한심합니다. 나는 이 역겨운 나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이고 폭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쾌락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러니 그가 웃으며 답한다.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오랫동안 곤궁한 데에 머물지 못하고, 오랫동안 즐거움에 머물지도 못한다. 인한 사람은 인 자체를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 자체를 이롭게 여긴다(4:2).”
인하지 못한 나는 나쁜 나와 동일하다. 나쁜 나의 인간에 대한 판단은 곧
“오직 인한 사람만이 사심이 없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4:3).”로 설명된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4:16).” 이제 인하지 못한 나쁜 나는 소인이 된다.
“진실로 인에 뜻을 두고 있으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4:4).” 그만 좀 나를 파 해쳤으면 좋겠다. 그렇다 나는 소인이다. 헌데 어찌하란 말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하다. 역겨운 인간은 어찌할 수 없다. 무슨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군자가 되라? 이 내가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군자는 인 말고는 명성을 얻을 수 없고, 밥 한끼를 먹는 동안에도 인을 어기지 않고, 활망하고 다급할 때도 반드시 인에 근거하고, 넘어지고 자빠질 때도 반드시 여기에 근거한다(4:5).”
나는 소인인데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안 그래도 이상적이었던 나의 길, 소인의 길을 왜 더 높게 만드는지. 안 그래도 낮아진 이 소인을 왜 더욱 낮게 만드는지. 역겨움을 발견했는데 해결책으로 이상을 제시하면 그 이상을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닌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된다. 도대체 군자를 이루는 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인은 예의의 기본이고, 의로우며, 알맞게 정치하게 하고, 공경과 겸손을 가지고 있으며 덕이고, 겸양이며, 충忠(마음속으로 섬기는 것)이고, 서恕(남의 마음처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하라는 것이란 말인가? 인한 것의 예시가 도대체 무엇이고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부모를 섬길 때는 완곡하게 간언하고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공경하여 거스르지 말고 힘들더라도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4:18),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고(4:19), 부모의 나이를 알고 있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한편(오래 사시는 것)으로 기쁘고 한편(노쇠해지는 것)으로 두렵기 때문이다(4:21).”
나는 어디서 프로이트의 개념을 부정하고 이타적이고 평화적인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생각 해보면 그 근원은 여러 곳에 있지만 가장 큰 곳은 가족일 것이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가족 밖에 없다. 형태는 변했어도 근원은 변하지 않았다. 공자는 아마 평생토록 인을 설명할 완벽한 단어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 덕, 예, 겸손, 공경, 충, 서 전부 타협을 보고 찾은 단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지 못해도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광활하게 펼쳐져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바다를 그저 ‘광활하다’, ‘아름답다’로 정의 할 수는 없다. 그저 그나마 표현할 방법을 찾아 어렵게 설명하는 것이다.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자연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다. 나는 가정에서 공자가 말한 인을 경험으로 배웠고 그것을 이타적이고 평화적인 욕망이라 풀어 설명했지만 역시 부족하다. 뭔가 부족하다. 이것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했지만 만족은 안된다. 인이라는 단어도 부족하다. 가정에서 배운 그 무언가를 어찌 말해야 할까? 인, 예, 덕, 정치를 잘함, 공경, 겸손 부족하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또 어찌 표현할까? 인하다, 예하다, 덕스럽다, 정치를 잘한다, 부모에게 공경하고 겸손하다. 부족하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잘 돌아보면 된다. 자신이 부모에게 받은 것을 잘 돌아보고 내 안에 있는 역겨움에 근처에 있는 그 무언가를 보면 된다. 모두에게 이것은 있다. 공자는 인이라 말하고 예수는 사랑이라 말한다. 그것은 가정에서 잘 들어 나고 공자의 예처럼 마을에서도 들어 난다. 공동체에서 들어 난다.
“나는 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4:6).” 공자는 분명 인간의 소인 같은 면을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인한 부분을 보았다. 그것은 가정 같은 공동체에서 얻고, 배울 수 있다. 동시에 베풀 수도 있다. 부모는 오로지 그 자식의 질병을 근심한다(2:6). 이것이 인이고 이 인을 다시 돌려 드리는 것이 또한 인이다. 인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에게 있다. 소인인 인간은 동시에 군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소인과 군자는 태생의 문제가 아니다. 배움과 실천의 문제이다. 모두의 삶은 소인의 삶이면서도 군자의 삶이다. 나에 대해 근심하면서도 이상을 품는 것은 그 증거이다. 소인인 나에 대해 자책하면서도 내 안에 군자 같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인 것은 ‘그래서 어떻게 군자가 되는지’의 문제이다. 도대체 어떻게 부모에게 인할 수 있는가? 인간의 소인 같은 부분은 군자로써의 잠재력 만큼이나 높다. 난 아직 실천에 대한 부분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실천할 수 있나? 성경은 예수의 실천이 있었고 성령의 일하심이 있었다. 그럼 이제 논어는 공자의 실천과 나를 군자로 이끌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설명해 내라. 성경은 이미 나에게 설명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