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외 / 유은고 시인
앵무샙니다 생선 한 토막으로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해요 말할 수 있지만 알아볼 수는 없겠습니다 오늘은
거위 한 마리와 개암나무의 이름을 짓습니다 오늘은
당신도 다음도 내 성적 취향입니다 최대한의 인간적 자세와 행위를 가르칩니다 옥수수 알을 던지며
당신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 아니라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는 지구력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지구가 아름다워졌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구에서 떳떳하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선 한 토막이나 정자 3억 개로는 호소력이 희박한 시대에 나는 인간만큼 신뢰할 동물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무서운 무기인데 이론은 아름답군요
아름다운 세계는 없겠습니다 옥수수 알이 물맛이 개암나무의 기적이 있겠습니다 하나의 기적을 이루려면 사랑할 사람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워할 사람이 없는 당신은
모르는 사람을 쓰다듬으며 앵무새를 앵무새로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다 말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먼저 꼬셨잖아요 그래요 새장과 세상이 같은 세계라서 나는 팬벨트나 돌리겠습니다
빙고
깊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모두가 역사적 사명감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사명감은 흰 눈과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휩니다
눈이 내려서
누구든 좋으니 아름다운 품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나는, 공원 변기에 앉아 배반하고 떠난 사람을 생각하다
오줌 떨어지는 소리나 들을 겁니다 검었다 희었다
하면서 권투선수는 스크린에서 느린 속도로 돌고
누군가를 조준한 주먹은 다음 순간을 위해 종을 치겠습니다 샌드백은 한 방을 위해 자전하겠습니다 검었다 희었다
하면서 인생에 대한 깊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변기 물을 내립니다
나는 흰 눈으로 뭔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거위를 죽였습니다
소용돌이를 닫고 일어나겠습니다 거위는 간만 빼먹고 버리는 겁니다
그라운드에서 몸을 숙이고 함께 휘는 겁니다 함께 자전하는 겁니다 튀는 겁니다 당연히 당신에게
당신이 들지 못하는 한 송이 눈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눈은 결백하겠습니다
나의 진짜 약점은 어쩔 수 없는 흰 눈을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받아 마땅한 놈이 되어 보시겠습니다
셀로판지
주로 상하기 쉬운 상품을 포장하는 것에 사용된다. 소시지를 좋아하는 나는 소시지가 빨간색이 아니라는 설명서에 잠시 분노한다. 당신도 당신의 분노를 참아 내지 못한다. 재발하는 치통과 같다. 빵을 한쪽으로만 씹는 나는 자주 치통을 유발한다. 당신은 범주와 주범을 구분하는 것에 관심이 없지만 장식장에 모자에 코끼리의 귀에 내려앉은 먼지는 한 개인의 범주에 속한다. 이가 빠진 당신은 셀로판지 필름 속에서 웃고 있다. 일요일에 아름답지 않은 게 있나요? 내일은 가족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간다. 일요일마다 교회의 창을 닦으며 공동체에 속한 기분을 갖는다. 창을 닦는 당신은 앞만 본다. 앞만 보는 창문은 관통당한다. 관통하는 것은 당신일 수 있다. 당신은 주범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셀로판지다. 당신은 이제 범주를 잃었고 잃었다는 말은 혁명과 같다. 혁명과 셀로판지는 동의어가 아니므로 하나의 범주에 묶인 것이 궁금했지만 한쪽으로만 비닐을 벗기는 당신과 한쪽으로만 소시지를 씹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소시지의 비닐을 벗기는 일과 혁명이 실패하는 것 3초면 충분했다.
*유은고 충남 보령 출생.
늦은 우기에게 외 / 조은영 시인
발자국 소리에 기대지 않을 때 바라본 눈동자에 쉽게 넘어진다
눈이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뒤꿈치를 들고 속삭대며 눈뭉치처럼 몸을 굴렀다
썩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당신은 줄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뿌리를 뻗어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했다 이건 살아 내고 있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죽어 가는 거야 후렴구처럼 소시락거린 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기면 항상 끝을 생각해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 기억이 흘러내릴까 당신의 곱슬머리를 쓰다듬는다 올해는 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부러진 가지 마디마디 손목을 그었다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복숭아는 눈을 감고 먹어야 해
상처 난 살갗을 곱씹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다음 해 눈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불을 끄고 흘러내리는 과즙만을 다리 사이에 발랐더라면
자꾸만 커지는 외투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팔과 다리 투명해지는 몸통들
눈이 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미끄러지다 결국 손깍지를 천천히 빼고 있다
하늘로 향한 다리를 파르르 떨며 몸을 뒤집는 딱정벌레
멈춰 있는 벌레의 움직임을 두 얼굴이 바라본다
우리는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한다 이건 죽어 가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살아 내고 있는 거야
천천히 목피가 벗겨진다 오랫동안 불을 끄고 뿌리를 뻗는다
왜 아직 여기 있어
환절기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수화기를 쥐고 있다
너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가졌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
생활의 자전 속에 자꾸 넘어지는 마음
밤이 등을 돌려 울고 있는 달을 안고 있다
주먹을 쥐고 울어도 손아귀는 힘이 없어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나날
축축한 손의 질기로 흙을 빚는다
눈물을 담을 수 있는 잔만큼
손끝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든다
물레의 방향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왼손
오른 손가락 끝에 힘을 모은다
물레가 돈다
원심력을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절정에 다다른 기물
자름실은 물레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질기가 만든 잔을 가마에 넣는다
손끝에 힘을 준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춰야지
방향을 바꿔 돌면 다음 계절이 다가온다
달이 밤의 품을 밀어내고 얼굴을 내민다
레르 데바가르Ler Devagar 서점에서 세 시에 만나요
제제의 하나뿐인 뽀르뚜까 아저씨
선생님은 아빠의 안부를 묻고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받은 다음 날
내 짝 책상 서랍에만 두꺼운 책을 놓아두었어요
나는 책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
리스본에 있는
레르 데바가르 서점으로 가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서점을 가로지르는 여자는
아이를 낳아 쫓겨난 인쇄소 여공이래요
비명을 지르는 종이에
손끝은 흥건한 꽃을 피워요
페달에 칭칭 감긴 발이 허밍을 시작하면
잠자던 돌림노래들이 길을 만들어요
몸을 감싸던 와이어를 끊고 머리를 틀어 올려요
비스듬히 태양이 비치는 세 시엔
발밑에 감춰 둔 풍경이 허리끈을 풀어요
맨발의 그림자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서점 한 바퀴를 느리게 돌아요
책장 왼쪽 맨 끝 세 번째 칸에
총구에 꽂혔던 카네이션을 말려 둔
두 권의 책을 숨겨 두겠어요
미동도 없이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 <에스프레소>*를 주문할게요
오직 햇살에 발가벗겨진 먼지들이
조각난 거울 위로 떨어질 때
선생님이 한 번도 부르지 않은 내 이름을
거꾸로 불러 주세요 나의 뽀르뚜까 아저씨
우리는 레르 데바가르 서점에서
세 시에 만나요
*레르 데바가르 서점은 과거 인쇄소였다. 이곳에서 1973년 포르투칼 신문 『에스프레소』의 제1호가 인쇄되었다.1974년 일어난 무혈혁명 ‘리스본의 봄’의 진원지이다.
수염이 자라는 밤
옥상의 빛을 찾아 나선형 계단을 오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소프라노 목소리를 흉내 내야 합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앞선 등의 표정을 봅니다 어제 삼키지 못한 슬픔이 말려 있는
등을 보며 간다는 것은 당신의 안녕을 묻는 일입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들숨 날숨은 리듬을 알고 있습니다
목구멍을 긁고 태어난 소리 위에 계단의 개수를 올려 봅니다
나선형으로 몸을 비튼 계단의 가운데를 바라보면
추락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고 있는 바닥에는
아주 작은 손가락과 너무 긴 다리가 흩어져 있습니다
전등이 깜빡입니다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속눈썹은
파닥거림으로 날갯짓을 연습합니다
개수를 잃어버려 예감으로 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등의 온기가 사라졌습니다
다급히 손전등으로 등을 비추니 그림자는
파동으로 맺힙니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없습니다
표정의 최소한은 세 개의 점과 세 개의 선이라서
바라본 얼굴에는 흩어졌던 눈 코 입이 떠오릅니다
왼쪽 귀에서 머물던 소리는 오른쪽 귀로 건너뛰기를 합니다
한쪽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다른 한쪽 소리는 멀어집니다
나선형 계단을 오릅니다 알토 목소리와 멀어집니다
빛은 알갱이거나 흔들림이라 배웠습니다
두 개의 가능성 중에
나를 통과하여 반원으로 퍼진 등의 그림자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흉내 내다 깨어지는 조각입니다
옥상에서 우리는 맹렬히 튕겨 나가겠습니다
*조은영 1984년 성남 출생.
심사위원: 유성호, 김병호