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명절이 되면 외갓집이 그립습니다.
외갓집이 대청댐 언저리입니다.
어린 시절엔 대청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털털 거리는 버스를 한 시간 남짓 타고 강가에 내립니다. 그곳이 내탑이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룻배에 오릅니다. 강물을 내려다보면, 강바닥이 다 보입니다. 모래알이 투명합니다.
거기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그 어린 시절의 그림이 저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나룻배에서 내리면 모래사장입니다.
다리가 아픕니다.
그러면 어머님께, “엄마, 나 다리 아파.”
정말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다는 게 이런 겁니다.
어머님은 양손에 선물 보따리 잔뜩 들으셨는데, 저에게 등을 갖다 디미십니다. 저는 그 등에 업혀서 외갓집을 갑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그립습니다.
서낭당을 돌아서면 어머님이 소리 질러라 그러십니다. 그러면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 지르면 두 분은 맨발로 뛰어 나오십니다.
지금 가만히 그림을 그려 봅니다.
저와 어머님은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이 외갓집엘 도착합니다.
그러면 반가움이 뛰어 나오십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반가움이십니다.
그러니까 명절이란 그리움과 반가움이 만나는 날입니다. 거기가 고향입니다.
생기가 가득합니다. 고향은 비타민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외갓집에 대한 그리움이 시들거려졌습니다.
왜냐하면 반가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명절이 좋은 이유는?
추억 속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게 고향의 힘이겠지요.
어느 아이가 오랜 만에 외할아버지 집엘 갔습니다.
하루 종일 외할아버지와 놀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허연 수염이 배꼽까지 길었습니다.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수염이 참 멋있어요.”
“허허, 그래.”
“그런데 할아버지는 긴 수염이 귀찮지 않으세요?”
“허허, 괜찮아. 밥 먹을 때 조금 귀찮지만, 괜찮아.”
손자는 외할아버지의 긴 수염을 이리 살펴 보고 저리 살펴 보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요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이불 덮고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어어? 글쎄? 가만 있자? 글쎄? 어라? 잘 모르겠네? 오늘 밤에 잔 다음에 내일 얘기해 주지.”
그러나 그 날 밤 할아버지는 한 숨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수염을 이불 밖에 내 놓으면 허전하고 이불 속에 집어 넣으면 답답하고,
밤새, 이불 속에 넣었다가 이불 밖에 꺼냈다가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평소에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잠을 잤을까?
그런 생각하다가 한숨도 못 주무셨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러다가 잠도 못자고 큰 일 나겠다.’
우리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맙시다.
까짓 거, 이불 속에 넣고 자면 어떻고 이불 밖에 내 놓고 자면 어떻습니까? 그거 별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닌 것과 소중한 것을 구분할 줄 아면 그가 곧 현명한 사람입니다.
사소한 것은 사소한 대로 놔 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